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사무 24,2.9-17; 마르 6,1-6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181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셔서 1888년 선종하신 요한 보스코 성인은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일생을 청소년 교육에 헌신하셨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도시로 온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또 무시당하던 것을 가슴 아파하시던 성인은, 존경하던 살레시오 성인의 이름을 따서 살레시오 수도회와 수녀회를 설립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당시에 청소년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는데, 성인은 “청소년들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은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셔서 사제품을 받으신 후,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시고, 특별히 청소년 교육을 위해 애쓰셨는데,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이 이태석 신부님의 삶 속에서 또 하나의 꽃을 피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생명의 수를 조사하는 인구 조사는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해 오던 다윗이, 인구 조사를 통해 자신의 국력과 군사력에 의지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무엘기 초반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 한나의 노래가 사무엘기 전체의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 2,8)는 한나의 노래가 다윗이 기름 부음 받고 왕위에 오를 때 이루어졌다면, 뒤이어 나오는 “사람이 제힘으로는 강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 2,9-10)는 노래는 오늘 독서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죄를 지은 것은 다윗인데, 왜 백성들이 흑사병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이겠는데요, 사무엘기는 다윗 당시에 있었던 흑사병의 원인을 다윗이 벌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제까지의 복음에서 죽음보다 강하신 예수님의 권능이 선포되었는데, 오늘은 그러한 예수님의 권능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적이 등장합니다. 바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가라앉히실 수도, 악령을 내쫓으실 수도 있으시고, 병든 이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이까지 살리실 수 있지만, 하실 수 없는 일 한 가지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앙의 힘은 얼마나 큽니까. 예수님의 모든 활동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반대로 신앙의 힘은 또 얼마나 큰가요.
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적 중 하나로 ‘선입견’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소위 안다는 사람, 고향 사람들이 가장 믿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주민행복센터에서 가족 관계 증명서 떼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다 아는 거겠네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알려는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은 오늘의 이야기를 왜 복음서에 남긴 것일까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었을까요? 아니면 복음서가 쓰일 당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요? 소위 예수님에 대해 잘 안다는 사람들이 가장 예수님을 모르고 있으면서 자신의 선입견을 강요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도 있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친척들을 아는 사람들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예수님의 모습을 한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셔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이것이 가장 위험한 논리입니다.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논리가 우위에 있고, 하느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내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맞도록 교회가 얘기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나이 어린 사람들에 대한 당대의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만나려면, 예수님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고정관념 안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 고정관념을 깨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첫댓글 좋은 말씀,감동을 주시는 강론을 준비해주시는 신부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좋게 보아주셔서 제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