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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 제9권
백리지재(百里之才)
- 100리쯤 되는 땅(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재주. 사람됨이 크나 썩 크지는 못하다는 말.
百里才(백리재). 사방(四方) 백리쯤 되는 자그마한 지역을 맡아 다스릴 만한 수완이나 도량이 있는 사람.
비백리지재(非百里之才)
-‘백리(百里) 땅이나 다스릴 인개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큰 인물을 이르는 말임.
(1) 방통(龐統)이 동오(東吳)를 떠나 유비(劉備)에게로 갔을 때 유비(劉備)는 그를 뇌양현(耒陽縣)이라는 작은 고을로 내치지만,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유비(劉備)의 부름을 받는다
그때 방통은 노숙이 써준 편지를 보여주는데 거기에 방통은 백리지재가 아니므로 중용해야 능력을 발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2) 용례
또 말하기를, “경연은 사직의 기국이며 백리지재가 아닌데 이제 수령으로 제수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고 한탄한다.” 하였습니다. 처음에 신이 듣건대…두고 보니 그 재주와 능함이 남보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 且曰 慶延是社稷之器 非百里之才也 今除爲守令 聞之者莫不嗟恨…見之則 其才能未有異於人者 [성종실록 권제91, 13장 뒤쪽, 성종 9년 4월 9일(경자)]
방통(龐統)의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봉추(鳳雛)이며, 봉추 선생이라 불리었다.사마휘(司馬徽)가 방통(龐統)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유(周瑜)를 돕도록 등용. 주유(周瑜) 밑에서 적벽대전(赤壁大戰) 때 공을 세웠다. 주유가 요절하자 노숙(魯肅)이 전권을 맡자, 방통을 孫權에게 천거했다.
손권(孫權)이 방통(龐統)을 만나 보니,
‘짙은 눈썹에 들창코(濃眉掀鼻)이며, 얼굴은 검고 수염은 짧으며(黑面短髯), 생김새가 고괴(形容古怪)하여,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心中不喜).’ 하여서 방통(龐統)을 쓰지 않았다. 노숙(魯肅)은 방통(龐統)의 인물됨을 아까워하여 유비(劉備)에게 천거하며 추천서를 써 주었다. 전에 주유 장례식에 참석하여 알고 있던, 제갈량(諸葛亮)도 손권이 등용하지 않으면, 같이 유비를 모시자며 추천서 방통에게 써 주었다.
방통은 곧장 형주로 와서 유비를 만났다. 이때 제갈공명은 4개 군을 순시하러 갔다. 유비는 방통을 만나 보았는데, 예의도 소홀하고 외모도 古怪하여 기쁘지 않았다. 이에 유비는 방통을 형주(荊州)에서 멀리 떨어진 뇌양현(耒陽縣)의 현령(縣令)으로 보냈다.
방통은 뇌양현(耒陽縣)의 현령으로 가서 일은 하지 않고 매일같이 술타령만 벌렸다. 이 소식 을 들은 유비는 매우 노하여 장비,손건을 시켜서 방통을 당장 잡아들이도록 시켰다. 그들이 잡으러 왔을 때, 방통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고서 100일 동안 밀렸던 일 을 한나절도 안 되어 끝내고 붓을 땅에 던지고 장비에게 말했다.
“폐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조조와 손권도 나는 손바닥의 손금처럼 들여다 볼 수 있거늘, 이런 작은 현의 일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많이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所廢之事何在?曹操.孫權,吾視之若掌上觀文,量此小縣,何足介意)!
장비는 크게 놀라 자리에 나와 사과했다. 그러자 방통은 노숙의 추천서를 장비에게 주었다. 장비, 손건은 유비에게 와 사정을 이야기 하고 노숙의 추천서를 주었다. 그 내용은,
방사원(龐士元)은 백리지재가 아닙니다(非百里之才). 치중 별가의 임무를 맡긴다면 비로소 준족을 펼칠 것입니다. 만약 용모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아마 그가 배운 바를 저버려 마침내 다른 사람이 중용하는 바가 될까 하오니 진실로 애석합니다.
(龐士元非百里之才,使處治中別駕之任,始當展其驥足。如以貌取之,恐負所學,終為 他人所用,實可惜也.)
유비가 노숙의 추천서를 보고 탄식하고 있는데, 문득 제갈량이 돌아왔다. 유비가 영접하여 맞이하니 예를 마친 제갈량이 먼저 물었다.
“방통 군사는 요즘 별 일 없습니까?” “요즘 뇌양현을 다스리면서 술만 좋아하고 현 의 일은 돌보지 않습니다.”
제갈량이 웃으며 말했다.
“사원(士元)은 백리지재가 아닙니다(非百里之才). 가슴속에 배운 바는 저의 10배를 넘습니다. 제가 전에 사원(士元)에게 준 추천서가 있는데 주공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까?
(士元非百里之才,胸中之學,勝亮十倍。亮曾有薦書在士元處,曾達主公否)?”
(3) 이 성어는 방통(龐統)이 유비(劉備)를 찾아와 미관말직을 맡은 일화에서 나오는 말로 이야기는 이렇다. 방통(龐統)의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봉추(鳳雛)이다. 당시 양양의 명사였던 방덕공이 와룡(臥龍)으로 불리던 제갈량에 견주어 방통을 '봉추(鳳雛)'라고 불렀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두 사람을 이렇게 불렀다.
수경선생(水鏡先生) 사마휘(司馬徽)가 방통(龐統)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주유(周瑜)를 돕도록 등용하여 주유(周瑜) 밑에서 적벽대전 때 공을 세웠다. 주유(周瑜)가 요절하자 노숙(魯肅)이 주유를 대신하여 전권을 맡자 방통(龐統)을 손권(孫權)에게 천거했다.
손권(孫權)이 방통(龐統)을 만나 보니, 짙은 눈썹에 들창코(濃眉掀鼻)이며, 얼굴은 검고 수염은 짧으며(黑面短髯), 생김새가 고괴(形容古怪)하여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心中不喜). 그래서 방통(龐統)을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노숙(魯肅)은 방통(龐統)의 인물됨을 아까워하여 유비(劉備)에게 다시 천거하며 추천서를 써 주었다.
또한 전에 주유 장례식에 참석했던 제갈량(諸葛亮)도 손권이 등용하지 않으며 같이 유비를 모시자며 추천서 방통에게 써 주었다. 방통(龐統)은 노숙(魯肅)의 추천서를 갈무리하고 곧장 형주와 유비를 만났다. 이때 제갈공명(諸葛孔明)은 4개 군을 순시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방통이 왔다는 연락은 받은 유비(劉備)는 방통을 만나 보았는데, 예의도 소홀하고 외모도 고괴(古怪)하여 기쁘지 않았다. 이에 유비는 방통을 형주(荊州)에서 멀리 떨어진 뇌양현(耒陽縣)의 현령(縣令)으로 보냈다. 방통(龐統)은 뇌양현(耒陽縣)의 현령(縣令)으로 가서 일은 하지 않고 매일같이 술타령만 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유비(劉備)는 매우 노하여 방통(龐統)을 당장 잡아들이도록 시켰다.
장비(張飛)와 손건(孫乾)이 방통(龐統)을 잡으러 왔을 때, 방통(龐統)은 그들을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서 100일 동안 밀렸던 일을 한나절도 안 되어 끝내고 붓을 땅에 던지고 장비(張飛)에게 말했다. "페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조조와 손권도 나는 손바닥의 손금처럼 들여다 볼 수 있거늘, 이런 작은 현의 일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많이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所廢之事何在? 曹操 孫權, 吾視之若掌上觀文, 量此小縣, 何足介意)."
장비는 크게 놀라 자리에 나와 사과했다. 그러자 방통은 마침내 노숙의 추천서를 꺼내 장비에게 주었다. 장비와 손건은 유비에게 와 사정을 이야기 하고 노숙의 추천서를 주었다. 그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
방사원은 백리지재가 아닙니다. 치중 별가의 임무를 맡긴다면 비로소 준족을 펼칠 것입니다. 만약 용모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아마 그가 배운 바를 저버려 마침내 다른 사람이 중용하는 바가 될까 하오니 진실로 애석합니다(龐士元非百里之才. 使處治中別駕之任, 始當展其驥足. 如以貌取之, 恐負所學, 終為他人所用, 實可惜也).
(...)
유비가 노숙의 추천서를 보고 탄식하고 있는데, 문득 제갈량이 돌아왔다. 유비가 영접하여 맞이하니 예를 마친 제갈량이 먼저 물었다. "방통 군사는 요즘 별 일 없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요즘 뇌양현을 다스리면서 술만 좋아하고 현의 일은 돌보지 않습니다."
제갈량이 웃으며 말했다. "사원은 백리지재가 아닙니다. 가슴속에 배운 바는 저의 10배를 넘습니다. 제가 전에 사원에게 준 추천서가 있는데 주공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까(士元非百里之才. 胸中之學, 勝亮十倍. 亮曾有薦書在士元處, 曾達主公否)?"
(4) 백 리 땅이나 다스릴 인재가 아니다(非百里之才)
방통은 불우한 천재의 대명사 같은 존재다. 그가 뇌양 현령으로 부임했을 때 매일 술을 마실 뿐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유비가 화를 냈을 때 제갈량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백 리 정도의 땅이나 다스릴 그런 작은 인물이 아닙니다. 가슴에 간직한 학문은 저보다 10배는 더 뛰어나지요."
여기서 백 리 정도의 땅이라든가 10배나 뛰어나다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천하를 경영할 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과 학문의 깊이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방통이 재주를 펼치지 못하고 중도에서 스러졌기에 비백리지재(非百里之才)는 오늘날에도 능력에 비해 작은 일을 하는 인물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하는 성어가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정반대로 백리지재(百里之才)에 불과한 인물들이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나선 형국이다. 특히 여의도 정치판이 그렇다. 국회의원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하는 행동을 보면 백 리는 커녕 십 리도 담당할 것 같지 않은 인물 투성이다. 그들을 선택한 건 국민이다. 국민들 수준만큼의 정치, 깨우쳐 줄 비백리지재(非百里之才)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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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제9권 P179 - P180) / 아래 스캔 자료 참조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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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龐統, páng tǒng) Pang Tong
출생 – 사망 : 178년 ~ 213년
(1) 형주(荊州) 양양(襄陽) 사람으로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봉추(鳳雛)이다. 삼국(三國) 시대 유비(劉備)의 책사(策士)로 제갈량(諸葛亮)과 동시에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이 되었다. 유비가 익주(益州)를 취할 때에 계책을 내어 큰 공을 세웠다. 낙현(雒縣)을 포위 공격할 때에 불행하게 화살을 맞고 죽었다. 관내후(關內侯)로 추증되었다.
방통(龐統, 179년 ~ 214년)은 중국 후한 말 유비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사원(士元)이며 형주 남군 양양현(襄陽縣) 사람이다. 별호는 봉황의 새끼라는 의미의 봉추(鳳雛)이다. 인물평의 대가이면서도 제왕을 곁에서 모실 인물로 여겨졌다. 익주를 탈취할 것을 제안하여 유비의 입촉을 수행하였다. 낙성을 포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추남에, 낙봉파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2) Pang Tong (pronunciation (help·info)) (179–214), courtesy name Shiyuan, was a Chinese politician. He was an adviser to the warlord Liu Bei in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of China. In his youth, Pang Tong was disregarded because he was plain looking, however Sima Hui highly esteemed him calling him the "Crown of Scholars in Jing Province". He studied under him along with Zhuge Liang, Xu Shu and Xiang Lang and was given the nickname of "Fledgling Phoenix". Because of his friendly attitude, he worked as an appraiser in Nan Commandery. When reviewing someone, he would prioritize their virtue over their abilities and would encourage them to help others.
He briefly served Zhou Yu and befriended Lu Ji, Gu Shao and Quan Cong before joining Liu Bei in 209 after the latter became the provincial governor. Under the recommendation of both Lu Su and Zhuge Liang, Liu Bei appointed him to Assistant Officer and promoted him to Military Adviser Generals of the Household. He advised Liu Bei to take over Yi Province accompanied him on his campaign (covering present-day Sichuan and Chongqing) against the warlord Liu Zhang, but was killed by a stray arrow during a battle at Luo County (north of present-day Guanghan, Sichuan) in 214.
(3) 생애
① 작은 날개
어린 시절 순박하고 둔하여 알아봐주는 이가 없었는데도 삼촌 방덕공만은 중하게 여겼다. 18살이 되어 방덕공과 친밀했던 사마휘에게 평가를 받으러 갔다.[2] 사마휘는 영천군 사람으로 청아하면서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을 따고 방통은 아래에 앉아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높게 평했고 이로써 점차 이름이 알려져 남군에서 공조(功曹)로 일했다.
남군은 주유가 조인을 몰아내고 점유했다가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방통은 계양군 뇌양현령으로 전임됐는데 잘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다. 노숙과 제갈량은 방통을 촌구석이 아닌 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비가 직접 만나보고는 큰 그릇이라 판단해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친밀하게 대우 받음이 제갈량에 버금가서 얼마 안 가 제갈량과 아울러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에 올랐다.
② 서촉으로
방통이 유비를 설득하길 "형주는 황폐해졌고 동쪽에는 손권이, 북쪽에는 조조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 즉 세발솥 다리의 계획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익주는 부유해서 인구와 병마, 산출되는 물자가 매우 많으니 이를 취해서 대사를 펼쳐야 합니다." 라고 했다. 유비가 "현재 나에게 있어 물과 불 같은 자는 조조요. 조조가 쪼이면 나는 풀어주었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했고, 조조가 농간을 부리면 나는 진실로 대했소. 매번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작은 이유 때문에 천하의 신의를 잃는 것은 취할 바가 아니오." 라고 답하자 방통은 "난세는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약하면 겸병하고 혼매하면 공격하는 것은 오패도 했던 일입니다. 어긋난 도리로 가지되 바른 도리로 다스리고, 유장에게도 의(義)로써 보답하여 큰 나라에 봉한다면 어찌 신의를 저버렸다 하겠습니까? 오늘 확보하지 않으면 끝내는 다른 사람의 이익만 될 뿐입니다." 라고 재차 청했다. 유비가 마침내 행하였다.[5]
211년(건안 16년) 유비가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따라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답시고 촉으로 들어갔다. 제갈량은 남아서 본거지를 진수(鎭守)하고 방통은 유비를 수행했다. 유장이 광한군 부현(涪縣)으로 나와 환대하였다. 장송, 법정, 방통이 병력을 소모할 것 없이 여기서 바로 유장을 잡자고 권하였지만 유비는 이제 막 타국에 와서 은혜와 신의를 드러내지 못했다며 중대한 일이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③ 상중하책
유장은 성도로 돌아가고, 유비는 가맹현(葭萌縣)으로 올라간 후 한중을 치려 했다. 방통이 유장부터 무찔러야 한다며 상·중·하책을 제시했다. “상책, 은밀히 뽑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밤낮으로 내달려 곧장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무략이 없을 뿐더러 대비도 없을 테니 대군으로 들이닥치면 한 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중책, 양회와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력한 병사로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이들은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는 그들에게 형주가 위급하여 구하러 간다 알리고 행장을 꾸려 돌아가는 척 꾸미십시오. 그들은 틀림없이 좋아하며 가벼운 차림으로 만나러 올 것입니다. 그대로 그들을 붙잡고 그 군대를 차지하여 성도로 향하십시오. 하책, 백제성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대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십시오. 선택 가능한 수는 이상과 같으며 만일 망설이기만 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유비는 중책을 추진하여 민심부터 휘어잡았다. 212년,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성도로 남진하였다.
④ 봉황 추락
지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유비는 부성에서 대연회를 개최하였다. 술을 차리고 음악을 울리며 즐거워하자 방통이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즐거워한다면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술에 취하여 “주나라 무왕의 군대가 주(紂)를 토벌하며 앞에서는 노래 부르고 뒤에서는 춤을 추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겠구려? 경의 말은 맞지 않소. 당장 일어나 나가시오!”라고 노여워하였다.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가 곧 후회하여 돌아올 것을 청했다. 방통이 원래 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먹고 마셨다. 유비가 방금 전에 누가 잘못했는지 물었다. 방통은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이라 대답했고 유비는 크게 웃으며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계속 진군하여 유순, 유괴, 장임이 방어하는 낙현(雒縣)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214년[6] 유시(流矢)에 맞아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비가 몹시 애석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훗날 방통의 아버지는 의랑(議郞)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으며, 방통은 관내후에 추봉되고 260년(경요 3년)에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4) 특징 - 인물평의 대가
인물 평가를 잘하는 한편 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남군공조 시절 매양 타인을 치켜세우는 바가 실제 재주에 비해 과해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묻기에, “천하가 무너지고 아름다운 도리가 황폐화되고 착한 사람은 적고 악한 사람이 많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바야흐로 풍속과 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고운 말로 칭송하지 않는다면 그 명성이 흠모하며 본뜨기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며 본뜨기가 부족하다면 선한 일을 하는 자도 적을 것입니다. 뽑은 열 명 중에 다섯 명은 아니더라도 나머지 다섯 명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분발하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라 답하였다. 그 명성이 오나라에 퍼졌다.
210년, 남군태수 주유가 숨을 거두었다. 그 시신을 동오로 옮기고 귀환하는데 육적·고소·전종 등 많은 사람들이 오군의 서문인 창문(昌門)에 모여 전송하였다. 방통은 ‘육적은 빠른 발의 힘을 가진 말’이고, 고소는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는[9] 소’라고 평하였다. 어떤 이가 육적이 더 낫다는 뜻이냐고 물어보자 “말은 빠르더라도 한 사람만을 태울 뿐입니다. 소는 하루에 300리[10]를 가면서 어찌 한 사람의 무게만을 나르겠습니까.”라고 답했다.[11] 전종에 대해서는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는 것은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유사하며 비록 지력은 많지 않아도 역시 한 시대의 훌륭한 인물’이라 평하였다. 육적과 고소가 ‘천하가 태평해지면 방통과 더불어 사해의 인사들을 논해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모두와 깊은 친교를 맺고 돌아갔다.
(5) 평가
방덕공은 방통의 싹을 알아보고 봉추라 칭하였다. 사마휘는 방통과 면담해보고는 "방덕공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방통은 실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라 감탄하였다. 어느 날, 유비가 사마휘에게 세상일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사마휘는 "저같이 견식이 모자란 유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인데, 근래에는 복룡(伏龍, 숨어있는 용)과 봉추가 있습니다."라 답하였다. 복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이다.
방통이 오나라에 있을 때 고소가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방통이 스스로 평하기를, “세속을 도야(陶冶)하고 인물을 품평하는 것은 제가 경만 못합니다.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倚伏)[13]의 요체를 파악하는 것은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11]
유비가 방통을 뇌양현령에서 면직시키자 노숙이 유비에게 글을 보내 "방사원은 고작 백 리나 다스릴[14] 자가 아닙니다. 치중이나 별가(別駕)를 맡겨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제갈량도 이에 동의하였다. 제갈량은 ‘방통과 요립은 초 지방의 우수한 인재로서 대대로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라 하기도 하였다.
장존은 본래 방통과 의견이 달랐다. 전사한 방통을 유비가 찬탄하자 장존은 “방통이 비록 충성을 다했던 몹시 아까운 인물이긴 합니다만 천하의 올바른 도리는 어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방통이 살신성인을 이뤘다고 화를 내며 장존을 면직시켰다.
양희는 방통을 ‘미덕과 맑고 고상한 기품이 빛났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내놓고 가슴에서부터 충정을 발현하였다. 의리와 도덕의 모범이 되어 자신을 희생해 은덕을 갚았다.’고 평하였다.[18]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인물 평가와 경학(經學), 책모가 뛰어나 형주 사람들은 그를 고아하고 준수한 자[高俊]라 했다. 위나라의 신하들과 비교하자면 순욱에 비길 만하다.’고 했다.[19]
부손은 방통(龐統)을 "재지(才智-재주와 지략)가 뛰어난 영웅(英雄-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지만 기량(器量-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불완전(不完全)하다." 말했다.
배송지는 방통과 유비의 연회에서의 일화에 대해 언급하기를, “유장을 습격하는 모책은 도의를 거스르면서 공업을 성취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본래 사악한 방법이므로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이 절로 그쳤다. 그러던 차에 흥겨워하는 유비의 발언을 듣자 무심결에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즐긴 것은 때에 맞지 않으며 남의 불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데도 자신을 무왕에 견주며 부끄러워하는 낯빛조차 없았다. 이것은 유비의 잘못이지 방통의 과실이 아니다. 방통이 ‘군신이 모두 잘못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유비에게 전가될 비난을 분담하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6) 사서 외의 이야기
① 세설신어
지인소설 《세설신어》에서는 방통이 영천군까지 2000리를 가 사마휘를 만나는 것으로 실었다. 뽕을 따는 사마휘에게 방통이 수레 안에서 묻기를, “듣건대 장부가 세상에 처해서는 마땅히 금인자수(金印紫綬)를 차야 한다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넓디넓은 도량을 굽히고 실 잣는 아낙네의 일을 하고 있소이까?” 라고 하였다. 사마휘는 “그대는 마차에서 내리시오. 그대는 부정한 길이 빠른 줄만 알지 길을 잃고 헤매게 될 줄은 모르고 있소. 옛날에 백성자고(伯成子高)는 농지를 갈면서도 제후의 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았고,[21] 원헌(原憲)은 뽕나무 지도리를 한 가난한 집에 살면서도 관리의 저택과 바꾸지 않았소. 어찌 꼭 화려한 집에 앉아야 하고, 살찐 말을 타야 하고, 수십 명의 시녀가 있어야만 귀하다고 하겠소? 이것이 바로 허유(許由)와 소부(巢父, 소보)가 강개한 바이며, 백이와 숙제가 길게 탄식한 바이오. 여불위가 진나라를 훔쳐 사두마차 천 대의 부를 누렸어도 귀하다고 하기엔 부족하오.” 라고 답했다. 이에 방통이 “저는 변방 구석에서 태어나 대의(大義)를 만나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종과 뇌고(雷鼓)를 쳐보지 않았더라면,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를 뻔했습니다.” 라고 했다.
②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사마휘보다 5살 어린 것으로 설정하였으며 그의 평가도 ‘복룡과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로 수정된다. 적벽 대전 무렵 강동으로 피신해있다가 장간과 함께 위나라로 넘어가 조조를 돕는 척한다. 조조의 수군은 익숙하지 않은 수상 생활로 인해 병사하는 병사가 많았으므로 방통은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라고 진언한다. 조조는 기뻐하는데 실은 화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환계(連環計)이다. 이를 알아챈 서서에게는 한수와 마등에 대한 방비를 핑계로 빠져나오라고 조언해준다.
제갈량과 노숙의 추천장은 꺼내지 않은 채 유비와 대면한다. 짙은 눈썹, 들창코, 검은 얼굴, 짧은 구레나룻 등 괴상한 용모로 인해 중용받지 못하고 뇌양현령을 받는다. 부임한 지 100여 일이 지나도록 사무는 전혀 처리하지 않고 술만 마신다. 장비와 손건이 순시하러 왔는데도 숙취가 깨지 않아 일어나 나가지 않는다. 장비가 업무 태만에 대한 벌을 주려하자 반일(半日)도 되지 않아 모든 공무를 끝마친다. 그제야 유비가 반성하며 부군사중랑장(副軍師中郞將)으로 기용해 크게 쓴다.
유비의 입촉을 수행한다. 방통, 장송, 법정은 부성의 연회 자리에서 유장을 암살하라고 권하는데 유비가 듣지 않는다. 방통은 불복하여 위연더러 칼춤을 추면서 기회를 봐 유장을 죽이라 지시하고 다른 무사들도 배치시킨다. 하지만 장임이 칼춤의 상대가 되겠다며 나서고 유봉, 유괴, 냉포, 등현 등도 나오는 통에 유비와 유장이 춤을 중지시킨다. 시간이 흐른 후 양군이 충돌하게 되자 양회와 고패를 유인해 참하고 부수관(涪水關)을 무혈점령한다. 이 축하연 장면에서 방통이 어진 사람에 대해 논했던 일화가 유사한 모습으로 삽입된다.
낙성으로 향하던 차에 마량 편으로 천문의 징조가 좋지 않다는 제갈량의 서신이 도착한다. 방통은 자신이 혼자 큰 공을 세울까 시기한 제갈량이 말을 지어낸 것이라며 간과 뇌가 널브러져 죽더라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간뇌도지, 肝腦塗地) 방통과 위연은 좁은 길로, 유비와 황충은 넓은 길로 나누어 진격하기로 한다. 각자 떨어져 출발하는데 타고 있던 말이 나아가지 않아 낙마한다. 유비가 자신의 백마와 바꿔준다. 마침 낙봉파(落鳳坡)에 매복하고 있던 장임 부대의 집중 사격을 맞고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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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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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1) 미국의 작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장편 소설 개요
저자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장르 : 장편 소설, 역사 소설
발표 년도 : 1826년 / 미국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 A Narrative of 1757, 1826년)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역사 소설이다. 대표작으로 《가죽스타킹 이야기》(Leatherstocking Tales)로 총칭되는 5편의 변경 로맨스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4년 후인 1840년에 나오게 되는 《더 패스파인더》(The Pathfinder)가 후속작이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757년 프랑스와 영국이 벌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다. 이 전쟁 동안 프랑스는 북동부 변방 지대에서 숫자가 훨씬 우월한 영국 주민과 싸우기 위해 미국 인디언 연합군에게 많은 의존을 했다.
쿠퍼는 17세기 코네티컷 지역에서 영국인과 동맹 맺었던 유명한 모헤간 족 사켐(수장)의 이름을 따서 ‘웅카스’(Uncas)로 이름지었다. 이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모헤간’(Mohegan)과 역사적으로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에 기반을 둔 ‘모히칸 족’(Mohican)을 혼동한 듯하다. 모히칸족은 그가 작품의 배경으로 하는 중앙 모호크 계곡 영역에 더 가까웠다.
비평가들이 설정상의 오류를 지적하긴 했으나, 이 소설은 당시 영어 소설 가운데 가장 인기 소설 가운데 하나였다. 그 길이와 정형적인 산문체 형식은 후대 독자가 보기에 지루하겠지만, 《모히칸 족의 최후》는 미국 문학 과정에서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었, TV의 영화나 만화 소재로 다루었다.
영국군 장교의 두 딸을 영국군 기지에 호송하는 한 무리가 프랑스군 지원하는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악전고투한다. 영국군 지원하는 변경 개척민 내티 범포와 그의 친구인 모히칸족의 추장과 그의 아들이 크게 활약한다. 쫓고 쫓기는 스릴이 넘치는 작품으로 서부극의 원조라 할 수 있다.
(2) 배경
배경은 1757년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이 발발한 시기로, 프랑스와 영국이 북미 인디언 식민지를 두고 전쟁을 치르던 때이다. 프랑스군은 인디언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서 초반에는 우세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으로 결국 영국이 북미 신민지를 장악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을 실감나게 묘사, 비판한 역사 소설이다.
(3)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 줄거리
먼로 중령의 딸인 코라와 앨리스 먼로는 포트 에드워드의 주요 던컨 헤이워드와 함께 먼로가 지휘하는 포트 윌리엄 헨리까지 여행한다. 그들은 영국 민병대가 동반하지 않은 지름길을 통해 그들을 이끌고 있는 마구아라는 이름의 원주민에게 숲을 안내받는다.
영국군 먼로 대령(Colonel Munro)의 딸들-앨리스(Alice), 코라(Cora)-은 던칸 헤이워드 소령(Major Duncan Heyward)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전쟁터를 가로질러 길을 떠난다. 그들은 길잡이 인디언 마쿠아(Maqua)의 안내를 받는데, 마구아는 영국군에 앙심을 품고 있는 프랑스의 첩자였다. 마쿠아가 그들을 프랑스 진영으로 유인하는 도중, 내티 범포(Natty Bumpo)와 모히칸족(the Mohican)의 추장 칭가치국(Chingachgook), 그리고 그의 아들 웅카스(Uncas)가 소령 일행을 구해낸다.
그러나 마쿠아 측 인디언들 휴런족(the Huron)은 그들을 추적하여 소령 일행을 인질로 잡는다. 내티 범포와 모히칸족의 도움으로 소령 일행은 겨우 윌리엄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에 도착하지만, 곧 영국군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하여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휴런족은 영국군이 돌아가는 도중 프랑스군의 묵인하에 영국군을 학살하고, 다시 일행을 납치한다. 내티일행과 마구아 일행의 격투 끝에 웅카스와 마구아가 죽고, 코라도 휴런족의 손에 죽게 된다. 내티와 칭가치국은 모히칸족의 마지막 후예 웅카스를 잃고 슬퍼한다.
작가는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영국, 프랑스 간의 갈등을 현실적, 복합적으로 그려냈다. 또한, 백인 문명의 확장이 원주민들의 문명을 파괴하는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마이클 만 감독에 의해 ≪라스트 모히칸 The Last Of the Mohicans≫으로 영화화되었고, 이전에도 많은 TV시리즈와 영화로 제작되었다.
(3) The Last of the Mohicans: A Narrative of 1757 is a historical romance written by James Fenimore Cooper in 1826.
It is the second book of the Leatherstocking Tales pentalogy and the best known to contemporary audiences. The Pathfinder, published 14 years later in 1840, is its sequel. The Last of the Mohicans is set in 1757, during the French and Indian War (the North American theater of the Seven Years' War), when France and Great Britain battled for control of North America. During this war, both the French and the British used Native American allies, but the French were particularly dependent, as they were outnumbered in the Northeast frontier areas by the British. Specifically, the events of the novel are set immediately before, during, and after the Siege of Fort William Henry.
The novel is set primarily in the area of Lake George, New York, detailing the transport of the two daughters of Colonel Munro, Alice and Cora, to a safe destination at Fort William Henry. Among the caravan guarding the women are the frontiersman Natty Bumppo, Major Duncan Heyward, singing teacher David Gamut, and the Indians Chingachgook and Uncas, the latter two being the novel's title characters. These characters are sometimes seen as a microcosm of the budding American society, particularly with regard to their racial composition.
The novel has been one of the most popular English-language novels since its publication and is frequently assigned reading in American literature courses. It has been adapted numerous times and in many languages for films, TV movies, and carto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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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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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모비 딕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캐롤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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