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롱초롱 박철홍의 다시 살펴 보는 역사도 흐른다! 5
ㅡ 병자호란과 조선사대부ㅡ
먼저 사대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가겠다.
사대부란 예전에, 사(士)와 대부(大夫)를 아울러 이르던 말로서 고려, 조선시대 상류계층을 말한다.
신흥사대부는 고려시대부터 향촌 사회의 지배 세력이던 향리층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후기 사회 변동 속에서 성리학이란 이념으로 무장한 채 과거시험을 통해 그 지위를 상승시켜 세력을 구축했다.
신흥사대부는 고려말기에 고려를 지속하면서 개혁하자는 정몽주 온건파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정도전 혁명파로 나누어 진다.
혁명파인 정도전이 고려사회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진 무인 세력 이성계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사대부가 주도하는 새로운 국가로 만들어 낸다. 그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정도전등 신흥사대부는 조선이 개국한 뒤 양반 관료체제를 구성한다. 양반은 문반, 무반 관료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그러다 세종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
계유정난을 도운 한명회 신숙주등이 공신이 되어 실세가 되는데 이들을 훈구파라 한다.
훈구파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공신들로서 조선초기 지배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부국강병정책과 관(官)주도적 경제정책 등을 실시했다. 또한 중앙집권을 목표로 지방의 중소지주층에 대한 통제등을 이념으로 삼았다.
이에 반발해서 성종때 부터 지방에서부터 한 세력이 꿈뜰 거린다. 이를 신진사대부 즉 사림파라 한다.
신진사대부 사림파(이하 사림파)는 성리학 본래 이념대로 중소지주층 자율성을 최대로 보장되는 정치·경제·사회 구조등 지방자치성 확립을 추구한 개혁파였다.
이 사림파는 사실 고려말 정몽주 계열에 속한 온건 혁명파
사대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조선건국 당시는 정도전 이방원등에 의해 찌그러 들어 지방에 숨었다. 그러다 성종때부터 슬그머니 중앙정계에 진입하다가 연산군 중종 명종 때 훈구파와 권력다툼에서 무오,갑자,기묘,을사 4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수 많은 희생을 당한다. 그러나 그 희생 속에서도 사림파는 불사조처럼 살아나 선조 때 이르러서는 중앙정권을 장악한다.
정권을 장악한 사림파는 권력의 속성 상 정권을 잡은 그 즉시인 선조 때 부터 분열이 시작된다. 그게 바로 조선의 유명한 당파의 시작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사림파 본래적 개혁적 색채는 퇴색되고 성리학 교조적인 면에만 집착한다.
그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때부터 명나라를 하늘같이 모시기 시작한다. 자기들 기득권이 싸그리 날아갈 뻔 했는데 명나라가 살려주었으니 그럴만 했다.
명이 멸망 후에도 조선 사대부들은 자기들이 멸망한 명을 이어 받았다는 희한한 소중화주의라는 극명한 사대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 대표적인 당파가 인조반정이라는 최악 쿠데타로 광해를 몰아 내고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이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첫 번째 명분이 친명배금이었다.
친명배금이라는 서인세력의 앞, 뒤 없는 꽉막힌 똥고집, 무지, 무능 등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을 조선에 불러 들인다.
서인정권 무능은 기가막히고 코까지 막힌다.
후금이 조선에 맛만 보여 주려한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까지 9년 이란 세월이 있었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정묘호란 때 그렇게 쳐 발라 놓고도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내부 권력투쟁에만 눈이 멀어 기찰(사찰)정치만 하고 있었다.
그 반대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정묘호란 때 후금 왕이었던 홍타이지는 청 태종이 되었다.
이제 어엿한 황제국을 칭한 청은 명을 멸하기 위해 전선을 중국 전체로 확장했다. 그러면서 군비부담이 늘어나자 수 차례 걸쳐 조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청의 이러한 요구는 지난 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이 맺은 화의조약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친명배금 정책 으로 치달았으며 똥고집으로 자존심만 세우던 서인정권은 이를 받아 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부 대신들 사이에서 친청정책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청은 더 강성해진 국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태도를 한층 더 강화시켜 간다. 지난 고려 때 몽고와 금이 그랬듯이 조선에게 형제관계가 아닌 부자관계인 전면적인 사대를 요구해 왔다.
나라가 강성해져 황제를 칭했으니 청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
또한 청은 요동을 정벌하고 명 본토로 진격하기 위해서 배후 불안 요소인 조선을 완전히 제압 해 두어야 했다.
이러한 것은 역사상 국제정세를 조금이라도 인지히고 외교 기본 상식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인조와 서인정권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 체 했다. 진짜 알면서도 그랬는지 정말 몰라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1632년 인목대비 국상사절로 온 청 사신 만월개를 냉대한다.
또 1635년 인영황후 조문사절로 온 청 사신을 살해 및 추방하는 등 강경일변도로만 대응한다.
당시 왕 인조는 더 가관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왕이 못된 자기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묘호를 추존하는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망해가는 명으로 부터 본인도 아닌 살아 생전 왕도 되어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친자식이 왕이 될 줄 조차도 꿈에도 모르고 죽어서야 사후 대원군이 된 정원군의 묘호 추존에만 매달려 있었다니 기가 막힌다.
앞 편에서 말한 정묘호란 첫번째 원인이 된 명나라 패잔 장수였고 국제 사기꾼었던 모문룡이 조선영토를 무단 침입 해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를 퇴치하기는 커녕 뇌물을 바쳐가면서 이런 일에 메달리고 있었다.
물론 조선이 들어주기 힘든 후금의 무리한 요구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후금을 탓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늘 날도 그렇지만 국제정세는 철저한 약육강식이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과 사대부들은 후금 사신을 박대하고 쫒아 보내 버리기까지 했다.
더욱이 기가막히는 일은 조선은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하는 홍타이지 청 황제 즉위식 축하연에 사신을 보낸다. 보내 놓고 그 사신들에게는 청태종에게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한다. 이에 참석한 조선 대신들은 청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꼿꼿하게 버텼다.
대단한 기개의 조선사대부였다.
그 결과 청 태종 홍타이지 큰 분노를 사게 된다. 홍타이지 청 태종은 두 사신을 죽지않을 만큼 뭇매를 때리고 친필 국서를 사신들에게 쥐어 조선으로 보낸다.
인조와 조선사대부들 정말 웃기지 않는 가?
자기 보다 힘센 사람을 괜히 약올리면서 건들어 보는 것도 아니고 황제 취임식에 보내 놓고도 고개를 숙이는 인사도 못하게 한다. 물론 조선사대부들 당시 생각하는 외교적 예법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청은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 였기때문에 조선사대부들 예법으로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 큰 전쟁을 눈 앞에 두고 그런 예법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사신을 보냈으면 이런 일들을 충분히 예상하고 어떤 방법이라도 찾아 냈어야 했다. 황제 취임식에 사신을 보내 놓고 예의는 못 차리게 해서 사신을 죽도록 맞게 만드는 당시 조선 조정 사대부들 정신 상태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럴라면 뭐하러 사신을 보냈을까?
게다가 죽도록 매만 맞고 돌아가는 불쌍한 조선 사신들은 조선으로 돌아 오는 도중 청 황제 홍타이지 가 준 친필 국서를 버려 버리고 조선 조정에는 보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청 태종 국서를 조선 조정에 그대로 보고 했다가는 헛된 자존심과 똥고집으로 똘똘 뭉친 조선사대부들에게 오랑캐에게 이런 국서 받아 왔다고 지탄받고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태종이 보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사신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않겠다. 전쟁으로 승부를 겨룰 뿐. 잘못을 인정한다면 세자를 보내라."
이런 국서마저 보고조차 하지않고 버려버린 사신들이나 이런 국서를 보고조차 못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버린 조선 사대부들 기개는 정말 대단하다 못해 감탄스럽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행위들은 결국 1637년 조선에 병자호란를 불러들이고 마는 엄청난 재앙을 범하고 만다.
청 태종 홍타이지 서신은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이 자기 친필 편지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청 태종은 자기가 말한대로 조선을 침략했다.
물론 병자호란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많다. 청 내부적 문제로 조선이 어떻게 했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인조와 조선사대부들은 아무런 힘도 기르지 않고 전쟁에 대해 그 어떤 준비도 없이 청에게 쓰잘데기 없는 자존심으로 똥고집만 피운 것이 첫 번째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한 가지 전쟁 준비를 하기는 했다. 인조는 이미 이괄 난과 정묘호란 때 연습도 해 두었다. 도성버리고 도망가기이다.
인조와 조선조정의 청의 침략에 대비한 유일한 전략은 강화도로 도망쳐서 거기에 쳐 박혀 명나라가 구원해주러 오리리 믿고 버티는 것이다. 백성들이야 죽던지 말던지 상관않고 고려당시 원 침입 때 처럼 몇 십 년을 버텨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 공부는 조선사대부들 보다 침략하는 청이 더 열심히 했다. 여기서도 역사공부 중요성이 나온다.
이미 청은 원의 고려침략 때 고려강화도 정권을 꿰뚫고 있었다. 청은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도망칠 것도 미리 예상하고 포로로 잡은 명의 수군과 장거리 대포도 이미 준비 해 놓았다.
인조와 조선사대부들이 고려 때 거란이나 몽고 침입 그 당시 역사공부를 충실히 해서 반면고사로 삼았다면 병자호란은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다. 고려 거란 침입 때 서희처럼 얼마든지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
병자호란은 가장 짧은 기간 내 조선의 수 십만 백성들이 죽고 또 수 십만 백성이 납치 되어 중국 땅으로 끌려 갔다. 조선 일반 백성들이 엄청난 피해를 본 우리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또한 병자호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한 전쟁이기도 했다.
광해의 중립외교처럼 조선이 현명하게 처신을 잘 했으면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역사학자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병자호란은 청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이 어떻게 했든 청이 조선을 침략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오늘은 나의 주관적 역사적 시각을 바탕으로 글을 쓰겠다.
어떤 시대이든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지도자 최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알렉산더, 징키스칸, 나폴레옹등 역사상 정복자들을 위대한 영웅으로 일 컷는다. 그러나 그 당시 같이 살았던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들은 위대한 영웅 이었을까?
또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전쟁을 준비하거나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당시 백성들의 삶이란 '안 봐도 비됴' 아니겠는가?
이유 불문하고 피할 수 있는 전쟁은 피해야만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객관적 역사적 사실로 보면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낸 것은 오로지 조선을 구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조선이 일본에 먹히고 나면 일본은 반드시 중국까지 쳐 올라 올 것이고 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명목적 목적도 '정명가도' 즉 명을 정벌하러 갈테니 조선은 길을 비껴 주라는 것이었다. 명은 조선이 일본에 정복되고 난 후 중국 본토에서 겪어야 할 전쟁을 미리 조선 땅에서 치룬 것에 불과한 일 이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위와 같은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명나라가 오로지 조선만을 위해 구원병을 보냈고 그 이유로 조선이 살고 자기들도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당시 이런 생각에만 빠진 조선사대부들은 명나라를 하늘 같이 떠 받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마 명이 후금 같은 오랑캐에게 멸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시대상황과 정보가 부족한 우물안 개구리 조선사대부들 그런 처지를 이해 할 수는 있다.
조선사대부들에게 백번 양보해서 정묘호란까지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어쩔 수 없었고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조선 이런 상황을 잘 아는 후금도 조선사대부들에게 자기들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확실하게 자기들 힘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조선을 겁 주었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선에서 물러 났다.
그랬다면 인조와 서인정권은 정묘호란 이후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명과 함께 전략을 잘 짜서 두 나라가 힘을 길러 후금에 대항해서 후금이 다시 조선 땅을 침략할 때를 대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당시 조선과 명 상황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명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고 친금배명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돌아 서서 청 침략을 어떻게든지 막아 내야 했었다. 당시로서는 이 일이 가장 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인조와 당시 서인정권은 이 두 가지 중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는 했다. 그들 정권유지를 위해 변방 장수들이 군사훈련 하는 것까지 역모로 몰아 갔다. 바로 이괄 난 원인이 되었다. 변방장수 이괄에게 한양까지 내주고 인조는 도망갔다. 병자호란 연습을 이때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준비가 철저하지 못해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 가는 길이 막혀 강화도로 피신조차 못 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바꿔 일단 몸을 피한다.
이 틈을 이용해 13만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영화 남한산성에도 나오듯이 남한산성에는 원래 왕의 준비된 피난지가 아니었기에 식량과 피복 등이 많이 부족했다.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 중 굶어 죽거나 얼어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던 근왕병들은 청군에게 차례 차례 격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조정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죽던지 말던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심한 논쟁이나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일이 무슨 큰 자랑이나 되듯이 책으로 나오고 영화로도 제작 되었다. 영화나 책에서는 우리가 그 처참한 상황에서 교훈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주전파도 조선사대부 기개를 나타내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게다가 주전파들이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선 절대적 충신으로 추앙받는 현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내 생각은 그렇다.
물론 당시 주전파들 기개는 높이 살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무 대책도 없는 막무가내 똥고집 기개였다.
나는 지금 곰곰히 생각해봐도 주전파 그들 입장을 알 수 없다. 도대체 무슨 힘으로 싸우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처음에는 근왕병이 와주리리 생각도 했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 격파 되었고 더 이상 올 수 있는 근왕병도 없었다. 임진왜란처럼 의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병 싹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싹둑 다 짤라 놔 버렸다. 선조는 의병장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그러니 의병이 일어날 수도 없었다
또 조선사대부들이 하늘 같이 믿고 있던 명도 임진왜란 때 처럼 구원병으로 와 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명은 자기 코가 석자나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백성들 목숨은 더 중요하다.
도와 줄 외부세력도 전무하고 식량도 다 떨어진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힘으로 끝까지 싸우자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들이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수도 없이 죽어 가고 약탈 당하고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에도 보면 승패가 확연히 갈리면 성주는 승자에게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백성들 안위를 부탁하고 자신 배를 갈랐다.
그러나 조선사대부들 중 그 치욕적 패배이후 배를 가르기는 커녕 책임진 사람 조차도 없었다.
결국 남한산성 내 식량이 떨어지고 그토록 믿었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세자부부가 포로가 되는 등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 온다.
백성들 죽음에는 꼼짝 안 하던 인조와 조선사대부들은 세자부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농성 59일째가 되던 날 청나라 신하가 되는 조건을 포함한 11개 조를 수락하며 항복한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항복의식에서 홍타이지(청태종) 앞까지 걸어가 바닥에 머리를 부딛치며 절하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예를 행하였다.
이것도 청이 많이 봐 준것으로 원래는 중국 항복 방식인 입에 옥구슬을 물고 망자 차림으로 항복 예를 치루는 것은 면해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병자호란은 죄없는 수 십만 백성들이 죽거나 수 십만이 청에 잡혀간 채로 그리고 왕이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라는 우리 역사상 듣도 보지도 못한 치욕을 당하고 끝났다.
그래서 병자호란 이후 우리 조선사대부는 반성을 하고
각성하여 조선을 부국강병했는가?
쓴 웃음만 나온다.
조선왕 인조는 그대로 보위를 이어 갔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사대부들 중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수 십만 백성만 죽고 수 십만 백성만 청에게 인질로 끌려 갔다.
조선사대부들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 이후는 더 가관이었다.
조선사대부 그들 기득권은 조선에서 몇 백년간 이어져 갔다.
다음은 '병자호란 이후와 소현세자' 1편이 이어집니다.
첫댓글 추월님 감사합니다
역사 이야기방으로
이동해 드리겠습니다
학교 댕길 때 역사공부는 괜시리 어려웠는데
나이들어 읽는 역사이야기가 더 재미있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