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연극이야기 81 <제 41회 대한민국연극제 개막축하공연, “치마돌격대”>
전국 16개 시도시 대표극단이 참가하여 경연을 펼치는 제 41회 “대한민국연극제”가 제주도 제주시에서 개최되었다. 개막 축하공연으로 제주연극인이 준비한 <치마돌격대>는 볼거리가 넘친 잘 만들어진 공연이었지만 홍보부족으로 제주민이 많이 관람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제주의 감동적인 승전의 역사를 되새기는 <치마돌격대>(이우천 작, 연출)는 1555년(명종 10년)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을묘왜변’ 당시, 제주읍성에 침입한 1000여명의 왜구를 70여명의 제주군이 상대하여 승전한 역사적 기록을 무대화하였다. 제주 백성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피폐한 삶에 시달려왔고 폭력과 억압으로 피해를 입은 역사에서 유일한 승전으로 기억되는 제주민의 자존감을 ‘을묘왜변’을 배경으로 전하고 있다. 치마돌격대의 뜻은 말을 치달아 돌격하여 왜구를 무찔렀다는 의미이다. 출연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양은숙 안무)과 더불어 호르존트에 비치는 배경영상(최종찬), 그리고 조명(김한솔), 음악(오종협 작곡, 감독)의 상승효과는 작품의 극적 완성도를 나름 대로 완벽하게 성취한 보기드문 총체연극으로 관객을 감동시켰다. 무대와 영상의 만남은 1919년 10월 27일 <신극좌>의 김도산이 연출한 <의리적 구토>가 있다. 실내장면은 무대에서 연극으로 야외장면은 스크린에 영화로 보여준 연쇄극(키노드라마)이었다. 그러나 키노드라마의 원조는 1919년 9월 23일 김도산 연출로 공연하였던 <카츄사>에서 키네오라마의 특수효과를 이용해 구름이나 비, 파도, 천둥, 번개 등 무대의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여 당시 관객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키네오라마는 오늘날 이펙트조명이라는 불리우는 특수효과 전기장치였다. <치마돌격대>의 영상효과는 전기장치의 이펙트효과가 아니라 실제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호리존트에 비쳐서 무대장치로 활용하고 바다의 물결과 파도 장면도 연출하는 프로젝트영상의 맵핑기술로 가상현실을 무대에 재현시켰다. 오프닝 장면의 바다 속 연출은 무대를 가로지르는 조명이 비치는 긴 천을 활용하여 조명과 헤엄치는 배우의 몸놀림으로 바다 속에서 물길질하며 전복을 따는 모습을 아나로그(가상현실이 아닌)로 리얼하게 보여주는 연출의 아이디어는 관객에게 신선한 감흥을 선사하였다.
<치마돌격대>의 이우천 연출의 작품은 필자가 처음보는데, 연출가 이우천은 무대예술을 너무 잘 이해하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2022년 “올해의 연출가상” 수상자답게 재능있는 연출가로 보인다. 그가 연출한 <치마돌격대>에서 배우는 연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 전락하였지만 극적 곳곳에서 활력소 역할을 한 원로배우 이방(최종원 분)이 그나마 크게 눈에 띈다. 이우천은 기존 연극무대와 차별화되는 영화기법을 활용한 연극무대의 입체화를 시도하였다. 기본적으로 요즘 무대에서 잘 활용하는 조명에 의해 같은 시간 다른 장소의 동시진행적 무대창출을 비롯하여 다양한 입체적 장면을 보여주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구와의 교전에서 관객이 볼 수 없는 성벽너머의 모습을 성벽을 이동하여 보여주는 것, 작품제목처럼 말달려 적진에 치닫는 말의 연기와 그 옆에서 검술을 펼치는 모습은 말타고 적진에 돌진하는 리얼한 전투씬을 전달하고 활쏘는 소년이 쏜 화살을 배우가 받아 적진의 왜장에게 전달하여 왜장 스스로 눈에 화살을 박는 재치있는 코믹성까지 연출의 재능은 넘쳐난다. 간단한 검술동작(대각선좌우찌르기, 바로찌르기, 뛰어 돌아 반복찌르기)으로 고수의 검술가로 변신시키고 안무와 슬로모션의 동작은 활쏘는 소년과 왜구와의 추격씬에서 절정을 이루고 영상, 조명 특히 장면마다 적절한 음악의 상승적 역할은 무대의 입체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즈음에서 이우천 연출가를 ‘연극작가’라고 칭하고자 한다. ‘연극작가’는 소설을 쓰는 작가처럼 작가주의론 개념에서 1950년대부터 영화계에서 언급되었던 ’영화작가‘라는 용어가 1980년대 이후 일반화되었고 2000년대에 이르러 연극계에서도 등장하였다. 연극작가의 세가지 조건은 탁월한 연출력, 동일한 연출 스타일, 강한 주제의식을 내세우지만 필자는 연출 이우천의 작품을 <치마돌격대> 외에는 관람하지 못해 연극작가라 부르기가 부적절할지 모르지만 <치마돌격대>의 총체적 연극성은 공연에서 연출만이 돋보인다는 차원으로 연극작가라고 호칭하고자 한다.
<치마돌격대>의 잘 만들어진 연극에 코빠뜨린 점은 배우들의 마이크 사용으로 볼룸이 너무 커 극적 감흥을 소란스럽게 떠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개막축하 공연의 역할 때문인지 후반부의 극적 마무리가 지나치게 의도적이었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살려 제주도민의 자긍심을 높혀주는 승전의 세레머니 장면을 연출하였다면 극적 감흥을 훨씬 고취하였을 것이다. 지난친 이방의 넋두리도 조절하지 못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네 번째 목사를 모시는 이방으로서 부임한 관료들이 제주민의 삶은 관심도 없고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만을 고대한다고 성토하면서 왕도 백성들을 등지고 왜구에게 잘보이려 한다는 관객의 반응없는 엉뚱한 대사를 읊는다. 무리한 한일외교를 펼친 윤석열대통령을 빗대어 역사를 왜곡시키는 정치적 발언은 왜국에게 선린정책을 편 대국적인 조선을 모욕하는 것이요 우리 선조를 욕되게 하였다. 1544년 왜구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 이후 조선은 왜구의 내왕을 금지시켰지만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내왕 통교를 허용하였고 ‘을묘왜변’ 이후 대마도주는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였음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런 엄연한 역사의 기록을 왜곡시켜 윤석열에 빗대어 사극에서 조선왕을 비하한 것은 연극예술인으로서 <치마돌격대>의 오점이다.
그러나 <치마돌격대>는 그동안 피해자로서 각인된 제주도민의 지긍심을 고취시키고 제주도민의 용명성과 단결력 그리고 자주성을 확인시켜주는 의미있는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