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수 2장 1-7절
설교제목 : 인생의 정탐꾼
영혼의 날개짓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제법 쌀쌀해진 날씨가 가을이 완연히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드높고 맑은 가을만큼이나 우리의 영혼이 맑아지고 풍성해지시길 빕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죄수들의 운동”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1888년 귀가 잘린 고흐가 정신병원에 들어간지, 2년 뒤에, 1890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원운동을 하며 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차단된 감옥은 편견과 무지, 오해와 의심, 그릇된 수치심으로 인간의 정신을 옭아매는 모든 것을 표상합니다. 경직되고 강박적인 자아는 감옥에 갇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에서 죄수들은 원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쳇바퀴를 무의미하게 공전하는 반복운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면 벽돌의 윗부분에 나비 두 마리가 날고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영혼의 날개짓을 표상하는 듯 보입니다. 변환과 부활의 상징이자 영혼의 상징인 나비는 그 감옥의 굴레에서도 자유롭게 날개짓을 하며 날고 있습니다. 이 감옥은 우리의 세상이자 육체적 정신적 한계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경직되고 속박된 감옥속에서 무의미한 반복운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살면서 체바퀴 돌듯 그곳에서 갇혀 살아가며 실의에 빠져 고개를 숙인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진정한 이름은 상실하고 죄수의 번호로 불리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옥 속에서조차 날개짓하는 나비처럼 영혼은 자유로운 날개짓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복해야 할 여리고성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가라하는 땅을 차지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정복해야만 얻을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이런 명령은 자기 실현을 촉구하는 충동과 강박이며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주어집니다. 이런 약속의 땅은 심리학적으로 개성화의 과정에서 자아가 동화해야만 하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실현을 향한 여정에서 자아는 갈등과 긴장, 충돌을 견디며 미지의 땅인 무의식의 영역을 인식하고 동화해 나가야 합니다. 이는 자기가 자아에게 할당한 것이지만 자아의 노력을 통하여 정복해야만 하는 영역입니다. 약속의 땅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싸워서 차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로 힘주어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유약한 자아로는 차지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으로 첫 진입에서 여호수아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을 만납니다. 약속의 땅은 텅빈 땅이 아니라 요새화된 도시들을 산재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요새화된 성들은 무의식의 영역을 동화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무의식적 콤플렉스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과정은 자아에 적대적인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삽화입니다. 이 여리고성 정복을 위한 여정은 여전히 우리 인격의 발전을 위한 길에서 적대적이고 강력한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다루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또한 여리고성은 우리가 고수하며 철옹성처럼 신봉하며 의지하며 살고 있는 기존의 집단적 가치, 낡은 삶의 방식과 닳아빠진 신념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강력한 콤플렉스가 무엇인가요?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할 때마다 강박적으로 가로막고 서 있는 콤플렉스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땅,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마주하며 넘어가야 하는 요새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고수하며 강력하게 따르고자 하는 집단적 가치를 대변하는 우리의 여리고 성, 낡은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이 여리고 성을 넘지 못하면 우리는 새로운 변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어떤 여리고성이 있으신가요? 이를 넘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명의 정탐꾼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정복을 위해 정탐꾼 두 명을 여리고성으로 보냅니다. 정탐군을 보내는 행위는 전면전을 치르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어떤 일을 행하고 무언가 시행해야 할 때, 정탐꾼은 직면해야할 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사항들을 미리 탐지하고 일러주는 역할을 합니다. 큰 일을 치르기 전에 일종의 사전 답사를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두 정탐꾼들은 자아에게 있어서 보조적인 기능으로 자아의식을 돕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를 들어 사고가 주기능인 사람은 보조 기능인 감각과 직관을 활용하여 사태를 명확하게 살피고, 사건 너머의 것을 살피는 기능을 수행하여 자아의 기능을 보조할 수 있습니다.
반대의 입장에서 여리고성의 거주자들은 정탐꾼의 방문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여야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여리고 왕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몇 사람이 땅을 정탐하려고 보고를 받고는 그들을 잡아 죽이려 합니다(2-3). 정탐꾼은 낯선 곳으로부터 오는 침입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낯선 자들의 방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기존의 집단적 가치를 표방하는 여리고왕은 우리 안에 낯선 것을 직면해야할 때 적대적인 반응으로 힘을 행사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낯선 정탐꾼들은 새로운 변환을 초래하는 동인이며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보내는 초대장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낯선 것을 마주할 때마다 여리고왕처럼 자신의 권력과 자아의 기존적 입장을 고수하며 정신의 여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적대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면 사태는 더욱 더 악화될 뿐입니다.
(...)
여리고 왕의 태도를 내려놓지 못하면 낯선 정탐꾼을 통해 새로운 변환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낯선 정탐꾼이 나타날 때 힘겹지만 기꺼이 환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도움을 주는 라합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으로 들어갔을 때 창녀인 라합의 집에 들어가 묵었습니다. 여리고왕은 라합에게 전갈을 보내 정탐꾼들을 색출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정탐꾼들을 지붕으로 데려가 지붕 위에 널어 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어 정탐군들을 도왔습니다. 이 라합을 요세푸스와 탈굼, 유대랍비들은 ‘창녀’, ‘조나(זוגה)’를 ‘여관주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 라합을 가나안의 풍요제의와 관련한 신전의 여세나 성스러운 창녀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나(zonah)의 용어와 풍요 제의때 행해진 크데사(qedesa)와 용어상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매춘을 하는, 간음을 하는 여성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창녀의 집으로 소개된 라합의 집은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여리고로 드나드는 다양한 민족들을 만나므로 정치, 군사적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었고,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노트는 ‘묵었다’. ‘유숙하다(솨카브)’가 동침을 위해 눕는 것을 뜻하기에 라합과 동침했을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유대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40년간 부도덕한 삶을 살았지만, 이스라에 다가왔을 때에 참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였고, 변화된 자로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아내로서 8인의 예언자들과 여선지자 훌다의 여자 조상이 되었습니다.”[Ginzberg, Lengends of the Bible, p508] 라합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의 영혼에 비유되기도 하고, 교부들은 여호수아(예수)와 결혼한 교회의 유형을 해석하였습니다. 라합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라합을 심리학적 측면에서 고려할 때, 여리고 성, 무의식의 영역으로 진입할 때 만나는 여성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낯선 미지의 영역에서 도움을 주는 아니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향상실과 혼돈을 경험할 때 우리에게 영적 통찰과 내적 확신을 부여하고, 보호받고 안전한 느낌을 부여하는 여성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갈 때 이런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출현하여 길을 안내하곤 합니다.
다른 구도에서 보면 지배적인 남성적 세계가 추동하는 지성과 합리성과 대비되는 감정과 정서적 원리는 새로운 변환으로 안내하는 동인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년의 남성들에게 바람이 불어올 때 기존의 체계가 식상해져 있고, 활력을 잃었기에 새로운 변화를 요청하는 무의식의 창조적인 움직임입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외면적으로 물질적으로 실현하여 관계와 삶은 망가지고 맙니다. 라합은 옛 신을 벗어내고 새 신, 새로운 하나님을 맞이하는 신성한 여성상, 내면의 여성 구원자라 할 수 있습니다. 어둔 길, 낯선 길을 갈 때, 위기를 만날 때 내가 바른 곳에 있다면 우리를 안내할 내면의 구원자, 라합이 등장할 것입니다. 이는 저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인생과 정신에서 여전히 발현되는 여성원리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을 주는 라합이 우리의 낯선 여정 길을 안내한다는 신뢰로 우리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