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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그림 신부)
비판 받는 새 영어 미사 경본
영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점 중의 하나가 a, an, the 등의 관사 용법이라고들 한다. 명사 앞에 어떤 관사를 쓸지, 또는 아예 쓰거나 안 쓰거나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로서는 한 음절로 된 이 짧은 단어를 쓰느냐 마느냐에 따라 구나 문장 전체의 뜻에 큰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잘 안다.
최근에 로마 교황청은 새 영어판 미사 경본을 영어 미사에 써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이 번역본에서 관사의 오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견되고 있다.
아시아 많은 곳에서 영어 미사가 드려지고 있으므로, 이 문제는 아시아에도 해당하는 문제다. 필리핀뿐만 아니라 남아시아를 비롯해 과거 대영제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필리핀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영어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아시아주교회의연합(FABC) 공식 언어도 영어다.
하지만 교황청의 새 번역본은 여러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가능한 한 라틴어 원문에 가깝게 하려다보니 문장이 형식에 치우치거나 장황하고 때로는 틀린 문법으로 인해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새 번역의 전체 과정을 비밀주의가 지배했다. 또한 영어 사용권 주교들은 그보다 10여년 이전에 만들어져 대체로 호평을 받았던 여러 번역본들이 비영어 사용자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줏대 없이 묵인했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번역본이 영어 미사 때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시험 기간을 거친 뒤에 의무화돼야 한다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물론 교황청과 주교들은 이 청원을 무시했다.
“교회의 기도 법칙은 교회의 믿음 법칙에 일치한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오랜 신학 원리가 있다. 우리의 기도가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사람들을 오도하여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이단’을 부르는 기도문
새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미사 전례에 사실상 ‘이단’을 불러들일 것이라는 점인데, 바로 관사 하나를 잘못 써서 그렇다.
현행 미사 경본은 성찬 기도에서 사제가 성작 위로 손을 뻗어 기도할 때 “너희와 모든 이(for you and for all)를 위하여 흘릴 피”라고 하도록 돼 있다. 이는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예수님이 썼을 아람어 말씀과 가톨릭 신앙을 번역, 전달하는 것이다. 라틴어 경본은 ‘pro multis’라고 돼 있는데, 이 문구 역시 모든 이를 포함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실제로 현행 영어 번역이 처음 나온 이후, 이 기도문의 포괄성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도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새 번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누군가 ‘multis’를 문자 그대로 ‘many’나 ‘the many’로 번역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라틴어는 관사가 없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할 때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전체 과정이 비밀주의에 부쳐졌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누가 했으며 그런 결정을 한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뽑혔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단지 라틴어에서 관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 번역에서도 관사를 쓰지 않는다는 논리가 적용된 듯이 보인다,
라틴어에 충실하지만 이단적인 영어 번역으로 인해 사제들이 앞으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린 것은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many’와 ‘the many’의 엄청난 차이
문제는 세 글자로 된 정관사 ‘the’를 빼버린 데서 비롯한다.
영어에서 정관사 ‘the’없이 그냥 “many”라고 하면 불특정 다수를 의미한다. 몇 명이 될 수 있고, 수 천 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고사하고) 결코 대다수의 사람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면, “the many”는 모든 사람을 뜻할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은 라틴어 문법에 노예처럼 충실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단적인 신앙을 기도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예수님이 분명히 모든 이들을 위해서가 아닌, 일부 사람들을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 인해 사제들은, 자신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시키려는지를 모르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따를 것이냐, 교회의 실제 신앙을 계속해서 선포할 것이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여러 명의 사제들과 얘기를 해봤는데, 많은 이들이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과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할 사명에 충실하다보면 같은 교회가 가르치는 전례 규칙에 불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지 주교들의 손에 고통당할지 모를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제들이 용기를 낼 이유가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설령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더라도 사제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보여주었다.
그는 1970년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 사용에 관한 교황 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적지 않은 신자들이 큰 사랑과 애착을 지니고 예전의 전례 양식을 지켜 왔으며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1962년 「로마 미사 전례서」 표준판을 따르는 미사 성제의 거행은 교회 전례의 특별 양식으로서 허용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또한 독일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새로 번역된 장례예식서를 거부했고, 주교들은 로마 교황청에 “새 전례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보고했다. 결국 새 번역본은 폐기됐다.
새 영어 미사 경본이 의무화된다면, 모든 이(the many)는 아닐지라도 많은 이(many)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for all)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복음을 계속해서 선포하리라 믿는다.
(윌리엄 그림 신부는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제로서, 아시아가톨릭뉴스의 발행인이며, 일본의 가톨릭 주간지 <가토리쿠 심분>의 전 편집주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