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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도기(陶器), 자기(瓷器), 사기(沙器), 토기, 질그릇 따위를 통틀어 말한다. 토기와 도자기는 점력(粘力)을 갖춘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질[胎土]로 형태를 만들고 이것을 불에 구워낸 것이다. 토기를 만들려면 점력을 가진 흙이면 대체로 질로 사용할 수 있으며, 토기를 구워내는 화도(火度)는 600℃ 이상에서 800℃ 정도이고 경우에 따라서 1,000℃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기전 1만년에서 6000년경 사이이며, 우리나라에서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기전 6000∼5000년경이었다.
토기를 질로 만들어 불에 굽지 않고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이었고 뒤에도 매우 제한된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처음 토기를 만들었을 때는 질을 앙금짓기[水飛: 혼합된 점토와 원료를 물에 풀어서 가라앉혀 앙금만 걷어서 쓰는 것)하지 않고 그릇을 만들어 600℃ 정도의 낮은 화도에서 구워냈으며 가마도 없었다.
사람의 지혜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질을 앙금짓기를 하고 토기를 구워내는 화도를 높이고, 높은 화도에 견디어내는 질을 찾아내고, 가마를 만들고 가마도 높은 화도를 견디어내는 가마로 점차 바꾸어나가면서 저화도(低火度) 연질토기(軟質土器)에서 더욱 발전하여 1,100℃ 이상 1,200℃의 고화도(高火度) 경질토기(硬質土器:炻器)를 만들게 되었고,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따라서, 도자기는 넓은 의미의 토기·도기(陶器)·석기(炻器)·자기(磁器:瓷器)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도기는 900∼1,000℃ 내외의 화도에서 산화번조(酸化燔造: 가마에 불을 땔 때 산소를 많이 들여보내는 방법. 결과, 토기는 황색·갈색·적색을 띠며, 청자와 백자는 황색이나 갈색을 머금게 됨.) 위주로 구워내며 표면에 유약(釉藥)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간단한 도기의 개념이지만, 도기라는 것은 그 범위가 넓어 그 밖에도 일부 반환원상태(半還元狀態)의 토기를 도기라고도 하며, 1,000℃ 이상의 높은 화도에서 여러 가지 회유(灰釉: 나뭇재나 석회로 만든 잿물)를 발라 산화번조한 토기를 지칭하기도 하며, 연유(鉛釉)를 입힌 모든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석기는 1,100℃ 이상의 높은 화도에서 주로 환원번조(還元燔造: 산화번조와 반대 방법으로, 가마의 온도가 1,100℃ 이상일 때, 땔감을 많이 넣고 산소를 막아 불완전연소가 되게 하는 방법. 결과, 토기는 회색·회청흑색이 되고, 백자는 담청색을 머금고, 청자는 아름다운 비색이 됨.)한 것을 말하는데, 자연유(自然釉)나 인공회유가 입혀진 것이 있으며, 토기 중에서 가장 경질의 것이다.
자기(瓷器는 중국식 표기)는 점력을 갖춘 순도 높은 백토(白土: 高嶺土), 즉 질(胎土: 陶土·陶石)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長石質)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번조(燔造)하여 그 조직이 치밀한 것을 말하며, 이를 백자라고도 한다.
치밀하다는 것은 번조할 때 가마 안에서 완전히 자화(磁化)되어 유약은 무색 투명하며, 순백의 태토 자체도 반투명질이 되고 태토와 유약이 일체가 되듯 밀착된 상태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유약에 균열(빙열·식은 테)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도기·석기의 단계까지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일찍이 도달할 수 있었지만,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한 나라는 별로 없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베트남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앞서서 자기를 만들어냈으며,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와 중국은 그 조형이 독창적이고 양질의 자기를 생산하였지만, 베트남은 자질(磁質)에는 거의 도달하였으나 질과 조형이 모두 중국의 아류로 우수하지 못하였다.
낮은 화도에서 산화번조로 구워낸 토기에서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의 석기(炻器)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표면에 내려앉아 규사질(硅砂質)과 합하여져 녹아붙어 자연유가 된다.
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灰釉土器)·회유석기(灰釉炻器: 일반적으로 회유토기라 함.)가 되는데, 이 회유토기가 청자발생의 시초이다.
중국에서는 이 회유토기의 시원이 은대(殷代)에 있었고,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전시대보다 매끄럽게 되는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도 점차 양질이 되고 유약도 장석유(長石釉)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고 초보적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당대(唐代)에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晩唐)·오대(五代)에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고 공예적인 높은 세련을 보였다.
화남(華南)과 화북(華北)지방에서 다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조질(粗質)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쯔강(揚子江) 남쪽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저장성(浙江省) 동북쪽 상린호반(上林湖畔)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월주청자(越州靑磁)였다.
당말·오대의 월주청자는 태토에는 철분이 약간 섞였으며, 유약도 철분이 약간 섞인 장석유로 화도는 1,250℃ 정도에서 거의 자화(磁化)된 것으로 월주비색청자(越州翡色靑磁)로 널리 알려진 고전적 청자였다.
987년(太平戊寅, 成宗 6)에 월국(越國)이 멸망하면서 월주요는 쇠퇴하고, 그 기술이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 남북방으로 확산되어 곳곳에서 이와 비슷하거나 그 지방, 그 시대의 특징이 있는 새로운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북방청자라고도 불리는 요주요(耀州窯)계통 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汝官窯靑磁, 河南省寶豊縣淸凉寺), 용천청자(龍泉靑磁), 남송 관요청자(官窯靑磁)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1세기 북송대에 만들어진 여관요청자이며, 남송 관요와 용천요의 명품도 높이 평가된다.
우리나라는 7,000∼8,000년 전경인 신석기시대로부터 흙을 빚어 번조한 토기(櫛目文土器)를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는 고화도로 환원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토기 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 환원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이 시대는 후장(厚葬: 정성껏 장례를 치름.)하는 시대여서 많은 유물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특히 신라·가야고분에서는 토기제품이 매우 많아서, 상상을 능가할 만큼 대량 매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토기는 기형(器形)이 다양한데 바닥이 둥글거나 아니면 높은 받침이 있고, 표면에 오목새김의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문양이 있으며, 선의 흐름이 강하고 직선적이어서 제례적(祭禮的)이고 의례적(儀禮的)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감이 있는 것이었다. 즉, 삼국시대의 높은 받침은 낮은 굽으로 변하고, 둥근 바닥은 편편한 바닥이 되고, 높은 목은 낮아져서 안정감 있는 토기로 이행(移行)된다.
또한, 이때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綠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면서 토기가 세련미를 가지게 되고, 9세기경으로부터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청자)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고 있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로부터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었으며(일부 백자·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9세기경으로부터 월주 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 해무리굽청자라고도 함.)를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일훈문굽계청자는 9세기말경 이미 신라에서 번조한 것 같다.
중국 저장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말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일훈문굽계 청자요지는 주로 경주지방과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곳만 하여도 8, 9곳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율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수도인 경주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확장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대표적 호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에 의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서남해안 지역이 중국 도자문화의 영향을 가장 일찍 받게 되었으며, 또한 풍부한 이 지역 물산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으로 이 지방의 사회·경제적 요건이 경주 등 다른 지역보다 앞섰고, 따라서 새로운 도자기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태세가 갖추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활동에 의하여 중국청자(백자·흑유도돈학)가 수입되고 청자번조 기술이 도입 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강진 일대는 이들 청자요 중에서도 장보고의 활동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이 지역 청자요의 대표적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강진이 장보고 활동의 중심지였던 완도와 가깝고, 또 청자를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 즉 태토·물·나무 등이 풍부하고 수운(水運) 또한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남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번조가 잘 되고 갑발(匣鉢: 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도 번조하였다.
고려 건국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 있게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서남해안 일대의 이들 초기청자 중 그 질이 우수하고 발색이 이미 비색(翡色)에 가까운 상태의 청자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등 가마에서 번조한 것으로 대표된다.
초기청자 중 그 질이 약간 떨어지며 발색이 비색에는 훨씬 못 미치는 청자는 옛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일부), 양주군 장흥면 청자요지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청자로 대표된다.
강진의 용운리 청자는 치밀하게 자화(磁化)된 상태로서, 장석계의 발달된 청자유약이 시유되었는데 환원이 잘 되어 초기비색의 아름다운 청자가 있는가 하면, 환원번조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환원과 산화번조 사이에서 암녹색·녹색·황갈색·녹갈색 등을 머금은 청자도 생산되었다.
기형과 굽의 형태, 도자기와 그릇 사이에 놓는 내화토목(耐火土目: 높은 화도에서 잘 견디어내는 내화토를 공기돌만하게 빚어 그릇 밑에 받치는 눈. 굽고 난 뒤에 그릇이 잘 떨어지게 됨.) 등에 처음에는 월주요의 영향이 가장 컸으나, 이후 기형·문양 등에는 요주요·임여(臨汝: 汝官窯에 대한 窯) 등과 교류한 자취가 나타나 있으며, 점차 환원번조가 더욱 잘 이루어지고 화도는 1,250℃를 넘는 우수한 질의 청자를 생산하였다.
경기도 고양과 양주시의 청자는 자화는 이루어지고 있으나 환원번조도 잘 안되어 대체로 갈색을 띠고 있으며 일찍이 단절되었고, 고창 용계리 청자는 자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강진 청자보다 치밀하지 못하고 환원번조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여 황색·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태토와 유약도 정선되지 못하였고, 오목새김과 돋을새김이 나오는 단계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해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생산과 소비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미 9세기 서남해안 일대는 해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서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 옛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양면,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에 있다. 이들 가마는 모두 규모가 방대하고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와 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은 이만 못하지만 거친 품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粗質)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器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 요지는 인천시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사오리,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 요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를 넘는 방대한 가마로,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녹청자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해무리굽 청자가 발달 보급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 발생을 좀더 올려 잡으면 신라 회유토기와의 관련도 추측해볼 수 있으나, 아직까지는 더 확실한 자료가 없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신라 말기에 청자를 만들고 일부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고려에 와서 청자가 더욱 발전, 세련되어 고려청자의 이름이 높다. 고려자기의 주류는 청자이며 그 밖에 백자·철유·흑유 등은 청자에 부수되는 것이므로 고려자기의 시대구분도 청자를 중심으로 한다.
고려 초기 강진의 해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고 다른 해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 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여러 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 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 초에서 16대 예종(1122)까지를 전기로 한다.
17대 인종 때부터 고려자기가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특한 비색(翡色) 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철채(鐵彩)·청자상감(靑磁象嵌)·진사채(辰砂彩, 또는 銅彩)·연리문(揀理文)·철채상감·철유(鐵釉)·흑유(黑釉)·백자(白磁)·백자상감·화금자기(畫金磁器) 등 다종다양한 자기가 매우 세련되었으며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 간의 알력이 심화되다가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이어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몽고군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인종 1)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고종 17)까지를 중기로 한다.
몽고 침입 이후 원종대와 충렬왕 초까지는 소수의 상품(上品)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는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 때이고, 충렬왕 10년 이후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고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성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여 고려말에 이르므로, 1231년 몽고침입부터 고려 말까지를 후기로 잡는다.
9, 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고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때 청자·백자 이외에 흑유도 일부 특수한 지역(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약간 만드는 등 고려도자기가 점차 다양화되고 있었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대담하고 큰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오목새김문양(거친 국당초문 등)과 철화문(鐵畫文)과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기청자와 같은 일훈문굽백자를 생산한 백자요지로서는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와 반곡마을에 있는 가마자리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필자가 1960년대에 발견한 이 가마는 청자도 생산하였지만 초기 백자가마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청자 이외에 백자도 이미 9, 10세기에 생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또한, 이 가마에서는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해무리굽 밑층에서 청자와 백자가 나오고 있는데, 청자는 유약이 안정되지 않았으나 기형과 태토 등이 안정된 양질의 것이며, 백자는 기벽이 얇고 기형과 유약 태토가 좀더 안정된 양질이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어도 우리나라 최초의 청자와 백자를 연구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20세기 중엽) 일인학자들이 초기청자 또는 원시청자라 부르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순화4년명항아리[淳化四年銘壺]도 백자를 번조하려다 담갈색이 약간 비낀 조질 백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1세기말∼12세기초까지는 중국의 산시성(陝西省) 요주요, 광저우(廣州) 서촌요·정요·자주요·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철화문과 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백자·흑유 등 여러 가지 도자기가 발전되며,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점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 일대에서 사당리 전면과 수동리 일대로 퍼지며,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 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게 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徽宗)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化奉使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 ”라고 한 것이나, 북송 말 무렵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받은 독창적 형태와 문양으로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양각·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흩어져 있는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괄유물인 1차비색완성기(12세기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아졌으며, 문양이 고려적으로 보다 완숙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발전이 있는 한편에서는 획기적인 시문 방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으며,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철채상감·철채백퇴화·철유·철유상감·철유백퇴화문 등)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靑磁象嵌寶相唐草文大楪)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유약은 1차비색 완성시기보다 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상감문양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유약의 색이 밝은 쪽으로 이행된 것이다.)·기형·문양과 문양의 포치·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먼저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그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역시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으며,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각 문양의 포치·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주면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굽언저리 등 주문양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한정된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 여백을 마무리하여 주는, 또는 공간에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고 있어, 전반적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전술한 비색·기형·문양뿐 아니고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그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이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 큰 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작은 것)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12세기 전반 상감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 초 무렵의 기명에 음·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처음 일부에 점차 그 자리 전면에 나타남. )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양각문과 흡사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초기 상감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전술한 것처럼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면 가운데 처음 일부에, 점차 전면에 나타나다가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主文)과 종속문(從屬文)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여러 가지 문양이 새롭게 고안되고 이들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보상당초문대접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 언급하는 상감 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의 백자·청자가마 발굴에서는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지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파편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그 수효가 상감청자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10세기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화청자·퇴화문청자와 그밖에 철채·철채백퇴화·철채백상감·철유·철유백상감·백자·백자상감·백자철화문·화금청자·청자진사[銅畫]설채·연리문[絞胎]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 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선 세계 최초인데,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절대로 남용하지 않았다.
17대 인종, 18대 의종대를 정점으로 아름답게 세련된 고려자기 문화는 귀족사회의 혼란과 정치질서의 변이(變異) 중에서도 계속 모습을 이어갔으나, 13세기 초 몽고의 침입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무신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여 가자 13세기 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졌으며 밝은 유약의 비색이 다소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원종 10)으로부터 1287년(충렬왕 13)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간기(干記: 己巳·庚午·壬申·癸酉·甲戌·壬午·丁亥)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간혹 밝은 유약이 있으나, 그 빛이 뿌옇고 그릇의 유려한 곡선이 둔해지고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 열전 조인규(趙仁規)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畫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으며, 충렬왕 때도 특별히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을 그대로 사용한 예와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 예가 있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도 그 문양이 곱고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고,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이 등장하며, 용문양도 간혹 보이고,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기형에도 항아리[扁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 중반 이후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 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번조수법 등에 조금씩 나타난 변화의 일부분이다. 그 밖에 번조할 때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갈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 초를 조금 지나서부터는 12세기 중엽경에 많은 종류의 도자기가 화려한 꽃을 피웠던 상태에서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문양·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상품 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여,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고려자기는 단군숭배,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내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고 세련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으로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는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 냈으면서 한두 점 악센트로 강한 색[銅彩發色]을 쓰는 것 이외에는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며 언제나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려 하는 것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조선도자기를 가리켜 소탈한 서민적 모습이 있다고 하고, 고려청자를 가리켜 귀족적 풍모가 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고려도자기와 조선도자기를 비교해서 그러한 표현이 고려청자와 조선분청사기와 백자에 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전제주의국가에서 현대 민주주의국가에 이르는 첫 번째 점진적 중간단계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이고 다음 조선왕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려시대에 백성들의 의지가 고대국가보다는 더 반영될 수 있었고 조선시대만큼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의미도 되고, 미술의 향유(문화생활의 향유)가 삼국시대의 국가중심에서 고려시대에 귀족중심으로 바뀌고, 조선시대에는 미술창조의 중심이 대중으로 이행되면서 대중도 세련된 미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고대 전제주의국가에서 왕권과 종교에 치우쳤던 권위주의 건축과 호화찬란한 공예도 통일신라시대에 그 규모와 양식이 한국의 자연과 문화환경에 맞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까지도 미술은 국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과 종교에 머물러 있었고, 신라 후기에 이르러서야 일부 지방호족 등에 미쳤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종전의 국가권위를 위한 것으로부터 왕실과 귀족·지방호족·승려 등 국가를 영위하는 인간을 위한 것으로 이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공예는 삼국시대의 호화찬란한 금관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 최고로 세련된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귀족·지방호족들의 생활에 맞는 미적으로 세련된 공예품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미술의 특징은 생활공예의 세련이다.
한편, 조선시대는 미술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향유라는 관점에서도 고려시대보다는 현대에 성큼 다가선 시대였다. 고려시대의 왕실·귀족·승려·지방호족들의 세력이 끊어지고 조선시대에 새로운 무인 출신의 왕실, 새로운 양반계층, 새로운 유학자의 등장으로 민중이 넓게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조선조의 문화가 고려에 비하여 보다 우리문화의 참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조선조 미술의 특징 중 하나가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민예적인 미에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이 널리 참여하여 그들의 소탈한 의지가 양반문인 계급의 미의식과 융화되어 표현된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한국인의 미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조 도자기의 특징 중의 하나도 이러한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은, 마치 자연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조선왕조는 태조 때로부터 성종 때까지 활기 있고 힘차고 빠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도자문화에도 나타나 국초로부터 전국의 가마를 조사, 정비하였다. 도자기번조를 맡은 중앙기관은 사옹원인데 1467년(세조 13) 이를 재정비하여 새롭게 그 체제를 갖추었다.
성종∼중종 연간에는 백자의 질이 가장 우수하였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광주지방에 사옹원의 분원을 두어 왕실용 자기번조를 전담하게 하여 조선조 백자 제조의 일대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성과의 기초는 세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세종실록』에 전국에 자기소 139곳, 도자소 185곳의 소재, 품질 등을 상세하게 조사 기록해놓은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초기 법전인 『경국대전』을 통하여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면, 사옹원 사기장(沙器匠) 380인, 내수사(內需司) 사기장 6인, 외공장(外工匠) 99인으로 되어 있어 사옹원이 사기번조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주가 중앙관요로 등장하기 전까지 사옹원에서 운영하던 중앙관요가 국초에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전국 자기소·도기소 가운데 상품자기(최우수질)를 번조한 곳은 3곳(광주·상주·고령)뿐이었으며,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 가운데 한곳이 상품자기를 번조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중앙관요라는 기록은 물론 없다.
그 뒤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해마다 사옹원 관원이 서리를 데리고 광주에 가서 어용지기(御用之器)를 감독 번조한다. ”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성종∼중종 연간에 광주의 자기소가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어 왕실에 필요한 자기를 만드는 중앙관요로서의 성격이 짙어지며, 다른 지방관요는 점차 중앙에 공상(貢上)하는 임무보다는 지방관아의 수요와 지방 수요에 응하는 가마로 변모하게 된 것 같다.
광주관요는 점차 규모가 방대하여지고 이곳에서만 중앙의 어용(御用)·관수용(官需用) 도자기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중앙관요가 되었다. 광주관요는 다른 수공업들이 16세기경인 연산군·중종대를 전후하여 관공장(官工匠)들이 관영수공업체로부터 이탈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만은 왕실용 자기를 번조하는 곳으로 공장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등, 우수한 공장을 확보할 수 있어서 오히려 팽창된 중앙관요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경향 각지의 가마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서 지방관요들이 재기하지 못하고 광주만이 제일 먼저 재건되고 확대되었을 것이다.
조선조 도자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분청사기 종류이고 또 하나는 백자 종류이다. 그 밖에 청자·흑유(黑釉: 石間硃)·철채·철유자기 등이 있으나, 그 수효는 훨씬 적었다. 청자·흑유는 어느 정도 쓰임새가 있었지만 그 밖의 것은 그리 사용되지 않았다.
세계 도자기의 발달을 크게 나누어 보면, 토기에서 도기·석기로, 도기·석기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에는 조선 전기에 분청사기라는 매우 특징 있고 공예적으로 우수한 도자기가 있어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한층 풍요롭고 여유 있게 하였다고 본다.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퇴화된 조질청자와 청자상감 기류를 생산하던 소규모의 가마들이 산재하였다. 특히, 이 중에서 상감청자 기류들은 점차 변모하여 문양(백토상감 등 각종의 백토화장 문양)이 기면 전체로 확산되고 유약이 투명한 담청색으로 변하였으며, 형태도 점차 변하여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분청사기라 한다.
조선 초 15세기경까지는 이러한 분청사기 외에 수요는 적으나 조선조적으로 변모된 청자·청자상감과 고려백자의 여맥을 이은 백자가 있었는데, 이러한 종류들은 고려자기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때는 고려자기와는 다른 원·명 백자의 영향으로 치밀한 조선조 백자가 새롭게 번조되고 있었다.
이 두 계열, 즉 고려자기 계통의 도자기들과 새로운 조선조 자기 중에서 분청사기와 치밀한 조선조 백자가 16세기까지 조선왕조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분청사기와 백자는 각기 다른 특성과 외형을 지니고 있으나, 분청사기는 조질태토의 표면에 백토분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특색이 나타나고, 백자는 처음부터 백토로 이루어지므로 백색을 지향하고 있어, 표면이 백색을 지향하는 공통성을 지니는데 이 두 가지 종류의 도자기만이 가장 세련되었다는 것은 고려와 조선조 도자문화의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는 청자와 달리 표면과 내부가 모두 백색이다. 분청사기는 태토가 청자와 같이 회색이며(일부 회흑색의 거친 태토도 있다.), 유약은 색이 청자보다 훨씬 엷으나 질은 청자와 흡사하며, 담청색을 머금은 희백이거나 담청·담황갈색을 머금고 대체로 얇게 시유되어 투명한 백색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태토와 유약 사이에 상감과 인화·귀얄분장과 백토물에 담그는 담금분장 등 여러가지 백토분장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이 있으며, 백토화장을 한 뒤에 다시 이를 어떻게 긁어내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종류의 문양이 탄생된다.
백토화장을 좀더 많이 하면서 특징을 살렸을 때가 그 발전의 절정기이며, 이후는 문양이 아닌 순수한 백토분장만으로 거의 전면을 채워 버린다. 다시 말하면, 분청사기의 발전은 백토분장이 더욱 많이 되어 표면색이 백색으로 이행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며, 백자와 같이 표면이 희게 되었을 때는 백자와 같아서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16세기 후반에는 분청사기의 일부는 백자에 흡수되고 일부는 백자와 같은 질의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분청사기의 끝남은 반자질 분청사기에서 자질이며 치밀질인 백자로 발전 이행된 것에도 그 의의가 있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 도자기 발전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여 전국적으로 가마가 파괴되고 많은 사기장인이 일본으로 끌려감으로써 이때부터 일본도 비로소 자기를 생산하게 되어 일본도자기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현재 규슈[九州]와 야마구치현[山口縣]의 도자기가 일대 성관(盛觀)을 보이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시에 주로 서일본의 여러 다이묘[大名]들에 의하여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중 특히 사기장(沙器匠)의 공헌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조선인 사기장인들은 좋은 도자기(茶碗 등)를 가지고 싶어한느 당시 일본인들의 오랜 소망을 매우 열심히, 그리고 성의 있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고 본다. 일본학자들이 임진왜란을 가리켜 도자기전쟁이니 다완전쟁이니 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환경과 생존권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조선인 사기장(일본에서는 보통 陶工이라고 통칭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문헌에 보통 사기장이라고 쓰고 있으며, 자기장이라 쓰는 경우도 있다. 사기라고 하면 상품에서 하품까지 여러 가지 질의 백자를 통칭하고 넓은 의미로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통칭하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백자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한국도자기의 주류는 치밀질 백자이기 때문에 도공·도예라는 표현보다는 사기장·자예·도자예라고 하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들은 다이묘들의 극진한 대우와 열의에 보답하고, 또 자기네의 실력을 자신들이 처하여 있는 현실에서 십분 발휘하였다고 본다.
가라쓰[唐津]·다카토리[高取]·우에노[上野]·아리타[有田] 등지의 고요지(古窯址)와 여기서 채집한 파편을 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인 사기장들이 처음 제품을 완성하고 얼마 안 있어 기형·번조기법·문양 등이 당시 일본의 생활환경에 맞게 급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자계통은 청화문양의 도입·색회(色繪)·청유(靑釉) 등으로 표면의 모습이 일변하여 잘못하면 중국 경덕진(景德鎭)의 영향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도자기는 가마와 파편을 모르고는 학문이 되지 않는다.
도자기를 규슈와 야마구치 지방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인 사기장들인데, 특히 이삼평(李參平)이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를 처음 발견하여 백자를 만들기 시작함으로써 일본인들은 그를 도조(陶祖)라고 하였다.
조선인 사기장들은 백자뿐 아니라 분청사기 등 여러 가지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각지에서 발휘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기형과 문양 등이 일본의 생활환경에 맞게 변해갔지만, 굽과 기형·태질·유약 등 어느 일부에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조 자기의 모습이 상당기간 남아 있음을 본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도자기 발전에 큰 획을 그었지만,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 연간에 궁중에서 연례(宴禮) 때 사용할 청화백자항아리가 없어서 전국에 수배하여 이를 구하고자 한 것을 보면, 상당한 기간 청화안료의 확보와 가마의 운영이 어려운 상태였던 듯하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조 도자기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백자와 함께 전기 도자기의 양대 주류였던 분청사기의 소멸이다. 전란으로 모든 가마와 도공이 다 같이 큰 타격을 받고도 백자는 다시 생산되었으나 분청사기는 다시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청사기가 어차피 표면이 백토화장으로 백자와 같이 되어가기도 하였지만, 전란이 계기가 되어 불교적인 고려청자 문화의 그림자가 도자기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백자문화 일색으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자문화가 백자로 이행하는 것은 보다 견고하고 실용적이며 청결한 기명으로 발전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조 도자사의 시대구분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가장 성행한 분청사기와 조선조 전기간 중에 성행한 백자를 중심으로 하여야 하나, 우리나라 도자기의 발전이 청자에서 분청사기와 백자로 이행되고 다시 백자로 귀일되는 것이기 때문에, 백자를 중심으로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다.
조선조 전기에는 16세기 초까지 오히려 분청사기가 제일 성행하였으나 분청사기가 백자로 이행되는 하나의 단계였으므로 그 중심은 백자라고 하겠다. 전기 백자는 제작수법과 기형 등이 전란 후에도 일정기간 15, 16세기와 흡사한 상태이므로 17세기 전반, 즉 1649년까지를 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백자는 형태가 안정감이 있고 원만하면서 그 선의 흐름이 유연하여 기품이 있다.
17세기 중엽 1650년부터 자기의 질과 기형, 굽의 정리, 굽받침 등에 변화를 가져오고 기형이 세장 준수하고 문양이 간결 단순화된 청화백자가 다시 생산되고 발전한 18세기 전반 1751년까지를 중기로 구분하며, 1752년부터 조선조 말까지를 후기로 구분한다.
전기는 1392년(태조 1)으로부터 1649년(인조 27)까지로 구분한다. 전기에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주류였으며 15세기에는 분청사기가 더 많았으나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백자화(白磁化)되어 줄어들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으며, 임진왜란 이후는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청사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임진왜란이 전기·중기를 구분할 수 있는 시대구분의 시점이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백자가 많아지기 시작하여 16세기 이후는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므로 백자를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한 것이다.
백자는 부분적으로 보면 15세기와 16세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는 조금 더 큰 차이를 보이지만, 큰 흐름으로 볼 때는 커다란 차이가 없으므로 인조연간까지를 전기로 본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과 인조 연간에 바로 여진족의 침입을 당하여 사상적으로 회의와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있었지만, 도자기의 경우 미처 새로운 경지를 모색하기에 어려운 시기였을 것이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기형도 고려청자에서 변형, 발전된 것이 많아 활달하고 익살스러운 중에 대담하지만 유려한 선의 흐름이 내재하고 있다. 문양은 상감·인화·박지·조화·철화·귀얄·담금분장의 7종류가 있으며, 상감과 인화와 박지와 조화 중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를 함께 시문하는 경우도 있다.
상감문은 조선조 초에 전국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것이나 힘차고 활력에 넘치며, 15세기 중엽 후반경의 면상감을 곁들인 작품은 신선하고 건실하다. 인화문도 전국적으로 분포되었으나 특히 영남지방에서 발달하여 시문이 치밀하고 조밀하여 백토와 담청색이 엮어내는 신선함이 있다.
그리고 박지문·조화문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범한 공예의장의 극치를 이루면서 호남지방에서 발달하였으며, 철화문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담한 회화적 필선에 담긴 운치와 활력이 넘치는데, 충청도의 계룡산에 가마가 있다.
귀얄문[刷毛目]과 담금분장은 분청사기 후기의 현상이며 주로 호남지방에서 발달하고 영남지방의 서부 일대와 일부 충청도지방에서 보이고 있다.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여 백자로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전기의 백자는 기형이 유연하며 너그러운 양감을 지니면서 높은 품격을 나타내고 있다. 색조는 상품의 경우 마치 함박눈이 내린 뒤 맑게 갠 새벽 햇살이 눈 위에 비친 듯 포근한 위에 청정한 담청이 깃들인 것과 같다. 전기 백자도 그 이후의 백자와 같이 아무 문양이 없는 청정무구한 순백자의 기품이 가장 드높은 아름다움이다.
백자에 코발트로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가 세종 연간부터 수입되어 회회청(回回靑:페르시아지방에서 생산되어 중국을 통하여 수입되는 코발트 안료를 회회청 또는 회청이라 하였다. )으로 번조되기 시작하여 세조·예종 연간에는 토청(土靑: 불순물이 많이 섞인 코발트 안료)도 개발되어 청화백자를 번조하였으나 그 수량은 극히 적었다.
15세기 전반기 청화백자의 문양은 주문양과 종속문양을 갖추었는데, 주문양은 명나라 초기의 문양과 유사하였으며, 종속문도 연판문계로 공예의장화된 도식적인 명나라 초기의 문양과 흡사하였다.
종속문양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주문양이 중국과 다른 회화적 문양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15세기 중엽부터는 점차 종속문이 사라지고 여백을 많이 살린 간결하고 소박한 회화적 주문양만이 있게 된다.
16세기는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 변형 퇴보하였으며,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17세기초는 왜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상태에 있다가 전란 후 주로 부장용으로 재번조되지만 수량은 매우 적었다. 문양은 간결하나 종속문이 일부에 다시 나타나며 주문양도 사실에서 약간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백자에 산화철로 문양을 나타낸 백자철화문도 15세기 후반부터는 번조하기 시작하였으나, 15, 16세기는 생산량이 적으며 17세기 중엽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간결하고 순수하며 대담하게 생략하고 재구성한 당시 도공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초화문과 죽문과 용문과 국화문 등이 간결하게 빚어내는 운치는 한국인만이 나타낼 수 있는 독특한 미의 경지이다.
백자에 흑상감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약간 연질이며 미세한 유빙렬이 있고 유약이 벗겨져 나가는 고려백자 계열의 백자가 15세기까지 경상도 일원에서 번조되며 여기 흑상감한 예가 있다. 경기도 광주에서 생산하는 치밀한 초기 백자에 흑상감이 있는 것이 있다.
전자는 그 문양이 사실적이면서 예리하고 간결하게 표현되었으며 형태를 변형하여 재구성한 것도 있다. 후자도 사실문양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익살스럽게 재구성한 특이한 세련을 보인 것이 있으며 면상감과 유사한 수법이 많다.
산화동의 환원 발색인 백자진사[銅畫]문도 15세기에 번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청화백자보다 더욱 희소하였을 것이며, 백자진사문은 전기의 실례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백자 이외 흑유가 있으며, 백자와 같은 가마에서 번조되는 것과 분청사기와 같이 번조되는 경우가 있다. 전기 말부터 중기 초에 걸쳐서는 철유와 철채도 극히 일부지역(옛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밤갓가마 등, 현 고양시)에서 생산하나 그 수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조 전기는 고려의 문화유산의 흐름이 상당기간 남아 있어 조선조 청자가 17세기 중엽인 전기 말 중기 초까지 번조된다. 조선조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이며,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가 퇴락한 상태인 말기적 조질청자에서 약간 변형되고 문양이 활달해진 것이며,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백자와 거의 같고 오목새김 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 전기 초기의 가마는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치, 남한산성면 번천리, 오전리, 초월읍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 중엽의 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 말엽의 가마는 광주시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초월읍 선동리 등에 있다.
중기는 효종 연간(1651)으로부터 영조 27년(1751)까지로,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정묘호란을 겪은 뒤 사상적으로는 회의와 반성과 새로운 모색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새로운 모색이 구체화될 수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백자의 질이 바뀌고 기형과 문양이 바뀌어 새로운 조형이 나타나서 큰 흐름으로 보아도 전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백자의 발색이 전기보다 더 희고 청순한 느낌이며, 각이 지고 면이 있는 형태의 비례는 세장(細長)하여 준수하며, 문양은 단순 간결하여 발색과 형태와 함께 잘 조화되어 매우 특이한 운치를 자아낸다. 이러한 특징 있는 자기의 재창조는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다음 새로운 사상체계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기의 백자는 전기의 너그러운 양감과 유연함에서 기형이 세장하게 되어 준수한 형태로 이행되며, 풍만한 항아리도 구연부와 몸체에서 끊고 맺는 맛을 풍기며 면을 대담하게 쳐서 각이 진 형태가 많다. 순백의 태토 위에 전기보다 푸른 맛이 줄어든 맑고 투명한 유약이 입혀져 설백자(雪白磁)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기에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아주 문양이 없는 순수한 백자에 대한 당시인의 관심과 사랑은 대단하여 어떻게 하면 백자에 더 좋은 백색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노력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 중앙관요산 백자 중에서도 발색이 아름다운 갑번(匣燔)백자의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경부터 상업자본의 발달은 이를 더 부채질하여 왕실에서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 갑번의 상품 백자를 사치스럽고 권세와 돈이 있는 양반과 부호들이 앞을 다투어 구하려 하기 때문에 광주 분원 운영에 커다란 문제로까지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전기 후반부터 점차 상품·중품의 구분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중기부터는 상품·하품의 구분이 없어져 모두가 상품화(上品化)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백자질의 평준화라는 데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청화백자는 수효는 적으나 간결하고 기품이 있는 난초계의 초화문이 기면의 국한된 일부에 시문되어 청정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우리나라 청화백자는 15세기 중엽과 후반에 단순화된 회화적 구성의 주문양만이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였으나, 그때의 문양인 산수·인물·송·매·조(鳥)·죽문 등이 중국 명대 북종화계의 준법이나 수지법과 유사하였다.
18세기 전반기의 중기 청화백자는 문양이 간결·독특할 뿐 아니라, 주제나 표현수법 등이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이어서 우리나라 청화백자사상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겠다.
철화문은 전기 말에 이어 중기 초까지 운룡문·초화문 등이 있었으나 점차 줄어들고 간결하게 도식화된 국화문계를 주로 한 문양이 등장하고, 중기 후반은 매우 희귀하나 철화운룡문·철화죽문 등이 있으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이어져서는 철화의 사용은 청화백자에 곁들여지는 경우가 있고 독자적으로 사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
백자진사문은 중기 초 무렵에 하나의 실례가 있을 뿐이며, 중기 후반에 만들어진 양각·청화·철화·동화를 같이 사용한 병이 있고, 중기 후반과 후기 전반에 걸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예가 비교적 많다.
동정색(銅呈色)인 붉은색으로만 대나무·포도·송학·연화·국화문 등을 매우 자유분방한 필치로 대담하게 그린 각병·항아리 등이 있으며, 19세기에 들어오면 각이 진 항아리, 키가 큰 작은 항아리 등에도 치졸하고 간결한 진사문양이 있는 예가 많으며, 이들은 광주 관요산이 아닌 경기도 어느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밖에 매우 드물지만 백자에 청화와 철화로 또는 철화와 진사로 문양을 나타낸 것이 있으며, 더욱 희귀하게는 백자에 청화와 철화와 진사로 문양을 나타낸 것도 있다. 백자에 물감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 이외에 양인각(陽印刻)으로 문양을 나타낸 경우와 투각으로 문양을 나타낸 경우가 매우 희귀하지만 이 시대의 말기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후기에 가면 그 수효가 많아지고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청자는 중기 초에 광주관요의 백자가마에서 수량은 적고 조질이지만 번조하였다. 청색보다는 갈색에 가까운 것으로 경질도 있지만 연질청자도 있는데 중기초의 청자가 우리나라 최후의 청자였다.
석간주자기[黑釉磁器]·철채자기·철유자기 중 석간주(흑유)는 유약 속에 산화철분이 8% 내외 들어가 유약의 발색이 갈색 내지는 흑갈색인 것을 말한다. 철채자기는 백자태토로 그릇을 만들고 그릇 표면 전면에 철분을 바른 다음 그 위에 다시 백자 유약을 입혀 구워낸 것이며, 철유자기는 백자태토로 그릇을 만들고 그 위에 산화철분이 15% 이상 함유된 유약을 입혀 구워낸다.
철채의 경우는 표면이 쇠녹색[鐵呈色]이 나는데 겉이 반짝이고 윤이 나며, 철유는 표면이 쇠녹색인데 표면은 유리질 유약 성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광택이 없다. 석간주는 철화를 지칭하기도 하나 보통 암갈색의 흑유가 입혀진 항아리나 병들을 석간주 항아리, 석간주 병이라고 한다.
각이 진 것이 대부분이고 중기 말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후기에 많이 사용된다. 철채와 철유자기도 중기 로부터 전기보다 다른 기형과 기법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후기에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중기 전반의 광주관요는 실촌면 유사리와 신대리 등에 있고, 중기 후반의 가마는 도척면 궁평리와 퇴촌면 관음리, 실촌면 오향리, 남종면 금사리 등에 있었다.
후기는 1752년(영조 28)부터 19세기말의 조선조 말까지이다. 분원 자체는 1883년(고종 20)에 중앙관요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도서원(都署員)에 의해서 책임 운영되는 민영의 왕실용 사기 공급 도급업체로 전환하였으며 이러한 체계가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사실상 침략과 일본 도자기의 대량 유입, 일본 자본에 의한 대규모 도자기공장의 국내 설립 등으로 분원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도자기는 조선조 후기에는 종전에 없었던 매우 다종다양한 종류와 기형과 문양의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은 중기 후반부터 그 싹이 터서 후기에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중기는 종전에 없었던 각이 지거나 면을 이용한 도자기와 접시·대접 등의 평범한 기형에 높은 받침이 있는 제기(祭器)의 등장, 새로운 형태의 문방구류의 제작과 기타 일반 기형의 다양화, 전혀 새롭고 간결한 청화문양·철화문양 등의 시문으로 도자기에 다양하고 새롭고 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새 바람이 후기인 분원기에 대담하게 확산 정착되고 세련되었다.
또한, 이때는 종전의 순수한 백자만을 드높이고 숭상하던 풍조에 비판을 가하여 오히려 이와 같은 백자 숭상이 국가의 검약을 위주로 하는 정책과 일치하여 다양한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었다.
누구나 순수한 백자를 제일 좋아하였지만, 특히 분원 후기는 백자에 수없이 많은 종류의 청화문양이 종전에 비하면 훨씬 많아지고 종전에 없었던 여러 가지 청화채백자와 동화·동채백자도 등장하며 압형성형한 것도 다양하게 나온다. 기형의 종류와 그 다양함도 종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었더라면 우리나라 도자기가 매우 다양한 내용의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나 일제의 침략으로 불행하게도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19세기 말 무렵부터 주로 일본의 규슈지방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무미건조하고, 선의 변화가 전혀 없으나 두껍고 견고하며, 매끈하게 생긴 백자류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또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대자본을 투입하여 대규모의 공장을 세워서 이와같은 기계생산 제품을 대량 시중에 내놓아 등요(登窯)에서 나무로 불을 때서 사기를 번조하고 물레를 발로 돌리며 손으로 빚는 애정 어린 창작품과 같던 우리 도자기들은 독깨그릇과 질그릇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조선조의 왕실용 사기(沙器)번조는 서울의 사옹원에서 관장하였으나, 경기도 광주가 중앙관요로 되면서 광주 현지에 사옹원의 분원을 두어 제반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처음은 사옹원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사기번조를 감독하고 완성된 것을 왕실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분원이 설치되어 분원에서 현지의 일을 전담하게 하였으나 그 확실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570년(선조 3) 광주에 사옹분감관(司饔分監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승정원일기』 1625년(인조 3)조에 이미 분원이 광주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부터는 분원에 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광주 일대 중에서도 분원의 입지적 조건은 서울에서 가깝고 수목이 풍부하며, 양질의 백토가 인근에서 산출되거나 다른 지방에서 산출되는 백토 등 제반 자료를 운반하여오는 데 수운(당시는 육로운송이 발달하지 못하였다.)이 편리한 곳이어야 하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가마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량으로 필요한 땔감의 조달이었다. 광주일대에 설치하였던 분원은 시목(柴木: 燔木) 조달을 위하여 수목이 울창한 곳을 택하여 10년에 한 번씩 광주 내에서 번소를 이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처음부터 번목의 조달과 수운이 좀더 편리한 곳을 택하여 지금의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로 가마를 옮겼기 때문에 이후는 조선조 말까지 이곳에서만 주로 강[漢江]상 무목(貿木:뗏목으로 내려오는 것)에서 수세(收稅)한 세목(稅木)과 무용(貿用)한 번목(사들인 나무)으로 질서정연한 직제와 분업화된 공정 등으로 계속 한곳에서 도자기를 대규모로 번조하였다.
따라서, 중기까지는 분원이 대체로 10년에 한 번씩 이동 설치되어 분원이라는 곳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서 지역 명칭도 고정되지 않았으나, 1752년(영조 28) 이후 계속 한 곳에서 머무르게 되어 그곳의 명칭이 분원리가 되었으며, 광주시 남종면 지금의 분원리를 가리키게 되었고, 분원사기하면 후기의 사기를 지칭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주는 전기·중기·후기에 걸쳐 조선왕조 도자기의 중심지역으로서의 구실을 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백의 가마를 인도해 나가게 된 것이다.
백자에 대한 높은 기호는 전기로부터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변함이 없으나, 후기에 오면 일부 지식인 사이에 국가가 시책으로 사치풍조를 엄금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국령으로 규정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이를 통렬하게 비판한 예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금령(禁令)으로 문양이 있는 화사한 자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갑번(匣燔)은 왕실 이외는 못쓰게 하였으나, 화사한 도자기보다는 좋은 흰색인 갑번의 수요가 계속 늘어서 가장 아름다운 흰색을 선호하는 풍조는 이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전기 이래도 청화백자의 선호는 순백자 다음으로 높았으며, 후기에 와서는 청화백자의 생산이 백자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전기·중기에 비하면 큰 폭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고, 기형과 문양이 매우 다양다종해져서 자기에 대한 선호도도 어느 정도 바뀌고 있고, 엄한 금령이 융통성 있게 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후기 백자는 그 특색이 18세기 말 무렵에 확립되었으며, 그 질은 전기·중기보다 더 치밀하다. 순백의 태토에 담청을 머금은 유약이 입혀져 중기보다는 물론이고 전기보다도 더 푸른 빛을 발산하는 백자로, 표면발색은 청백자와 비슷하다. 대체로, 기형은 풍만한 중에 단정하고 구연부를 제외하고는 기벽이 두껍고 굽의 지름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일상생활에 널리 쓰이는 기물 이외에 문방구와 제기·화장용기 등 특수한 용도의 기물들은 중기 후반부터 독특하게 세련되기 시작하여 이 시기에 그 특색이 나타나며, 그 종류와 각기의 기형도 매우 다양하며 대량 생산되었는데, 단정 단아하면서 기품있고, 그러면서도 친근감 있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순백자 자체만으로도 각이 지거나 면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형태를 다양하게 한 것이 많으며, 다양한 문양의 양인각과 투각(透刻)이 많아졌으며 간혹 음각문양도 있다.
청화백자는 매우 다양하여 청화에 철화 또는 진사를 곁들인 것, 세 가지 안료를 사용한 것 등이 있다. 문양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종류가 많으며 여러 가지 특징을 보인다. 화원의 그림과 분원 장인의 그림, 문인의 그림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주문양만 있는 것, 여기 종속문양을 갖춘 것과 회화적인 것, 이를 도식화한 것 등이 있으며, 그 종류는 산수·인물·초목·일월·성신·화조·초충 등 모든 삼라만상이 문양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를 대담하게 생략하거나 변형 재구성하여 전·중기에 비하면 훨씬 대담하게 변형된 회화적이면서 공예의장의 특질을 나타내는 유머와 위트에 가득찬 문양이 많다. 청화로 그린 것 이외에 청화채(靑華彩)도 있으며 청화채음각문양이 말기에 많이 등장한다.
진사[銅畫]문양은 경기도지방 민요에서 성황을 보이고 있는데, 후반에 들어오면서 문양이 공예의장화하였으나 치졸하고 단순화되었다. 이보다는 광주관요에서 진사의 사용이 늘어나서 청화와 철화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진사채에 양인각을 곁들이거나 진사채양인각에 청화나 철화를 곁들이고 형태도 특이하게 한 것이 있어 단정단아한 중에 화사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철화문은 단독으로 사용한 예는 아주 드물고 청화·진사와 같이 사용한 예가 있으며, 철채 수효는 적으나 설채를 귀얄로 하여 활달하고 힘찬 멋을 풍기며, 철유도 청화와 같이 사용되기도 하면서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흑유는 색이 진한 갈색이거나 암갈색이며, 지방가마에서 각이 진 항아리가 특히 많이 만들어졌으며, 거칠게 음각문양을 한 예가 있다. 이와 같이, 청화·진사·철화와 철채·철유 등이 매우 다양하게 이용되었으며, 여기에 양인각과 때로 음각까지 곁들여 사용하기도 하고, 투각도 이용되었다.
조선왕조 도자기는 전기에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되며, 중기와 후기는 백자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자기의 자취인 유려한 선의 흐름이 외형에 소탈하게 남아 있으나, 그 기형은 풍만 대담하고 익살스러우며, 문양은 새로운 사실적 문양을 대담하게 생략 변형하고 단순화시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깊고 드높은 조형적 역량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결국 표면의 색이 백자와 같이 되면서 백자로 흡수되었다.
한국의 도자기는 자질(磁質)을 위주로 하여 그 질이 정치(精緻)하고 그 모습은 건강하고 발랄하다. 언제나 자연과 같이 깊게 호흡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기능미를 위주로 하였으므로 번잡한 기교와 다양한 색채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경비를 들여가면서 단순한 색조와 기형, 대범한 조형 등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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