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 수거함 외 4편
이미산
그곳엔
응시하거나 중얼거리는 한때의 빨강들
구겨진 자세는
지나간 빨강에 박음질하는 내일의 그림자
구멍에 빠진 햇살의 종아리 잡으며
벽 타고 오르는 침묵의 숨소리 긁어모으는
빨강의 농도는 서로 달라서
분홍 주홍 진홍 선홍 핏빛 불그레 검붉은
다시 올 빨강은 언제인지 몰라서
누군가 지금이라고 중얼거리면
가장 쉬운 질투와 분노이다가
급히 두 손 모으는 간절함으로
시들 일만 남은 향기가 이명으로 갈아타듯이
어쩌면 저 노을이 진짜 빨강이라고
악몽에서 깬 소풍날 아침
지난밤 싸놓은 배낭을 확인하듯이
기적汽笛에 달아오르는 열차처럼
온갖 환상이 뒤섞이는 여기 난장亂場
습설
이미산
용서를 만나기 위해 떠돌았지
되짚어가는 길엔
깨진 유리처럼 반짝이는 조롱의 언어들
미안해…… 환청으로 뛰어드는 사과가
싫어
이해해…… 나를 에워싸는 모르는 손들이
미워
살아서 닿아야 한다고
겨울의 상흔에서 아지랑이가 핀다며
누군가의 목소리 차분하지만
우리의 악수가 공갈빵처럼 부풀어
녹지 않는 눈송이로 떠다니면 어쩌지
내 손에 닿은 너의 손가락
멀쩡해서 징그러우면 어쩌지
용서가 나도 모르게
봄바람처럼 지나가면 좋겠어
다시 온 봄이 나를 끌어안고
석 달 열흘 곤죽으로 널브러지면 좋겠어
우리가 함께 습설 위로 걸어가는
구부정한 뒷모습이면 좋겠어
이명
이미산
몹시 아팠던 여섯 살
슬픔이 초대한 매미 한 마리
내 오른쪽 귓속에 눌러앉았지
누군가 내 국어책 숨겼을 때
매미는 나 대신 골목을 헤매며
돌려줘
돌려줘
직장에 다닐 땐 피곤해 피곤해
그래서 결혼이나 하고
일기장에 이상한 남편을 일러바칠 때도
매미는 나보다 더 슬피 울었지
매미가 떠나면 나는 행복해질까
보약을 먹고 명상음악을 듣고
그러나 점점 힘이 세진 매미는
원고 마감일
고치고 또 고치다 문장의 뼈대마저 허물어졌을 때
두 마리였다가 세 마리였다가 죽음의 칸타타 레퀴엠
나는 살려줘 살려줘
매미는 나를 삼키고 떠나겠다는 듯이
그래서 그날까지
우리는 서로를 묵묵히 견딘다
반대과정이론
이미산
우리는 농담으로 만든 구름
손바닥에 놓인 서로의 부피를 모르고
빗길에 자주 미끄러지는 바퀴
처마 아래 서서 지나가는 우산이나 세어보는
심심한 놀이
그 견딤으로
구름은 빗방울이 되지 빗줄기라 불리는
낭만의 재킷을 걸치지
지옥철을 견디고 새로운 바퀴 찾아
여행을 떠나고 낯선 길에서 만난 설렘으로 낭만의 개념을 수정하여
되돌아온 여기
무료한 날의 군것질처럼
다시 비가 내린다
산산이 부서져 바닥을 지우며
구름은 한 번 더 농담이 되기 위해
환幻의 세계로 귀환한다
추락의 유전자를 품고
요코하마 메리
이미산
요코하마 길모퉁이
한줌 공간에 앉은 기다림
주름살 속 협곡엔
그녀와
그녀의 남자가 다정히 걷고
하얀 분 다시 덧칠하면
그의 속삭임 생생해
하얀 드레스
하얀 구두
빨간 입술로 피워내는 꽃송이
남아있는 날들이
그녀가 앉은 가방 속으로 흘러들어
한 끼를 때우고
한뎃잠을 자고
달콤한 공상에 빠지는 동안
어디선가 전쟁을 수행 중인 그가
무덤 같은 그녀 속으로
걸어오고 있다
이미산: 2006년 《현대시》 등단
시집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 『저기, 분홍』, 『궁금했던 모든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