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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이용교는 누구?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이용교는?
2013년 2월 1일 제가 “광주광역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할 때, 사람들은 “이용교”에 대해서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가 3만 5천명 사회복지사의 대표로 나선 만큼 살아온 길과 꿈꾸는 것을 알리는 것이 도리하고 생각하여 말씀드립니다. 반세기가 넘는 삶을 몇 장의 글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진솔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혹 부족하면 제가 알려준 곳을 클릭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용교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전남 보성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녹차는 원 없이 먹었겠네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스무 살이 되도록 녹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습니다. 보성 녹차는 ‘회천면’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23살 때 처음으로 회천면에 가보았습니다. 같은 보성군이지만 녹차가 생산되는 곳과는 생활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의 고향인 율어면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해방구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한 사실도 태백산맥을 읽은 후에야 알았고, 제가 자랄 때에는 평범한 농촌이었습니다. 일곱 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 급장을 하였습니다. 회장 입후보자 신청서류의 ‘표창’란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졸업식에서 ‘전라남도교육위원회 교육감상’을 탔습니다.
율어중학교에 입학하여 교장, 교감, 그리고 다섯 분의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120여명의 졸업생 중에서 서울대, 중대, 성균관대, 숙대, 건대, 부산대, 전남대 등 유명 대학교에 입학한 동기들이 많았습니다. 시골의 신설학교 졸업생들의 성적치고는 괜찮은 수준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자식농사가 최고라고 했지만 여자는 늘 뒷전에 밀렸습니다. 44명의 여학생 중에서 제때에 혹은 재수를 해서 대학교를 간 사람은 2명에 불과했는데, 한 사람은 면장님 딸, 또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 딸이었습니다. 다른 딸들은 부산 당감동의 고무신공장이나 서울 구로공단에 가서 미싱을 돌리거나 전자제품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딸은 집안의 살림 밑천으로 그들의 희생에 의해서 아들들이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여섯 살부터 소를 먹이기 시작하여 중학교 졸업까지 10년간 소를 키웠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서는 소를 한 마리씩 키웠지만, 초등학교 상급생이 되었을 때는 늘 2~3마리씩을 함께 키웠습니다. 매년 소가 송아지를 낳으면 그것을 키워 팔아서 학비에 보탰습니다. 보리와 나락을 수확할 때를 제외하고는 현금이 별로 없는 시절에 송아지를 판 돈은 큰 돈이었고, 3~4년에 한 번씩 캔 ‘작약’은 우리 집안의 재산을 증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용교는 “배워서 남 주는 사회복지사”를 꿈꾸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하는 형을 따라 서울로 가서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주로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1년 반만에 대입 검정고시를 마쳤지만, 그해 희망하는 대학교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는 두 번째 도전하여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복지학과”가 생소했기에 제가 사회복지학과를 다닌다고 하니 사촌형은 “겉보리 팔아서 대학을 간 놈이 고아원 원장 될래 양로원 원장 될래”라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저는 대망의 80년대가 되면 복지사회가 된다고 하여 사회복지학과가 전망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꿈은 “동방의 대학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교수가 되었으니 학자는 된 셈입니다. 아직 대학자에 미치지 못했지만, 사회복지학에 관한 저서 30여권을 집필하고 20권 이상을 기획하면서 그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면서 잘한 것이 두 가지었습니다. 하나는 2학년부터 3년간 근로청소년을 위한 야학인 ‘다울중학원’의 교사로 일했습니다. 당시에는 강의하는 학생을 강학, 일하면서 배우는 학생을 노학이라고 했는데, 그때 배워서 남 주는 사회복지사의 길을 배웠습니다. 당시 일주일에 두세 번씩 다울야학에 가서 강의하면 되었는데, 담임교사, 회장을 맡으면서 거의 매일 다울에서 살다 시피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첫사랑을 하였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입니다. 고향 친구였던 아내를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서울에서 만나 십여년을 사귀다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문화부활동을 하다가, 광주로 이사한 후 광주여성의전화에서 상담활동을 하면서 관련된 공부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호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목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1급 사회복지사가 된 후에는 가정폭력피해자 보호시설인 쉼터의 소장으로 일하였고, 현재 성교육강사와 대학 외래교수로 일하기도 합니다.
부부가 사회복지사여서 그런지 아들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사회복지사가 되었습니다. 올해 3월부터는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더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4인 가족에서 75%가 사회복지사입니다. 제가 광주광역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에 입후보할 때에도 아내와 아내 친구들의 추천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가 하거나 하려는 사회활동 중에서 아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광주사협 회장 선거’라고 생각됩니다.
이용교는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를 지향했습니다.
제가 지난 30년간 월급을 받고 상근한 직장은 총 3개입니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는 한국복지정책연구소 주임연구원으로 일하였습니다. 지도교수인 김영모 교수님이 설립한 연구소에서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복지서비스 등 사회복지정책을 연구하였습니다. 복지정책 연구에 대한 기본을 배우고, 연구한 것을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하게 하는 사회운동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연구원이 후에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회장이 된 성공회대 정종우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사회복지기초선’을 기획한 중앙대 김연명 교수 등입니다.
두 번째로 일한 직장은 1989년에 창립된 한국청소년연구원(후에 한국청소년개발원, 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1997년초까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가출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쉼터’를 설계하고, ‘청소년자원봉사센터’를 제안하였으며, 한국 청소년상담정책의 발전방안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청소년지도사 양성에 꼭 필요한 교재인 ‘청소년지도자 총서’ 9종을 개발하였습니다. 지금은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청소년복지론, 청소년지도론, 청소년심리학, 청소년문화론 등의 교재를 제가 기획하였고, 그중 일부는 집필하였습니다. 저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필요로 하는 것을 새로 만들거나 초보적인 수준에 있는 것을 발전시키는데 나름 공헌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청소년학회를 발기하여 창립하고, 초대 간사로 일하면서 학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청소년학을 정립하였습니다.
이용교는 “행복한 세상을 열어가는 사회복지사”가 되고자 합니다.
1997년부터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광주 사회복지를 발전시키고, 한국 사회복지의 지평을 넓히며, 지구촌 사회복지사의 길을 꿈꾸고 있습니다.
제가 광주사회복지에 기여한 것을 몇 가지만 소개하면, 광주전남에 있는 사회복지학과 교수님들과 협력하여 광주복지아카데미를 기획하여 ‘광주사회복지론’이란 책을 만들었습니다. 참여자치21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다양한 복지정책을 제안하고, 광주광역시 청소년위원회와 사회복지위원회에 참여하여 복지정책의 형성에 기여하였습니다. 후에 남구청장이 되신 황일봉 회장님을 모시고 남구사회복지협의회를 창립하였고, 현재는 남구지역사회복지협의체 대표협의체 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복지성지 남구 뿌리찾기아카데미’를 기획하기도 하였습니다.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에서 학부장으로 일하면서 학부행정을 표준화하고 전산화시켰으며 2년간 학부행사와 각종 활동을 학부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학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을 공정하게 집행하고, 연간 1억원이 넘는 학부 예산을 투명하게 집행하여 그 주요 내역을 학부 홈페이지에 공지하였습니다.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20년사를 정리한 책을 발간한 광주대 사회복지학과(부)의 자부심이고 저의 자랑입니다. 2005년에 참여복지센터를 설립하여 사회복지사와 시민을 위한 복지교육의 산실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2009년부터 3년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서 수행한 ‘농어촌복지활동가 양성사업’은 전국에서 128회의 복지강좌를 기획하여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 복지교육의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발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일하면서 늘 대한민국 사회복지교육의 표준을 만들고 복지정책을 개발하여 복지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주로 관심을 가졌던 아동복지와 청소년복지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한때는 공부방에 불과했던 지역아동센터를 법제화시키고 전국화 시키는데 주력하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지역아동센터가 가장 많은 곳이 광주와 전남인데, 그것은 제가 ‘지역아동센터의 설치와 운영’을 가르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번 광주사협 회장 선거를 나설 때 추천하여 주신 분들 중에는 지역아동센터 센터장님이 많은데 그러한 이유입니다. 또한 학교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지역사회교육전문가, 교육복지사의 직무 개발과 권익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아울러, 청소년쉼터, 청소년자원봉사센터(활동진흥센터), 청소년수련관, 청소년단체 등은 지금도 저의 활동 근거지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청소년복지학회를 창립시키고 학회장으로 일하였습니다. 한국사회복지학회 총무분과위원장, 한국사회복지교육협의회 인증분과위원장, 한국사회복지사협회 1급 시험 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복지정책을 실용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몇 년 전 사회복지사 1급 국가시험이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되었을 때, 1급 시험 공개운동을 펼쳤는데 이를 계기로 시험지가 공개되었고, 시험시간이 1문제당 50초에서 60초로 변경되었습니다. 제가 사회복지사와 예비 사회복지사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7월에 만든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 http://cafe.daum.net/ewelfare 덕분이었습니다. 한명의 사회복지사가 시민과 함께 복지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그 참여자가 2013년 2월 11일 현재 53,037명으로 증가되었습니다. 지역아동센터의 설립과 운영을 가르친 아동복지아카데미,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대비하여 노인복지시설의 설립과 운영을 가르친 노인복지아카데미를 비롯하여 20여개가 넘는 복지아카데미를 기획하여 전국적으로 오프라인/온라인 강의를 실시하였습니다. 제가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의 활동을 17년 이상 지속적으로 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복지운동을 펼치는 사회복지학과 교수, 법률가, 사회운동가들과 다양하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새롭게 개척하는 분야는 ‘국제사회복지’입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도움을 받았던 한국에서 도움을 주는 대한민국으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지구촌 복지를 위하여 ‘아동청소년학월드포럼’을 기획하고, 이를 계기로 국제사회복지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현재 글로벌청소년학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3년 1학기부터는 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을 받아서 ‘국제개발협력과 국제복지’를 강의할 예정이고, ‘국제사회복지학의 지평’을 넓혀갈 것입니다.
제가 지향하는 삶은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입니다.
제가 지향하는 삶은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이고 이미 온라인을 통해서 이루었습니다. 처음에는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학생들과 과제물을 ‘이메일’로 받아서 1997년에 ‘복지대통령 만들기’를 기획한 이후 대학생/대학원생과 10권 이상의 책을 기획하였습니다. 복지시장 만들기, 복지공동체 만들기, 시설과 인물, 새천년을 열어갈 사회복지사의 길, 디지털 사회복지사의 길, 사회복지대학생의 길, 지구촌 청소년과 내가 할 일 등은 그중 일부입니다.
2000년에 한국복지교육원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다양한 복지아카데미 http://www.okwelfare.net 를 기획하였고, 2002년에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 http://cafe.daum.net/ewelfare 를 통해서 복지세상을 활짝 열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복지평론가’란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여 복지칼럼을 쓰고 그것을 묶어서 ‘복지는 생활이다’, ‘디지털 복지시대’를 발간하였습니다. 대학생들과 복지를 함께 공부하고, 사회복지사와 복지정보를 나누며, 시민을 위한 복지교육이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습니다. 그 결과 ‘알아야 챙기는 산재보험’, ‘알아야 챙기는 건강보험’, ‘알아야 챙기는 고용보험’을 발간하였고, 이후 ‘상식으로 알아야 할 국민연금’, ‘상식으로 알아야 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등을 기획하였습니다.
저는 30년이 넘게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25년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3년간 광주광역시사회복지사협회를 한 단계 발전된 협회로 만들겠습니다. 지난 100년 최흥종 목사님, 강순명 목사님, 이현필 선생님, 서서평 선교사님, 조아라 여사님 등 광주의 어른들은 한국 사회복지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제가 회장이 되면 광주 사회복지의 역사를 집대성하고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로서 새 역사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공약을 다음 호에 연재하겠습니다.
[2013년 1월 11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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