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산골에 왜 고서점 마을이 있을까. 마을 전체가 헌책방으로 뒤덮인 것은 불과 반세기 전 일이다. 옥스퍼드대학 출신 리처드 부스(62)가 1961년 고향으로 돌아와 시작한 사업이 낙후돼 가던 탄광촌을 한 해 50만 명이 찾는 세계적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부스는 먼저 쓸모없던 중세 시기의 성(城)과 극장, 소방서, 빈집 등을 사들였다. 그리고 전 세계를 돌며 고서들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아 자신이 세운'헌책 왕국'의 서가에 차례차례 들여놨다. 심지어 성벽 자체를 서가로 꾸몄다. 헤이 온 와이의 서가는 낡은 농가와 창고 등을 개조해 만든 것이 많다.
부스가 서점으로 개조한 헤이 성은 이 마을 언덕 꼭대기에 있다. 100만여 권의 헌책과 희귀 고서가 알파벳 순서로 3개 층에 촘촘히 진열돼 있다. 14세기 책부터 최근 나온 신간까지 연대도 다양하고 규모도 방대하다. 특정 주제에 관한 전문서들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이웃들이 운영하는 서점들도 소박한 개성이 넘친다. 19세기 소설, 추리 소설, 그림책, 건축, 원예 등 분야별로 전문화돼 있는가 하면 심지어 벌이나 권투 등 지극히 좁은 주제의 책도 주인이 척척 구해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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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매입한 과정도 재미있다. 리처드 부스의 자서전 『헌책방 마을 헤이 온 와이』에 따르면 고서의 가치를 잘 모르는 지방 유지를 꼬드겨 어마어마한 장서를 얻기도 한다. “얼마면 되겠느냐”는 부스의 물음에 그는 “암캐 서너 마리 살 돈이면 되지 뭐…”라고 답변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너무 많은 책을 사들이는 바람에 한때 파산의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서가가 불에 탄 적도 있다. 어쨌든 헤이 온 와이에 가면 ‘어떤 책도 구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번지면서 전 세계 고서 수집가들이 모여들었다.
77년 독립국 선포, 쌀종이 화폐 발행
부스가 처음 고서점을 시작할 때 마을 사람들은 부스의 행동을 이상하게만 여겼다. 부모는 명문대 보내 놨더니 취직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고 한숨을 쉬고 이웃은 조롱 섞인 농담을 던졌다. “장담컨대 내가 아는 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 책을 안 보거든.” 그러나 중고 서적을 사고파는 게 여러모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데는 점차 수긍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기행’이 언론의 관심을 받자 주민들이 하나 둘 동참했다. ‘대형 마트에선 살 수 없는 물건’이란 슬로건 아래.
1977년 4월 1일 만우절, 부스는 헤이 온 와이를 독립국으로 선포하고 스스로 왕좌에 오른다. 쌀 종이로 된 먹는 화폐도 만든다. 나아가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거대 자본의 침투, 영국 관료들의 몰개성적인 지역 관광 정책으로 지방이 죽어간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헌책왕 부스의 괴짜 같은 마케팅 전략에다 영국인들의 조금은 각별한 기질과도 맞아떨어져 이 마을은 '고서적 왕국'이란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헤이 성의 직원 마이크 스네이프(27)는 “우리는 원래 쓰던 것을 좋아한다. 책은 또 볼 수 있는 거고 버리면 환경에도 안 좋다. 영국은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것들의 의미를 알아주는 전통이 깊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오래되면 될수록 유물로서의 가치가 격상된다. 예술 제본이나 북아트가 발달한 것도 이 덕분이다. 영국은 공예 예술가이자 책 디자이너인 윌리엄 모리스의 나라 아닌가. 책을 앤티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이 마을엔 골동품 가게와 갤러리들도 즐비하다. 찻집과 식당, 작지만 기품 있는 여관도 여럿 생겼다. 매년 5월이면 ‘헤이 문학 축제’가 열려 닷새간 콘서트, 시낭송 대회가 열린다. 고서점 동네는 책도 100만 권 넘게 팔리지만 관광객들이 즐기고 갈 수 있는 문화공간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 영국에서 고서점들이 즐비한 곳은 런던 채링 크로스 거리다. 대표적 대형 서점 포일스(Foyles)와 학술 전문 블랙웰(Blackwell), 대형 체인 워터스톤(Waterstone), 미국 체인 보더스(Borders)뿐만 아니라 고전 셰익스피어와 추리소설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등을 취급하는 고서점을 레스터 스퀘어 가든 근처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포일스의 서가는 너무 오래돼서 어떤 곳은 옛 서적 냄새가 코를 찌른다. 뉴욕 작가 헬렌 한프의 자전적 소설 『채링 크로스 84번가』의 배경도 여기다.
“저는 속표지나 책장 모퉁이에 적혀 있는 글을 참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누군가 보았을 그 책장을 넘기면서 느껴지는 동질감이 좋아요.” 잉크 냄새 나는 새 책보다 헌책을 갖고 싶은 한프는 절판 서적 전문인 84번가의 ‘마크스’ 서점 직원에게 편지를 써 빈티지 북을 달라고 요청한다. 소설에는 전형적인 과묵한 영국 청년 프랭크와 한프 간의 책을 통한 20년 서신 우정이 담겨 있다.
프랑스·벨기에 시골에도 ‘古書 마을’
영국도 출판시장 전체가 위기를 맞은 건 사실이다. 대형 체인 서점들도 온라인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북비즈니스에 밀리는 마당에 고서점들이 설 땅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헌책의 유통체계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뛰어나다. 앤티크 시장과 채리티 숍이 워낙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헤이 온 와이를 벤치마킹한 책 도시는 네덜란드·노르웨이·이탈리아·벨기에·핀란드·독일·프랑스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벨기에의 책 마을 레뒤(Redu)는 1984년 기자 출신 노엘 엉슬로가 해발 450m의 숲 지대에 창고를 개조해 서점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프랑스의 몽톨리외(Montolieu)도 인구 1000여 명의 시골이지만 고서 12만 권을 갖고 있다. 한 해 방문객은 10만 명에 이른다.
프랑스는 센 강변을 따라 고서점이 많다. 특히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가 유명하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주연의 영화 ‘비포 선셋’에 나온 이 가게는 오랜 역사와 작가의 서재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1919년부터 22년간 이 서점을 운영한 실비아 비치는 당시 영문학에 목말라 있던 파리 지성인들의 감수성을 사로잡았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내외 작가들의 사랑방이 됐다. 앙드레 지드, F 스콧 피츠제럴드,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등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년 후(64년) 다시 세워진 이 서점은 프랑스 고서점의 대표 주자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