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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경본문 ; 느헤미야 4: 1-6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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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교회 안에 자전거를 타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집에 차가 두 대나 있는데도 어느 형제님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른 시간에 새벽기도회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분도 있고, 한 대에 4,000불(?)이나 되는 자전거를 타고 주일에 교회에 오는 분도 있습니다. 주말 뿐 아니라 주중에도 학교를 갈 때나 직장에 출근할 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산성광침례교회를 섬기는 유관재목사님이 국민일보에 실은 글에 보니까, 원래 이 자전거는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던 19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산림청 책임자였던 독일의 귀족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1785∼1851)는 관할지 시찰을 위해 말 이외에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전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가 1817년입니다. 처음에 그가 만든 자전거는 안장에 올라타고 상체를 세운 채 걷거나 뛰는 것처럼 좌우의 발로 땅바닥을 번갈아 차면서 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드라이지네(draisine)’ 또는 라틴어로 ‘빠른 발’을 뜻하는 ‘벨로시페드(velosipede)’로 불려졌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도를 비난했습니다. 그가 만든 벨로시페드를 ‘사람을 말이나 마차로 만드는 이상한 발명품’으로, 이전에 동물이 하던 일을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또 ‘하찮은 것’ ‘우스꽝스러운 것’ ‘선박을 끌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고귀한 인간에게 홀로 경주하게 만드는 것’ 등으로 폄하하며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난과 혹평을 받은 자전거가 200년이 지난 요즘에는 올림픽의 정식 종목이 되었고, 국가와 지방자치 단체마다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고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자전거 타기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초로 자전거를 만든 ‘카를 폰 드라이스’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본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전거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비전이 비난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비전으로 사는 사람은 비난을 극복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강해설교 여섯 번째로 “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비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비전의 사람과 비난의 사람, 등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비난의 사람
먼저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는 느헤미야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벽재건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였습니다. 당시 산발랏은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에 의해 건립되었고, 이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자기 사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든지 사실이 아니든지, 사마리아를 다스리고 있는 산발랏은 무너져있는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이 재거되면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절에서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산발랏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아니 당황하다 못해 크게 분노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2절을 보면, 산발랏의 비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산발랏은 질문 형식을 사용하여 다섯 가지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했습니다.
1) ‘미약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첫째로 그는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며 비난했습니다. 여기 ‘미약하다’는 말의 원어 ‘아말’은 ‘나무가 시들어 말라 비틀어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주로 소망이 없는 암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산발랏은 지금 권력을 갖고 있는 자기 친형제들과 사마리아 군인들이 듣는 데서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라 비틀어버린 고목나무로 비유하며 조롱하고 비난했습니다.
2)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라고 비난했다
둘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여기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는 말은 반어법인데, 이 말은 ‘너희들 힘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딸이 퀸스타운까지 혼자 운전해서 간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네가 혼자 운전하려고 그러니‘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이 말은 아직은 혼자서 퀸스타운까지 운전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없다고 무시하며 비난했습니다.
3) ‘제사를 드리려는가‘라고 비난했다
셋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여기 ‘제사를 드리려는가’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심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언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고 그러느냐 그것은 착각이다‘ ’예배한다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이 재건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무시하고 신앙심을 조롱하며 비난했습니다.
4)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라고 비난했다
넷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재건공사를 마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하루 만에 모든 공사를 마치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하루 만에 공사를 끝내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었고, 또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말할 만큼 힘이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발랏은 그들을 더욱더 낙심케 하며 비난했습니다.
5)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비난했다
다섯째로 그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필요한 자재들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매우 궁핍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서 자재를 가져올 수 있느냐며 조롱했습니다.
이처럼 산발랏은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면서 성벽 재건공사에 임하려고 하는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난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발랏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3절에 보면 암몬 사람 도비야의 조롱이 나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옆에서 산발랏의 비난을 듣고 있던 도비야도 거들었습니다. 만약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이 다시 재건된다 할지라도 너무 약해서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조롱과 비난은 산발랏과 도비야 두 사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비난하는 반대 세력들이 많아졌습니다. 도비야에 이어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산발랏의 방해 작전에 동참했습니다.
비전의 사람
그 때 비전의 사람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느헤미야로부터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맞서 싸우지 마라
첫째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비난을 받았을 때 화를 낼 수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 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비난한 그 사람을 향해 반드시 그 이상으로 갚아주겠다고 복수를 다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따진다고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자대면하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만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만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죤 드라이든은 “고통을 받을 때는 침묵이 최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토마스 칼라일은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비난을 많이 받으신 분도 없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오해도 받고, 없는 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면전에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던 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해를 직접 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침묵하셨습니다.
19세기의 목회자로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Charles Haddon Spurgeon ; 1834~1892)은 단순한 문장을 사용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 문제 역시 외면하지 않고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해서 비난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여러 개의 학교와 고아원, 그리고 요양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스펄전 목사님이었지만, 주변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달걀을 판매하는 일이었습니다.
스펄전과 그의 아내는 여러 마리의 닭을 직접 길렀습니다. 그런데 두 부부는 자신들이 기르는 닭이 낳은 달걀을 절대로 그냥 나누어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돈을 받고나서 달걀을 건네주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스펄전 목사 부부를 구두쇠라고 하고, 돈만 아는 욕심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펄전 목사 부부는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비로소 스플전 목사 부부가 왜 그렇게 구두쇠처럼 돈을 벌었는지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달걀을 판 돈은 두 명의 늙은 과부들의 생활비를 대는데 고스란히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스펄전 목사 부부는 자신들의 선행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늙은 과부들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비난을 일삼던 사람들과 맞서서 싸우지 않고 철저하게 침묵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어디에도 느헤미야가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비난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왜 그러한 말들을 하고 다니느냐’고 따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예수님처럼 스펄전 목사님처럼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기보다,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가 비난을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라
둘째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기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피 터져 죽은 것이 너무나 억울한 모기가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이 파리는 죽이지는 않고 그냥 손으로 쫓기만 하는데, 왜 우리는 창자가 터지게 때려죽이나요? 너무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파리는 항상 손을 싹싹 빌잖아….”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침묵했지만, 하나님께는 침묵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다같이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고 하나님께 억울함을 하소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악을 그냥 덮어두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을 쌓고 있는 우리 앞에서 주님을 모욕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못 본체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의 신앙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 앞에 나아가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처 받은 것, 속이 상한 것, 억울한 것을 다 풀어놓아도,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여러분, 구약에 등장하는 한나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브닌나를 둘째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한나는 남편의 사랑은 갑절로 받았지만 아이가 없었고, 브닌나는 아이는 있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나를 심하게 질투하며 괴롭혔습니다.
그 때 한나는 수치와 굴욕, 아픔과 절망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착각할 만큼 한나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물을 보시고 후에 위대한 선지자가 된 사무엘이라는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감정을 다 받아 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기도가 핸드폰보다 좋은 이유>라는 글이 있습니다.
첫째, 핸드폰은 잘해봐야 한 달 100분 무료 통화지만,
기도는 한 번 가입하면 평생 무료로 통화할 수 있다.
둘째, 핸드폰은 환경에 따라 통화 성능이 결정되지만,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통화가 가능하다.
셋째, 핸드폰은 공공장소에서 사용하기엔 눈치가 보이지만,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 가능하다.
넷째, 핸드폰의 사용 내역은 통신회사에 남지만,
기도의 사용 내역은 하늘나라 책에 남는다.
다섯째, 한 대의 핸드폰으로는 한 사람밖에 통화할 수 없지만,
기도는 원한다면 한 번에 수많은 사람이 동시 통화할 수 있다.
여섯째, 핸드폰으로 통화할 때의 침묵은 쓸 데 없는 상상을 일으키지만,
기도할 때의 침묵은 주님이 알아서 접수하신다.
일곱째, 핸드폰은 부재중일 때 받는 사람이 없지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항상 기다리시고 받아주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고 받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시편 62편 8절에서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로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토해내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찾아가 하소연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한숨도 있었고, 탄식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고 상처받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토해냈습니다. 그러므로 속이 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다윗처럼 사람에게 털어놓기보다 하나님께 다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비난을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입니다.
3) 비전을 붙잡으라
셋째로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여기 ‘마음을 들여’라는 말을 NIV영어 성경에 보면 ‘with all their heart'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무너진 성벽을 절반이나 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기도하면서 건축하고 건축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짧은 기간 안에 전체 성벽 중 절반이나 재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비전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세 번재 비결입니다.
옛말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신을 한 곳에 모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중석몰촉(中石沒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생긴 말입니다.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이라는 사람은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으로 황제를 모시는 시종 무관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황혼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마음으로 활을 당겼습니다. 화살이 명중했는지 호랑이가 꼼짝하지 않아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큰 바위였습니다. 화살이 그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아까 활을 쏘았던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활을 당겼지만, 화살은 바위를 뚫고 박히지 않고 공중으로 튀어 올랐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처음에 쏜 화살은 바위에 박혔지만, 두 번째 쏜 화살이 바위에 박히지 않고 튀어 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집중의 힘은 대단합니다.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사람은 뉴질랜드 출신 에드먼드 힐러리 경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높은 산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확고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꿈을 이룰 때까지 계속 시도합니다. 저 역시 중간에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방법을 찾아서 도전했습니다. 만일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이쯤 되면 시련도 제풀에 꺾이게 마련이지요.”
이처럼 비전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세운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돋보기로 초점을 모으면 나무를 태울 수 있는 것처럼, 비전을 붙잡을 때 그 비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물을 파려면 한 곳을 집중해서 깊게 파야 물이 나오는 것처럼, 세운 목표에 집중할 때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난받을 때마다, 비난하는 사람을 신경 쓰기보다 이루어야 할 비전에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조롱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때 촉망받던 한 피아노 연주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창 피아노를 연습하던 어느 날, 그 피아니스트가 제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에 임했습니다.
스스로 만족스런 연주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으로부터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는 글렀다.’라는 최악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피아노를 즉시 그만뒀습니다.
그 후 평범한 중년 여인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마침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연주회가 열린다는 뉴스를 듣고 그 연주회에 갔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후 그 피아니스트를 만나 따졌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군요. 연주가 인상 깊어 오래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옛날 당신의 연주는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인은 왜 나에게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기는 글렀다’고 해서 나를 망치게 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이 뭐라 하건 스스로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내 말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했다면, 분명히 당신은 사람들의 비난과 혹평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을 망친 건 내가 아니라, 나약한 당신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욕을 먹고 비난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나쁜 일을 했으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일이나 실수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견디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데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비난을 극복한 느헤미야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비난하는 사람과 맞서 싸우기보다, 침묵하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느헤미야처럼,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게 비난받을 때마다, 비난하는 사람을 신경 쓰기보다 느헤미야처럼 이루어야 할 비전과 달려갈 목표에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귀한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