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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순론
희미한 그림자의 인격화, 긍정 지향성과 순명인식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시작된 전환의 시대에 인간의 풍경, 특히 첫 수필집을 내는 한 여성작가의 내면을 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다고 한 융은 사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이른바 '구원'의 근원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삶 속에는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이 있다. 또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겪으면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된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는 끊임없이 심역에 출몰한다. 이 지점에서 이봉순의 수필은 내적 풍경이 된다. 무의식의 이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불러내 그린 그림이 이봉순 수필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봉순의 수필은 바로 그림자의 인격화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녀의 수필은 자신을 찾아가는 치유 여행에 견줄 수 있다. 인도의 기업인 라메슈와 다스는 “말은 줄에 걸린 빨래처럼 마음의 바람에 펄럭인다.”고 했다. 망치를 휘두르며 관계를 만들 수 없다. 망치라는 연장 하나만 가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못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봉순은 망치 대신 펜을 들었다. 치유를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엄청나게 큰 세계이다. 마법사 멀린은 “슬플 때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길지 않지만 예의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길다고 하였다. 이봉순의 수필은 마음을 갈고 닦아 타인의 마음을 얻는 기술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준다는 의미에서 수필을 읽으면서 우리는 공감의 문을 열 수 있다. 무의식은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그것과의 대면을 피할 때,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의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아에게 준다.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 고통, 갈등, 절망, 상실의 아픔은 자기성찰의 귀중한 기회가 아니겠는가. 이봉순에게 있어서 ‘궁’의 상황은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런 체험,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시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림자의 인격화는 정서의 소통을 의미한다. 우리의 정신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통한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몸의 자세로도 소통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직접적인 방법은 수필 쓰기다.
이봉순은 “그동안 써왔던 글을 고치다 보니 나 자신이 삶에 갈증을 때때로 느껴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들을 보면서, 지난 시간과 그 안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러는 안타까운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지만, 알 수 없는 용기가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오랫동안 내 손 안에 수필을 꼭 쥐고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 수필과 함께 걷는 길이 아름다울 것 같다.”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녀의 수필은 감정과 생각, 의지까지도 표현하므로 소통의 길을 연다. 이 수필집에는 화자의 감정만이 아니고 정보와 사고까지도 실려 있다. 수필을 통해서 화자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고 개념을 통해서 그녀가 살아온 사회의 가치관에 어떻게 순응하고, 어떻게 저항하였는가를 알 수도 있다. 더욱이 그녀의 감정 상태도 알 수 있다. 수필을 통해서 이봉순을 총체적으로 접근해 보자.
Ⅱ. 자아 성찰과 인연화합의 꽃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이 ‘다름’을 창출하는 것이 인연화합이다. 각기 다른 원소들이 모여 분자가 되어 하나의 물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봉순 수필도 작가가 겪었던 여러 체험들 편편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 것이다.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또 인연화합, 즉 상립을 통해서 자기규정을 밝혀나간 것이 이봉순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찰은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이봉순의 수필쓰기는 자아성찰이라는 과정에서 꽃을 피운다. 수필의 개념에는 내면의 고백 못지않게 자아성찰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수필이다.
크게 보면, 이봉순 수필은 인연화합의 본질이나 특성을 그리는 글이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과 함께 빛을 발한다.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은 사회 현실 속 생활인들의 공유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구원'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서는 문학의 밑바탕이 되는 요소로서 문학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상에 대해 인정을 흘리는 일, 그리움을 갖는 일, 추억의 세계 속으로 빠져 인생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일 등이 이봉순의 주된 작업이다. 수필적 미학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도 않고, 거창한 주제나 경이로운 소재에 있지도 않다.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배어 있는 따스한 정이 독자의 누선을 자극할 때 완성되는 것이 수필미학이다. 그래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글에 공감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봉순 수필집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면서 무욕의 삶을 추구하는 ‘비움’의 자세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가슴을 매만지게 된다.
집이란 말에는 가족의 의미가 가장 강하게 들어 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처럼 집은 가족과 함께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견디며 살아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제일 먼저 마음에 들어온다. 그러나 좀 더 넓게 생각해보면 집은 ‘나’라는 존재의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기억을 모아둔 기억창고나 저장소 같은 곳이 아닐까 싶다. 비록 그 기억이 사람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고통과 슬픔의 장소일 수도 있겠지만,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영혼의 안식처’라는 느낌이 든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노래 가사처럼, 집은 어쩌면 세상에 지쳐 돌아오는 영혼들을 받아주고 위로해 주는 유일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게 실제로 아름다운 집과, 초라한 집이든 그저 마음으로만 그리던 집이든 내 몸과 영혼을 뉘어 쉴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우리 모두의 집이다.
- <기억 속의 집> 중에서 -
이 수필은 가족이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한 ‘잡’에 대한 단상이 잘 노정되어 있는 글이다. ‘견디며 살아내는 곳’으로 집에 전통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그녀는 더 나아가 집을 기억의 창고로 인식한다. 이 수필이 수필다울 수 있는 근거 내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부분이라면 이런 대상에 대한 자기만의 의미부여다. 그 기억의 저장소는 다시 영혼의 안식처로 의미가 확대되면서 집이라는 개념을 ‘치유’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부분은 이 수필의 쾌미다. 몸과 영혼이 함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집을 회복하는 게 현대인에게 급선무이지싶다. 작가는 이러한 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다 더 설득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제목과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노래가사를 택스트로 채굴하여 근거를 보충하는 것으로 볼 때, 이봉순은 매우 전략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편다고 보겠다. 삶의 질적 변화가 인간에게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부의 획득만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잊고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작가가 <기억 속의 집>을 통해 말하려는 궁극적 가치는 ‘절문이근사’다. 내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가치나 애모가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울리는 경종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집에 대한 단상은 매우 전통적이고 본래적이다. ‘힘든 일’ ‘고통과 슬픔의 장소’ ‘초라한 집이든’ 등의 어구를 종합해서 보면, 과욕으로부터 오는 비극적 삶의 시초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견뎌내는 것’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영혼의 안식’이 물질적인 것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인식이 녹아 있어 이 글에는 전통적인 가치의 선양의식, 그리고 물신주의를 배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녹아 있다고 봐야겠다. 기억의 뿌리를 움켜지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수필은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추억을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잊고 있던, 기억의 저편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인연화합을 통해서, 서정어린 그림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은 이봉순 수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나는 바로 당과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남편에게 어머니와 때로는 설거지를 부탁하고 혼자 걷기 시작했다. 보폭을 크게 하고 팔을 앞뒤로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삼사십 분 정도를 힘차게 걸었다. 안 보이던 풀과 꽃, 새소리도 들으며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쁜 일이 꼭 나쁘지만 않다는 교훈을 배운다. 육 개월 꾸준하게 운동하다 보니 혈당이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주로 나물 종류를 좋아하고 육식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으나, 단백질이 부족해지면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음식조절도 하고 있다. 노력해서도 안 되면 어머니처럼 ‘인슐린 펌프’로 인슐린을 주입해 당을 조절해 주는 기계를 달고 살면 되겠지 하는 여유도 생겼다.
- <나이가 지나간다> 중에서 -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나이가 들면 먼저 생기는 것이 몸의 고장이다. 작가는 ‘당과 거리두기’라는 실천덕목을 가지고 건강을 관리해 나가고자 하는데, 삼십 분 정도의 운동만으로도 건강해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나쁜 일이 꼭 나쁘지만 않다는 교훈을 배운다.”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수필을 쓰면서 마음의 여유도 많이 얻고 있다. 수필쓰기를 통한 치유효과를 확실히 느끼고 있다. 운동도 하고 식이요법도 해서 건강을 챙기지만, 혹여 노력해도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살겠다는 자세에는 순명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봉순의 글에 ‘어머니’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그녀의 가슴 안에 그 분의 존재가 너무나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고, 병으로 고생하며 살았던 어머니는 지금와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그녀에게 일으킨 것이다. 시어머니를 자신의 삶에 초대한 것은 전략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당 문제로 고생한 그런 어머니가 더욱 눈에 밟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이가 지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유를 가지고 순명을 가슴 속에 채우는 것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고, 자신도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준비이자 연습인 것이다. ‘안 보이던 풀과 꽃, 새소리도 들으며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쁜 일이 꼭 나쁘지만 않다는 교훈을 배운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운동과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여유는 물론 건강한 정신까지 되찾고 있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종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즉 달관의 자세를 보여준다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결과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의 압권은 안 보이던 풀과 꽃, 새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대목에서의 역동성이다. 풀과 꽃 새소리의 등장이 시청각적 이미지를 불러왔고 수필 속의 풍경을 영화필름 돌아가듯 바뀌게 하고 작가를 둘러싼 공간 전체를 입체적인 시공으로 전환시켜 미적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곤혹스러운 공포를 이겨내며 창작에 인생의 반세기를 살아온 ‘쿠사마 야요이’를 생각하다가 못난 자신에 머물러 있는 나를 본다. 나름 자족해야 노년이 행복하다는 말에 한쪽 귀라도 멀쩡하다니 감사할 일이지 않은가. 양쪽을 다 듣지 못하는 장애로 불편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쪽이라도 건강하지 않은가. 오늘도 살아 있음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감사하자. 한 쪽 귀가 닫혔다고 감성도 메말랐을까. 소망 하나, 한 쪽 귀가 닫혔더라도 대신 문학적인 감성의 문이 열려주었으면 하고 꿈꾸며 나를 다독인다.
- <10프로 남았어요 > 중에서 -
이봉순 수필들의 특징 중에서 가장 강한 색채를 가지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성이다. 청력검사에서 청력기능이 10퍼센트 남았다는 검진 결과를 듣고 ‘자족해야 노년이 행복하다’는 말을 되새겨보며 현실에 만족하는 자세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10프로 남았어요’라는 제목을 통해 청력이 아주 안 좋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소망 하나, 한 쪽 귀가 닫혔더라도 대신 문학적인 감성의 문이 열려주었으면 하고 꿈꾸며 나를 다독인다’는 표현이 그렇다. 그녀의 글에는 한결같이 긍정의 자세가 녹아 있고, 그 긍정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는 작가의 인간적 체취가 드러난다. 한 마디로 그녀의 작품은 현실 인정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멋진 수필가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봉순은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한 쪽 귀가 닫혔더라도 대신 문학적인 감성의 문이 열려주었으면’ 하는 기원은 그녀의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이 수필의 복합적 구성은 기술방법론에서 보면 ‘이중성’과 같은 말이다. 빛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파동-입자’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이봉순 수필에 적용해 보자. 빛이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모두 나타내듯이 이봉순의 수필도 복합적인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봉순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드높이는 이중구조의 쾌미는 정서의 객관화에서 나온다. 수필 <10프로 남았어요>는 청력을 거의 상실한 자신의 삶을 비슷한 처지인 ‘쿠사마 야요이’에 견준 데 관전 포인트가 있다고 하겠다. 그 역시 창작혼으로 궁의 상황을 극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수필은 극복의 삶, 만족의 삶이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최대 압권은 ‘곤혹스러운 공포를 이겨내며 창작에 인생의 반세기를 살아온 ‘쿠사마 야요이’를 생각하다가 못난 자신에 머물러 있는 나를 본다.‘는 대목의 상관성이다.
나는 투명한 유리창이 좋다. 안에서나 밖에서도 볼 수 있어서다. 유리창은 닫혀 있어도 그다지 답답하지 않아 그런대로 괜찮다. 요즘에는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거실 창이나 자동차의 썬팅은 답답해서 싫다. 투명 유리창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아도 좋고,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여유로움도 좋다. 창밖에 꽃밭이나 정원이 있다면 더욱 좋다. 장독대가 보이면 정겨워서 좋고 누렁이가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면 보는 즐거움이 크리라. 비 오는 날이면 고즈넉한 분위기도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좋다. 유리창 밖을 내다볼 때 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좋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누렁이가 뛰어다니며 재롱 피우는 것을 보는 재미도 한몫할 것이 분명하다.
고층아파트 생활의 큰 아쉬움이 이런 게 아닌가.
-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단상> 중에서 -
살아가는 이유 아홉 가지를 산만구성으로 엮은 이 수필이 눈길을 끄는 것은 왜일까. 탄력성 때문이다. 전개나 구성의 변주는 문학의 속성이기도 한 탄력성을 주는 일로 매우 권장할 만한 사항이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든 아홉 가지 살아가는 존재 이유가 아주 평범한 것들이라 놀람을 안겨준다. ’뜻밖의 만남‘ ’내가 사랑하는 이유‘ ’사치품‘ ’변명‘ ’그 집 대문 앞‘ ’뒷모습‘ ’진달래‘ ’나무‘ ’유리창 밖‘ ’깍두기 찌개‘와 같은 아홉 이유들은 이질적인 것 같으면서도 나름의 유기적인 상관성을 지닌 질료들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녀는 사물과 사건을 끌어들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아련히 그리워하는 낭만적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그 자체에 눈길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상과 자연까지 확대해서 깊은 명상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포착된 사물은 관조의 세계로 끌어들여지고 그것은 곧 현실의 삶에 투사된다. 이 수필의 화두 ‘살아가는 이유’ 아홉 가지 항목을 보면, 이것이 왜 살아가는 이유일까를 생각해 보게 하지만 이런 이유로 수필은 향기를 낸다. 구성 요소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홉 가지 이유 중에서도 유독 ‘유리창 밖’이라는 항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나는 투명한 유리창이 좋다. 안에서나 밖에서도 볼 수 있어서다.’는 말에는 삶을 대하는 자세의 순수성이 묻어난다. 투명한 유리창에 대한 애호는 세상을 제대로 투명하게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위선이나 가식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숨기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순수하게 살아가고 있는 순박한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고, 그 천진성에 대한 지지이기도 한 투명성은 우리 삶을 살찌우게 할 요소가 분명한 것 같다. 이를테면 밖에서 안을 보든 안에서 밖을 보든 사람들은 유리창을 통해 안과 밖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연의 대상 앞에 선 작가는 자연의 완상을 즐기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의 철학자다. 따라서 그녀의 수필은 전혀 교시적인 분위기를 주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교시라는 문학적 기능을 손색없이 수행한다고 하겠다. 창밖의 풍경에 대한 작가의 상상은 역시 관찰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역동성을 가져와 미적 사유의 즐거움을 주는 것 같다.
Ⅲ. 욕망의 주체와 견고한 자화상
누구에게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이봉순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이봉순 수필가의 특성은 욕망하는 주체와 견고한 자화상에 비쳐진 그녀의 수필에 대한 관조로 풀어낼 수 있겠다. 수필은 응축된 정서와 사상의 지도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그 지도에는 작가가 거처하고 있는 위치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바로 견고한 주체의 자화상이다. 이봉순의 자화상은 많은 수필에 등장하는 사연들에 빛나고, 날카로운 작가의 인식이 돋보이는, 수필 에서 작가는 욕망의 근원에서부터 사건의 중심으로 달려간다. 그 접근 과정에서 인용하고 있는 예화들, 삽화들 그리고 다양한 근거와 전략장치들은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인간미가 특출한 주변인물이나 작중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픔을 동반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인생을 이해시키는 데 안성맞춤인 화소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두 가지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만치 고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봉순 수필의 또 다른 한 축은 삶의 여러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을 바로 세우고 자신의 삶을 자기식으로 이끌어가려는 작가의 주체적 인식이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기심을 가지고 그대로 생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권을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식이 많고 능력이 불어나면 욕심이 불어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확대된다. 이러한 욕망의 확대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어두움의 그림자다.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민주 시민 나아가 세계시민으로서의 교양을 획득해가는 그녀에게 갈등이나 어두움은 없다. 공교롭게도 이봉순의 수필은 이런 갈등의 그림자를 물리치려는 수필적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주목된다.
시어머니께서 의심을 하고 역정과 짜증을 내실 때나 씻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실 때가 있다. 어르고 달래며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진솔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시어머니를 끝까지 잘 모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인연이 어디까지 일지 모르는 일이지만, 생이 다하실 때까지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알 수 없는 욕심을 부려본 적이 있다. 칠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숱한 일들이 있었지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환한 미소를 닮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의 우군이었던 그녀도 우리 집을 떠났다. 또 누군가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갈 그녀를 상상한다.
-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중에서 -
작가는 며느리로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끝까지 케어하며 살 수밖에 없는 근거를 설정함에 있어 ‘우리의 인연이 어디까지 일지 모르는 일이지만, 생이 다하실 때까지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알 수 없는 욕심을 부려본 적이 있다’는 진술을 활용한다. 자신이 시어머니를 칠 년 동안 잘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친절하게 어른을 잘 돌보아준 요양보호사 덕분이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재산은 인간적인 정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속에서 저 요양보호사처럼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마음을 다해 사회적 약자를 돕고 서로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이는 인연화합의 순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라 하겠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서 야기된 조작된 행복관, 전도되고 도치된 가치관으로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 아닌가. 그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순명'이요, '견딤'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면, 순리의 시간으로 가는 삶의 터전이 아닐까. 삶의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향한 주체적 열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욕망의 주체는 처음부터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그것을 필요하다고 느끼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수필이 우리에게 기여하는 것은 ‘인생은 어쩌면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르침이다. 바람직한 욕망의 주체가 되는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작가는 한 요양보호사의 소명의식을 통해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 수필이 감동을 주는 것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그 요양보호사의 ‘웃음을 잃지 않는 환한 미소를 닮고 싶다.’ 는 자세다. 시어머니 덕분에 이런 훌륭한 보양보호사와 인연이 된 것을 감사히 여기는 작가의 생각도 주제의식의 구체화에 기여한다.
열흘 뒤쯤 밭에 콩 싹을 보러 와서 물을 줄 겸해 다시 만나서 양평 해장국 먹자고 했다. 더운 날씨에 일은 힘들었지만 즐거움이 더 컸다. 농사라고는 해보지 않아서 어찌해야 할지 궁리하던 차였는데 형부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것 같았다. 작물을 제대로 수확하려면 물도 주고 약도 때로는 필요하겠지, 잡초도 뽑아주며 가지치기도 해 주어야 튼실한 작물을 수확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끊임없이 돌봐주어 ‘어른 아이’가 되지 않고 성숙한 노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오늘 심은 콩 세 알 중 과연 얼마나 콩깍지에 콩이 열릴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금부터 설렌다. 콩도 호박도 잘 자라야 할 텐데.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으로 나눌 사람을 손에 꼽으며 마음은 벌써 콩밭에 가 있다.
하루 농부는 콩 수확할 꿈에 부푼다.
- <콩 세 알> 중에서 -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란 걸 나타내는 수필이다. 작가는 ‘성숙한 노인’이 되고자 한다.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으로 나눌 사람을 손에 꼽으며 마음은 벌써 콩밭에 가 있다.’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마음의 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나눔의 꿈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이봉순은 일상의 모든 인연에 대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계없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방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무관심하고, 외면함으로써 홀가분하기를 소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른 아이’로 남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관계의 진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남달리 주체적인 사람임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긍정적 세계관이 투영되고, 고통에 대한 인식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보고 자란다는 농작물이 아닌가. 콩 세 알의 꿈을 잘 아는 작가의 심장이 뛰는 이유다.
아무튼 발이 회복되고 기회가 된다면 체력을 키워 도전해보리라. 남편은 두 번이나 다녀와서 함께 갈 수 없다면, 나는 좋은 친구와 함께 할 수 있기를 꿈꾸어본다. 사실 요즘에는 긴 여행이 힘든 게 사실이다. 젊었을 때는 시간과 돈이 문제였는데 이제는 긴 일정에 따른 무거운 짐도 부담이 된다. 많은 것을 보아도 기억에 한계를 느낀다. 이제는 쉬는 여행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제일 편한 곳이 집이지만 고생길을 감수하면서도 여행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한동안 많은 것을 보려고 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우주 속의 미미한 존재임을 느끼고 싶다. 요즘에는 너무 먼 곳에 가려면 체력이 문제가 되기도 해서 안전하고 가까운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살피는 여행에 관심이 간다. 역사 공부를 더 해서 역사 탐방하는 그런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무더운 여름날에 돈 하나 들이지 않고 상상만으로 여행하며 더위를 잠시 잊었다.
-<상상으로 떠나본 여행> 중에서 -
상상 여행에 대한 넘치는 작가의 개성적 인식이 차가운 겨울바람도 녹일 정도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직시하는 주체적인 사유가 아름답다. 수필은 이렇듯 대상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이 돋보일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운명지워진 모든 것을 갈등 없이 수용하는 삶의 태도가 더없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이 수필은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여심을 발견하는 데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한동안 많은 것을 보려고 했다면, 이제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우주 속의 미미한 존재임을 느끼고 싶다.’ 대목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지나온 삶에 대한 응시를 통해 밝음과 활력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이 글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을 이제는 주체적으로 끌어가겠다는 남다른 인식 때문이라 하겠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투자함으로써 정신적 성숙을 지향하겠다는 진술에서 그녀의 세계관은 더욱 빛을 발한다.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수필이라면, 이런 유형의 글은 나름의 역할을 다한다. 우리의 삶은 많은 견문을 통해 완성된다. 생의 완성을 기대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깨달음에 이르는 일도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존재의식을 가지려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구도자라 하겠다. 이런 작가의 열린 마인드는 ‘훌륭한 문인은 구경꾼이요 방랑자여야 한다’고 한 하버드대 쿠퍼렌드 교수의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이런 자기 주도적 삶의 태도는 어느 날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선한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발전해 가는 게 아닐까. 상사에게 혼이 나면서도 음악의 유익성을 설파한다. 죄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해가며 끝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젊은 여성 교도관의 열정과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진정한 리더가 아닌가. 죄수들은 한순간에 죄를 지어 후회하며 고통스러운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며 생활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서 리더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록 죄인이지만 어미들인 그들의 고통에 많은 공감이 되었다.
달아난 잠이 한 편의 영화를 선물해 준 밤이었다.
- <영화 한 편의 선물> 중에서 -
선한 역할에 대한 애정과 성찰은 이봉순 수필의 깊이를 알게 한다. 그녀는 마음이 넓은 만큼 자상하고 세심하게 주변을 잘 살피는 편이다. 그리고 한 눈에 그들의 심중으로 들어간다.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한 여성 교도관을 바라보는 눈길과 그 의미화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이봉순은 훌륭한 수필가의 자질을 이미 가졌다. “어느 곳에서나 선한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발전해 가는 게 아닐까.” 이 부분은 ‘공동선’의 가치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을 통해 선한 역할의 의미를 멋지게 형상화하는 작가의 기량이 이 수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디테일한 서사의 제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이 작품은 구성적 전개가 잘 되었다. ‘비록 죄인이지만 어미들인 그들의 고통에 많은 공감이 되었다.’는 대목은 예사로 넘길 부분이 아니다. 사랑과 연민의 속성을 포함하는 것은 ‘진’도 ‘선’도 아니다. 바로 ‘미’다. 사랑과 연민이 녹아 있는 여성교도소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서사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섬세함과 강인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녀의 수필 앞에 서면, 문체에서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작가는 영화보기를 통해 한 리더의 주요성을 ‘교도관의 헌신’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이는 ‘사랑’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건져올렸다는 데서 그 가치가 크다. ‘응징’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외치는 한 교도관의 견고한 직업의식은 근대적 성찰의 결과로 나온 인간관에 대한 새로운 수용임과 동시에 인류애적 사상에 기반을 둔 듯하다. 사랑과 용서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서사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설정하려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결국 사랑을 받고 싶은데 사랑을 받지 못해서 죄를 짓게 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진술에서 그녀는 우리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복잡한 악의 근원을 파헤친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 사랑에서 인간 본성을 찾아내려고 하는 그녀의 과감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Ⅳ.
수필가 이봉순은 모두 가슴 한복판에 녹슬어가는 징을 하나 감추고 누군가 아프도록 쳐주기를 기다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독자들이 자신의 수필집 이면으로 찾아와서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인연화합의 원리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봉순의 수필은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풀어야 할 기호 내지는 암호인 것이다. 이 해답을 찾으려는 과정이 바로 상호작용이다. 수필로 쓰여진 회상의 이면에는 대체적으로 다른 기억이 은폐되어 있다. 은폐된 기억에는 이봉순 수필가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말하자면 의식의 세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은 덮개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저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심리 과정이 나타나는 이유는 억압해버리는 기억도 억압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픈 경험도 기억으로 남으려는 힘이 있다. 이 힘의 작용으로 이봉순의 기억은 수필이라는 이름의 옷으로 갈아입고 여러분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이 수필의 맛은 표면적 내용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을 탐구하고 성찰하여 숨어 있는 작가 자신의 긍정 지향성과 순명인식을 과감하게 보여준 데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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