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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아는 척하기』– 후쿠다 토모히로(福田智弘)
이 제목이 원래 저자가 사용한 제목인지 서문에는 설명이 없다. 다만 표지에 「지리, 지명, 지도로 보는 흥미로운 세계사 39」라고 하였고, ‘세계사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 중심의 역사서, 세계 역사의 비밀을 찾는 여행’이라고 부제가 있는데, 그것은 세계사를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는 출판사 광고인지 모르겠으나 제목에서부터 흥미를 끄는 것들이 많다. 이집트는 어떻게 고대 건축물이 발달할 수 있었을까? 왜 중앙아시아에는 ‘- -스탄’이라는 이름이 붙은 나라들이 많을까? 칠레는 왜 그렇게 길다랗게 생겼을까? 등등
책은 깊이 세계사를 공부하지는 않는다. 짧고도 단편적으로 세계사를 되짚어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전 역사도 있으나 책에서는 세계 4대 문명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4대 문명은 강 인근 지역에서 탄생했다」로 시작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세계 4대 문명이란 나일강 유역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하강 유역의 황하문명을 말하는데, 왜, 어떻게 이 지역들에서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을까를 설명하면서 첫째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그 덕택에 강 주변 토양이 비옥해졌고, 그것이 풍요로운 농업을 이끌었으며, 바다와 사막으로 둘러싸여 이민족의 침입이 적었고 그것이 이집트 문명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도 그것을 지적했다고도 했다.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천 년경 ‘파라오’로 불린 왕들이 다스린 통일 국가를 탄생시켰고 수도였던 멤피스는 번창했다. 파라오의 권력은 평균 2.5톤짜리 돌 230만 개를 쌓아서 만든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상징된다.
메소포타미아 문영은 이집트와 달리 유목민들의 진출이 잦아 여러 왕조와 민족이 번영과 쇠퇴를 거듭했다. 고대 바빌로니아 지역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주의 원칙을 담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바빌로니아 왕조(BC1894∼1595)가 번성하기도 했으나 그들도 전차와 철제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히타이트(김해박물관에 히타이트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에 지중해 무역으로 번창한 페니키아(페르시아)인, 히브리(유대인)인 등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여기서는 유럽의 시각에서 동방으로 해가 뜨고 지는 지역이라 하여 ‘오리엔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원전 2300년경에 인더스강 유역에도 독자적 문명을 형성했는데,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 당대를 대표하는 유적들이 여기서 나왔다. 기원전 1000년경에 아리아인들이 침입해 브라만교와 카스트 제도가 생기고, 점차 갠지스강 유역으로 문명의 중심이 이동하기도 했다. 황하문명은 황토가 퇴적되고 범람하자 치수 공사가 역대 왕조들의 고민거리였으나, 그곳은 사막과 대초원으로 둘러싸여 독자적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남아시아(인도)와 동아시아(중국남부)에서도 넓은 지역을 이용하여 거대한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페르시아로 불리는 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의 삼나무 수출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는 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지중해 연안에는 이들이 남긴 지명들이 아주 많다. 삼나무 수출이 없었다면, 고대 교역의 루트가 없었다면 이집트 문명은 그렇게까지 성장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레바논 국기 중앙에 그 유명한 삼나무가 그려져 있다.
알렉산드 대왕은 이집트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하고 도서관을 건립했다. 그가 건설한 시의 수가 70여 개로 알려졌지만, 현재 남은 것은 25개 정도다. 젊은 나이에 활약하고 일찍 죽었지만 그는 페르시아와 적극적인 융합 정책을 펼쳤다. 그가 멸망시킨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녀와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페르시아 왕족과 귀족들의 딸들과 혼인 정책을 장려하기도 했다.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가 죽은 후 20년 동안은 전쟁이 지속되면서 지배했던 지역은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프롤레마이오스 등 왕조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융합 정책은 그리스 문명이 동방에 전파되어, 동방에서 헬레니즘 문명이 번영할 수 있었다. 헬레니즘 문명은 제국을 넘어 인도 주변에도 영향을 주어 불교미술인, 간다라 미술에 꽃을 피웠다. 헬레니즘 시대란 알렉산드 대왕의 동방 원정을 시작으로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300년간을 말한다.
카자흐스탄, 기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피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명에 ‘∼스탄’이란 이름이 아주 많다. 왜일까? ‘스탄’이란 페르시아어 접미사로서 ‘∼나라, ∼의 지방’이라는 뜻이다다. 3세기 페르시아의 사산왕조가 ∼의 지방을 의미해 스탄을 행정용어로 사용하면서 널리 보급된 것이다. 나라 이름으로까지 정해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카자흐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되었을 때 스탄을 빼고 그냥‘카자흐 공화국’으로 불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다시 국명을 변경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제갈량의 기교로 조조군을 끌어들여 유비, 손권 연합군이 조조군을 격파한 적벽대전은 『삼국지』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은 그 전쟁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적벽대전이 있은 후, 약 800년 후, 한 명의 북송시대 문인이 그곳을 찾았다. 그는 소방파, 즉 소식 선생으로 장강에 배를 띠우고 시를 읆었는데 그것은 적벽대전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꽤 유명한 〈적벽부〉라는 시다. ‘이곳은 조조가 주유께 곤욕을 치른 곳이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조조의 힘든 싸움을 회상했다.
그런데 사실 소동파가 시를 읊은 곳은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이 아니라고 한다.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은 호북성 적벽시 서쪽으로 바위에 붉은 글씨로 ‘赤壁’이라고 쓰인 인상 깊은 장소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장소는 같은 호북성이지만, 황강현으로 전쟁터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고 한다. 소식 선생이 잘못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냥 넘긴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든 현재는 武적벽과 文적벽으로 불리면서 둘 다 관광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저 못 가보는 것이 원망스럽다.
세계에는 이제 250개 가까운 나라들이 있다. 그 나라들 이름이 비슷한 것은 있어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또 우리가 부르는 이름과 그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독일인들은 자기 나라를 ‘도이칠란드’라고 부르고, 일본인들은 도이츠, 우리는 독일, 영어로는 게르마니라고 부른다. 게르만인에서 유래한 게르마니는 원래 ‘이방인, 전사’라는 의미로, 600년 전 역사가 현재에 남아 있는 이름이다. 게르만인 대이동은 유럽의 역사를 크게 바꾸었다. 유럽의 동쪽과 북쪽은 갈수록 대기가 건조했고, 기후는 냉냉하다. 따라서 유럽 민족들의 이동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진행되었다.
기원전 4세기 후반 흑해 북쪽에서 흉노라고 하기도, 훈족이라고 하기도 하는 기마민족인 유목민들이 유럽을 침입했다. 훈족의 압박을 받은 서고트족, 프랑크족, 앵글로 섹슨족 등 게르만 민족은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로마제국 영내로 들어갔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고 하는 것으로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에 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395년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2명의 자식들에게 나눠주었다. 로마 제국이 분열하는 계기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비잔티움)과 로마를 수도로 하는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게르만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100년 후인 476년 유럽은 게르만인들에 의해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은 각지에다 왕국을 세워나갔기 때문이다.
독일과 주변에는 ‘∼부르크’라는 지명이 아주 많다. 함부르크, 브란덴부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뒤셀부르크 등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다. 왜 이리 많은 부르크가 존재하는 것일까? 부르크는 ‘성채도시’라는 의미다.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마을이란 뜻이다. 아름다운 성이 독일에는 많다. 성에는 영주가 살면서 지역을 다스렸다. 성채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 자취가 ∼부르크라는 지명이 된 것이다. 부르크라는 지명은 성이 많았다는 것으로 독일에는 많은 영주가 존재했다는 증거기도 하다. 다른 유럽국가도 비슷한 경향인데 프랑스의 ‘∼부르’영국의 ‘∼바라, ∼베리’, 러시아의 ‘∼그라드’도 비슷한 지명을 부르는 접미사다. 지명에 관한 이야기가 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노르망디에 상륙해 독일을 공격함으로써 단숨에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는데 노르망디는 북유럽의 노르웨이 노르딕에서 차용된 지명이다. ‘노르만인의 나라’라는 의미에서, 북유럽에 연고가 있는 이름인 것이다. 사실 노르만인들은 유럽 각지에 진출하여 몇몇 국가를 건설했는데 통상과 해적활동으로 유럽을 뒤흔든 ‘바이킹’이 그들의 선조다.
10세기 초. 노르망디인의 수장 롤로는 프랑스의 센강에서 파리까지를 공격해 제압했다.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회유책으로 그에게 센강을 내주고 노르망디 공에 임명했다. 센강 하류를 하사받은 롤로는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세기 초 노르망디인은 지중해로 진출하여 시칠리아에도 왕국을 세웠다. 그만큼 진취적이었다는 말이다. 영국과 노르만인 관계도 아주 깊은데, 영국에는 기원전부터 켈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가, 게르만인 대이동 때는 소부족인 잉글로 섹슨인이 브리튼에 침입하여 소왕국을 건설했다. 9세기 전후 섹슨 왕국으로 통일했지만, 노르망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1016년 노르만인 수장 크누드가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1066년 섹슨 왕조의 왕 에드워드로부터 노르망디공인 월리엄이 왕위 계승을 약속받았지만 에드워드가 죽자, 영국은 이를 거부했다. 월리엄은 왕위 계승을 요구하며 잉글랜드로 쳐들어갔고 승리해 노르망디 계통이 영국 왕이 되었다. 월리엄은 노르망디 공이면서 잉글랜드 왕이기도 했다. 그가 잉글랜드 왕이라는 입장에서는 프랑스와 동등하지만, 노르망디공이라는 입장에서는 프랑스 왕을 섬겨야 하는 복잡한 관계였다. 복잡한 관계가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 관계를 낳고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중국의 한왕조는 전한 때 수도를 장안에, 후한 때는 낙양에 두었다. 두 곳의 위치를 따져 장안은 서경, 낙양은 동경이라고 불렀는데 삼국시대를 거히면서 진나라(265∼316년)에 의해 반세기 정도 통일을 이루었다가 다시 분열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270년이 지난 589년 수나라가 통일하는데, 수나라 2대 황제 양제는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낙양을 동경이라 불렀다. 동경은 5년 후 다시 동도(東都)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졌으며 당나라는 수나라가 실현하지 못한 토벌정책을 성공함으로써 이때 결국 고구려도 망했다. 300년간 번영을 이루었던 당나라 수도 장안은 계획된 도시로 다시 지어졌고, 이는 다른 나라 도시건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백과 두보가 활약하고 삼장법사가 인도로 여행하고 돌아와 장안에 시안탑을 세우고 불경을 번역했으며, 측천무후의 손자 현종이 양귀비에 싸여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등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을 보이기도 하는데 양귀비의 죽음으로 반란은 수습되지만 당나라의 지배체제는 매우 약해졌고 결국 실크로드를 통해 세계에 이름을 알리던 당나라는 907년 멸망했다. 이후 힘의 상징인 무인들이 등장하면서 작은 나라들이 생기고 멸망하기를 반복하면서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960년 송나라가 통일했다.
‘사랑, 평화’만큼 좋은 말은 없을 것이다. 미국에는 평화에서 유래한 살렘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40여 개나 있다고 한다. 히브리어 예루살렘은 마을과 평화의 조합으로 ‘평화의 마을’이라는 의미다. 유대교에서 예루살렘은 고대 신전과 같은 곳이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순교와 관련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승천한 성지로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동경하고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고 함으로써 지금까지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 여기다.
우리도 어느 때부터 맛있게 먹고 있는 햄버그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당초에 미국 음식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여러 설이 있지만,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행하던 다르타르스테이크가 미국에 전해져 함부르크풍 스테이크라는 의미로 ‘햄버그스테이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에서 생긴 요리가 아니라 몽골계 부족인 타르타르인들이 유럽 원정시에 먹었던 요리라고 한다. 유목민인 그들이 양파 등을 넣은 말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말안장에 깔고 다녔는데, 함부르크에서는 말고기 대신 소고기 요리로 변했다고 한다. 햄버그는 몽골이 기원인 것이다. 경기를 한다는 ‘플레이∼ 플레이∼’란 응원구호도 영어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몽골 군대의 함성소리였다고 한다.
1227년 칭기즈칸이 죽은 후, 아들 오고타이, 손자 바투와 훌라구에 의해 몽골제국은 영역을 크게 확대했다. 오고타이는 금나라를 멸망시켰고 바투는 러시아를 정복하고는 동유럽을 공격했다. 폴란드와 독일이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결말은 빤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때 바투의 작은 아버지인 오고타이가 죽으면서 바투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는 캅차카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다. 오고타이가 죽고 3대 칸에는 귀위크가 즉위했지만 2년 만에 요절하고, 이어서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아들인 몽케가 4대 칸에 올랐다. 몽케의 동생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폐허로 만들고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훌라구는 이란과 이라크에다 일한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몽골은 반세기 만에 대제국을 일으키는 위업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멍케에 이어 제5대 칸에 오른 쿠빌라이는 현재 북경인 대도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 이름도 중국식인 원으로 정했다. 그는 티베트와 고려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일본과 베트남 자바섬까지 지배하려 했다. 베트남의 역사를 꼭 한번 읽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쿠빌라이 시대 원은 정상에 오른 것 같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2,3대는 오고타이 계통이, 4,5대는 막내 툴루이 계통이 칸이 되었지만, 쿠빌라이 즉위시 툴루이 계통이 이어지는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고타이 계통인 카이두가 그였다. 그는 찹차카한국과 함께 반 쿠빌라이, 반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다만 일한국은 원나라에 우호적이었는데 일한국을 창립한 훌라구가 쿠빌라이 동생, 즉 툴루이 계통이었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바뀌거나 왕조가 바뀌면 같은 도시라 하더라도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북경도, 남경도 그랬다. 건읍, 건강, 금능읍, 강녕부 등으로 불린 남경이 그랬고, 북경은 춘추시대 연나라 때는 계(薊)였다가 연나라 수도일 때는 연경(燕京), 금나라 때는 중도(中都), 몽골이 점령했을 때는 대도(大都) 또는 칸의 수도라는 의미로 칸바라크라고 부르기도 했다. 명나라 제3대 영락제 때부터 북경(北京), 즉 베이징이라고 불렸으며 20세기 들어 수도를 남경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중국 공산당은 다시 북경으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원나라의 정치 혼란을 틈타 민중 반란인 홍건적의 난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원나라 흥망의 치명타가 되었으며 반란군 중에 두각을 보인 주원장이 1368년 남경을 수도로 하는 통일왕조 건설에 성공했다. 영락제는 자금성을 건축하는 등 명나라는 조선과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원의 잔존 세력과 왜구의 압력으로 혼란을 겪다 마침내 1644년 만주인(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에 흡수되었다. 청나라는 원, 명과 마찬가지로 북경에 수도를 두고 자금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과거 중국 왕조 때의 제도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변발이라는 만주 풍습을 강요하기도 했다.
다시 유럽으로 가보면 이 무렵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맞는데 이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새로 발견한 아메리카로 활발히 진출했다. 그러나 서로 이해관계로 충돌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로 경계를 정하게 되었다. 경계선의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맡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포르투갈의 카브랄 제독이 포착한 브라질은 포루투갈이 점유하고, 마젤란이 도착한 필리핀은 스페인령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필리핀은 스페인 황태자 펠리페 2세의 이름에 유래한다. 우리는 흔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그가 탐험하기 500년 전에 이미 바이킹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것을 점유하지 않았을 뿐이다. 콜럼버스는 유럽인에 의한 ‘재발견’이었던 것이다.
이름이 역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에서 다빈치는 ‘∼출신’이라는 뜻으로 빈치 출신의 레오나르드라는 의미다. 실제로 피렌체 근처의 빈치 마을이 그의 출신지다. 그의 아버지는 세르 피에로로 다빈치의 풀 네임은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 빈치’가 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그가 사생아인데다 부모의 이혼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림과 건축 음악과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드러낸 천재 예술가로 현재까지 칭송받는 것은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는 러시아 연방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1,700만 ㎢로 우리나라의 170배 미국의 2배다. 그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는 모나코 공국과 산타마리아 공화국, 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도 꼽히지만 그 보다 훨씬 적은 나라는 바티칸 시국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둘러싸인 바티칸 시국의 면적은 0.44㎢, 여의 면적이 2.9㎢이니 여의도에는 바티칸이 6개가 들어간다. 바티칸의 원수는 로마 교황으로 역사상 교황령의 크기는 상당히 넓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이 기부한 교황령은 19세기 이탈리아에 빼앗긴 후 1929년 바티칸 시국으로 부활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부활하기 전에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개혁 등의 사건의 중심지였다.
4년마다 세계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올림픽과 월드컵일 것이다. 올림픽과 달리 월드컵 출전 자격은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각국의 축구협회 단위로 정해진다. 보통 1국 1협회가 원칙이지만 영국은 예외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까지 4개팀이 월드컵에 출전한다. 아시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처럼 지역 예선을 거치는 것도 아니다. 4개 지역 축구협회가 각각 국제축구연맹에 가입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다. 현재는 다른 나라가 된 아일랜드까지 5개인데, 5개 중에 웨일즈는 이미 13세기에 잉글랜드에 합병되었음에도 그렇다. 왜일까? 헨리 8세 이후 영국은 여왕이 다스린 나라로 ‘피의 여왕’메리를 피롯해 엘리자베스 1세 여왕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만큼 국력이 커지고 축구의 종주국으로서 영향력이 막강했다는 것이다.
세계의 한 귀퉁이처럼 보이지만 지중해 입구,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대항해의 본고장 투우와 플레밍고의 고향, 이베리아반도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2개의 국가가 더 있다. 피레네 산맥 안쪽에 안도라 공국과 아프리카와 마주보고 있는 지브롤터가 그것이다. 안도라 공국은 스페인의 우르헬 주교와 푸아백작이 공동 영주로 우르헬 주교와 프랑스가 공동 통치하던 중 1993년 독립했고, 지금은 주교와 프랑스 대통령이 공동 원수로 되어 있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킨 곳으로 승리의 보상으로 영국령이 된 곳으로 지금도 영국령이다.
세계가 사용하는 여러 기준에는 영국이 중심이 된 것이 많다. 그만큼 국력이 컸다는 증거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위·경도를 정한 것도 그렇고, 지금 우리가 중동, 근동, 극동이라고 부른 것도 영국이 그렇게 부른데 원인이 있다. 근동은 유럽에 가까운 터키와 이집트 등 지역을, 중동은 그보다 먼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을, 극동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동북부를 가리킨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따로 부르지는 않았다. 영국은 북아메리카를 거의다 삼켰는데 콜럼버스 이후 5년이 지난 후, 영국왕실의 지원을 받은 ‘캐벗’이라는 인물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했고, 이어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영토 분쟁을 일으켰으나 영국이 승리했다. 아메리카라는 지명은 이탈리아 프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발견자 콜럼버스가 아니라니 이상하기도 하지만,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거기가 인도라고 생각했으나 베스푸치는 새로 발견된 ‘신대륙’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콜럼버스의 이름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 콜롬비아에 있는 산 이름 크리스토말콜론이나 아메리카 합중국의 수도 워싱턴 DC(District of Columbia)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길쭉한 나라는 칠레가 아닐까 싶은데, 지형적으로 동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솟아 있어서 넘어가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원래부터 그렇게 긴 나라는 아니었다. 17세기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의 부하이던 ‘페드로 데 말디비아’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산디아고를 건설했는데 그것이 칠레의 모태다. 산디아고는 칠레 중간쯤에 있다. 남쪽에는 마푸체족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원주민들의 격렬히 저항해 영토를 확장하지 못하다가 1818년 독립국가가 된 칠레가 1883년 마푸체족과 화해하면서 국토가 넓어졌고, 1879년에 있은 불가리아와의 소위 태평양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돼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알래스카가 러시아 영토였다가 미국에 팔아넘긴 사실은 아는 일이지만 러시아는 왜 그것을 팔 수밖에 없었을까는 궁금한 부분이다. 1853년 고작 720만 달러에 산 미국은 그곳에서 반세기 만에 금광개발 등으로 100배에 이르는 이익을 얻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영국, 프랑스를 상대로 크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자 재정확보를 위해 알래스카를 팔기로 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보통 인접국가와 협상을 벌리는 것이 상례이나, 알래스카와 인접한 캐나다는 영국 영토였다. 적국인 영국에게 알래스카를 팔 수는 없었다. 차선책으로 미국에 팔게 된 것이다.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역사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미국은 1774년 13개 지역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독립 문제에 대한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듬해 보스톤 교외 지역인 렉싱턴 콩고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식민지 측은 프렌치 인디언과 싸움에서 공적을 올렸던 조시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1776년 7월 4일 역사적인 독립선언을 하고, 다음 해 연합 규약을 제정해 아메리카 합중국이 탄생했다.
식민지 측은 처음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이 참전해 힘을 보탰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스웨덴, 덴마크, 포르투갈, 프로이센도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하면서, 영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1781년 영국 거점인 요크타운이 함락되자 전쟁을 단념하고 1783년 파리조약으로 미합중국은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은 미시시피강 동쪽 영토도 이양할 수밖에 없었으며, 1787년 미합중국 헌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이 임명되었다. 미국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과는 달리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돼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은 반세기 만에 동서를 관통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서부 개척시대 원주민의 토지를 빼앗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100만 명이던 원주민이 19세기 말에는 불과 25만 명으로 감소했다.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역사를 하나 더 보면, 1861년 북부에 가까운 서부 출신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노예제가 더이상 늘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노예 해방을 주장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대통령을 배출했던 남부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남부와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초기에는 북부가 열세였다. 그러나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안팎의 지지를 얻어냈고 서서히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최대 격전지였던 게티즈버그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는 여기에서 있은 추도식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연설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어쩌면 가장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니 현대의 역사이기도 한 중동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재선 등 복잡하고 다양하게 역사는 언제나 진행되고 있고 한국도 결코 만만치 않다. 대통령 탄핵 등 아슬아슬한 칼 위를 걷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작금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중국과 한국 일본, 동남아에서 크게 발달 했다. 그중에서 불상의 이름을 지명으로 한 곳은 만주라고 있다. 만주는 산스크리스트어 ‘만주슈리’에서 가져왔다. 흔히 문수보살이라 부르며, 지혜를 관장하는 부처인 그의 이름이다. 일본 원자력연구개발기구의 고속 증식로 이름도 몬쥬라고 하여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아마도 만주족이 문수보살을 닮고 싶어서 지명에 붙였을 것이고 그것이 일반화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세계에는 3대 운하가 있다.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는 잘 알아도 세 번째 것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독일 북부에 있는 칼 운하로 북해와 발트해를 잇는 것으로 정식명칭은 ‘북해-발트해 운하’이지만 발트해에 있는 도시 이름을 따 ‘칼 운하’라고 부른다. 군항이며 칼 대학이 소재하는 이곳은 한 때는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나치와 파시즘에 의해 발생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디오피아를 침공함으로써 국제연맹은 경제 제재를 시행했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듬해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에서 프랑코가 이끈 반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독일 공군은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다. 이때의 참상을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 아주 유명하다. 국제 의용군이 정부측을 지원했으나 반정부군에 패했고, 국제 의용군에는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앙드레 말로 《희망》,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등 작품들은 당시 전쟁에 참가하여 상황을 그린 명작들이다. 1938년에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다음 해에는 체코슬라비아를 해체하고 슬로베니아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으며 폴란드를 침공했다. 뒤에 소련도 폴란드를 공격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축으로 하는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연합국 사이에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과 소련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읽었던 폴란드를 회복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독일은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리에, 프랑스를 침공하여 파리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1841년 독일은 석유 확보를 위해 독소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이 해 말 추축국 일본은 고철과 석유 공급을 거부한 미국과 전쟁을 시작해 진주만의 해군기지를 기습한 데 이어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도 침공했다.
1942년 중반에 이르자 경제적 우위를 보인 연합군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에 패배했다. 이해 연합군이 이탈리아로 접근하면서 반 무솔리니 운동이 활발해져 무솔리니는 해임되어 총살당했다.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파리가 해방되고 베를린을 압박하는 동안에 히틀러는 자살했다.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이 접수되었고, 미군은 사이판, 레이테섬, 마닐라섬을 탈환하고 이오지마에 있던 일본군은 전멸당했다. 4월에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가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전쟁은 끝났다.
끝으로 러시아 역사를 보면 러시아는 바이킹의 한 유파에 기인하는데 그들이 남하하여 슬라브족과 섞였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을 받았고, 1480년에야 몽골로부터 벗어났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는 ‘습지’를 뜻하는 모스크에 물을 의미하는 말로 생긴 것으로 습지의 물, 강이라는 의미다. 시베리아 역시 몽골어로 습지를 뜻하는 ‘시비르’에다 라틴어 접미사 ‘이아’가 붙은 것으로 모스크바와 시베리아는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지명이다.
겉핥기식일지라도 세계사를 훑어보았다. 이제 인류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환경문제 말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면 복잡한 문제들도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