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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
권 인 호
1. 서론
‘유학’은 ‘사람에게 필요한 학문’1)으로서 실학을 뜻하기도 한다. 학문이란 무릇 그것이 리론적인 사상체계 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인 실학일 때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문사상은 보다 실질일용적인 것에 중점을 두어야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즈음 한국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불안은 한 개인의 삶에서 부터 국제적인 정세와 여론에 이르기 까지 현실적인 학문사상의 경향성에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윤리도덕’과 ‘국가 사회의 정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주제도 실제적이고 현실성이 없다면, 즉 그것을 연구하는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 등의 전통적인 인문과학은 사회과학이나 응용 자연과학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 위기에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것과 관련하여 얼마전에 ‘포청천’ 이란 중국의 사극이 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포청천이라는 인물2)이 불의에 항거하고 상층권력에도 아부나 흔들림 없이 진실과 백성을 위해서 철저하게 증거를 확보하여 공정한 재판을 하는 모습 때문이라 본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현실사회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대리충족적 심리상태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무리 기계기술과 첨단과학과 같은 응용과학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의 주체인 인간을 주제로 한 현실과 연결된 실용성 있는 인문과학, 즉 실학은 오히려 더욱 절실함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우리의 정치현실과 포청천 붐을 보면서, 포청천보다 조금 앞서 개봉부윤을 역임했고 재상까지 되었던 범중엄의 말이 곧 유교의 민본정치사상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무릇 관리가 된 자(황제까지 포함)는 ‘천하(만민)의 근심을 그들(백성)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그들보다 나중에 즐겨야 한다’3)는 ‘선우후락사상’을 말하였다. 물론 이는 맹자가 ’민중을 나라의 근본으로 하여 정치를 하여야 하고’(민본사상), ‘왕과 관리는 백성과 더불어 즐겨야 한다’(여민동락)는 유교의 실학적 정치사상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인물 가운데 남명 조식(1501-1572, 이하 남명)이 지녔던 훌륭한 유교의 민본정치사상과 불의에 항거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정치비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한 상소문을 올리는 훌륭한 전통은 왜 계승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와 아울러 우리의 현실에서 비판적 학자나 지식인의 목소리보다는 정치적 간지를 속삭이는 당정의 참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재벌의 정치자금에 묶여있는 정치지도자는 그들 스스로의 자질과 함께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왜 시대가 발달하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청백리’는 고사하고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세금을 도둑질하고 이권에 개입하여 국고를 축내어 결국에는 머슴이 주인의 재산과 호주머니를 터는 이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조선왕조도 후기에 와서 노론의 일당전제과 세도정치로 인하여 똑같은 모습을 보이자 나라가 망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남명이 상소문에서 당시의 정치사회 비리를 질타한 조선 중기 당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이 논문에서는 유학사상의 근본 종지라고 할 수 있는 ‘수기치인’에서 그 궁극적 목적인 ‘치인’, 즉 실학사상에 중점을 두고 조선 중기 유학자인 조식과 그 제자 및 사숙인들(남명학파)의 사상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남명의 고제자인 래암 정인홍(1535-1623, 이하 내암)은 스승의 출처대의를 본받아 중앙권력에 의해 벼슬에 자주 추천되었으면서도, 몇 번의 출사말고는 끝까지 재야의 비판 세력으로 남아서 실천적이고 개혁적인 정치사상가로서 실학사상을 펼쳤다. 또한 내암과 더불어 ‘양강’으로 병칭되는 남명의 고제인 동강 김우옹(1540-1603, 이하 동강)4)과 한강 정구(1543-1620, 이하 한강)5)는 인조반정 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제자와 사숙동향인들에 의해 남명보다는 퇴계 이황(1501-1570, 이하 퇴계)의 제자임을 부각하고 내암과의 반목질시를 왜곡날조하거나 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최근의 객관적인 연구성과로 인하여 그 실상이 밝혀졌으니, 즉 내암과 동강의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내암과 한강의 관계 또한 광해군 년간의 이른바 ‘할은론’과 ‘전은론’이라는 정쟁 이전에는 양문의 제자들이 함께 존숭하였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남명학파의 두 존장으로 영남사림의 종장으로 존경의 표적이었음이 오이환 교수의 『남명집』 판본과『고대일록』에 관한 연구6) 등으로 밝혀진 바 있다.
2. 시대적 상황 및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
고려말에 성리학이 원나라로 부터 전래 되면서 이전의 불교와 도교를 ‘허학’이라 하고 성리학을 ‘실학’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의 관학이었다는 점이 조선초기의 개혁적 정치 분위기에서의 역할과 중기 이후의 수구반동적 분위기에서 그 역할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한편 정도전의 경세적인 학문내용과 권근의 철학적 학문내용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그들의 제자후예들이 세종과 더불어 집현전을 통해 국가의 기틀과 민생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실학적 요소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세조에서 성종 시기에 이르는 왕위찬탈과 변방의 반란 그리고 왕권강화는 그 과정에서 공신의 남발로 인하여 보수적인 훈구파를 양산하기에 이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과 그것을 가지고 향유하는 세력이 끝없이 긴장하면서 역사적 발전을 담보해 내는 법은 없었다.7) 이들 훈구세력은 이제 왕권도 넘볼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는 것은 민본적인 유학사상에서 볼 때 부정적인 집단임에 틀림이 없다. 성종은 그 치적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정치적 견제와 균형을 위한 사림파의 등용이다. 그렇지만 연산군에서 중종반정을 거쳐 선조 초기 까지의 역사적 추이는 반정과 사화라는 비정상적인 것이 었다.
중종반정은 훈구외척 세력의 궁중 쿠데타로서, 인조반정이 서인이라는 훈구외척과 보수적 색채를 지닌 역사반동적 쿠데타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며 성리학적 사회정치 질서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반역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련의 사화(사화)라는 것도 유교의 민본사상과 성리학의 이상정치에 근본을 둔 사림파의 정치 개혁적에 용군과 보수적 훈구파들이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느끼자 정치적 야합으로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들이다. 한편 명종 말기 모후인 문정왕후가 죽고 난후 명종 말년과 선조 초년의 이준경과 권철 등 비교적 사림파에 옹호적인 재상들에 의한 정치 개혁적 분위기 조성으로로 인하여, 사림파가 정치전반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다. 이러한 사림파가 정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사림정치는 중종때 조광조에 의해 시도된 지치주의 또는 도학정치로 일컬어진다. 이 사림파의 정치사상은 ꡔ대학ꡕ의 삼강령과 팔조목의 정신에 토대를 둔, 다시 말해서 ‘수기치인’의 유학 정치사상에 철저하고자 하였다.8) 바로 이러한 사상적 맥락이 실학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조 실학과 그 사상에 대한 연구가 한국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9) 물론 조선시대 후기실학 연구는 19C-20C 초에 정인보에 의해 다산 정약용 연구가 있었고10), 문일평과 신채호 등이 국학운동 차원에서 다룬 적이 있었다.
실학은 ‘실사구시’를 줄여서 쓰는 명칭이다. 그 용어가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은 ꡔ한서ꡕ에 “수학호고 실사구시” 라는 말이 나온다.11) 당시에는 하나의 학풍적 대명사는 아니었으며, 중국에서는 17C 후반에서 18C 상반의 기간에 고증학적 학풍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실학’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는 시기는, 16C 중엽 이후에는 주자학 자체가 현실문제를 외면하고 오히려 관념화․내성화․허학화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 이후부터 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사회․정치․군사․경제․토지․조세 등 시무책의 학문체계로서 유학의 경세사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실학파의 연원에 대해서는 그동안 대체적으로 퇴계, 율곡, 이수광, 미수 허목, 성호 이익 등 많은 연구가 있어왔으나, 최근 여기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며 남명과 그 제자사숙인이 실학의 실질적인 학맥과 학문경향성을 가진다고 문제제기 하였다.12) 선행하는 기존의 연구자들이 다룬 인물들 가운데 퇴계와 율곡은 실학자라기 보다는 성리학자임에 틀림이 없고, 그 학문사상에서 초기 실학적 학풍이 분명한 남명, 내암, 한강, 문위, 조경, 허목 등 남명과 그 제자사숙인을 물론 유형원, 윤휴, 이익, 안정복, 권철신, 위백규, 홍대용, 최한기 등에 이르기 가지 이들의 학문경향이 성리학과 경․사․자․집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병진․력법․산술․율려․음양․의약․복서 등을 이단학문이나 사설난언으로 비판하지 않고 적극수용하여 박학홍유로서 특히 모두가 과거(문과:대과) 출신자가 아니고 재야 출신으로 출처에 엄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박세당, 박지원, 정약용 등도 비록 과거출신 이지만 그들이 각각 숙종, 정조, 순조 때에 조정에서 밀려나 재야나 귀양 중에 있을 때 실학적 학문사상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점은 남명학파의 실학사상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 논문의 연구에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조선조 실학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3. 남명 조식의 실학적 학문사상
1) ‘부’를 중심으로 한 민본사상
남명의 학문사상에서는 경세사상과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요소가 당시 어떠한 학자보다도 많이 내포되어 있으나 현재 학계의 실학연구에서 거론이 미진한 실정이다. 남명학파의 경세사상은 현실개혁을 통해 자신들이 리권을 쟁탈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당시 양반 사대부 세력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보다 유교 정치사상의 원칙론에 입각하여 민중을 위한 ‘민본’을 립론의 토대로 한 것이기에 비교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출처에 엄정하여 재야에서 중앙권력의 소외와 탄압을 받았지만 그것이 바로 역사 발전의 추동력이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유교의 민본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동사상13)은 구체적인 역사 현실로 볼 때는 이상적인 논의에 불과하고 구두선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조선조는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입국의 정치이념을 표방하고 왕조 초기의 중앙집권국가 형성과정에서 법치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권력과 경제력(토지)을 독점한 훈척파들과 사림파 사이에 이해관계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유교정치사상의 특색인 현실에 대한 우환의식에서 관념적인 리기심성론으로 도피하는 보수적 사림파가 등장한다. 이 때에 남명은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사상적 혼란시기에 사회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궁극적 정치소재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였다.
구체적으로 남명은 그 당시의 정치와 왕실에 대하여 「민암부」에서 민중을 물속의 바위(암초)에 비유해서 읊었다. 그는 “‘염여퇴’14)에 배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또한 이곳에서 전복되기도 한다”고 하여 민중에 의해 권력자체가 바뀔 수 있음 주장하고 있다. 또한 남명은 “민중이 물과 같다 함은 옛날부터 있는 말이다.15) 민중은 임금을 모시지만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16)라 주장하였다. 즉, 당시 사회도 정치권력의 민중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물이 있어야 배가 떠서 다닐 수 있다. 민중이 있어야 임금이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이 배를 뒤집을 수 있듯이, 민중을 위한 정치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쫒겨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남명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속에서 유교의 혁명적인 정치적 사상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는 “걸주는 탕무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나라의 민중을 얻지 못한데에서 망했다.”17)라 하여 ꡔ맹자ꡕ의 「리루장」18)과 「진심장」19)의 두 문장을 합해서 그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즉 폭군인 걸왕과 주왕이 단순히 혁명을 이끈 탕왕과 무왕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천하는 실기민 때문이고 그것은 곧 실기심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시 남명은 보다 후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다. “한나라 류계20)는 소민이었고 진나라 이세21)는 대군이었다. 필부가 만승(천자)으로 바뀌었으니 대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직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22)라고 하여 분명히 정치권력인 대권이 민중의 손에 달렸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의 정치사상에는 민본을 바탕으로한 소박한 민주적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이는 물론 당시 대비 윤씨와 그 오래비 윤원형 일당의 외척정치가 극도로 부패문란하여 당시 민중의 생활이 피폐된 시대적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그 구체적 예로서 조식은 「민암부」에서도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읊고 있다. 그는 “궁실을 광대하게 하는 것은 암을 운반해 오는 수레이고 녀알23)이 성행하는 것은 암의 계단이고, 세를 거두는데 기준이 없음은 암을 쌓는 것이고, 사치함이 헤아릴 수 없음은 암초가 크게 서있는 것이며, 이 암초가 비록 민중에게 연유하고 있으나 임금의 덕에서 연유함이 아닐 수 없다”24)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물과 같은 백성이 배인 임금을 받들어 모시지만 물 속에 암초인 바위가 있으면 배는 좌초해서 전복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당시 현실이 온통 바위를 물속에 운반하여 크게 쌓고 있는 것과 같아, 잘못하면 왕 자신도 무너지게 된다는 경고였다.
2) ‘공거문(상소문)’에 나타난 우환의식의 실학사상
조선 초기의 과전법이 실제에 있어서 폐지된 결과, 실권을 가진 훈구외척 세력들의 토지겸병이 일어나고 대토지를 소유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 당연히 귀족 관료층은 과소비와 아울러 사치스러워지고 상대적으로 이를 충당해야 하는 하층민은 공물 등 세금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가난해져 류민화되며, 나중에는 도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민은 정치적인 주체가 되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귀족층의 권력과 부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바로 다산이 말한대로 ‘관리가 민중을 그들의 논밭으로 하여 사사로운 사익을 추수’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유교 정치사상에서 민심의 향배는 천심을 움직이는, 즉 ‘민심이 곧 천심’으로서 국가의 존망과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남명은 상소문에서 당시 민중이 어육이 된 현실을 직절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당시 중종 때부터 다시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발호하고 남쪽 바닷가에서는 을묘왜변 등으로 왜구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은 때였다. 그런즉 미구에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예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논지가 내치의 문란, 즉 국가 안의 부패가 나라의 힘을 약화시켜 밖으로 부터의 화를 자초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 당시 내치의 부패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남명은 “지금의 형세가 이미 극도로 부패해져 둘러보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고 어찌할 줄을 모른다. 소관들은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재물과 뇌물을 모으기만 한다. (중략) 외신은 민중의 껍질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 날뛰듯 하는데,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신은 이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하며 계속 탄식하여 낮에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고 허희하며 탄식하여 밤에는 눈물을 가리는 것이 오래 되었다. 자전은 소식이 막혀 있는 깊은 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가 어리어 중종의 고사일 뿐이니, 백천가지 천재와 억만갈래로 흩어진 인심을 무엇으로 수습할 것인가?”25)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민중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환의식에서 탄식과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조정에 있었던 왕과 실권을 행사한 대비와 내외의 대소 신료들에 대하여 준열하게 비판하였다. 3
조선 중기 당시의 국제정세는 조선 초의 사군․륙진개척과 대마도 정벌로 보인 적극적 대처로써 얼마 동안의 평화를 가져왔으나 중종 시대 이후로 부터 끊임없는 변방의 소요가 있었다. 또한 남명은 상소문에서 외교와 국방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당시 상황과 그 이유 그리고 대처방안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세종 원년(1419년)에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 10년(1479년)에 북방 야인(여진족)들을 치게 하여 변방을 튼튼히 한 사실을 들고, 당시(명종 시대)의 국방문제는 국가의 규율이 무너지고 남쪽에는 삼포왜변이 일어나 민중이 어육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점검 진단하였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 이유를 남명은 “평소의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쓰니26) 재물은 모이겠지만 백성은 흩어져서 필경에는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 없고 성에는 군졸이 없다. 적이 침입하여도 무인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이것이 괴이한 일이겠는가. 이것은 역시 대마도의 왜구가 몰래 결탁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하는 바가 국가의 무궁한 치욕이 되어 왕령이 떨치지 못하니 마치 국가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듯 한 것이다. 이것은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은 주나라 예법보다 엄하면서 원수 같은 구적를 대우하는 것은 망한 송나라 보다 더한 셈27)이다.”28)라고 말하면서 당시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구의 국경침입과 변란이 심상하지 않음을 경고하였다. 더구나 그가 처가인 남해안의 김해에서 18년간 거주하면서 왜구의 노략질과 민중의 참상을 목격하고서 올린 상소문이기에 그 내용은 더욱 절실한 감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때 이미 심상치 않은 변방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남명은 고제인 덕계 오건(1521-1574)이 어사겸재상경차관으로 호남의 포조29)와 포졸30) 등의 폐해를 건백한 사실을 조보를 통해 보고, 그에게 편지에 써서 말하기를 “나라의 큰 일은 군사와 식량에 더한 것이 없는데, 포조와 포졸에 대한 백년동안 막혔던 적폐를 이제 통하게 하였으니, 공과 같은 사람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단지 한스러운 것은 묘당에서 계획되지 않고 륙품의 언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31)라고 하여 남명은 당시 나라의 상황이 방납의 폐해와 군역의 문란으로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남명이 나라의 존망에 관련된 것인데도 중앙의 고위 정책심의 기구인 묘당이나 비변사 등에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고 오히려 미관말직이 지적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라의 장래를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이러한 그의 우려는 바로 을묘왜변이나 임진․정유년간의 왜란과 정묘․병자호란에 그대로 나타나 민중이 어육이 되고 국가가 존폐의 위기로 나타났다.
그리고 남명은 ‘서리망국론’과 ‘공물폐해론’을 주장하였다. 먼저 ‘서리’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전’ 또는 ‘구실아치’로 사용되고 있다.32)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문무관료와는 그 출신이 다른 관리층으로서 ‘리’가 존재하였다. 고려시대 초기, 지방의 실질적 지배세력이었던 향리계층은 사회경제적인 변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가 있어서 고려말에는 그 권력지향적 성향과 맞물려 신흥 중앙관료층으로 진출하였다. 리족이 사족화의 길을 걸다가 조선초 이후 이러한 중앙관료층에로의 진출은 이미 사족화된 계층 관료 사대부층들에 의해 봉쇄되자 그들 스스로의 리권을 위해 폐단이 속출되었다.
남명은 선조가 즉위하여 구언하였을 때 올린 「무진봉사」에서 “옛날부터 권신이나 척리, 그리고 부사(왕후이하 왕 주위의 여자들과 환관)가 나라를 전횡한 것은 혹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서리가 나라를 전횡한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정치권력이 대부에게 있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서리의 손에서 인가? 당당한 천승의 나라33)로서 조종 200년의 유업을 기록하면서도, 많은 공경대부가 앞뒤 서로 모두 정치를 하인(서리)에게 맡길 수가 있는가? 이런 일은 차마 소 귀에도 들려줄 수가 없다. 비록 망탁34)의 간교함에도 이런 일은 없었으며 망한 나라의 세상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다.”35)라고 하여 남명은 조선중기의 나라의 정치가 바로 이 조세정책의 잘못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공물의 방납과 이를 관장하는 서리의 작폐 때문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선조의 구언에 의해 같은 시기에 올린 퇴계의 상소문36)은 시폐의 진단과 비판 그리고 광정과 개선책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변통과 개혁이 화를 불러 올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다. 또한 그는 성리학의 인심도심과 인효 등 윤리에 대한 이야기와 왕의 마음가짐 그리고 이단 배척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훈구대신에 대해서도 지치와 중흥에 방해가 되지만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신진사류에 대해서는 이들의 등용이 혼란의 빌미가 된다고 강한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일찍이 맹자도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37)고 하였고, 공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선부후교)’38)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나라의 기틀인 민중이 공물과 서리의 가렴주구에 생존마저 위태로워 살아나려고 류민화하고 도적이 되어 도덕을 버릴 수 밖에 없는 마당에, 이기심성과 윤리도덕 그리고 이단 배척을 임금의 구언에 답한다는 것은 오히려 공맹의 정치사상을 버리고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남명은 이어서 “서리들이 도적이 되어 모든 관청에 무리를 이루어 들어가 웅거하여 요직을 차지하고서 나라의 국맥을 결단낼 뿐만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희생까지 도적질하여도 법관이 감히 묻지를 못하고 사구(형조:법관)도 이를 따지지 않는다. 혹 일개 사원(하급의 젊은 관리)을 조금 규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있고 관리들의 무리들은 손을 묶어놓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근근히 녹봉이나 받아먹으면서 아첨하며 따르는 지경이니 이것이 어찌 믿는 바가 없고서야 그렇게 되겠는가.”39)라고 하여 그는 서리가 도적이 되어 무리를 이루어 나라를 결단내고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단호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또한 더나아가 그보다도 이들 서리들을 규찰하고 심문하여 죄를 논하고 그 예방을 해야할 사헌부나 형조 등 조정의 대신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가렴주구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남명은 다시 “만약 언관이 이것을 논박하지 않는다고 그대로 따른다면 선악의 소재와 시비의 분별하는 바를 알지 못해 임금의 도리를 잃게 된다. 어찌 임금이 그 도리를 잃고서 능히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40)라고 하여 그는 선악과 시비가 현실을 떠나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임금의 정치라는 것도 민중이 도탄에 빠졌는데 이에 대한 실정도 모르면서 ‘륜리도덕, 상하강상, 천리인심을 운운’하는 것은 바로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한 호도책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조식은 임금이 현실분별 속에서 선악시비를 가리고 그에 의해서 정치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사회 정치관에서 정곡을 찌른 남명의 상소문에 대해 미언이 많았다. 퇴계는 남명의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가 왕가에 공손하지 못한 언사를 사용하여 임금이 크게 노한 사실을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남명이 비록 리학으로서 자부하지만 그러나 그는 바로 기사라서 논의와 식견이 매양 새롭고 기이하다. 고상하고 세상이 놀랠 일을 하는 것은 어찌 도리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41)라 하였다. 그리고 또한 “무릇 장소는 진실로 솔직히 말하여 현실문제를 피하지 않는 데에서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모름지기 요컨대 완곡하여 뜻은 곧되 말은 부드럽고 과격하지 않아 공손하지 못한 병이 없어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례를 잃지 않고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게 할 수 있다. 남명의 상소는 진실로 금세에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언어가 합당한 것을 지나쳐 비방에 가까웠으므로 임금이 노한 것은 당연하다.”42)라고 하였다.
3)「학기류편」의 실학정신
남명의 학문은 성리학과 외형적인 의리명분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그 폭이 매우 넓었고, 그 박학으로 인하여 현실 문제에 대처하는 능력과 사상 또한 새로울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실질을 숭상하는 실학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중종 8년(1513년 8월) 변방을 소란하게 하던 야인 추장 속고내를 쳐서 붙잡으려 했으나 술수를 써서 잡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는 조광조의 지치주의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국방에 대해서 만큼은 유교 도학적인 이상정치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세력이 미약하던 건주위 야인43)을 제압하지 못해 백년이 지나지 않아 그 세력이 강성해져 온 나라의 민중이 어육이 되고 국토가 초토화 되었던 사실들을 상기해 볼 때, 남명의 국방론은 더욱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국방에 관한 정치사상은 문무가 함께 나라에 있어야 함은 남명의 신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명은 「학기」에서 “임명할 관리의 재목과 재주를 변론하는 바의 그것이 어찌 특별하게도 문(문재) 뿐이겠는가. 사마가 교전을 장악하는 것은, 곧 사도가 거갑을 교습하는 바의 것은 바로 무이다. 이것은 문무가 합해져야 하나의 도가 되는 까닭이다.”44)라고 하여 연평 주씨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 문약에 흘러있던 조선조의 실정에서 나라의 인재를 구하는 과거시험에 문무를 함께 지닌 인물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남명은 “진사과에는 사부와 성률을 공부하나 사부속에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있지 않다. 비유하자면 ‘호인이 배를 부리고 월객이 말을 모는 것’과 같은데 그것의 잘하기를 구해도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45)라고 하여 당시 조선의 과거제도가 비록 문과와 무과가 있었지만 한사람의 재주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함께 종합적으로 시험보는 것이 아니었고, 문과 마저도 생원과와 진사과로 나눠졌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 전공별 인재채용이라는 긍정적 의미가 있지만 각 부서에 임명될 때는 소과(생원․진사과)의 출신별 구분이 없었다. 더구나 생원과는 그래도 유교경전을 시험치루니 그런대로 그 속에 담긴 정치와 경륜을 가질 수 있었지만 진사과는 시․부․송․책 등 문장과 시를 보고 인재를 뽑으니, 나라의 정치가 경륜이 없는 자의 손에 있게 되었음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사과 출신을 오히려 우월하게 여겼고46) 문과 출신이 실무행정에는 약해서 서리들에게 속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앙이나 지방의 수령들이 대부분 ‘무’를 몰라 외적의 침입에 속수무책인 경우는, 바로 북쪽 평야에서 말만 잘타는 북쪽 오랑캐(호)가 배를 부리고, 남쪽 바닷가에서 배만 잘부리는 남쪽 나라(월) 사람이 말을 타는 것과 같아서 제대로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비유하였다. 이것은 남명이 당시 사회정치제도와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실질적인 학문과 기술도 갖추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남명의 학문체계가 문무겸전과 함께 하학과 상달의 단계적인 발전과 함께 상호보완적인 점을 강조하여, 이를 무시한 상달위주의 당시 학문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유학의 실학적 일면과 관련된 문구 가운데 하나는 ‘하학이상달’47)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성리학의 위학체계인 ‘하학인사, 상달천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시 유학자들이 일용실천의 인사에 대한 하학 공부가 미흡하면서 ‘인심도심’과 ‘성명리기’ 그리고 ‘천리인욕’ 등의 상달 문자에 매달려 론구하는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고 비판하었다.48) 그리하여 남명은 경전과 다른 제자백가 및 여타 학문 즉 지식의 고명과 그 ‘경의실천’에 바탕을 두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내용과 그 사상적 경향이 바로 여기에 있고, 이것은 먼저 남명의 고제들인 덕계 오건, 내암, 동강, 한강 등의 남명이 준 글과 스승에 대한 존모의 기록49)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곧 그들의 학문적인 의지의 표명이고 후술하는 실학파의 계보 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수 허목의 학문계승과 함께 남명학파의 실학사상을 파악할 수 있겠다.
4. 남명의 제자와 사숙인의 실학사상 및
그 연원과 계승
1) 내암 정인홍의 의병과 ‘상소문’에서의 실학사상
이러한 남명의 학문사상을 이어 받은 래암은 유학의 민본적 사상에 입각하여 국내정치와 경제제도 개혁 등, 구체적인 혁신정책을 주장하고 시행했다는 점, 그리고 국방 외교에까지 자주성을 강조한 것은 실학사상의 요소로서 조선 후기 실학파들에 연결된다고 본다.
그리하여 내암은 ꡔ서경ꡕ의 ‘민중이 오직 나라의 근본’ 이라는 말과 ꡔ주역ꡕ ‘익’괘의 ‘임금을 비롯한 상층계급을 박하게 하고 하층계급인 민중을 후하게 해야한다’는 말 그리고 ‘맹자가 량혜왕이나 제선왕에게 누누이 권한 것도 ‘보민제산’의 이야기다’라는 말에 이어서 그는 “ꡔ서경ꡕ에 이르기를 ‘가히 두려워할 이 민중이 아니겠는가’ 와 ‘민중이 바위와 같다’는 말을 반성하고 다스리라.”50)고 하면서 남명과 마찬가지로 ‘민암’의 중요성을 말하는 유교 민본적 정치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즉, 내암은 앞서 잠시 거론한 ‘위민’, ‘애민’, ‘보민’, ‘휼민’ 등의 민본적 정치이념에서 출발한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것은 ꡔ서경ꡕ의 ‘민중이 오직 나라의 근본(민유방본)’이라는 데에서 출발한 그의 정치적 사상도 임금이 민중과 그 민심을 얻은 후에야 그 정권과 지위를 지킬 수 있고 나라가 편안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민중과 나라 그리고 임금이 하나이고 별개의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는 정권이 왕의 개인적 소유물이 아닌, 즉 전제적 왕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임금인 선조나 광해군과 직접 대면하여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군민일체와 민중의 호악와 우환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보민의 심정으로 민중을 위한 정치(위민정치)를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송대 이후 성리학의 정치사상에 바탕을 두었다기 보다는 공론에서 벗어나서 실제적인 사회사상과 연결시켜, 선진 유가사상의 근본적이고 민본적인 사회정치사상에 새롭게 다가가서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통해 당시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유교 사회정치사상의 르네쌍스’라고 할 수 있고 실학적 정치사상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암은 “국가의 일이란 일개 한 가문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51)라고 하여 국가와 왕위계승 그리고 그 통치행위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훈구외척의 발호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내암보다 75년 후에 태어난 중국의 황종희(1610-1695)가 ꡔ명이대방록ꡕ의 「원군」(군주론)편에 나오는 ‘감히 스스로 사사롭게 못하는(불감자사)’것과 ‘천하의 큰 공공성(천하지대공)’등의 용어를 연상하게 한다. 즉 그것은 철저한 민본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권력의 소재와 행사가 일 개인이나 일 가문에 있는 것이 이니라 다수 민중으로 부터 나왔기 때문에 공공성을 가진다52)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다.
물론 광해군의 등극 초기에 있었던 왕위에 대한 도전에서 보다 왕권강화적 측면에 내암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구체적으로 외척과 밀착된 소북일파와 보수적인 서인 훈구세력이 계속하여 왕권에 도전해 왔으므로 정권보위적인 성격이 강한 일면을 갖는다. 실제로 군권을 장악했으면서도 정치권력53)에서 일시적으로 소외된 보수적 사림파 세력에 의해 군사쿠데타가 주도되어 개혁적으로 정치를 이끌던 광해군이 물러나고 내암도 참형을 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내암의 왕권강화 이론은 다른 각도에서 즉, 민중을 위하여 보수반동세력으로 부터 왕권을 보위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의 사회정치사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외적인 정치불안 요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왕권강화 주장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보수세력이 그들의 리권의 영속화를 위해 그 세력의 가장 우두머리격인 왕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과는 분리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 정조의 왕권강화와 실학파인 다산의 역할을 참고로 할 수 있다.
또한 내암의 왕권강화 사상은 보수적 사림파의 주자학적인 ‘천리’에 근거한 군신관계의 절대성이나, 그리고 인조반정 이후 수구적 정치지배 체제가 계속되면서 예학적 질서와 주자학의 이데올로기화에서 나타난 임금과 양반귀족 지배체제의 보편타당성과 정당성을 강변하고자 한 보수적 사회정치사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이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정치사상과 진보적 사림파와 실학자들의 학문사상이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남명의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과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열망은, 성격에 있어서도 그와 비슷하고 실천을 중시한 내암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리하여 내암은 「사의장봉사」에서 “오늘날 형세는 사람이 중병에 걸린 것과 같다. 신이 듣기로 앞선 유학자인 진덕수54)가 말한대로 ‘안으로 벼슬아치들의 도적질(의관지도)이 있은 연후에, 바깥으로 무기를 든 외적의 침구(간과지구)가 있다’고 했다. 안에 사사로운 악한 도적이 있기 때문에 밖으로는 인접한 외적에 대한 근심으로 협공하니 국가를 보전할 수 없는 위태로움이 있다”55)라고 하여 먼저 당시의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른 것은 무엇보다도 나라안이 부패하여 밖으로의 외적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데 있다고 보았다. 관군이 연전연패하던 시점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58세의 나이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약 3,0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빼앗긴 성과 주둔지를 습격하여 탈환하는 교란작전을 펴고 연전연승하고 있던 때라, 그의 상소문에 나온 조정에 대한 질타와 시정을 위한 비판은 말만이 아닌 절실하고 실천성과 중의가 있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내암은 이어서 당시 조정대신들의 정치적 모습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비판한다. 그는 “편당을 좋아하고 정직을 미워하며 청절을 천하게 여기고 권세와 이익에 따르고, 명의를 가볍게 여기고 관작과 녹봉만을 중시하여 어떻게 하면 내 집과 내 몸이 이로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정에 있는 자는 량신에만 능하고, 나라를 이롭게하는 방안에는 어두우며 거착할 때도 오직 들리는 소문의 유순함 만을 듣고 그 재능의 당부는 묻지 않으며, 단지 한결같이 자신의 호악에만 따르고 공론의 소재가 어디 있는지는 살피지도 않는다. 대간은 사사로운 감정을 풀기에는 급급하고 공의가 있는 줄을 모르며, 장수가 된 자는 백성에 대한 형벌과 살해에는 용감하면서, 적에 대한 의분도 없고 겁부터 집어먹고, 수령이 된 자는 오직 권력자에게 아부할 줄만 알면서 민중의 일은 버려두고 도외시해 버리고 있다. 관의 창고가 개인의 창고가 되어 토전을 모으고 장획을 사들이는 것을 기탄없이 하며, 백성의 굶주림은 보살피지 않고 사사롭게 개인만 살찌우면서도, 누구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서, 먹고 마심이 날로 심하여 음식을 낭비하고 절약할 줄 모르며, 변장의 탐도함은 나날이 더하여 군졸을 괴롭힘이 극에 달하여 어육과 같이 여긴다.”56)라고 하면서 바로 이어, 무릇 이러한 무리들이 나라 안에 가득차서 서로 충돌하니 그 병이 심복중에 있어서 하루하루가 더하게 큰 나무의 뿌리가 벌레먹은 것과 같이 되어 쓰러질 날이 가까이 온 것같이 되었다고 격렬하게 당시의 사회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개탄한다.
특히 ‘량신’, 즉 수기에만 치중해서 언어로만 이기심성과 인의도덕을 일컫던 무리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능력이 없는 자가 그 백성이 낸 세금으로 치부하면서 나라의 관직을 더럽힌다는 것은 반유교정치적 행위이며, 바로 이들 조정의 관리나 지방의 관리나 장수가 바로 의관을 갖추어 입은 도적이고 사사롭고 악한 오랑캐와 다름아닌 것으로 보았다. 당시 민중의 참상은 대개 난을 피해 산골짜기에 몰려 들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가까스로 겨우 농사를 지었다 하더라도 전쟁에 쑥밭이 된 형편이었다.또 그 보다 더 억울한 것은 당시 민중을 보호하고 보살펴야 할 장수와 지방 수령이 오히려 가렴주구하고 심지어 왜놈보다 더 악독하게 자기나라 민중을 무참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왔다는 명나라 군사가 한술 더 떴다.
이러한 때도 왕실․훈구파와 척신 그리고 보수적 사림파의 일부는 의병에는 관심도 없었고, 관직을 가진 자는 오히려 지방의 벼슬을 자원하여 민중을 탐학하고도 뒤에 살아남아 인조반정(궁정 쿠데타)를 주도하고 그리하여 정권을 잡자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를 날조왜곡하고 견강부회하여57) 지금도 국난극복의 뛰어난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그와 반대의 위치에 우뚝 선 내암 같은 인물은 오히려 역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남명학파의 잔여세력들은 학파연원을 바꾸고 내암의 관련기사나 이름을 문집들에서 삭제하기에 바빴다. 또한 그들은 일찍부터 내암과 절교하였다고 혐의부인에 급급했던 사실과 아직도 이러한 풍조가 남아, 문자를 안다는 학자마저도 학문의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있는 것을 왕왕 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내암의 올바르며 진정한 학문사상과 실학정신을 파악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2) 동강 김우옹의 『속자치통감강목』 편찬과 실학적 력사의식
동강은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남명의 외손서로서 ꡔ속자치통감강목ꡕ58)을 찬수를 시작하여 6년만인 그의 56세 때 그 해 3월 말에 끝마쳤다. 이는 사마광의 ꡔ자치통감ꡕ59)에 이은 그 시대를 편년체 역사서로서 역사를 중시한 동강의 실학적인 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조에서 유교경전과 성리학에 대한 강조와 연구는 과거와 관련되어서 매우 성한 반면 역사서와 역사의식에 대한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특히 조선초기의 비록 대개 관주도이긴 하지만 의욕적인 역사서적 편찬이 있었는 데 비하여60) 중기에 올수록 사림파가 성리학을 내세우면서 이러한 현상은 심화되었다. 역사는 ‘거울(감)’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정치에 있어서 어떤 기준과 비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즉 과거 역사의 거울에 현재의 사건(실)을 비추어 경계하고 참고한다는 ‘감고계금’의 감계주의가 유교 력사철학이다.
동강의 이 저술이 활자화 된 것은 영조 47년(신묘;1771년)에 동궁(정조)의 명으로 규장각에서 인쇄하게 되었다. 그 연유는 당시 동궁이 명나라 유자인 상로가 찬한 바 있는 성화본 ꡔ속자치통감강목ꡕ61)을 일찌기 신료와 함께 그 ‘권형지불칭처’를 강론하는 석상에서 함께 입시한 순암 안정복(1712-1791)62)이 이뢰기를 “일찌기 선정신 김우옹이 찬한 ꡔ속강목ꡕ의 초고가 신이 지금 말한 바의 적당한 것이 있다”고 하니, 동궁이 즉시 명령하기를 드려와 열람하도록 하니, 크게 포장되고 이어 동궁과 그 신료들이 이를 교정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서연에서 진강하게 되었다.63) 또한 그 후 사림들이 창의를 시작하여 청천서원에서 순조 8년(무진;1808년) 8월로 이 때 36권 20책으로 간행64)하였다.
성호는 역사를 비판과 고증적인 입장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작자(작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했다. 이와 같은 력사관은 유형원에서도 일맥 통하는 것이었고, 다산의 현실비판과 주례적 인식(정치제도와 개혁)에서도 그 일단을 찾아볼 수 있다. 성호의 이러한 사관은 안정복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었다. 물론 이 밖에도 당시의 실학자 가운데는 역사에 대한 의식과 그 비판적인 입장이 없던 것은 아니다.
안정복은 경학과 시문에 결코 소홀한 것이 아니었지만, 역사 서술을 통해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유교의 경전은 모두 역사일 따름이다(육경개사야)”라고 갈파한 청나라 장학성의 주장과도 같이 경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역사의식이 전진되어 자국의 역사를 재편성해 본 것이다. 서술의 대법은 비록 주희의 강목사관에 의한 명분에 두었던 것이었으니, 바로 동강에서 안정복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안정복이 역사 찬술의 기준을 주자의 사관에 근거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젊어서 주자학에 심취되어 있었음은 전술한 바이지만, 당시의 우리 학계가 온통 주자학적 세계이었고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춘추적 대의명분론이 강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동강과 안정복도 그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동강의 이러한 근본주의적이고 상고주의적인 역사의식은 태조 리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부묘문제에 그대로 나타난다. 당시 조정 신하들의 중론은 부묘를 찬성하며 신덕왕후가 훙하였을 때 명나라 천자가 사조하였으니 왕후로 성립하는 것이니 불부하는 것은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강은 신덕은 태조의 차비로서 ‘무이적지의’라는 ꡔ춘추ꡕ의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천자가 인정 안한다고 해서 제후의 정식부인으로 인정 안된다는 것은 ꡔ춘추ꡕ에서 혜공과 중자의 고사를 상고해 볼 때 그렇지만도 아닌란 것을 내세우며 끝까지 주장하고 이것이 가납되지 않자 체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65)
이와 같이 옳다고 여기면 중론에 영합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조정에 있으면 경연을 통해 직접 왕에게 극진히 간쟁하였으며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위란시에 많은 위문․접반사로 활약하고 수많은 국가의 조서가 동강의 지은 바 되는 등, 이러한 여러가지로 미루어 당대의 육지66)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동강의 역사의식은 바로 실학자들의 역사철학에 계승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허목의 『동사』『거우록』등은 이익의『성호사설』과『곽우록』을 이어 안정복의 『동사강목』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강의 력사의식과 아울러 민본적인 경세론으로서의 정치사상은 실학사상과 통하며 정치권력에 대한 역사철학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뢰기를, 황천이 민중을 위하여 임금을 세운 것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사람이 천하를 다스린 데 있을 따름입니다. 인군이 이 뜻을 모르고 임금의 자리에 앉아 열락을 도모하여 게으르고 삶에만 골몰한다면 위험하고 망하는 화가 이를 따름입니다”67)라고 하면서 옛날의 제왕들의 긍업계구하는 것과 폭군들인 걸․주․유․려왕이 이 뜻을 모르고 행한 여러 악행들을 열거하여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유교의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자주 강조되는 부분이다. 군왕에게 이러한 경고는 원칙론으로서 당연한 주장이고 진정한 간언이다. 하지만 진충한 간언이란 자칫하면 그것을 아뢰는 사람이 미움을 사게되고 죽음에도 노출될 수 있는 것으로 미묘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사상과 그 실천적 태도는 바로 남명학파 인물의 특징이고 실학정신과 바로 통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은 현실적인 경세치용에 몰두했다. 경학을 중심으로 하되 그 경학이 시사하는 그 세계를 위해서 많은 개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새혁론에는 합리적․실증적인 배경이 필수로 되었다. 현실적인 문제를 역사적인 현실로 포착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실학파 중에서도 근기학파에 의해서 주로 주창되었다. 이익을 중심으로 한 그계열의 학파의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역사의식은 이 학파에서는 중요한 입장이 되기도 했다. 중래와 같은 역사의 학습․이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체계 있게 재편성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치사와 찬사의 사관이 나왔고 이에 의거해서 한국사의 새 모습을 찾고자 했다.68) 조선후기의 실학파 학자들은 역사의식이 뚜렷했다. 유형원․이익․정약용을 계보로 하는 실학자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주변의 일련의 실학자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당시의 학문적 성향이 경학을 중추로 한 백과전서식인 고구에 있었다는 것에서도 그 일단을 찾아볼 수 있지만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광구하기 위한 전제에서 오는 자기 역사의 이해와 그 정리에서 더욱 찾아볼 수 있다.
3) 한강 정구와 미수 허목의 학문경향 및 그 연원
조선 후기 실학자의 사상적인 연원과 영남학파와 근기학파의 연결과 그 표상으로서 미수 허목(1595-1682)은 한강의 말년제자이다. 잘알다시피 조선 후기 ‘경세치용’ 중심의 실학파인 근기학파의 개산비조인 미수 허목은 용주 조경(1586-1669)과 함께 처음에는 한강의 제자인 모계 문위1554-1632)69)에게 사사하다가 문위의 추천으로 한강에게 급문하였다.70) 앞서 살펴본대로 한강은 유년시절부터 천자가 호매하고 체질적으로 남명과 유사하여, 남명의 지려명행과 출처의리를 본받고, 학문의 태도나 수양에 있어서는 퇴계를 본받았다. 학문연구의 대상이 폭넓어 성리학은 물론 력사․문학․지리․의학․병법․예학․인물․물산 등의 방면에 밝아,71) 이 또한 퇴계보다는 남명의 학문사상적 색채와 더욱 유사하다. 한강은 이러한 학문적 성격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 「회연급문제현록」에 의하면 341인의 제자가 있다.
다시 말해서 미수 허목은 남명학파의 훈습이 배인 강우지역과 인물들에게서 배우고 특히 남명의 제자인 한강의 많은 제자 중에서 가장 후배였던 그가 후일 한강의 학통의 상속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명의 실학적 학풍을 경기지방으로 가져와서 조선 후기 근기실학파를 형성시켰다. 미수 허목이 위로 ‘남명의 학풍과 퇴계의 학통’을 물려받은 한강을 직접 이어 아래로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의 경세치용적인 학문사상을 발전시키게 한 그 사숙인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조선 중기 영남의 성리학과 실학적 학문풍토에서 조선 후기 근기의 실학에 가교자적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할 것이다.
그리고 허목과 조경는 다같이 래암과 마찬가지로 산림(유일)출신으로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허목은 또한 고향이 근기 지방인 경기도 련천이지만 16세 때(광해군 2년:1610년) 부친 허교가 고령현감으로 가자 이 때부터 경상우도의 남명학파 제현들과 배움과 교류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허목은 23세 때 부친이 거창현감으로 갔을 때 한강이 죽기 3년전에 찾아가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년보에 나온다. 그리고 그가 25세 때 부친이 다시 산음(현 산청)현감으로 나아가자 더욱 남명학파와 가까워졌을 것이다. 또한 허목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중제의 처가 곳인 경상도 의녕에 피난 가서(그의 나이 42세 때인 1636년 4월 12일 도착) 10년을 생활하고 연천에 돌아와서(51세 때인 1645년 9월)도 모친이 의령에 남아있어 수시로 의령을 방문하며 경상우도 전역을 유여하였 다.
또한 그는 이러한 경상우도와 남명학파의 관계로 인하여 후일 남명의 신도비도 짓는다. 그가 유일로 후에 조정에 나가 벼슬이 정승에 이르고 당시 남인의 영수에 이르러 청남으로서 반대당인 서인(노론)의 송시열의 치죄에 준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조 당시 정철 등에 대한 내암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뿐만아니라 래암의 고제자였던 동계 정온(1569-1641)의 손자 정기윤이 허목의 막내사위가 된다.72) 조선조에 양반계층에서 혼인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한 남녀의 만남이나 인척의 의미보다도 두 가문 전체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크다. 더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같은 당색이나 문벌을 가진 가문끼리 혼인할 뿐만아니라, 이들이 당시 단순한 양반가문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학자관료 집안이었다는 것을 종합해 볼 때, 비록 허목의 당색이 남인이었다고 하지만 그 학풍과 사제계승 그리고 상호통교한 쪽은 경상우도의 퇴계학파보다는 오히려 남명학파에 더 밀접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미수의 학통은 인조반정 후에 기록되어 현존하는 문헌상에서 언표한 것에서만 볼 때는 일반적으로 퇴계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 후의 퇴계학파는 지역적으로 보아, 인조반정 후에 살아남은 잔여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에 속하는 남인은 영남학파와 근기학파로 나누어지거니와 허목은 바로 근기 실학파의 성립에 기초 구실을 한 사람이다. 일찍이 정조 때 명재상이자 다산 정약용 등 근기남인 실학자들의 후원인이라 할 수 있는 번암 채제공73)이 성호 이익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우리의 학문은 원래 계통이 서 있다. 퇴계는 우리 나라의 공자로서 그 도를 한강에게 전해주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에세 전해주었는데, 성호는 미수를 사숙한 분으로, 미수를 통하여 퇴계의 학통에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해 미수는 위로 퇴계의 학문을 물려 받아, 아래로 성호의 실학적 학문으로 발전적 계승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나74), 앞서 밝혔듯이 그는 외형적인 학통은 퇴계학파에 속할지 모르나 그의 학문적 영향과 학문경향을 살펴보면 오히려 남명학파에 가까움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의 발생과 그 학문적 풍토와 실질적 내용을 보면 후기에 있어서의 벌열정치의 출현과 상품화폐경제의 새로운 작용 등 정치 경제관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지만, 또한 사상사 자체의 내재적 전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과 후기의 실학을 본래 무관계한 것으로 완전히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 그렇지 않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관념화, 형식화되어 스스로 현실에 대처할 능력이 없게 되자 관념세계로부터 현실세계로, 내면세계로부터 외면세계로 눈을 돌리면서 자기 극복을 통하여 발전적으로 전개된 것이 곧 조선 후기의 실학이다. 이런 점에서 미수의 실학사적 위치는 그 중요함을 거듭 느끼게 된다.75) 그러나 잘알다시피 퇴계학이 리기심성지학에 매몰되고 이단배척에 앞장서서 당시 남명으로부터 오히려 비실용적인 공리공담으로서 ‘기세도명’을 하는 학문 풍토에 장로로서 꾸짖지 못한다고 비판을 받았다는 점과 남명의 학풍은 바로 근기 실학자들의 학문 연구 경향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한강은 학문의 영역은 앞서 살펴본대로 대단히 넓고도 실용적이다. 그의 이러한 학풍은 허목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사고를 더욱 현실에 밀착시키고 그 학문적 시야를 더욱 열어주었다. 허목은 사회정책․천문․지리․동식물․산천․국학 등 여러분야에 박학하였다. 그리고 허목은 우리나라 역사인 ꡔ동사ꡕ를 지어 당시 중국사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문 풍토에서 국사를 짓는 등 박학과 존명사대주의에서 주체적인 사상을 중시하여 후기 실학파와 직접 접목 되는 인물이었고76) 이익에게 주는 사상적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즉 우리 나라의 역사․지리․인물․경제 방면에 관한 학문적 관심을 크게 높여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허목은 스스로 “고문과 고서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도처에 보인다. 이것은 바로 남명이 특히 ‘고문인 좌류문에 능통하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허목의 상고주의와 감고계금적인 역사철학은 중세에 대한 부정이며, 그것은 곧 관념화된 당시의 주자 성리학적 정신풍토의 부정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주자를 존신하고 주자의 학풍을 답습한 퇴계학풍과 율곡학파의 후기 학풍에서 그 권위주의가 정점에 도달한 17세기 당시 그 권위의 구축과 그 위광으로 백호 윤휴나 서계 박세당과 같이 주자의 경전해석과 달리한 것에 대해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산림을 자처하면서도 훈척파를 후원 합리화 한 송시열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한 상고주의와 감계주의의 실학사상은 바로 성호와 안정복에게 이어지고 다산의 녹암 권철신의 묘갈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음날 실학사상의 발달에 큰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적에서 주로 오경을 좋아하고 송원명 시대 유학자들이 중시해 오던 사서, 특히 정주의 장구주석과 『심경』과 『근사록』 등의 성리학 서적들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오경을 좋아한다고 하여 한대의 훈고학나 청대의 고증학적 학문경향에 쏠린 일을 볼 수 없었다.77) 이는 바로 그가 성리학보다는 실천과 학문의 범위가 선진유학과 일맥상통하는 남명학파의 실학적 학풍, 즉 민본과 실용에 중심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수 허목은 「자서」라는 글이 있는데, 자기의 평생 중요한 경력을 적어 놓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거기에 당시 시국에 관한 자기의 정치 사회적 견해를 몇가지 열거해 두었다. 그 중에서도 아문과 둔전의 혁파 문제, 그리고 시전의 정리 문제는 본래 그의 상소문을 그대로 옮기다시피 하여 그 문제의 심각성과 자기 견해의 타당성을 되풀이 해서 피력하였고, 그 밖에 체찰부 문제78), 무사에 대한 만인과 문제, 호포 문제 등에 관해 거듭하여 자신의 소신을 말해놓았다. 이는 선조 초기에 무진년의 구언에 대한 남명과 퇴계의 상소문이 그 성격상 매우 달랐고,79) 그 내용상 미수의 실학적 시폐광정의 상소문은 남명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4) 경세치용 학파와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적 연원
성호 리익(1682-1763)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실학파들은 대개 유교경전 해석에 있어서 정주의 해석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고 나아가 비판적이기 까지 하였다.80) 바로 이러한 새로운 경전 해석 실학사상을 배태하는 온상이었다.
성호는 1680년 로론의 쿠테타(경신대출척)로 정계에서 밀려나 유배당하는 부친 리하진은 당시 함께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거두인 허목과 같은 근기남인이다. 그런데 성호의 학문적 연원과 그 성격이 같은 미수와 그 스승 한강의 경세치용적 학풍에 대해서는, 그것이 퇴계에서 유래한다는 근기남인들 자신의 표방 외에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81) 오히려 앞서 법가와 기질론쟁을 말하면서 인용한 리식의 글에서도 한강은 남명연원이 확실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실학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는 다산은 16세 때 성호의 유고에 접하고 평생 사숙한다. 같은 경세치용학파로서 현실정치에 있어서 법과 제도의 개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실학파의 거두인 성호와 그 집대성자인 다산은 바로 남명의 경세사상에서 실학적 요소를 이어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내용상의 유사점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사회경제 문제에 있어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남명과 래암의 ‘서리망국론’과 성호의 ‘장리론’ 그리고 다산의 ‘향리론’은 그 대표적인 례이다. 이들은 모두 법도 오래가면 폐가 생기고 폐는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본 일종의 변법사상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부국강병책에서 정전론에서 출발한 균전적인 ‘한전론’,‘려전론’과 국방책에 있어서 병농일치적의 ‘부병제’에 관심을 두고 문무를 국가에서 비중을 균등하게 두어야 한다는 주장82)은 남명과 래암 및 성호와 다산이 일치하고 있고 그 론조도 매우 유사하다. 즉 성호는 「론병제」에서 국가경비와 군역 그리고 서리의 농간을 지적한 다음 무과에서는 무경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무장들이 이론적인 병법공부도 철저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83) 그리고 그는 “이른바 ‘무를 그치고 문을 닦아 밝힌다’84)는 것은 전쟁을 치루고 난뒤 무를 조금 억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문과 무를 아울러 쓰는 것이 장구하게 하는 방법”85)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자가 문교를 드리웠으므로 륜리강상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태공이 병법을 전하였으므로 화란이 그를 얻어서 평정된다. 무략이 갖춰지지 않으면 비록 례락성명의 찬연함이 있을지라도 하루아침도 존속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만일 무교를 숭앙권장하고 일으켜 부흥시키려면 반드시 무교의 근본을 높혀야 할 것이니, 무성지묘를 어찌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성왕의 사당을 비록 여러 고을에 다 세울 수는 없을지언정, 마땅히 먼저 경사에 세우고 옛날의 명장86)과 우리나라의 김유신․강감찬․리순신을 배향하고 무경박사를 두어 수시로 익히게 한다면 거의 (의도한 바를) 얻을 것이다.”87)라고 하였다. 이것은 즉, 무학에 있어서도 당시 유학의 대학(성균관)과 마찬가지 형식을 갖추고, 즉 무묘88)를 건립하고 무학을 창설하자는 것89)은 요즈음의 사관학교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문무겸전을 통한 국방책은 앞서 살핀 남명의 견해와 일치한다. 남명은 이러한 학문적 견해와 상소문에서만 문무겸전과 실질적 국방책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 왜란을 예측하고 제자들에게 그 대책을 강구하는 시험문제도 제출하였다.90) 이렇게 광범위한 조식의 학문적 견해에서 비롯된 병진공부 대책을 시험보는 것은 그 후 임진왜란 때 57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것은 바로 남명의 제자문도로서 의병장이 된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의병장들과는 달리 전법에 능하고 그 규모에 있어서도 위세가 당당하였고 관군보다 더 용감하게 투쟁하여 거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이러한 구체적인 결과는 남명학파의 국방외교론이 사회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그의 학문이 실천적이며, 즉 실학의 면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 모습이 률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라는 논의보다 더 의의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률곡의 주장은 과연 그가 말한 것인지도 의문91)이고, 또한 후세에 실학자 리익은 ꡔ성호사설ꡕ,「예양병」에서 십만의 군사를 양병하게 되었을 때 국가재정과 국방비 부담과 군역 때문에 오는 민중의 고통을 말하고 그 현실성을 의문시하면서, 꼭 십만이 있어야 외적을 방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면에 남명은 ‘정전’과 ‘군부’를 말하면서 현실성 있는 균전제와 부병제적인 부국강병책을 논하고 있다.92)
그리고 조선시대 공물93)제도는 민중이 그 지방의 산물을 중앙의 조정에 상납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중기 이후로 이 공물 상납이 민중에게 가장 폐해로 나타났다. 이 공물을 바치지 못하여 류맹이 되면 그 친척이나 이웃이 부담하는 ‘족징’,‘린징’까지 등장하는 것을 ‘유호칙유공물’과 같이 생각해 보면 일종의 호구세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각 왕조가 멸망하는 직접 원인은 말기에 가면서 왕실과 귀족의 부패타락과 사치향략 그리고 혹은 전쟁으로 인하여 재정이 파탄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과다하게 민중에게서 착취하자 민심과 민의의 이탈94)과 봉기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남명학파의 경세사상에서 공물 폐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공리적 사상에 바탕을 두었기에 더욱 절실하였고 후세 실학자들의 시의구폐적 인 경세사상 즉 실학사상과 그대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명종 시대의 암흑기에 퇴계는 관학파였고 남명은 재야학파였다. 이익은 당시 조정의 관리가 아니라 과거를 포기한 재야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학파의 그 사상적 연원을 이제까지 많은 학자들이 퇴계와 률곡에만 매달린 것을 다시 되돌아 보고 남명학파도 함께 거론되어야 진정한 실학파의 학문연원과 그 경향을 옳게 논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조선조 후기 실학의 계보에 있어서 태두로 여겨지는 경세치용 학파의 성호 리익이 숙종 시대 17세기 말 근기남인의 일파였으므로, 남인에 착안하여 그를 퇴계학풍의 연원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성호는 「장리론」에서 “백주에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을 강도라 한다. 지금 민중을 다스리는 자는 공공연하게 민중의 재물을 약탈함이 강도보다 더 심하다.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95)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산도 「감사론」에서 진정한 도둑을 감사로 보고 있다. 또한 그도 “아아, 옛날 서리의 직책에 있으면서 옛날 대부의 권한을 잡고 있는 자가 향리이다. 그리하여 로나라의 삼환96) 과 진나라의 륙경97)과 정나라의 칠목98) 같은 자는 그 나라가 폐허가 되기 전에는 그 악함을 그치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 대대로 세습되는 향리도 또한 이와 같이 그만두지 않는다”99)라고 하여 그는 향리의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고 하강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이어서 그는 “수령이란 자는 서리와 더불어 장사아치처럼 그 리를 분배하고,서리와 더불어 도둑처럼 그 장물을 나눈다. 아전과 더불어 민중을 짓밟아 어육이 되고 흩어지는 데도 그들에게 위세를 부린다. 먼저 그 강령이나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100)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남명과 래암이 서리의 악폐에 통렬하게 비판한 모습과 내용에서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익은 그의「퇴계남명」론에서 “황금계(준량)가 퇴계에세 상서하여, 남명이 의리에 통달하지 못한 점이 어디에 있느냐고 논하자, 퇴계는 답하기를 ‘이 사람들은 흔히 노장에 병들어 우리 유학에 대해서는 깊지 못한데, 어찌 그 통달하지 못함을 괴이히 여기겠는가? 요는 그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당시 부제학 개암 김우굉이 이 서한을 얻어 보고 크게 놀라서 마침내 퇴계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남명 선생은 우도에서, 선생은 좌도에서, 해와 달같은 존재로 다 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고 계시니, 선비의 기습이 일변하여 도에 이를 수 있음이 마치 하에서 물 마시고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 비록 갱갱한 소인일지라도 말이 미덥고 행실이 과감하다. 남명 선생으로 말하면 더욱이 아래에서 부터 배워 올라가는 것을 주로 삼아서, 항상 말씀하기를 “학이라 하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데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를 힘쓰지 않는다면 바로 인사상에서 천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 끝내 소득이 없을 것이다” 하여 한 마디 말도 허무에 가까운 점이 없었는데 지금 말씀하기를 “로장이 병이 되어 학문이 깊지 못하다” 하시니, 문하의 소자는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학문이란 인륜의 일용행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마음을 보존하여 살피고 또 살펴서 그 일에 익숙한 뒤라야 실지 소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감히 여쭈노니 우리의 학문이 이밖에 어디 있는가? 지금 선생께서 거리낌 없이 저척하시어, 심지어는 이단에 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시니, 아마도 선생의 크신 도량에 손상될 듯하다. 원컨대 개유를 주시어 심한 의혹을 풀어주소서’라고 하자, 퇴계는 답하기를. ‘나는 모를 너무도 앙모하는 처지인데 어찌 감히 기탄없이 비난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입에 넘치는 예찬을 잘 못하는 까닭으로 하유의 평과 미순의 논이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한강은 말하기를 ‘남명이 어찌 동방에 재생할 인걸이겠는가?’ 하였고, 율곡은 말하기를 ‘세도를 만회한 공은 아마도 동방 제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였거니와, 그 천 길의 벽이 우뚝이 서 있는 기상 같은 것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 혹자는 퇴계의 평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르기를 ‘유가의 유가 아니요 바로 처사 중에 협기가 있는 자이다’ 하였으니, 역시 가소로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니 그 뇌룡101)․계복102) 등의 문자를 살펴보면 그 공력을 들임이 각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찍이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다만 그 혼수를 깨우치는 데 있을 따름이니 이미 눈을 떴을 경우에는 저절로 천지와 일월을 보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 한 마디 말은 초학의 정침이 될 만하다”103)고 한 것을 볼 때 성호의 남명학파에 대한 실학적 경향과 그 훈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익은「하송정」에서도 “송정 하수일의 자는 태이이니, 각재 항의 조카이다. 각재란 이는 남명의 문인인데 송정이 그에게 수학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겸재 하홍도가 또 송정에게 배우게 되어 일찍이 수곡정사에서 모시고 자는데, 닭이 울자 송정은 제자를 깨워 일으키며 말하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을 하는 자는 순 임금의 무리라 하였는데, 옛날에 남명 선생이 깊이 그 의지를 체득하였고, 우리 각재는 남명에게 친자하여 그 도를 들었었다. 그래서 알지 못했을 적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알고서는 일찍이 이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중략) 나 같은 불초가 그 학에 유염하고 사숙하여 종신토록 잊지 못하는데, 너희들은 내 문에서 나왔으니 비록 중대한 책임은 지지 못한다 할지라도 또한 깊이 여등의 힘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불의에 빠져서 네 소생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104) 하였다.
남명학파의 역사인식에 투철한 학문경향은 바로 성호에 의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호가 사숙한 첩의 소생인 만호 신무(1625-1699)의 전기를 쓴데는, 당시의 관례에서는 이미 벗어나 신분계층의 문제를 타파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보민편』에 맺힌 국사의 시정에서 민생의 고를 건지자는 신무의 경국제민의 이념을 흠모한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선조에서 역사적 현실을 비판하는 태도는 곧 유형원에서 이어받은 것으로서 그의 『반계수록서』,『반계유선생유저서』,『반계유선생전』등 삼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유형원은 이원진의 사위로서 여주 이씨가의 실학적 학풍을 계승하여, 그의 경세론은 다시 성호를 통하여 이씨 문중으로 이어지게 되었음은 유형원의 저작 중『동사조례』가 있었다. 또한 그의 『반계수록』이 조선의 일체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논하는데서 역사적인 인식에 치중하였으며, 성호의 학문이 역사적 인식 그것도 당시 조선의 현실사회의 비판에 직결된다고 본다. 성호는『성호사설』에 산재한 여러 가지 박학한 논의와 이것의 체계적 추상화로써의 『곽우록』의 형성하는 것을 보면, 성호는 정신적으로는『반계수록』보다 더욱 집약화된 논의가 제시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성호 스스로 그 문하제자인 『안정복』에게 『동사강목』의 찬술을 위촉하는 것105)과, 박은식과 신채호 한테로 이어지는 새로운 학문경향, 즉 실학과 양명학의 수용도 남명학파의 그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명과 그 제자사숙인들이 학문사상이 비록 한계는 있고 일정한 부분이지만 실학적인 학문내용과 사상적 경향을 가지는 것은 앞서 실핀대로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성리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익과 정약용도 마찬가지로 유학 내에서의 진정한 성리학은 정학으로 볼려고 한다. 다만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이미 남명의 지적대로 유학의 근본 종지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본연의 자세로 유학의 르네상스적 상고반본에 근거하고 일용행사의 경세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4. 결론
일찍이 성호는 “경서를 궁구함은 장차 치용하기 위함이다. 경전을 해석하면서 천하만사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갖 책을 읽는데 능할 뿐이다”106)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퇴계의 글은 본래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정사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에 법령이 해이해지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기회였다. 리기심성의 이론 다음에 시무의 큰 것을 대략 말하여 5년이나 7년 후의 효과를 기대하여야 바야흐로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107)라고 하였다. 또한 북송의 왕안석의 ‘도재정사’나 청의 장학성의 ‘육경개사’의 담론을 새롭게 여길 때 실학사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참고할 때 남명학파와 조선 후기 경세치용학파의 실학적 학문사상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또한 남명학파의 실학사상에서 우리는 유학에서 민본을 바탕으로 한 사회정치사상은 오늘의 혼란된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더욱 반성적인 고찰과 실천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즉 그것은 현재 한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치구호만 남발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를 실천하지 않는 정치가들과 서구의 민주주의만 정치이론으로 유일하게 알고있는 ‘부분적인 지식인들(지식 수입상들)’에게 새로운 과제와 질문 그리고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유교의 근본사상은 ‘수기 이후에 치인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하학이 상달’인 것으로 상호보완의 성격이다. 『대학』‘격치성정’과 ‘수제치평’을 말하고 있으니,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국가사회와 통치자와 백성 등 상하계층이 더불어 잘 살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성인이다, 현인이다” 하는 것도 바로 민중과 연관된 구체적 정치현실을 개선하고 이상사회를 실현한 사람 또는 실현하려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도 완성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과 그 소속학파가 하는 이론이나 학문 만이 중도요 진리이고 나머지 다른 사람이나 자신과는 다른 이론을 하는 사람은 치우친 것이거나 이단으로 몰아 부친다면, 바로 그 자신의 이론이란 학문의 영역을 떠나 허위의식화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의 실학사상이란 바로 그러한 학문적 경향을 비판하고 이미 교조사변화한 성리학을 반성하고 일용학문과 이를 위한 박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본 남명과 그 학파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왜곡된 사회정치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실학적 학문경향과 사상적 내용 그리고 투철한 역사인식은, 퇴계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양명학의 하학이상달적인 지행합일의 사상에서 보이는 실천중시 사상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각주)-----------------
1) ‘유’의 뜻은 ‘유’, ‘유’, ‘윤’ 혹은 ‘수인’, ‘인수‘의 뜻을 가진다고 한다.
2) 중국 북송시대 인종 때의 사람으로 이름은 포증, 당시 수도였던 개봉부의 부윤.
3)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낙이낙.
4) 졸문, 「동강 김우옹의 학문과 사상 연구」,『남명학연구논총』제2집 소수, 남명학연구원, 1992. pp.433-513. 참조
5) 그는 13세때 조식의 고제자인 오건(호는 덕계 1521-1574)에게서 배우고 명종 20년 과거장에 나갔으나 당시 정국의 부패상에 실망하여 포기하고, 다음 해에 남명의 문하에 들어와 그 학풍에 몰두하여 래암과 함께 남명 제자가 되었다. 리기론 등 공론을 싫어하고 지방관으로서 치적을 올리고 임진왜란 때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고문에 능하여 학문 범위가 넓어 유학 일반은 물론 례학․풍수․병진․의약․산수에 능하여 남명 문도의 전형적 모습으로 남명 조식의 제자 가운데 래암 정인홍과 쌍벽을 이룬다. 그런데 정구를 퇴계 문도로만 취급하는 것은 후세 남인들의 아전인수적 태도이다.
6) 오이환,「남명집판본고 1」,『한국사상사학』 1, 한국사상사학회, 1987.
ꠏꠏꠏꠏꠏ,「남명집판본고 2」, 『동양철학』 1 한국동양철학회, 1990.
ꠏꠏꠏꠏꠏ,「남명학자료총간 해제 서론」,『남명학연구론총』1, 남명학연구원, 1988.
ꠏꠏꠏꠏꠏ,「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차산안진오박사회갑기념동양학논총』, 간행위원회, 1990.
ꠏꠏꠏꠏꠏ,「남명집 임술본의 훼판」『남명학연구』3,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3. 참조.
7) 특히 세조의 쿠테타 이후 성종시대 까지 잦은 정변으로인하여 ‘공신전’이 남발되어 많은 일반 공전이 회수되어 ‘세습전’으로 되면서 량인은 전호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세조의 치세를 개혁정치로 평가하는 것은 민중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8) 졸저,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pp.37-71. 참조.
9) 천관우,「한국사의 재발견」,ꡔ력사학보ꡕ2.3호,1952년.
한우근,「리조후기의 사회와 사상」,ꡔ진단학보ꡕ19호,1958 참조.
10) 정인보,ꡔ담원국학산고ꡕ,문교사,1955.
11) BC.155년 서한 경제의 아들 하간헌왕 류덕이 학문을 좋아하고 옛 서적을 수집하여 장서하고 학자를 초빙하여 유학을 장려하였다. 이 때 허무한 황로지학과 신비한 도참사상을 배척하고 유학의 수신제가치국의 도와 례락형정의 법을 숭상하여 위의 명칭을 들었다.
12) 조평래,「남명사상의 실학적 성격」, 경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8. pp.3-12.
졸저, 앞의 책, 한길사, 1995, pp.265-277. 참조.
13) 비록 그 사상의 출처가 유교경전인 『예기』「예운」편이므로 유교사상의 연원으로 보고 있지만, 대동사상의 적극적이고 혹은 이상주의적 경향성 때문에 묵가나 도가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예기』의 형성 시기가 전국시대 말과 한 대까지 내려오므로 그 대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이 종합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이론이다.
14) 중국 양자강 구당협 입구에 있는 돌 무더기로 물밖으로 수십장 솟아있는데 지나가는 배들이 자주 여기에 부딫혀 좌초한다고 한다.
15) ꡔ순자ꡕ,「왕제」:군자주야, 서인자수야. 수칙재주, 수칙복주.
16) ꡔ남명집ꡕ권1,「민암부」:민유수야, 고유설야. 민칙대군, 민칙복국.
17) ꡔ남명집ꡕ권1, 「민암부」:걸주비망어탕무, 내어불득구민.
18) 걸주지실천하야, 실기민야. 실기민자, 실기심야.
19) 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 시고득호구민이위천하.
20) 한나라 고조 류방. 계는 그의 자.
21) 진나라 이대황제 호해.
22)ꡔ남명집ꡕ권1,「민암부」:한류계위소민, 진이세위대군, 이필부이역만승, 시대권지하재. 지재호오민지수혜.
23) 왕의 총애를 입은 궁녀가 그 권세를 이용하여 청탁하는 행위.
24) ꡔ남명집ꡕ권1,「민암부」;궁실광대, 암지여야. 녀알성행, 암지계야. 세렴무예, 암지적야. 사치무도, 암지립야. 암지재민, 하막유어군덕.
25) ꡔ남명집ꡕ 권2,「을묘사직소」
26) 문정왕후 등 외척이 정권에 개입하면서 매관매직이 성했다.
27) 송나라가 문약하여 거란족(요)과 여진족(금)에게 세폐를 바치고 화의하고 지냈으나 끝내 금나라에게 북송이 멸망당하였음을 말함.
28) ꡔ남명집ꡕ권2, 「을묘사직소」:
29) 민호가 류망하여 미납한 조세.
30) 군정이 류리하여 병역을 기피하는 것. 또는 그 군포를 내지 않는 것.
31) ꡔ남명집ꡕ권2, (아본 p.34) 「여자강자정서」.
32) ꡔ주례ꡕ에서도 ‘서’는 하급관리로 설명하고 ‘리’ 또한 ꡔ한비자ꡕ에서 「주부지리, 조관병, 추공법」하는 행정실무자를 지칭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은 ‘벼슬아치’로 구분되어 사용된다.
33) ‘승’이란 말이 끄는 수레로 전차를 말한다. 전차 천대를 지닐 수 있는 제후국을 말하고, ‘만승천자’라 하여 황제국은 만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로 곧잘 묘사된다.
34) 중국 전한말의 왕망과 후한말의 동탁을 말함. 이들은 외척 세력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35) ꡔ남명집ꡕ권2, 「무진봉사」.
36) ꡔ퇴계전서ꡕ권2,「무진륙조소」.
37) ꡔ맹자ꡕ,「량혜왕」상.
38) ꡔ론어ꡕ,「자로」.
39) ꡔ남명집ꡕ 권2, 「무진봉사」.
40) 위의 글.
41) ꡔ퇴계선생언행록ꡕ 권5, 「론인물」.
42) 위의 글.
한편, 남명의 이 상소문에 관련하여 명종이 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잠시 거론한대로 당시에 좌의정 상진이 이제신을 시켜 중국 송나라 역사책인 『송사』의 「영종본기」에서 구양수가 말한 것과 같은 남명의 ‘모후는 깊은 궁궐의 일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유충하여 단지 선왕의 유업을 이은 한 고아일 뿐’이라는 말을 빼내어 놓고 변명하기를, “남명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를 지극하게 말한 것이지 거만한 일이 아닙니다”하였다. 이에 명종도 남명을 ‘유일의 선비’로 대우하여 마침내 죄주지 않았다.
43) 이들 부족이 후일 후금 곧 청나라를 건국.
44) ꡔ남명집ꡕ(갑오본), 「학기류편」권4, <치도>.
45) 위의 책.
46) 리익,ꡔ성호사설ꡕ권8,「학교불상벌」에서 감시(국자감시;성균시)에는 생원.진사의 구별이 있는데 벼슬이 없는 선비도 생원이라 호칭하므로,생원과에 합격한 사람이 그 호칭이 같음을 꺼려 진사 호칭을 쓰고 있다고 하여 명실이 다르고 진사가 우대되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47)『론어』,「헌문」
48)『남명집』권2,「여퇴계서」.
49)『남명집』,「행장」정인홍.
『남명집』권2,「여오어사서」.
『남명집』권5,「제문」정구.
『남명별집』권2,「언행총록」. 참조.
50) ꡔ래암집ꡕ권5, 「사이상차」7월24일 조(아본 pp.257-258).
51) ꡔ래암집ꡕ권4, 「청참류영경봉사」,(아본 상, p.191): 국사비일가지사.
진덕수(자는 경원.희원,남송인,1178-1235)도 “천하지사 비일가지사”라 하였다(ꡔ송사ꡕ권437. 왕거상 주편 ꡔ중국력대사상가전기회전ꡕ(남송-근대분책), 상해 복단대학출판사,1989, p.99).
52) 졸고, 「ꡔ명이대방록ꡕ을 통해 본 유교정치사상연구」-서구 민주사상과 현실을 비교하며-,ꡔ동양철학연구ꡕ 제8집,동양철학연구회,1987. 참조
53) 당시 정치권력의 장악은 언론과 대간을 주도하는 일파로 생각했다. 즉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장악하는 것을 말한다.
54) 진덕수(1178-1235) 남송 건주인, 호는 서산.
55) ꡔ래암집ꡕ 권2, 「사의장봉사」(아본 상권,pp.68-69):금일지세, 여인병중. 신문선유진덕수지언왈, 내유의관지도, 연후외유간과지구. 내유사사지구, 외유린적지우, 협공이불치, 칙국가위의.
56) ꡔ위의 책ꡕ 권2,(아본 상권,pp.70-71):신규견호편당이악정직, 천청절이추세리, 경명의이중작록, 하이리오가, 하이리오신. 고처랑묘자장어량신이단어모국, 거착지제, 유시성세지역순, 이불문인기지당부, 지순일기지호악, 이불고공론지소재, 문상부조이멸실용, 무취공현이기담용. 위대간칙급어사감이불유공의, 위장수칙용어형살이겁어적개, 위수령칙유사객지칭협, 이치민사어도외. 인창고위사장, 치토전매장획이무기탄, 불휼민기, 환양사인, 이수감아하, 사성지포철일심, 음식약류이불지절, 변장지탐도전극, 겹서군졸이시위어육.
57) 인조21년(1643년) 리식(호는 택당,본관은 덕수,중종 때 대표적인 훈구파이며 좌의정을 지낸 리행의 현손,리이.리순신의 일족,1584-1647)이 주도하여 ꡔ선조실록ꡕ을 자기파에 유리한 시각으로 수정삭제,날조왜곡 등 역사를 자의적으로 고치는 폭거를 저질렀다.특히 본 논문에 직접 다룬 조식과 정인홍의 관련기사는 더욱 심하고 임진왜란 부분도 후세에 대개 상식으로 통하는 부분이 ꡔ선조수정실록ꡕ에 의거해 있다.이러한 역사 왜곡작업은 조선조에 3번(ꡔ현종개수실록ꡕ,ꡔ경종수정실록ꡕ) 이뤄지는데 모두 보수적 사림파와 훈척의 색채가 농후한 서인-로론이 주도 하였다.
58) 이 책의 역사적 내용과 기간은 송태조 건륭 원년(고려 광종 11년 준풍1)58) 이 해 3월에 백관의 공복을 정하고 개경을 황도라 하고 칭제건원하여 명실상부한 황제의 나라 고려를 이룩하였다. 역대 왕조 가운데 고구려에 이어 고려가 중국에 자주성을 보인 시기라 생각된다.
원년; A.D.960년)에서 명태조 홍무 원년(고려 공민왕 17년 무신; A.D.1368년)까지 408년간의 중국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것이다.
59) 전국초기인 주 위열왕 23년(B.C.403)에서부터 오대말기인 후주 세종 현덕 6년(A.D.959)까지 16왕조 136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 사마광이 19년에 걸쳐 편찬한 294권의 방대한 저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ꡔ통감ꡕ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져 있다.
60) 예외적으로 권근의 ꡔ동국사략ꡕ과 서거정의 ꡔ동국통감ꡕ은 개인편찬 역사서다. 중국의 경우는 사찬의 사서(『춘추』와 『사기』 등)가 먼저 나왔고, 그 틀에 의해서 관찬의 사서가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관찬사서 후에 사찬사서가 이루어졌다.
61) 명황제 헌종(연호가 성화,치세는 1465-11487)의 칙령을 받들어 상로 등이 편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것은 숙종말기이니 동강이 이를 입수하여 보고 ꡔ속강목ꡕ을 편찬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62) 순암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그가 찬한 ꡔ동사강목ꡕ은 단재 신채호가 극찬한 우리나라 편년체 역사서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미루어 볼 때 동강의 ꡔ속강목ꡕ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63) ꡔ동강집ꡕ 부록 권4(민본 p.510 하)
64) 1995년 청천서원에서 『동강선생전서』를 영인편찬하여 총10권 가운데 4권(7-10권)이 이 내용이다. 송찬식이 「해제」를 썼다.
65) ꡔ동강집ꡕ 부록 권1, 「행장」 pp.45-48(민본 pp.449 상-450하); 부록 권4 「년보」, pp.20-21(민본 pp.503 하- 504 상); 권3 「론신덕왕후부소」․「자핵소」(민본 pp. 223 하 - 225 하) 참조.
66) (754-805) 자는 경여, 시호는 선공, 당의 덕종 때에 활약한 명신으로 가흥사람이다. 성품이 매우 충진하고 유학을 좋아하였다. 18세에 진사에 등제하고 한림학사에 덕종의 부름을 받아 황제가 매우 신임하였고, 문집으로 ꡔ육선공한원집ꡕ이 있는 데 특히 그의 상주문과 의론은 매우 저명하다. (ꡔ당서ꡕ 권157,ꡔ구당서ꡕ 권139 참조)
67) ꡔ동강집ꡕ 부록,권1 (민본 p.435 하) ; 계왈 황천위민입군, 비이천하봉일인, 유이일인천하이, 인군부지차의, 이이위위락, 칙일예지염생, 이위망지화지의.
68) 황원구, 「한국의 력사사상 개설」,『한국의 력사사상』소수, 삼성출판사, 1984, p.11.
69) ꡔ덕천사우연원록ꡕ;(1554-?)자는 순보, 호는 모계, 한강과 동강의 제자. ꡔ상서ꡕ에 능통하고 임진왜란 때 향병을 거느리고 김면과 함께 왜구를 물리쳤다.
70) ꡔ기언ꡕ권40, 「룡주신도비명」. ꡔ미수선생년보ꡕ. ꡔ룡주집ꡕ권13, 「제모계선생문」 참조.
71) 이우성,『한강전서』해제 참조.
72) ꡔ기언ꡕ. ꡔ미수선생년보ꡕ.
리재철, 「18세기 경상우도 사림과 정희량란」,ꡔ대구사학ꡕ31,대구사학회,1986,p.41-43 참조.
73) 그는 남명의 향사서원이고 강우학파의 연수인 덕천서원의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74) 이우성, 「해제」『미수기언』,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82. pp.4-5.
75) 위의 글, p.5. 참조.
76) 허목, ꡔ기언ꡕ.「년보 신도비명병서」, 리익찬.
김길환, ꡔ조선조유학사상연구ꡕ, 일지사, 1986, p.137.
천관우, ꡔ한국사의 재발견ꡕ, 일조각, 1975, p.105. 참조.
77) 위의 글, p.5.
78) 윤휴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윤휴가 정권의 핵심에 있을 때 그의 북벌론은 송시열 보다 구체적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병역의 의무를 평민들에게만 부과하던 신분제적 불평등에서 탈피하여 양반귀족의 자제에서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평등하게 부과할 것을 주장하였다. 병권을 외척이 쥐거나 일개 정파가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초의 오위제와 체찰부(군총사령부)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청나라에서는 명나라 장수로서 청에 항복하여 강남지방의 왕으로 책봉되어 있던 오삼계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1673년) 청나라가 전전긍긍할 때였다. 윤휴는 이 때를 북벌의 호기로 보아 대만의 정금(명나라 잔여 망명세력)과 통하고 청나라를 협공하자는 실질적인 북벌론이었다. 그러나 보수파와 우유부단한 왕이 시간만 보내다가 6년만에 오삼계의 난이 거의 평정되자 청나라 눈치를 보며 다음해 윤휴 등 남인정권을 실각시키고 윤휴 등을 귀양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숙종6년:1680년).
79) 졸저, 앞의 책, pp.178-191. 참조.
80) 윤휴와 박세당은 대표적인 인물이고 이익의 경전에 대한 여러『질서』와 정약용의 2백 6십여권에 달하는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주석.
81) 리우성, 「한강전서해제」, 「미수기언해제」, 「실학연구서설」 등 참조.
82) 졸저, 앞의 책, pp.167-178. 참조.
83) 리익, ꡔ성호잡저ꡕ, 「론병제」:인주지존, 역필유경연강학, 무장개독궐언.
84) ꡔ서경ꡕ,「무성」:언무수문.
85) ꡔ성호사설ꡕ권7, 「문무병용」:소위언무수문자, 당전벌지여, 초가언굴운이. 고왈문무병용, 장구지술.
86) 리익은 중국의 인물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문묘의 형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
87) 위의 책, 「인사문」권8, ‘무성왕묘’:공자수문교, 강상이지불훼, 태공전병법, 화란득이감정. 구사무략무비, 수유례락성명지찬연, 공불가일조거야. 여욕숭장흥기필야, 선존교지, 소자출무성지묘, 하가불거. 수불능편우제주, 의선립어경사, 이고명장급아국김유신강감찬리순신배식, 치무경박사, 이시습마기득지.
88) 리익의 문장에서 볼 때는 문묘에 대비되는 무묘의 뜻이 아니라 ‘무성왕(강태공)의 사당’의 뜻으로 보아야 겠으나 리익의 주장한 바 의도는 전자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89) 최한기(혜강,1803-1879),ꡔ명남루전서ꡕ,「인정」권17,‘선인문’.
리규경(오주,1788-?),ꡔ오주연문장전산고ꡕ권5,「무학변」 등 조선후기 많은 실학자들이 ‘무학’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90) ꡔ남명집ꡕ 권2, 「의책문제제생」. 참조.
91) 이 건의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제자들에 의해 편집된 「률곡행장」에만 보이며, 률곡은 당시의 임금 선조와의 이야기와 강의 내용을 「경연일기」로 남겼는데 이곳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92) ꡔ남명집ꡕ(갑오본),「학기류편」권4,<치도> 참조.
93) ‘공’은 ‘토산물을 바친다. 아래서 위로 바친다’는 뜻이 있다.
94) ꡔ대학ꡕ10장 : 재취칙민산, 재산칙민취.
95) 리익,ꡔ성호새설ꡕ,「인사문」.
96)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 모두 환공의 자손.
97) 지․범․중행․한․위․조씨.
98) 자전․자서․자산․백유․자태숙․자석․백석.
99) ꡔ여유당전서ꡕ,「향리론일」.
100) ꡔ여유당전서ꡕ,「향리론이」.
101) 남명의 서실인 뇌룡정 이름. 『노자』의 ‘시거용현, 연묵뇌성’에서 취한 말로서 남명은 그 옆에 ‘뇌칙회명, 용칙연회’라고 추기 하였다.
102) 남명의 정사인 계복당. 자신의 수양함이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뜻.
103) 『성호사설』권9,「인사문」<퇴계남명>
104) 『성호사설』권9,「인사문」(하송정>
105) 홍이섭, 『한국사의 이해』,「실학에 있어 남인학파의 사상적 계보」, 탐구당, 1979, pp. 92-93.
106)『성호사설』권20,「경사문」,<송시>
107) 성낙훈, 『한국사상논고』, 동화출판공사, 1979, p.51 재인용.
각주)-----------------
[출처] 남명학파의 실학사상 연구|작성자 노원앙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