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2년(세종 4) 정월 초하루부터 조선의 젊은 국왕 세종은 바빠졌다. 지금으로 치면 일기예보를 담당하는 기상청에 해당하는 서운관에서 그날 일식이 일어날 거라고 예보했기 때문이다. 일식은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이다. 지금이야 인간 사회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생각하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천문 현상을 인간 사회와 깊이 연결 지어 판단하곤 했다. 임금을 상징하는 해가 빛을 잃는다는 것은 임금에게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세종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을 위한 역법을 만들다
세종은 하얀 소복을 입고 창덕궁 인정전의 월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는 하늘에 어서 일식을 거두어 달라고 비는 의례로서 ‘구식례’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식이 일어난다고 한 시각에도 햇빛은 여전히 내리비치는 것 아닌가? 일국의 제왕이 신하들 보는 앞에서 뻘쭘하게 석고대죄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가 일식이 시작된 것은 1각(15분)이 지난 뒤였다. 예보를 담당한 이천봉은 곤장을 맞는 장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실 이천봉의 잘못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역법을 직접 만들지 못했다. 아니, 만들 수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고려나 조선은 중국 왕조의 제후국이었고 제후국은 중국의 천자가 만들어서 내려주는 역법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종 당시 조선 왕조가 사용하던 역법은 150년 가까이 지난 고려 때 원나라에서 들어온 수시력이었다. 그러한 수시력을 명나라가 이름만 바꾼 대통력을 가지고 24절기, 일식과 월식 따위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천체의 운행을 계산할 때 미묘한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이천봉이 일식을 1각 빨리 예보한 것은 바로 그런 오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자존심 강한 세종에게 이런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종은 조선의 입장에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조선의 실제 시각을 측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초, 정인지, 장영실 등 천문에 일가견이 있는 학자들이 세종에게 불려갔다. 그들에게 내려진 임무는 서울에서 본 북극 고도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에 맞는 표준 역법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천과 장영실이 실무 책임을 맡았다. 천체를 관측하는 중국의 전통 기구를 ‘혼천의’라고 한다. ‘혼천’이란 천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니까 혼천의는 곧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이다. 이천과 장영실은 나무로 혼천의를 간소화한 간의를 만들고 북극 고도를 관측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본 북극 고도는 38도 1/4이라는 것이 확정되었다.
재창조된 천문 관측 프로젝트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의 천문 관측 프로젝트가 개시되었다. 먼저 나무로 만든 임시 간의 대신 청동으로 제대로 된 간의를 만들어 천문 현상을 관측했다. 중국의 전통 관념에 따르면 이처럼 하늘을 관측하는 것은 오직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천자의 제후에 불과한 세종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외교적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세종은 외부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간의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로 만든 청동 대간의를 설치하도록 했다. 간의대 서쪽에는 해가 가장 높이 뜨는 정오에 그림자의 길이와 위치를 관측해 절기와 시각을 계산하게 해주는 규표도 설치했다. 밤 시각까지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해시계 겸 별시계 일성정시의도 제작되었다. 이동하는 군사들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가지고 다니게 한 휴대용 해시계 천평일구,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 등도 잇따라 선을 보였다. 이처럼 눈부신 천문 연구의 성과 위에서 역사상 최초로 조선이 만든 역법인 칠정산 내외편이 나올 수 있었다.
세종은 중국의 천자에 대해 제후의 예를 갖추지 않거나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나 역법 같은 문물을 무시한 국왕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그는 유교적 질서를 숭상하고 그 자신이 유교적 기준에 맞는 어진 임금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대주의자들처럼 무조건 중국의 기준에 모든 것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중국의 문화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세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중국 문화를 창조적으로 조선에 적용하려 노력했고, 조선의 역법은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서양의 발달한 과학기술을 찬양하고 애써 그것을 익힌 전문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선진 문화를 한국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럴 때 세종과 그의 신하들이 벌였던 ‘간의 프로젝트’는 언제든 돌아봐야 할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글_ 강응천 역사 저술가(문사철 대표)
출처_ 행복한교육 2017.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