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 : 2024년 11월 16일
44번째 성지순례는 1.왜고개 성지 → 2.당고개 순교 성지 → 3.용산 예수성심신학교 → 4.용산 성직자 묘지 → 5.새남터 순교 성지 입니다.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
† 자비로운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 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신 다빗, 김 소화데레사, 신 미카엘)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신 다빗, 김 소화데레사, 신 미카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 성당 "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서울대교구]
성지 알아보기
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용산 성심 신학교(옛 용산 신학교 성심 성당)와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과 성심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옛 용한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다.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31년 조선 교구가 북경에서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갖은 고난과 질병을 이겨 내고 조선 땅으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을 향해 떠난 지 4년 만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비록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개척해 둔 입국 경로를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교회는 완전하게 조직을 갖춘 명실상부한 교회가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1877년 한국에 입국해 1933년 서울에서 선종할 때까지 중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국땅인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박해 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 조약 이후 지하 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 성심 신학교, 종현 성당, 약현 성당을 짓는 한편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유명한 뮈텔 일기는 자신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임종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써 둔 일기로 총 6천여 면의 분량에 주교 개인 사정과 재임 동안의 교회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한국 교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그는 "뮈텔 문서", "기해 일기" 등을 저술하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발견되자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을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다. 현재 황사영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주교좌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2010년 노후화된 성당 외벽과 주변에 대한 보수공사를 시행하고, 2011년에는 성당 내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