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선풍기 외 4편
- 송승안
바람이 분다
이잉이잉 소리를 죽이고 분다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식지 않는 가슴을 파닥이며 분다
아무리 불어도 모자라는 힘
힘 없이도 과열되는 걸
타버리고 나면 소용없는 걸
목을 빼고 분다
한쪽으로만 분다
뒤돌아볼 줄 모르고
고개를 흔들 줄은 더욱 모르고
걷잡을 수 없다가 가라앉다가
어지러운 속을 다잡고 분다
흐어엉 흐어엉 떨다가도 분다
멈추었다가도 분다
베네딕도 요셉 수도원에서
- 송승안
한 뼘 가량 마루너머 창밖은 온통 풀 밭
나비 앉고 매미 우는 한가한 대낮
배 밭에서 풀 깎는 소리 다가왔다 멀어진다
풀 냄새 진동한다
엎드려 책을 읽다 내다보니
놀랐는가 잠자리들 어지러이 날아댄다
풀들이 작게 흔들리고 이내 다시 아까의 풍경
살풋 졸립던 잠 다 달아났다
혼란이 왜 필요한지 알겠다
흔들리다
문 닫힌 방안 더운 기운 가득하다
탈이라면 생각이 많은 것
끝내 돌고 있는 선풍기처럼
넘쳐 꿈속까지 따라온 사람
누웠다 일어나는 잠결에도 오나
문 열어보니 빗소리 요란하다
늦은 태풍을 회초리 치는 빗줄기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풀처럼
흔들리다 뿌리 더욱 깊어진 사람
비 맞고라도 나가 맞을까
하다가도 차마 못하고 문을 닫는다
길이 된 다리
여길 지날 땐 한동안 액셀에서 발을 떼는 습관이 있었어요 이쪽과 저쪽이 다를 것 없고 창유리를 내리기도 전에 지나가버리는, 이 짧은 길 아래 사납던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툭 툭 끊기던 돌다리 사이로 소용돌이치던 물살, 성난 물은 사소한 것에도 순식간에 차올랐고 이쪽과 저쪽은 까마득히 멀어졌고 점 점 놓인 돌다리는 마침표 같았지요
물에 빠질 때마다 짧은 다리를 얼마나 탓했던지요 애꿎은 발바닥을 얼마나 돌밭에 문질렀던지요 굳은 살 박힌 발로도 마찰을 못 견뎌 넘어지는 날이면 급류에 휘말린 바지는 또 얼마나 무겁던지요 속설로는 한 눈 팔아 물에 빠진다지만 돌다리의 세계에선 흔히 있는 일이라지만 고개 들고 먼 산 보아도 사라지지 않던 어지러움, 미끄럽던 돌다리
잠깐 브레이크를 밟아볼게요 벌써 지나치고 말았군요 애달프던 기억을 지나와버렸군요 이제는 가물가물 잊히는 옛이야기. 창문을 내리면 가을 물 든 산자락 살갗에 닿는 바람, 길이 된 다리를 순식간에 건넜군요 정차도 가속도 익숙한 말랑말랑한 내 발바닥 어느 새 산굽이 돌아 새 풍경 속을 달려요
고장 난 철제서랍
- 송승안
내게 오기 전부터 그랬다 철제 서랍은
책상 품이 모자라는지 어딘가가 찌그러졌는지
야물게 다문 조개의 입처럼 잘 열리지 않았다
달래고 속을 끓이고 탕탕 친 후에야
마지못해 속을 조금 보였을 뿐이다
나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먼지와
메모지와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 버리고
클립과 테이프와 풀 같은 것을 넣고는 타협했다
끝까지 밀어붙이지 말 것
숨을 모아 단번에 당길 것
반드시 조심스러울 것
그러면 서랍은 불평 없이 열렸다
엉겁결에 열린 날도 있다
자주 뒤죽박죽이 되는 제 속을
다잡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쾅쾅 흔들리던 기억에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삐걱대지 않고 제자리로 들어가도록
그 속을 정리하고 다독여 주었다
함부로 건드릴까 세심하게 살폈고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래도 서랍은 안심이 되지 않았나보다
반쯤 열던 몸을 버티며 나올 뜻이 없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숨을 모아 단번에 확, 당겼지만
당기는 반동으로 밀려들어간 서랍
책상 속으로 깊이 박혀 나오지 않는다
자물쇠로 잠근 것처럼 열리지 않는다
송승안 2024년 겨울호 애지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