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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조선, 조선의 석가
글/이원익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그래도 일반 민중들에 비해 조정과 지역사회가 베풀어 준 혜택을 누리며 떠받듦을 받아왔던 지배 계층, 선비들, 관료들, 지식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많은 변절자, 기회주의자, 배반자, 매국노들이 요새 말로 다투어 커밍아웃을 하였는데 특히 독립이 영영 불가능해 보인 일제강점의 후반기에 이르자 그 대놓고 와글대고 설쳐대는 모습이 마치 여름 나절 뒷간의 구더기들이 서로 타넘으며 득실거리듯 하였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그래도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을 받쳐 주는 적지 않은 선조 어른들이 계셨으니 그 가운데 단재 신채호라는 분이 있다.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죽는 날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겉으론 멀쩡한 허우대로 온갖 몸치장에 각종 최첨단 전자기기 노리개를 부리며 스펙을 뽐내지만 그 정신을 이야기하자면 바람 앞에 등불이기 일수다. 젓가락 짝, 아니 이쑤시개만한 줏대도 없이 돈과 지위에 눈멀고 생활과 가족, 현실을 빌미로 운명 앞에 금방 흔들리기 쉬운 나약한 존재들이 우리 중생이다. 그리고 실은 우리가 김수영의 말마따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잡풀 같은 백성인데 그 씨앗이 이 태평양 동쪽 대륙에도 떨어져 겨우겨우 뿌리를 박고 오늘도 바닷바람에 휩쓸린다. (아, 우리가 바다 건너 머나먼 이 땅, 메마르거나 지나치게 찰진 이 기슭에도 날아와 마지막 자존심으로 영양분을 보내며 여린 뿌리를 내리어 기어코 험준한 바위를 붙잡고 흙을 거두는구나. 이런 안간힘에도, 한평생을 풍찬노숙, 끝내 목숨까지 버리신 이 분들의 공덕과 힘뻗침이 어찌 전혀, 전혀 없다고만 하겠는가!)
참말인지 다른 분 얘기와 헷갈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전해 듣기로 단재 이 분은 아침이면 늘 앞가슴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세수를 할 때에도 눈앞에 일본 놈을 대하듯 절대로 고개를 숙일 수가 없어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선 채로 두 손우물로 물을 떠서 얼굴을 씻었으니 앞품에 물이 쏟아질 밖에.
이 분의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왜 우리 조선에는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아니 되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아니라 석가의 조선이 되고, 예수가 들어오면 조선의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조선이 되는가!’
요즘 보면 고국이나 이곳 동포 사회나 확실히 한국의 예수, 한국인의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한국, 아니 예수의 이스라엘, 예수의 유대민족이 거진 다 되지 않았나 싶다. 조선시대로 올라가 보면 더욱 가관이다. 완전히 공자의 조선이었지 조선의 공자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배우고 갈고 닦았다는 사대부일수록 자기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몰랐다. 아니 확신을 했다, 자기들은 작은 중국인이라고. 심지어 자기들이야말로 진짜 공자님의 자손, 때 묻지 않은 적자요 순혈의 후예들이라고.
그럼 불교는 어땠나? 석가의 고구려, 석가의 백제, 신라였던가 아니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석가였던가? 고려시대 이후는 어땠고?
기록이 드물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후대에 비하면 신라의 석가, 백제와 고구려의 석가라고 할 만한 게 눈에 뜨인다. 고려의 석가, 조선의 석가, 한국의 석가…, 하지만 역사 전체로 놓고 보면 여태 한국의 석가가 아니라 석가의 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나 지눌, 사명대사 같은 훌륭하신 고승들과 수많은 선지식이나 운동가들 중에 우리의 석가를 만나고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얼마간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불교 전체의 종합성적을 매기자면 한국불교와 그 파생지인 미주한국불교는 크게 보아 그저 중국이 전해준 것을 대개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민중이 잘 못 알아듣는, 이웃나라의 고대 음에서 유래된 죽은 소리로 노상 경을 읊으며 신세대들은 뜻도 잘 모르는 의식을 치르는데 그건 한두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한국불교는 지난 시절 풍미했던 중국불교의 아류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섣부른 인상이요 판단이다.
한국불교는 많은 경우, 그 정신의 뿌리, 고민의 뿌리가 자신들이 지금 서있는 이 땅에 박혀있질 못하고 거꾸로 뜬구름 속을 휘젓고 있어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지금 당장의 처절한 고통의 도가니, 불평등과 차별, 양극화, 사회분열, 남북문제, 전쟁위험, 경제난, 환경문제, 인권문제, 청년실업, 복지문제, 사회분열, 종교분쟁, 정체성 문제 등은 출가와 정진, 깨달음의 절실한 재료가 되기보다는 오래 전 외국에서 들어온 어떤 가르침에 들러리를 서는 구색으로만 여겨지는지 별 감흥이나 대안 없이 피상적으로 들먹여지고 있을 뿐이다.
어찌 보면 외형의 성장과는 관계없이 한국불교의 정신과 문화는 서서히 뒷걸음쳐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저 석굴암의 조형미와 원효의 가르침, 설총의 풀어읽음을 뛰어넘을 만한 게 그 후에 있었던가? 또한 고려의 빼어난 사경 문화, 그리고 이를테면 세속과도 결합한 불교대중문화, 연등회, 팔관회만한 것이 후대에 재현이나 제대로 되어 왔던가?
아무튼 이 모든 것의 강력한 원초는 나의 깨달음, 우리의 통절한 자각에 있다. 일생을 바친 경전 강독, 없는 재보를 쥐어짜 이룬 이런 저런 불사들, 하안거 동안거의 거듭된 기나긴 칩거에서 우리는 과연 무슨 깨침을 얻었는가? 아뿔싸, 시대의 태동을 느끼는 원초적 예민함으로, 이러한 깨침은 오히려 불교의 바깥에서 먼저 꿈틀거렸으니 피폐와 나락을 극한 조선 후기에 이르자 동서남북 다방면에서 자극 받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피어오르고 소용돌이쳤다. 불행히도, 그 때 불교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제 목숨 연명하기에도 급급하였으니 그 때놓침의 그림자가 이토록 길이길이 꼬리를 끌 줄을 미처 왜 몰랐던가!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이미 다했던가’하는 수운의 한탄이 다시 들리는 듯하다.
이제 이 궁벽한 모퉁이 골방에서나마 다시금 우리 불교의 바깥에서 먼저 일어났던 그 시대정신의 서사시들을 한 번 짚어 보도록 하자. 나와 우리의 뒤늦은 깨달음을 위하여. 더군다나 가까운 장래에 어쩌면 고국의 역사 과목이 이러한 소용돌이의 근세사 가운데 상당 부분을 이리저리 도려내어 마치 늦은 밤 동네 푸줏간에 걸린 소 뒷다리처럼 살 몇 점 없이 앙상하게 뼈다귀로만 남을 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 땐 이런 앞뒤 못 가리는 향원의 허접한 글이나마 못내 아쉬워질 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이 기울어져가던 시절, 공교롭게도 동서남북 네 방위를 딴 동학 서학 남학 북학이 잇달아 태동 되었다. 순서로는 북학이 먼저다. 북학이 무엇인가? 북이라면 괜히 겁먹거나 얕보거나 덮어놓고 적대시하는 버릇이 실은 조선시대 위정자들에게도 있었다. 북학이 과연 무엇인가?
북학이란 17, 18세기에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이용후생의 학문이다. 이에 조금 앞서 명말부터 청초에 들어서면서 일련의 개혁적인 학술 사상이 나타나 민족의식, 민본의식, 현실개혁의식이 일어났는데 결국 청나라 조정의 강압으로 제대로 발전을 못하고 옛 것을 가지고 따지고 챙기는 고증학으로 기울어지기는 한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만주족에게 호되게 당한데다가 망해 버린 중국 한족의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킨답시고 만주족이 세운 청의 문명에 대해서는 무조건 야만시하였다. 하지만 중원을 평정하고 안정을 찾은 청나라는 곧바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와중에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이용후생의 문명이 피어나고 있었다. 반도에 갇혀 제 혼자 고고하던 조선을 훨씬 앞지르는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도 외교상 매번 중국의 수도인 연경, 지금의 베이징에 사절단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직접 가서 보고는 사람인 이상 느끼는 점이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미국의 도로망이나 교통체계에 대해 들었는데 아무리 들었으면 뭣 하나? LA 에 떨어져 프리웨이를 한 번 달려 보면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아닌가!)
이렇듯 연경에 갔다 온 사절단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조선의 북학파들은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저작으로도 유명하다. 길을 줄자로 재듯 똑바로 직선으로 닦자. 벽돌로 집을 짓자. 수차를 써서 논밭에 물을 대자, 행정을 개혁하자 등등이 이들이 보고 와서 주장한 것들 중에 몇 가지다. 비록 중앙정부에 중용 되지는 못하고 시골구석에 쳐박혔을 망정 그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인 기아해결, 그리고 나아가 부자 나라, 기강이 잡히고 원칙이 통하는 발전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이들의 고뇌와 헌신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들의 북학론은 19세기 후반에 문호개방과 개화파 형성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것도 역시 중국으로부터 따라 들어왔는데 서학이다. 천주교, 카톨릭인데 좋든 나쁘든 엄청난 결과를 이끌어왔으니 21세기에 이르러 급기야 그 종교집단의 수장에게 조선의 심장부 광장을 집회장소로 내어 주고 그 교도 수십만이 운집한 가운데 한 동안 온 나라가 서학의 놀이터가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한 떨기 열매가 지금 미국까지 뻗어온 튼실한 한국인 천주교 교세다.
이름에서 보듯이 본래 서학은 조선 유학자들에게 색다른 서양의 학문으로 비춰져 호기심의 대상으로 연구 되었다. 본래는 중국 명나라 때부터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와 황실이나 조정과 연계를 갖곤 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지배층과 민중들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종교 외에도 서양의 여러 학술서적을 한문으로 번역해서 전하곤 했는데 조선의 방문객들이 이 책이나 기기들을 조선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러다 개중에는 학문이 아니라 서양이 의도한 대로 정말로 종교적으로 빠지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 자발적 신도들은 서학을 마침 기울어져 가던 조선을 살릴 대안으로 여겼으며 서양은 조선을 개신교와의 선교전쟁에서 선점할 만만한 먹잇감으로 간주하였다. 부침을 거듭하는 중에 먼저 닥친 것은 천주교 박해라는 참화였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천주교도의 손으로 쓰인 일종의 반역문서인 황사영 백서라는 것이 당국의 손에 들어갔다. 이를 빌미로 수많은 목숨이 칼날에 잘렸음은 물론이다. 뒤늦게 들어온 개신교에게 주도권을 뺏기는 등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제 천주교는 고국에서 불교, 개신교에 이은 제3의 종교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리고 한 때의 반역행위나 제국주의 영합, 독재자 후원이라는 옛 그림자는 완전히 덮어 버린 채 선하고 정돈 되었으며 서민적이면서도 고상하고 심지어 개혁적이기까지 하다는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하여 이대로라면 아마 우리 생애 안에 불교마저 앞지를 것이다.
다음은 토종 동학이다. 1860년 철종 때 경주 출신 최제우가 시작한 동학은 서학에 빗대서 나온 말이다. 그 때 나라 형편은 그야말로 형편 무인지경이어서 웬만한 의식 있는 청년이라면 요새말로 운동권이나 혁명가, 사상가가 아니 될 수 없었으리라. 본명이 최복술이인 이 청년은 세상의 어리석음을 건진다면서 이름도 제우로 바꾸고는 명상과 기도에 들어가 득도한다. 그리고나서 힘들게 도를 펴다가는 아니나 다를까, 애통해 하는 수만의 추종자와 몇몇 우수한 제자를 남기고는 대구 감영에서 목이 잘린다. 이유야 뻔하지 않나. 세상을 현혹시키고 민중을 선동했다고. 요새는 어떤가? 뭘 좀 잘못 됐다고 말하면 세상을 어지럽힌다, 편가른다 하고 하 답답해 앞장서면 선동했다, 색깔이 어떻다, 잡아 죽일 웬수다 하며 침을 뱉이거나 뒷덜미를 낚아채이기 일수인가? (아닌가?)
아무튼 동학은 빼어난 조직가이자 후계자인 일자무식 최시형을 비롯한 헌신자들과 전봉준, 김개남 같은 혁명가, 풍운아들에 의하여 일세를 풍미하며 수백만을 뒤흔든 큰 바람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미약하다. 어련히 교과서에 실려 있고 서울 한복판에는 수운회관이라는 멀쩡한 벽돌건물이 있어 지금도 동학의 존재를 알리지만 실상 내 평생 천도교를 믿고 있다는 친구는 단 한 사람도 만나 보지를 못했다. 오히려 거기에 한 가닥 뿌리를 댄 증산교도를 LA에서도 한두 명 마주치기는 했어도. 왜 그랬을까? 국권상실, 남북분단, 서구화 등 여러 강력한 외적 요인이 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아서였겠지만 형만한 동생이 없다고, 결국은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못난 핵심 후계자들이 저지른 아둔과 배신, 분열 때문이다. 교단을 갈라 일제에 앞잡이를 선 자, 등등.
아무튼 내 생각에 수운 최제우는 보살이다. 만약 그 당시 그가 보기에 불도의 운이 이미 다하지 않았었다면 아마 그는 훌륭한 선지식이 되어 크게 추앙 받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겉보기에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라도 남학이라는 것도 있다. 1862년, 철종 13년에 충청도 논산의 도학자인 이윤규가 세운 신흥종교다. 신흥종교가 어디 한두 개인가? 하지만 그렇게 업신여길 일이 아니다.
이윤규는 그 당시 현대를 선천시대와 후천시대로 나누었다. 이거 어디서 좀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비슷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의 뿌리가 이윤규요 남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겉보기와는 달리 남학은 우리나라 정신사의 큰 새암 하나다.
그는 말한다. 지금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바뀌는 즈음이라 말세와 같은 우환이 겹친다고. 이 우환을 없애고 극락무궁한 지상선경인 후천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러고선 후천시대를 짐작할 ‘정역’이라는 서책을 짓게 하고 인간개조의 도법으로 다섯 음의 주문을 외게 한다. 교리로서는 유불선 삼교가 합해짐을 말한다. 큰 제자로는 김일부와 김치인 등이 있는데 삼교융섭이라 했지만 ‘정역’을 지은 김일부는 유교적인 냄새가 강하면서 계룡산 일대에 포교를 했고 김치인은 불교색이 더 강하면서 전라도 진안 일대에 포교하였다.
지금 이윤규의 교단 자체는 거의 사라졌지만 그 후 혹은 불교스럽거나, 혹은 유교나 도교적, 기독교스럽거나 단군교스럽거나 이들을 버물러 섞은 듯한 수많은 소수종교, 민족종교의 명멸이 거의가 다 이 남학과 닿아 있으니 어찌 이를 없는 듯 업신여기기만 할 것인가, 우리가 잘 몰랐던 게지. 산이나 들의 풍경을 이루자면 멋지게 단단히 굳어지거나 갈라진 바위, 숲, 시내도 중요하지만 흩어진 모래나 날아가 사라진 흙먼지도 그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도 다 우리 정신의 파노라마, 풍경의 한 부분을 이루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밖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1909년 홍암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다. 일제시대에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정면으로, 물리적으로 맞서다 보니 애꿎은 평신도들까지 십만 명 이상이 일제에 잡혀 죽어 거의 씨가 말랐다. 이들이 십분의 일만 살아남았어도 겨레의 수준이 지금 이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데도 일본 놈들이 우리에게 좋은 일 많이 했다고 뇌까리는 정신 나간 치들은 그 어리석음만으로도 죄 많을진저!)
그런데 아무리 씨가 말랐다 한들 한두 톨이라도 남아 안 먹고 늘렸으면 몇 해 만에 대충 한마지기 씨 뿌릴 종자는 나올 텐데 지금 해방 되고 수십 년이 흘렀건만 이 위대한 애국자에서 비롯한 민족종교는 거의 기운을 못 차리고 있다. 누구를 탓하랴? 대한민국 수립 초기의 쟁쟁한 인사들 중에 대종교 출신이 다수다. 그런데 왜 다 몰락했나? 아마 너무 독립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데 제대로 안 돼서 그렇다 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어쨌거나 이 종교는 천연기념물처럼 화석화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게 내 억측이길 바랄 뿐이며 날로 피폐하여 감에 눈물겨울 따름이다. 한 줄기, 그 정신만은 끝내 놓지 않기를 바란다.
위에서 보듯 대종교든 북학 서학 동학 남학이 본래 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 민중의 고통,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 주겠다고 맹세하고 시작된 학문이요 종교였으니, 달리 말하면 그게 바로 ‘참나’를 깨달아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네. 온 누리가 괴로움에 잠겼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불학이요 불도의 모양 바꾼 한 자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지금 누가 있어 이름은 불도요 불학이라면서도 이웃과 현실의 중생고는 외면하고 타성에 젖어 노상 제사놀이, 염불놀이 참선놀이에만 탕진하고 있다면 기껏해야 취미생활이거나 그야말로 호구지책 장사놀음이거나 치부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사든 염불, 참선이든 참 정신이 깃든 제대로 된 의식이요 수행이라면 얼마든지 권장해야 하리라.)
부처님께서는‘부처님의 우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지만 우리는 그 분을‘우리의 부처님’‘우리와 함께하는 우리 속의 부처님’, ‘나의 부처님’‘나인 부처님’으로 깨달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비록 고국을 가진 은혜를 입어 저 멀리 한국을 거쳐 온 불교요 부처님이시지만 그 부처님이 이 땅의 부처님으로, 나의 부처님으로 거듭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단재 선생의 꾸지람을 들어 마땅하다.
‘부처의 미국이 되지 말고 미국의 부처가 되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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