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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의 본이 된 에녹 창5:21-24, 살전4:15-18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 믿고 살다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세상 왕 마귀가 다스리는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 죄악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에 죄를 자연스럽게 짓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원해 낼 수 있을까하면서 한탄하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복된 소망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바로 영생한다는 소식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우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고후5:1-2)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2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육체적 죽음으로 무너질 때 성도들은 영혼이 거할 새로운 거처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몸은 기존 육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 육체에 새로운 옷을 입듯이 덧입기를 한다는 말이다. 죽은 자들도 썩어 흙으로 변한 몸이 다시 썩지 않을 영원한 몸으로 부활된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정말 소망해야 되지 않을까 이에 관련된 말씀을 우리는 데살로니가에서 읽을 수 있는데 죽었던 성도들이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영혼으로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는 부활의 몸으로 변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살전4:15-17)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 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오실 때 중요한 사건은 죽었던 자들이 먼저 일어나 구름속으로 올라가면서 뒤이어 살아있는 자들도 채여 올라간다 즉 휴거된다는 말이다. 17절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간다는 말이 바로 휴거를 말하는 것인데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는 비밀로 되어 있으며 종말에 사는 성도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말인데 이 휴거는 주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때 일어날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이며 가장 복된 소식이다. 누가 이 말씀대로 살아서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인가가 참으로 궁금한데 우리는 그에 해당되는 사건을 성경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참고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재앙의 날 마지막 사건으로 예수님이 성도들과 함께 지상으로 오시는 것으로 휴거로 인하여 공중에서 주님과 만난 이후 재림은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반드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약속을 하셨으니 분명히 휴거와는 다른 사건이며 둘 다 성경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마24: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지 않은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또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을 때 거짓증인 들이 증언을 하여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을 때 대제사장은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그리스도인지를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6:64)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아들이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이후에 너희가 보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마지막 날 이 세상에 구름들 가운데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주님은 역사 마지막 날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휴거는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재림은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재림할 당시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해서 기록한 종말장이라고 합니다. 휴거는 살아있는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인데 인류 역사상 휴거된 사람이 있었는가? 있었고 말고요 정말 있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따르면,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며,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의 6대손으로 가인의 계보가 아닌 셋의 계보에 속한다. 또한, 에녹은 야렛(Jared)의 아들이며 성경의 최장수 인물인 므두셀라(Methuselah: 969년)의 아버지이며 노아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창세기 5장에는 각 인물들이 주로 누구의 자식이며 몇 해를 살다가 죽었는지가 기술되어 있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죽었다(died)"라는 낱말이 명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에녹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죽었다(died)"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 for God took him)" (창5:24, KJV). 전통적으로, 이 진술은 에녹이 아담의 다른 자손들과는 달리 죽음을 겪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데리고 가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에는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By faith Enoch was translated that he should not see death)"라고 말하고 있다(히11:5, KJV).
히브리 성경과 구약 성경에 에녹에 대한 진술이 아주 짧음에도 불구하고, 에녹은 기원전 1000년 동안의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취급되었는데, 특히 외경에 있는《에녹 1서》·《에녹 2서》·《에녹 3서》의 에녹서들의 중심 인물이다. 에녹은 일부 기독교 교파들에서 중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가톨릭교회에서 에녹은 이들 교회의 교회력(Calendar of Saints)에서 축일이 7월 30일로 등재된 성인(聖人 · Holy Forefather)이다. 또한 에녹은 후기성도 운동(Latter Day Saint movement)의 전통들에서, 이들 중 특히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전통에서 중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은 에녹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히11:6)고 말합니다. 에녹이란 이름의 뜻은 “시작하는 자, 봉헌된 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아담의 7대 손이었으며(유1:14), 셋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성경에는 또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사람이라 할 때 오직 두 사람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한 사람은 노아요(창6:9), 또 한 사람은 바로 에녹이다(창5:24). 성경은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한다(창5:22). 이것은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럼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에녹에게 어떤 계기가 된 것일까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때 아마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주셨던 것 같다. 다음 말씀을 보면 알게 된다.
(유1:14-15) 14 아담으로부터 일곱째 사람인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15 이것은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969세까지 장수한 므두셀라는 그 이름의 뜻이 “그가 죽으면 보낸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홍수의 심판을 보내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969세까지 가장 오래 장수하였던 므두셀라가 죽은 후에 노아 홍수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므두셀라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계시하셨던 홍수의 심판이 왔던 것이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노아 홍수 이전이라서 사람들이 극도로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기 쾌락대로 살았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실컷 먹고 놀고 즐기고 누리자고 생각하여 방탕하며 죄를 지었다. 그러나 에녹은 그들과 같이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라고 말합니다. 즉 두 사람이라도 함께 동행하려면 서로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살아도 서로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동행하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나의 뜻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 순종해야 동행이 가능하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의식하며 사는 임마누엘의 영성을 가져야 한다. 한국 교회의 위대한 부흥사로 알려진 이성봉 목사의 영성은 한마디로 “임마누엘의 영성”이었다. 그분의 좌우명은 “순간 순간 주(Lord)로 호흡, 일보 일보 주(Lord)와 동행”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는 훈련을 했는데, 한순간도 예수님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항상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다녔다고 하고, 또 물을 마실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을 기억하며 세 모금씩을 마셨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장소는 교회 안뿐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에도 이루어져야 한다. 에녹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준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1-22).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육적인 생활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지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영적인 생활이다. 자녀를 많이 낳은 에녹이 얼마나 할 일이 많았겠는가? 자녀를 보고 손주를 보고 증손주를 보고 그들을 돌보고 양육하느라고 신경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 에녹은 당시 죄악이 만연한 시대에 집안의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느라고 할 일이 많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상황에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에녹의 대단한 업적은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그는 가정에 충실하며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저와 여러분도 에녹처럼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는 에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므로써 유다는 에녹서를 영감된 것으로 믿었는가?
"아담의 칠대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ㅡ15)
유다는 외경 에녹1서에서 14-15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책은 제1세기 교회에서 폭 넓게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원래는 아람어로 회람되었으나 아마 히브리어로도 회람되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사해 사본 가운데 아람어로 기록된 본서의 단편들을 발견하였다. 학자들은 유다가 에녹1서의 아람어 사본을 참고해서 그가 이 서신을 위해 필요한 구절을 헬라어로 번역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유다는 왜 정경서가 아닌 에녹일서에서 인용하고 있는가? 유다는 그와 그의 독자들이 잘 알고 존경했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썼으며 그것은 기독교 진리의 전달에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에 현존하는 것이다. 이런 외경 문서들은 신약의 많은 말과 사상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들이다. 특별히 에녹1서에서는 마태, 누가, 로마서,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말과 사상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들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다는 에녹일서에서 인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에녹일서는 영감된 책인가? 리크(Reicke)는 에녹서는 공식적으로 유대인이나 크리스천들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유다가 이 책을 영감 된 것으로 간주한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은 성령께서 저자를 충만케 하시고 그에게 성경을 쓰도록 지시하셨을 때 발생하였다.
(벧후1:21)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행17:28)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라. 너희의 시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도 이르되, 우리 또한 그분의 후손이라, 하였나니
성령은 빌어온 말들로 영감시키시며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부분이 되게 하시는데 자유로우시며. 따라서 여기 유다가 에녹서에서 빌어온 말들에도 성령께서 영감하셨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에녹일서 자체가 영감되었느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성경 저자들은 그들이 어떤 자료의 원천에서는 인용하려고 할 때 그 부분이 영감 된 것이 아니라도 진리일 때는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성령의 간섭과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에녹이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것은 바로 휴거의 본을 보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우리들이 휴거를 원한다면 에녹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면 휴거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휴거의 말씀을 보자.
(살전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휴거는 주님께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실 때에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인데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졌듯이 우리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땅에서 하늘을 향해 옮겨진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선 당연히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요소이다. 그렇다면 에녹의 삶을 조명해보자.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에녹은 간단하게 말해서 임마뉴엘의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에녹의 삶에 대해서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옮겨져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그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이 증언을 가졌느니라.
(1) 선한 행실을 살았던 믿음의 삶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을 마태복음 5장 20절에는 이러한 삶이 아닌가?(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결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에녹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삶도 우리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능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주님의 재림을 믿고 있어야 휴거에 합당한 삶이다.
(히11:6)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주님은 역사 마지막 날에 이 땅에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심판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믿고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 19장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게시하고 있다.
(계19:11-16)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12 그분의 눈은 불꽃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니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14 하늘에 있던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고운 이마포 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더라. 15 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데 그분께서 그 검으로 민족들을 치시고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리라. 또 그분께서는 전능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드즙 틀을 밟으시며 16 그분께서는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고 기록된 한 이름이 있느니라.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하나님은 반드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실 것이고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믿었다.
(2) 경건한 삶을 살았던 에녹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에는 감독과 집사의 직분에 합당한 삶을 제시했다.
디모데전서에는 교회직분자들의 자세에 대해 감독을 예로 든다면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 자기를 술에 내주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인내하며 말다툼하지 아니하며 탐욕을 부리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서 자기 자녀들을 모든 위엄으로 복종시키는 자라야 할 것이며(딤전3:2-3) 또 집사의 예로 들면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많은 술에 내주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순수한 양심 속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우선시 되어야 하며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직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나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자질들을 우리들이 소유하였다면 주님은 이런 자들을 이 땅에서 휴거대상자로 선택하실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물들지 않아야 하며 말씀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계명의 핵심은 이웃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이다.
(신15:11) 가난한 자가 그 땅에서 결코 그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네 땅에서 네 형제와 네게 있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넓게 펼지니라.
(약1:27)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선한 신앙생활 즉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들이다.
(3) 마지막 때에는 인 맞은 144000명에 속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혹시 144000(계7,14장)이라는 숫자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기도 하지만 144000은 기독교에서 자주 다뤄지는 이슈이기도 한데 이유인즉 144000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144000은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요?
위의 말씀대로, 144000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라고 하며 이 밖에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인을 맞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144000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또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에 대해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장로 교단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144000은 구약의 12지파, 예수님의 12제자, 큰 수 1000을 하나님의 계산법인 승법(곱셈)으로 곱한 수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여자는 실제 육적 여자이고, 정절을 지켰다는 것은 육적 음행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144000은 구약의 12, 예수님의 제자 12와 1000의 곱이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또한 문자 그대로라면 본문의 여자가 실제 여자라고 했을 때, '여자'는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처럼 성경의 뜻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을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많이 있다.
또한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면 결국 계시록의 말씀을 더하거나 뺀 셈이 될 수 있다.
(요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문제는 이 144000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단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신천지이다. “도채데 왜 그들에게서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14만 4천이라는 숫자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들이 바라는 소망은 ‘14만 4천에 들어가는 자격만 되면 이 땅에서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이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이 안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미 신천지 교리에 중독되어서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믿어진다는 거다.’ 2014년 이후 신자 수가 14만 4천명이 넘게 되자 이만희 설교의 내용도 슬쩍 달라지게 됩니다. ‘14만 4천만 구원받는다고 우리가 안 그랬죠? 아이고 신천지는 설마 14만 4천만 구원을 받겠느냐? 안 그러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이말이야!’ 신천지 신자들은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14만 4천명 만이 제사장으로 선택 받기 때문에 그 자격에 맞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라고 하면서 자기들 12지파 간에 경쟁을 하거든요.’
탁지일 이단전문가에 의하면 ‘그 14만 4천에 속하기 위한 신천지 신도들의 끊임없는 종교적인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종교적인 착취가 가능했던 거지요. 말하자면 이 조직 자체가 14만 4천에 속하기 위한 무한경쟁 체제로 돌입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신천지 신도들의 열성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종말에 14만 4천명만이 구원을 받는 다는, 또는 14만 4천 명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린다는 교리이다. 이런 식으로 14만 4천 명을 강조하는 이단이 신천지만은 아니다. 여호와 증인, 안상홍, 정명석 집단에서도 이 숫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사실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대부분의 이단들이 매우 중요시하고 있고, 이 수에 해당하는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다. 신천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이단들이 자신들과 14만 4천이라는 수를 일치시키고 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는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서 등장하는데, 지상의 큰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성도의 수가 등장하기 바로 전 요한계시록 6장에서 일곱 인의 재앙 속에서 구원 받는 성도의 수가 14만 4천이다. 그 재앙이 벌어지기 전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성도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는데, 그 인을 받는 사람의 수가 14만 4천이다. 중요한 사실은 살아남은 14만 4천의 성도가 그 대재앙을 언제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이 이 편지를 받았던 성도들의 실제 상황과 직접 연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계시록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당시의 불신 권력자들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감추고 오직 편지(요한계시록)를 받는 성도들만 알고 뜻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붙들게 만드는 내용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또 하나는 편지(계시록)를 받는 성도들의 실제 상황과는 직접 관련이 없고, 먼 훗날 세상 끝에서 이루어질 내용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을 취할 때의 문제는 계시록이 쓰여질 당시의 성도들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핍박 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아무런 위로와 소망이 되지도 않는 먼 훗날 역사의 끝에서 있을 일에 대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학자들이 계시록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그 당시의 실제 상황과 직접 연관되었던 내용이고, 계시록의 후반부의 일부 내용은 먼 훗날의 세상 종말의 때와 관련된 내용으로 보고 있다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가 등장하기 직전의 일곱 인의 대 재앙(핍박과 환난)은 편지(계시록)를 받아서 읽는 성도들이 직면하는 실제 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바로 로마 제국의 성도들에 대한 극심한 핍박에서 믿음을 지키고 구원받는 그 당시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을 신천지는 먼 훗날, 즉 2020년대의 한국의 상황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의 수가 14만 4천이라고 가르치면서 자신들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편지가 쓰여질 당시 즉 로마의 네로황제는 기독교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소멸시킬려고 하였을 때, 고난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인을 받는 사람의 수가 14만 4천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이마에 인치기’(계7:3), ‘인 맞은 자’(계7:4)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구원받는 사람의 이마에 실제로 도장을 찍듯이 무슨 표시를 한다기 보다, 예수 믿게 되는 은혜를 입어 죄용서와 성령의 임재를 누리는 성도가 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7:4).”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을 지키고 구원을 얻는 성도의 숫자가 14만 4천이라고 하였다. 즉 로마 제국의 핍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지키고 구원을 얻을 사람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는 실제로 구원을 받는 성도의 숫자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숫자가 아니고,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이 풍성하고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임을 알 수 있는데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계7:5-8).”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구원받은 사람이 14만 4천명이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정말 이스라엘의 한 지파 당 12,000명씩만 구원받게 하셨을까? 하는 말에는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그 정도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또한 예수 믿다가 유대교 당국자들의 핍박을 받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한 지파 당 12,000명을 정확하게 정하여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도 정말 넌센스이다. 예수님 믿고 극심한 환란을 당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구원에 이를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맞는 말이다.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 믿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어려웠으나, 참고 견디며 끝까지 주를 부인하지 않고 또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면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언급은 없었을까? 유대인들이 예수 믿은 후 유대교를 버렸음으로 인해 유대교의 핍박을 받는 성도들을 격려하신 후 하나님은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어 구원 받은 후 로마 제국의 극심한 핍박을 받는 성도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계7:9-10)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하더라.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위로하신 하나님께서 곧 바로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라는 말은 여러 이방 민족들을 뜻하는 말이다.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 성도의 수가 풍성하게 많다는 뜻이다.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는 말은 이방인으로서 예수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무수하게 많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당시 로마 제국의 여러 곳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많았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어 믿음을 지키고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당시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은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구원을 받는 성도의 풍성한 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며 또 그와 함께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 백성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도 신빙성이 있다. 당시 로마 제국의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성도들에게 지금 신천지가 가르치는 것처럼 2020년대에 한국에서 이만희를 믿어 구원을 받을 사람의 수가 14만 4천명이라고 하나님께서 편지를 보내셨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한편 먼 훗날에 해당되는 144000이라는 말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적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짐승표를 받게 할 때 당하는 환난 고통을 끝까지 견디며 짐승표를 받지 않고 환난을 통과한 마지막 시대 때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자들이 휴거의 반열에 선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면 무난하다고 본다. 환난에서 견디고 나온 자들이 주님오실 때 땅에서 휴거되는 에녹과 같은 성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