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
이수창 (摩聖,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 차 례 ▒
Ⅰ. 머리말
Ⅱ. 이역(異譯)의 발단과 그 원인
Ⅲ. 여러 경전에 나타난 dīpa의 번역 사례
1. 長部 및 長阿含에서의 번역예
2. 相應部 및 雜阿含에서의 번역예
3. 有部雜事 및 法句經에서의 번역예
4. 梵本 및 西藏本에서의 번역예
Ⅳ. 자귀의 법귀의 교설을 설하게 된 배경
Ⅴ. 맺음말
Ⅰ. 머리말 ▲ 위로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특수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불교만이 갖고 있는 특수성 가운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는 그 어떤 절대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어떤 특별한 권능을 지닌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서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있다.
난다여, 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형상(形相)을 보지 말라. 사문(沙門)이 소유한 견해를 따르지도 말며, 사문에게 공경심을 내지도 말라. ‘사문 고타마가 나의 위대하신 스승이다’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러나 다만 내가 스스로 증득(證得)한 법에 대하여 홀로 조용한 곳에서 사량(思量)․관조(觀照)․성찰(省察)하고, 항상 많이 수습(修習)하여 용심(用心)의 관찰한바 법을 따라 바로 법의 관상(觀想)에서 정념(正念)을 성취해 머물러 있음이 옳은 일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자신조차도 맹신하거나 맹종하지 말고 각자 스스로 진리를 수행해 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자신은 예경의 대상도 아니며, 승단의 지도자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붓다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팔리삼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定型句)이다.
atta-dīpā (bhikkave)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이 정형구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구들이여, 자기의 섬[自洲]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自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이 정형구는 불교의 특질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 정형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무아론파(無我論派)와 초월적 유아론파(超越的 有我論派)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베를린의 정신과 의사였던 파울 달케(Paul Dalke, 1865-1928)가 주장했고, 후자는 법관 출신이었던 게오르그 그림(Georg Grimm, 1868-1945)이 주장했다. 파울 달케는 철저한 무아론자(無我論者)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이었고, 게오르그 그림은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존재하는 오온 이외에 초월적인 자아(自我)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증거로 위 정형구에 나오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철학적인 문제에 접근하기에 앞서 초월적 유아론을 주장하는 쪽에서 증거로 삼고 있는 팔리문 정형구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번역상의 문제 즉, ‘attadīpa’와 ‘dhammadīpa’를 ‘자주(自洲) 법주(法洲)’ 혹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중 어느 쪽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붓다의 진의(眞意)에 적합한 것인가를 찾아보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필자가 이러한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이 輧低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불교관이 달라지며, 위에서 언급한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제공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역(異譯)의 발단과 그 연유를 살펴보고, 그런 다음 위 정형구가 실려있는 남전과 북전의 여러 경전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그 번역예를 분석해 봄으로써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이역(異譯)의 발단과 그 원인 ▲ 위로
초기경전을 중국의 역경승들이 처음으로 한역할 때, 각자 달리 번역하게 된 까닭은 원전이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같은 원전을 번역함에 있어서도 역경가에 따라 달리 번역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attadīpa’와 ‘dhammadīpa’의 정형구에 해당되는 원문과 여러 번역본들을 대조해 보니, 그 이역(異譯)의 원인은 팔리어(Pāli, 巴利語) ‘dīpa’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리스 데이비즈(T. W. Rhys Davids)와 윌리암 스테데(William Stede)가 편찬한 Pāli-English Dictionary(巴英辭典)에서는 팔리어 ‘dīpa’가 ①등불(a lamp), ②섬․대륙(island, continent) 등의 뜻이 있다고 했으며, 붓다닷따(A. P. Buddhadatta) 장로가 지은 Concise Pāli-English Dictionary에서는 ①등불(lamp), ②섬(island), ③돕다(help), 지탱하다(support) 등의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의 水野弘元著 パ-リ語辭典에서는 ‘dīpa’가 ①등(燈)․등화(燈火)․등명(燈明)의 뜻과 ②주(洲)․주저(洲渚)․도(島)․비호소(庇護所)의 뜻이 있다고 풀이했다. 이러한 ‘dīpa’의 세 가지 의미 중 ①과 ②는 경전에서 많이 쓰이고 있지만, ③의 뜻으로는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이 ‘dīpa’라는 단어를 등불과 섬 중에서 어느 의미로 사용했을까?
주지하다시피 부처님의 말씀은 붓다 재세시에도 그 이후 상당 기간이 지날 때까지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와 같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불설을 문자로 기록할 당시에는 붓다께서 ‘dīpa’를 어떤 의미로 말씀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장을 문자로 기록한 후 또다시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중국의 역경승들이 한역하기 시작했다. 이 때 어떤 역경가는 이 ‘dīpa’를 ‘등불’로 풀이했고, 또 다른 역경가는 ‘섬’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한역 경전들에서는 두 가지 번역이 모두 남아있다.
만일 붓다께서 팔리어(Pāli, 巴利語)가 아닌 산스끄리뜨(Sanskrit, 梵語)로 법을 설했다면, 쉽게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범어에서는 ‘등불’의 의미로 사용할 때는 ‘dīpa’이지만, ‘섬’의 의미로 쓰일 때는 ‘dvīpa’로 표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attadīpa’와 ‘dhammadīpa’를 설한 정형구에 해당되는 범본(梵本)과 서장본(西藏本)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의문과 논란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이것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많은 역경가들이 팔리문 ‘attadīpa’와 ‘dhamma-dīpa’라는 이 대목에 이르러 ‘등불’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섬’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고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5세기경 팔리삼장의 대주석가였던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인 것 같다. 붓다고사는 당시 싱할라어(Sinhala language)로 전해져 오던 삼장을 팔리어로 복원한 사람이다. 그가 싱할라어로 씌어진 삼장을 복원하면서 이 문제에 봉착하여 나름대로 고심했던 것 같다. 그 증거를 리스 데이비즈 부부가 영어로 번역한 『Cakkavattisīhanadā- sutta(轉輪聖王師子吼經)』의 각주(脚註)에서 발견할 수 있다.
“Dīpa는 등불 혹은 섬을 뜻하는데, 대양 가운데의 섬은 그 자체가 굳은 땅[육지]이 됨으로 붓다고사는 여기서 섬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역의 발단은 팔리어 ‘dīpa’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역의 원인도 역경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팔리어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어떤 번역이 가장 붓다의 원래 뜻에 가까운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자귀의 법귀의’를 설한 여러 경전들에서 ‘dīpa’가 어떤 역경가에 의해 어떻게 번역되었는가를 살펴보자.
Ⅲ. 여러 경전에 나타난 dīpa의 번역 사례
1. 長部 및 長阿含에서의 번역예 ▲ 위로
Dīgha Nikāya(長部)에서는 『Mahāprinibbāna-sutta(大般涅槃經)』와 『Cakkavatti- sīhanadā-sutta(轉輪聖王師子吼經)』에서 팔리문 정형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남전의 장부에 대응하는 북전의 장아함은 계빈국 삼장인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ha-yaśas)가 양주(凉州)의 축불념(竺佛念)과 함께 후진(後秦) 홍시(弘始) 16년(413 A.D.)에 왕명(王命)을 받아 북방소전(北方所傳)의 범본(梵本)을 기본으로 한역했다고 한다.
1) 『Mahāprinibbāna-sutta(大般涅槃經)』의 경우
남전의 대반열반경은 장부 제2 대품에 속한 열여섯 번째 경으로서, 제2장 26항에 팔리문 정형구가 나온다. 이 팔리본을 저본으로 한 영역본(英譯本)․독역본(獨譯本)․일역본(日譯本) 및 한역본(漢譯本)과 한글역본(譯本) 등이 있다. 먼저 각 역경가들이 이 팔리문 정형구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대조해 보자.
① 英譯本(T. W. & C. A. F. Rhys Davids): Therefore, O Ānanda, be ye lamps unto yourselves. Be ye a refuge to yourselves. Betake yourselves to no external refuge. Hold fast to the Truth as a lamp. Hold fast as a refuge to the Truth. Look not for refuge to any one besides yourselves.
② 獨譯本(K. E. Neumam): Darum, O Ananda, werdet ein Licht fur euch selbst. Werdet euch selbst zur Zuflucht. Suchet keine auBere Zuflucht. Haltet fest an der Wahrheit, die euere Zuflucht sei. Sucht nach keiner Zuflucht auBerhalb von euch selbst.
③ 日譯本(平等通昭):されば, 阿難よ, ここに自らを洲とし, 自らを依所として, 他人を依所とせず, 法を洲とし, 法を依所として, 他を依所とせずして住せよ.
④ 漢譯本(巴宙; W. Pachow): 因此, 阿難, 以自己爲明燈, 爲歸依, 勿以他人爲歸依, 以法爲明燈, 爲歸依, 勿以他人爲歸依.
⑤ 한글譯本(강기희 옮김):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들 비구도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며 타인을 귀의처로 하지 마라. 또 진리를 의지처로 하고 진리에 귀의할 것이며,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위 번역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영(英)․독(獨)․한역(漢譯)에서는 ‘dīpa’를 등불(lamp, 燈明)로 번역했고, 일역본(日譯本)에서만 섬(洲)으로 번역했다. 먼저 일역본부터 살펴보면, 이 경을 일본어로 번역한 平等通昭는 이 부분을 번역함에 있어서 왜 섬(洲)으로 번역했는가를 주(註)에서 밝히고 있다. 즉 “주(洲)의 원어 dīpa에는 주(洲)와 등명(燈明)의 두 가지 뜻이 있다. 불음(佛音)은 큰 바다의 가운데에 있는 섬(洲)의 뜻으로 주(註)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불음을 따라 ‘주(洲)’로 번역한다”고 했다.
그런데 리스 데이비즈 부부는 왜 ‘dīpa’를 등불(lamp)로 이해했을까? 그의 다른 번역 Cakkavattisīhanadā-sutta(전륜성왕사자후경)에서는 ‘dīpa’를 섬(island)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이 팔리문 정형구를 번역함에 있어서 무척 고심한 것 같다. 그래서 같은 Dīgha Nikāya에 속한 전륜성왕사자후경에서는 고주석(古註釋)을 근거로 섬으로 번역하면서도 대반열반경에서는 등불로 번역했다.
이것은 리스 데이비즈 부부가 ‘Attadīpa’를 ‘초월적 자아’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박사는 지적했다. 그 예로 현재 그의 부인(Mrs. Rhys Davids)과 그 학파들은 붓다의 가르침 속에 자아(自我)의 관념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 학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찬양하고 숭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교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명철하고 심오한 사상가라고 인정하는 붓다가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아트만(Ātman), 즉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영원한 존재. 다시 말하면 소아(小我)로서의 작은 개인적 자아(自我)가 아니라 대아(大我)로서의 커다란 자아를 인정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스 데이비즈 부부는 의도적으로 대반열반경에서 ‘dīpa’를 등불로 해석하여, ‘자아를 등불로 삼고’(Atta-dīpa), ‘자아를 의지처로 삼아라’(Atta-saraṇā)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월폴라 라훌라는 이러한 리스 데이비즈 부인의 번역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반열반경에서의 “Dīpa는 등불이 아니며 명백히 ‘섬’을 의미한다. Dīgha Nikāya의 주석서는 dīpa를 이렇게 설명했다. 큰 바다의 섬처럼 안전한 곳인 섬을 네 자신의 안식처로 하여 안주하라. 윤회는 보통 큰 바다, 즉 ‘윤회의 바다’(Saṁsāra-sāgara)로 비유된다. 안전을 위하여 바다에서 필요한 것은 섬, 고도(孤島)이지 등불이나 등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그의 저서 阿含經 이야기에서 팔리문 정형구를 “너희들은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法, 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라고 번역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여기서 섬(dīpa)이라 한 것은 강물 속의 육지, 또는 바다의 섬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는 한 가운데에서, 이것만은 의지할 수 있는 곳, 즉 확고한 의지처란 자기 자신과 법밖에 없다는 그것이 이 말씀의 요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법에 의해 제어되는 자기, 그것 밖에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는 의미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마스타니 후미오 역시 붓다고사나 월폴라 라훌라와 같이 ‘dīpa’를 의지처(依支處) 즉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이해했다.
다음의 독역본(獨譯本)과 파주(巴宙)의 한역본(漢譯本)은 리스 데이비즈 부부의 영역본(英譯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족사에서 발행한 강기희 옮김 붓다의 마지막 여로에서는 팔리문 정형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Attadīpa’와 ‘dhammadīpa’ 부분을 빼버렸다. 따라서 ‘dīpa’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고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무책임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대응하는 북전의 한역본은 다수의 이역(異譯)이 있다. 이 중에서 남전과 가장 내용이 비슷한 북전은 불타야사(佛陀耶舍)와 축불념(竺佛念)이 공역(共譯)한 유행경(遊行經)이다. 이 경은 장아함경(長阿含經) 2권에 실려 있으며, 초(初)․중(中)․후단(後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초단(初段)에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에 대한 교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경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 알아보자.
“是故, 阿難! 當自熾燃, 熾燃於法, 勿他熾燃., 當自歸依, 歸依於法, 勿他歸依.”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그러므로 아난아, 마땅히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부디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자기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부디 다른 데에 귀의하지 말라” 라는 뜻이다.
불타야사와 축불념은 ‘dīpa’를 치연(熾燃)으로 번역하였는데, 이 치연(熾燃)을 한글대장경에서는 등불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치연(熾燃)을 등불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을 밝힌다’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當自熾燃 熾燃於法’을 ‘마땅히 자기를 밝히고 법을 밝혀라’라고 해석 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본래의 뜻과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최근 중화민국 불광산(佛光山)에서 편찬한 불광대장경(佛光大藏經) 아함장(阿含藏) 장아함경(長阿含經) 1권, 유행경(遊行經)의 각주(脚註)에서 ‘중생이 생사(生死)의 바다 가운데 있을 때, 섬(島․洲)을 의지처(기댈 곳)로 삼아야 마땅히 구제되기 때문에 ‘dīpa’를 섬으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밝히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유행경을 제외한 다른 번역본에서는 ‘자귀의 법귀의’에 대한 교설이 발견되지 않는다.
2) 『Cakkavattisīhanadā-sutta(轉輪聖王師子吼經)』의 경우
남전 팔리본 전륜성왕사자후경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똑같은 정형구로 되어 있다. 이 팔리본을 저본으로 한 영역본과 일역본을 대조해 보자.
① 英譯本(T. W. & C. A. F. Rhys Davids): “Live ye as islands unto yourselvers, brethren, as refuges unto yourselves, taking no other as your refuge; live with the doctrine (the Norm), as your island, with the Norm as your refuge, taking no other as your refuge.”
② 日譯本(靑原慶哉): “自らを島とせよ, 自らを歸依處とせよ, 他を歸依處とする勿れ. 法を島とせよ, 法を歸依處とせよ, 他を歸依處とすること勿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리스 데이비즈 부부는 대반열반경과는 달리 전륜성왕사자후경에서는 ‘dīpa’를 섬(island)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들은 왜 ‘dīpa’를 ‘island’로 번역하는가 하는 근거, 즉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붓다고사가 ‘dīpa’는 여기서 섬(island)의 의미로 사용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팔리본을 일본어로 번역한 靑原慶哉도‘dīpa’를 섬(島)으로 번역하고 있다.
남전의 전륜성왕사자후경에 대응하는 한역본은 ① 후진(後秦)의 불타야사와 축불념이 공동으로 번역한 轉輪聖王修行經(장아함 제2분)이 있고, ② 동진(東晋)의 구담승가제파(瞿曇僧伽提婆)가 번역한 轉輪王經(중아함 王相應品)이 있다. 두 경전의 번역 내용을 살펴보자.
① 轉輪聖王修行經(佛陀耶舍․竺佛念共 譯): 汝等 當自熾燃, 熾燃於法, 勿他熾燃., 當自歸依, 歸依於法, 勿他歸依.
② 轉輪王經(瞿曇僧伽提婆 譯): 諸比丘. 當自然法燈 自歸依法. 莫然餘燈 莫歸餘法.
위의 전륜성왕수행경은 불타야사와 축불념이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앞의 유행경과 마찬가지로 ‘dīpa’를 치연(熾然)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구담승가제파가 번역한 전륜왕경은 ‘dīpa’를 완전히 등(燈)으로 해석하고 있다. 구담승가제파는 다른 역경가와는 달리 번역이 독특하다. 그가 어떤 원본을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2. 相應部 및 雜阿含에서의 번역예 ▲ 위로
Saṃyutta Nikāya(相應部)는 경전성립사적으로 팔리삼장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되었고, 북전의 잡아함은 한역 사아함(四阿含) 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역경되었다고 한다. 이 상응부와 잡아함경 도처에서 ‘자귀의 법귀의’에 대한 교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상응부경전 3권, 제1 『Khandha-vagga(蘊相應)』에는 ‘자귀의 법귀의’만을 설한 별도의 독립 경전이 있다. 그것이 바로 『Attadīpa-vagga(自洲品)』이다. 이 경은 본 논문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Attadīpa’가 경의 제목일 뿐만 아니라, ‘자귀의 법귀의’에 대한 교설만을 별도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Khandha-vagga(蘊相應)』의 경우
『Khandha-vagga(蘊相應)』의 『Attadīpa-vagga(自洲品)』 역시 팔리문 정형구는 동일하며, 이 팔리본을 저본으로 한 영역본과 일역본이 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한역본은 잡아함경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역본을 대조해 보자.
① 英譯本(F. L. Woodward): Do ye abide, brethren, islands unto yourselves, refuges unto yourselves: taking refuge in none other; islanded by the Norm, taking refuge in the Norm, seeking refuge in none other.
② 日譯本(渡邊照宏): 諸比丘よ, 自を洲とし自を依とし異を依とせず法を洲とし法を依とし異を洲とせずて住せよ.
③ 漢譯本(求那拔陀羅): 諸比丘. 住於自洲. 住於自依. 住於法洲. 住於法依. 不異住 不異依.
위 세 역본에서는 모두 ‘dīpa’를 섬(洲)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영어로 번역한 우드워드는 주(註)에서 섬으로 번역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 번역자는 별다른 주석을 달고 있지 않다. 또한 구나발타라도 섬(洲)으로 번역했다.
2) 『Satipaṭṭhāna-saṃyutta(念處相應)』의 경우
상응부경전 권5 제3 『염처상응』 제2에 『나란다-박가(Nālandā vagga, 那羅揵陀品)』가 있다. 이 나란다-박가에 쭌다(Cuṇḍa, 純陀) 항과 쩨라(Ce-ḷa, 支羅) 항에 ‘자귀의 법귀의’에 관한 교설이 나온다. 이 두 가지는 내용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쭌다 항의 번역예만 살펴본다.
쭌다 항에 나오는 팔리문 정형구는 앞과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이 팔리본을 저본으로 한 영역본과 일역본이 있고, 이에 대응하는 한역본은 잡아함경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역본을 대조해 보자.
①英譯本(F. L. Woodward): Wherefore, Ānanda, do ye abide grounded on self, self-refuged, taking refuge in none other. Do ye abide grounded on the Norm, taking refuge in the Norm, having none other refuge.
②日譯本(立花俊道): 阿難よ, 然らば 自を洲とし自を依處として他を依處とせず, 法を洲とし法を依處として 他を依處とせず住せよ.
③漢譯本(求那拔陀羅): 是故阿難. 當作自洲而自依. 當作法洲而法依. 當作不異洲 不異依.
위 세 가지 역본 중 영역본은 ‘dīpa’를 섬이라는 말 대신에 대지(ground)로 번역했고, 일역과 한역은 동일하게 섬(洲)으로 번역하고 있다.
3) 『Gāmaṇi-saṃyutta(聚落主相應)』의 경우
상응부경전 4, 제8 『취락주상응』제7에 데사나(Desanā, 說敎) 항이 있다. 이 항에서는 동일한 팔리문 정형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본래 ‘attadīpa’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의 팔리문과 영역 및 일역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巴利本: Seyyathāpi gāmaṇi yaṃ aduṃ khettam aggam evameva mayham bhikkhu-bhikkhuniyo, tesāhaṃ dhammaṃ desemi ādikayāṇaṃ majjhe kalyāṇam pariyosānakalyāṇaṃ sātthaṃ savyañjanaṃ kevalaparip-
uṇṇam parisuddham brahmacariyam pakāsemi. Taṃ kissa hetu, ete hi gamaṇi maṃdīpā maṃleṇā maṃtāṇā maṃsaraṇā viharanti.
② 英譯本: Well, headman, just like that excellent field are my ordained disciples, both men and women. I teach them the Norm that is lovely in its beginning, lovely in its middle and lovely in its ending, both in spirit and in letter. I make known to them the righteous life that is wholly perfect and utterly pure. Why is that? Because, headman, these people abide with me for their island, with me for their cave of shelter, me for their stronghold, me for their refuge.
③ 日譯本 : 聚落主よ, 譬へばこの勝れたる田, 如くなるは余の比丘比丘尼なり. 彼等に對して余は, 初め善く中ごろに於て善く終り善く, 意義あり文言調へる法を說き,一切完具し,完全に淸淨なる梵行を說き明す. これ何の故ぞ. 聚落主よ,彼等は余を燈とし余を窟とし,余を庇護とし余を歸依として住すればなり.
④ 한글 譯本: 이와 같이 가마니야, 저 밭들 중 최고의 밭은 바로 나(=세존)의 비구 비구니들이다. 그들에게 나는 법을 설하니 처음도 좋고 가운데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의미와 문장을 갖춘 온통 충족되고 순결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그것은 왜냐? 가마니야, 실로 이들은 나를 섬(洲)으로 삼고, 나를 동굴(洞窟)로, 나를 피난처(避難處 혹은 庇護所)로, 나를 귀의처(歸依處)로 삼아 머물게[住]하기 때문이다.
위 예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는 dīpa(洲)․leṇa(洞窟)․tāṇa(避難處)․saraṇa(歸依處)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동의어들은 모두 어떤 구체적인 곳(장소)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등불(lamp)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사실 필자의 관심은 처음부터 ‘붓다께서 어떤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이러한 필자의 의문에 해답을 제시해 준 경증(經證)이 바로 위 인용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Encyclopaedia of Buddhism』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사전의 ‘Attadīpa sutta’ 항에 의하면, “‘dīpa’라는 단어는 ‘섬’(island) 혹은 ‘빛’(light)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이 경우는 문맥에 따라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데, 주석서인 Sāratthappakāsinī(相應部註)에서는 이 술어가 다음과 같은 동의어와 함께 설명되고 있다. 즉 피난처(tāṇa)․동굴(leṇa)․운명(gati)․목적지(parāyaṇa, 到彼岸)․의지처(saraṇa, 歸依處) 등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Pali-English Dictionary』에서도 ‘dīpa'는 island(섬), continent(대륙, 본토, 육지), terra firma(견고한 땅), solid foundation(견고한 토대 혹은 기초), resting-place(휴식처), shelter(피난처), refuge(의지처)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종종 tāna, lena, saraṇa, patiṭṭhā와 결합하여 쓰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위 팔리경전과 주석서에서 분명히 ‘dīpa’를 leṇa, tāṇa, gati, parāyaṇa, saraṇa 등과 동의어로 해석한다. 그럼으로 ‘자귀의 법귀의’를 설한 팔리문 정형구에서는 ‘dīpa’를 섬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일본어로 번역한 다치바나 슌도(立花俊道)는 같은 상응부에 속한 『염처상응(Satipaṭṭhāna-saṃyutta)』에서는 ‘Attadīpa’를 ‘자주(自洲)’로 번역해 놓고, 『취락주상응(Gāmaṇi-saṃyutta)』에서는 ‘dīpa’를 ‘등(燈)’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역자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일어난 실수로 보인다.
3. 有部雜事 및 法句經에서의 번역예 ▲ 위로
1) 『有部雜事』의 경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에서 전승한 유부잡사에 ‘자귀의 법귀의’에 대한 교설이 나온다. 이 유부잡사는 당(唐)의 의정(義淨)이 번역했다. 그는 ‘자귀의 법귀의’의 정형구를 “自爲洲渚 自爲歸處 法爲洲渚 法爲歸處 無別洲渚 無別歸處”라고 번역했다. 이것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자신을 피난처의 섬이나 물가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며, 법을 피난처의 섬이나 물가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니라. 별도의 피난처로서의 섬이나 물가가 없으며, 별도의 귀의처가 없느니라”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의정도 ‘dīpa'를 섬이나 물가[洲渚]로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Dhammapada(法句經)』의 경우
팔리삼장 중에서 세계 각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된 경전이 『Dhammapada(법구경)』일 것이다. 이 법구경에는 팔리문 정형구가 없다. 하지만 제12장 ‘자신의 장’(Atta vaggo, The self)에 나오는 160게(偈)는 초월적 유아론의 논증으로 자주 인용되는 매우 중요한 게송이다. 이 게송을 각 역경가들이 어떻게 번역했는지 살펴보자.
① 巴利本: Attā hi attano nātho, ko hi nātho paro siyā. Attanā'va sudantena, nāthaṃ labhati dullabhaṃ.
② 英譯本: ⓐ Translated by Radhakrishinan; The self is the lord of self; who else could be the lord? With self well subdued a man finds a lord who is difficult to obtain. ⓑTranslated by Narada Thera; Oneself, indeed, is one's saviour, for what other saviour would there be? with oneself well controlled one obtains a saviours difficult to find. ⓒTranslated by Walpola Rahula; Oneself is one's own protector(refuge); what other protector(refuge) can there be? With oneself fully controlled, one obtains a protecting(refuge) which is hard to gain. ⓓTranslated by Piyadassi; Oneself is ones own protector (refuge); who else could the protector be? With oneself well-controlled one obtains a protection which is difficult to obtain. ⓔTranslated by Ācharya Buddharakkhita; One truly is the protector of oneself, who else could the protector be? With oneself fully controlled, one gains a mastery that is hard to gain.
③ 日譯本(迅直四郞 譯): 自己の依所は自己のみなり. 他に如何なる依所あらんや. 自己のよく調御せられたる時 人は得難き依所を獲得す.
④ 한글譯本: ⓐ 徐景洙譯 자기만이 자기의 주인이다. 누가 따로 주인이 될 수 있으랴 ? 자기만 잘 억제되면 얻기 힘든 주인을 얻으리라. ⓑ 法頂譯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는다.
위 각 역본을 대조해 본 결과, 라다끄리쉬난(S. Radhakrishinan)이 유일하게 ‘Attā hi attano nātho’를 ‘자기는 자기의 주인(lord)이다’라고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리스 데이비즈 부부와 마찬가지로 붓다가 소아(小我)를 비난한 것이지 대아(大我) 혹은 보편아(普遍我)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이러한 라다끄리쉬난의 번역은 매우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atta’라는 말은 영혼이란 말을 지닌 자아(自我)가 아니다. 팔리어에서 ‘atta’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귀(再歸)대명사나 부정(不定)대명사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atta’는 ‘나 자신’, ‘너 자신’, ‘그 자신’, ‘사람’, ‘우리 자신’ 등으로 쓰인다. 또한 ‘nātho’란 말은 주인(主人, lord)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처’, ‘의지처’, ‘도움’, ‘보호’ 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러므로 ‘Attā hi attano nātho’란 말은 ‘자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처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 형이상학적인 영혼이나 자아란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단지 너 자신은 너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지 다른 어떤 것에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또 법구경의 고대 싱할라 주석서에서도 ‘nātho’는 pihita vanneya 즉 ‘안식처(보호, 도움)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Encyclopaedia of Buddhism』에서도 “여기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그 밖의 다른 귀의처 혹은 의지처를 취하지 말라(Anañña saraṇa)고 가르쳤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불가사의한 힘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마음의 갈등 원인은 자신으로부터 생긴 것이므로 거기서부터 정지 혹은 제어하려고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때때로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하라’ 라는 충고로 잘못 이해되었다. 여기의 ‘Atta’는 Ātman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이 동의어들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anañña로 쓰인다. 이것은 그가(자신이) 만든 문제는 자신이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일론 전통의 고주석서에 충실한 학자들은 모두 ‘자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처이다’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법구경 중 서경수 역과 법정 역은 라다끄리쉬난의 영역에 따라 ‘자기의 주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자칫하면 붓다가 그렇게 강조하고 강조한 유아(有我)의 상견(常見), 즉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 혹은 유아론(有我論)에 빠질 염려가 있다.
위 법구경 제160게는 “자기는 자기 자신의 의지처이다. 어디에서 다른 의지처를 구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제어하면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법구경 제236게에서도 “그대는 스스로를 섬(피난처)으로 만들어라”는 대목이 나온다.
4. 梵本 및 西藏本에서의 번역예 ▲ 위로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팔리어 ‘dīpa’라는 단어는 등불과 섬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범어와 티베트어에서는 등불(dīpa)과 섬(dvīpa)이 완전히 구별된다. 따라서 ‘attadīpa’와 ‘dhammadīpa’를 설한 정형구에 해당되는 범본(梵本)과 서장본(西藏本)을 대조해 보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돈황에서 발견된 필사본 가운데 범어로 씌어진 『Das Mahāparinir-vāṇasutra(대반열반경)』는 1950년대 에른스트 발트슈미트(Ernst Waldschmidt)가 편집하여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에 해당되는 서장본도 현존하고 있다.
① 梵本: ānadaitarhi mamvātyayād ātmadvīpair vihartavyaṃ ātmaśara-
ṇair dharmadvīpair dharmaśaraṇair ananyadvīpair ananyaśaraṇaih.
② 西藏本: kun dga bo de Ita bas na da Ita 'am 'adas kyaṅ ruṅ gan su dag bdag ñid gliṅ daṅ bdag ñid skyabs daṅ chos kyi gliṅ daṅ chos kyi skyabs kyis gnas par byai. gliṅ gžan daṅ skyabs gžan gyis ni ma yin no.
위에서 인용한 범본과 서장본에서도 등불(dīpa)이 아닌 섬(dvīpa)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범본과 서장본 외에도 불교혼성범어(Buddhist Hybrid Sanskrit, BHS)로 씌어진 대중부 계열의 『Lokottaravādin(說出世部)』의 Mahāvastu(大事)와 중앙아시아의 간다라 언어로 씌어진 Dharmapada(법구경)에서도 등불(dīpa)이 아닌 섬(dvīpa)로 나타난다. 따라서 붓다께서 처음 ‘attadīpa와 dhammadīpa’의 정형구를 사용할 때는 등불이 아닌 섬의 의미로 사용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attadīpa와 dhammadīpa’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아닌 ‘자주(自洲) 법주(法洲)’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팔리경전에서는 그 원래의 뜻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붓다고사는 주석서에서 그 원의가 dvīpa(섬)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리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서양의 학자들은 이러한 범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번역하였기 때문에 등불로 잘못 번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Ⅳ. 자귀의 법귀의 교설을 설하게 된 배경 ▲ 위로
자귀의(自歸依)와 법귀의(法歸依)의 교설을 설하게 된 배경은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잘 묘사되어 있다.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붓다는 한 때 벨루와(Beluva)라는 한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 3개월 전이었다. 붓다가 80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심한 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붓다는 그의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서 자신의 질병을 극복하지 않고 죽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용기와 결단으로 모든 고통을 이기고 병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여전히 허약했다. 회복된 후에 거처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때 붓다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 아난은 존경하는 스승에게 다가가 그 곁에 앉아서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의 건강을 돌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병상을 돌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여래의 건강을 보건대 이미 황혼이 드리워졌습니다. 제 솜씨는 더 이상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더구나 아무런 위안도 없습니다. 저는 여래가 승단에 대해 가르침을 남기고서야 비로소 열반에 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붓다는 자비와 인간적인 감정에 가득 차서 그의 헌신적이고 사랑스런 제자에게 “아난아, 승단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나는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을 구분치 않고 진리(法)를 가르쳤다. 진리에 관해서 사권(師拳 acariya mutthi; 스승의 곽 쥔 주먹)처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진정으로 승단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거나 승단이 그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그의 가르침을 따라라. 그러나 여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승단이 누구에 의해 지도되어야 하는가? 아난아, 나도 이제 80노인이다. 낡은 수레는 다시 수리되어야 갈 수 있듯이 여래의 몸은 다시 수리되어야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아난아, 너 자신을 너의 섬(島, 依支處)으로 하고 법을 너 자신의 귀의처로 하지, 다른 누구도 너의 귀의처로 하지 말며, 법을 너의 섬으로 하고 법을 너 자신의 귀의처로 하지 다른 무엇도 너의 안식처로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붓다가 아난에게 전하려고 했던 가르침은 아주 명백하다. 아난은 슬프고 괴로웠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 죽은 후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무리들이 고독하고 의지할 곳이 없으며, 안식처가 없고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붓다는 그를 위로하고 용기와 자신을 불어넣어 주면서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그가 가르친 법에 귀의하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한역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도 ‘자귀의와 법귀의’의 교설을 설하게 된 배경이 묘사되어 있다. 붓다께서 마유라국(摩兪羅國) 발타라(跋陀羅) 하천 근처 산개암라수림(傘蓋菴羅樹林) 중에 계셨다. 이 때는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 존자(目健連尊者)가 열반(涅槃)한지 얼마 되지 않은 15일 포살일(布薩日)이었다. 그 때 세존께서 대중 가운데 조용히 앉아 계시다가 대중들을 살펴보니, 사리불과 목건련의 열반으로 말미암아 모두들 슬픔에 젖어 있었다.
세존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시길, “나의 성문(聲聞) 제자 중에 설법(說法)․교계(敎誡)․교수(敎授)․변설(辨說)에 만족할 만한 사람이 둘 있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재산이 있다. 그것은 전재(錢財)와 법재(法財)이다. 전재는 세상 사람들을 쫓아 구하고, 법재는 사리불과 목건련을 쫓아 구한다. 여래는 시재(施財, 世財)와 법재(法財)를 이미 여의었다. 너희들은 사리불과 목건련의 열반으로 말미암아 슬퍼하거나 근심스러워 하거나 고뇌하지 말라.
비유하면, 뿌리와 가지, 꽃과 열매가 무성한 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큰 가지가 먼저 잘리는 것과 같고, 또한 보산(寶山)의 큰 바위가 먼저 붕괴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래의 무리 가운데 사리불과 목건련 두 큰 성문(聲聞)이 먼저 열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슬픔과 근심, 고뇌를 일으키지 말라.“라고 전제하고 ‘자귀의 법귀의’ 대한 교설을 설했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 이 교설을 설하게 될 때에는 붓다 자신의 열반과 사리불 목건련의 열반 등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거나, 교단 내에 큰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때,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나약해 질 때,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때 붓다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은 본래 없다. 나(我)라고 주장하는 것도 분석해 보면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며,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상호 의존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따라서 절대 불변의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섬이나 피난처․구호소․귀의처로 삼아야 하며, 법을 섬이나 피난처․구호소․귀의처로 삼아야지 별도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설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법을 섬이나 피난처․구호소․귀의처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상응부경전의 『자주품(自洲品)』에서 제시해 놓고 있다. 그것이 곧 ‘사념처관(四念處觀 Catusatipaṭṭhānas)’이다. 이 사념처관(身․受․心․法)의 수행을 통해 스스로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증득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Ⅴ. 맺음말 ▲ 위로
지금까지 불교의 특질을 나타내는 교설 가운데 하나인 팔리문 정형구에 나오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번역에 따른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번역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팔리경전에서 발견되는 ‘attadīpa와 dhammadīpa’를 현재의 번역가들은 물론 과거의 중국 역경승들도 각자 달리 번역하였다. 이러한 다른 번역의 원인은 팔리어 dīpa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 단어는 등불(lamp)과 섬(island)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등불과 섬 중에서 어느 의미로 사용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남․북전의 원문과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붓다는 여기서 섬의 의미로 사용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경전적 증거[經證]가 바로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과 주석서에서 ‘dīpa’는 피난처(tāna), 동굴(leṇa), 운명(gati), 목적지(parāyaṇa), 의지처(sara-ṇa) 등과 같은 동의어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증거는 ‘attadīpa와 dhammadīpa’를 다루고 있는 팔리본에 대응하는 범본과 서장본은 물론 간다라 언어로 씌어진 법구경에서도 등불(dīpa)이 아닌 섬(dvīpa)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붓다께서 처음 ‘attadīpa와 dhammadīpa’의 정형구를 설할 때에는 등불이 아닌 섬의 의미로 사용했음이 거의 확실해졌다. 따라서 ‘attadīpa와 dhammadīpa’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아닌 ‘자주(自洲) 법주(法洲)’임이 밝혀진 것이다.
한편 붓다께서 ‘자귀의(自歸依)와 법귀의(法歸依)’의 법문을 설하게 된 배경은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였다. 이 때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과 법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과 법을 섬이나 피난처, 구호소, 귀의처 등으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상응부경전에서 제시해 놓았다. 그것이 곧 사념처관(四念處觀, catusatipaṭṭhānas)이다. 이 사념처관(身․受․心․法)의 수행을 통해 스스로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제어
자기의 섬[自洲] 법의 섬[法洲],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atta-dīpa dhammadīpa, atta-saraṇā dhamma-saraṇā).
A study on the translation of attadīpaand dhammadīpa
Lee Soo-chang(Ma Sung)
This paper deals with some questions arising from the translation of attadīpa and dhammadīpa in the Pāli Canon. That is, it is an attempt to research thoroughly into the Buddha's original intention, when attadīpa and dhammadīpa are put into local languages. This seemingly trivial matter of translation is actually a very important subject because it has been the cause of misunderstanding the Doctrine of No-Self(Anattavāda) in Buddhism.
Not only modern translators, but the Chinese translators of the Tripiṭaka in the past as well, translated attadīpa and dhammadīpa revealed in the Pāli Nikāya into various versions, considerably different from each other. The fundamental reason for the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the text lies in the term dīpa in the Pāli language. The word dīpa has two distinctive senses of island and lamp(light). Comparative investigations into the Buddhist Scriptures in the Pāli Nikāya, the Chinese Āgamas and several other translations are made to reveal how the Buddha used the word in question, either in the sense of island or of lamp. It is confirmed as the result of the comparative study that the Buddha here used the term in the meaning of island.
The scriptural evidence is that the word 'dīpa' was used with the synonyms such as shelter(tāna), cave(leṇa), destiny(gati), goal(parāyaṇa), and refuge(saraṇa) in the Saṃyutta Nikāya and its Commentaries. And the more apparent proof is in the representation of the word 'dīpa' as island not lamp in the Sanskrit Scriptures, the Tibetan Scriptures, and even in the Dharmapada written in Gāndhārī corresponding to the Pāli Nikāya which deals with attadīpa and dhammadīpa. It is inferred from the examined data that the Buddha almost certainly used the term in the meaning of an island when he preached the set-form verse of attadīpa and dhamma-dīpa for the first time. Therefore, it is made clear that attadīpa and dhammadīpa are translated into 'live ye as islands unto yourselves' and 'live with the doctrine, as your island', but not into 'be ye lamps unto yourselves' and 'hold fast to the Truth as a lamp'.
On the other hand, the Buddha's atta-saraṇā and dhamma-sara-ṇā discourse was delivered on an extremely difficult occasion that he must endure suffering as a human being. At that time, the Buddha gave with great emphasis to his disciplines the lesson that 'be ye a refuge to yourselves and a refuge to the Truth'. And in the Saṃyutta Nikāya, the Buddha presented to his followers the way of practicing concretely on taking refuge in themselves and the Truth, as an island, shelter, cave, goal, etc. That is the four satipaṭṭhānas. Every one can achieve an arhantship or attain nibbāna through practices of the four satipaṭṭhānas(kāya, vedanā, citta, dhamma).
[불교학연구 Vol.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