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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유배문학 16세기 정황(丁熿)의 오언율시 한시의 세계와 문학적 특징>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오언율시(五言律詩) 3편--
이번 지면에는 거제도 520명 유배인 중에 가장 많은 유배문학을 남긴 조선 전기의 올곧은 선비이자 문신인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오언율시(五言律詩) 한시의 세계와 문학적 특징을 소개하겠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 특히 정치적 시련(을사사화와 유배)과 그 과정에서 지켜낸 성리학적 지조가 그의 문학 세계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선생은 조광조의 학풍을 이은 사림파로서 천품이 정직하였고, 문정왕후의 갈장(渴葬, 장례 절차)을 반대하는 등 권력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을사사화 때 파직되고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양과 거제도에서 오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60년 거제도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던 인물이었다.
○ 조선 전기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로서 권력에 기대지 않았던 그는 거제도에서 13년간 유배 생활을 마쳤던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한시 세계는 사화(士禍)라는 극단적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선비의 절개와 학문적 의리, 그리고 유배지의 고독을 담고 있다.
이번 편에 소개하는 3편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등계룡 여김급(登鷄龍 與金伋)」, 「제부헌록후(題負暄錄後)」, 「봉정이자수 준민(奉呈李子修 俊民) 기미년(己未)」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 정황과 오언율시의 특징을 분석해 보겠다.
● 지금부터는 16세기 정황(丁熿)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의 작품별 분석 및 문학적 정황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① 「등계룡 여김급(登鷄龍 與金伋)」에선, 유배지 자연과의 동화와 지기(知己)와의 소통을 묘사했다. 거제도의 중심에 솟아 있는 계룡산(鷄龍山)에 지인인 김급(金伋)과 함께 오르며 지은 시다. 유배객에게 산에 오른다는 것은 물리적 유폐 공간을 일시적으로 벗어나 드넓은 세상을 조망하는 해방의 행위다. 문학적 특징으론, 거제도의 거친 바다와 대조되는 계룡산의 웅장한 기세를 오언율시의 대구(對句)를 통해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함께 오른 거제향교 훈도 김급(金伋)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유배지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지기'가 곁에 있음을 확인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유가(儒家)적 우정이 돋보인다.
둘째 ② 「제부헌록후(題負暄錄後)」 2수(首)에선, 군자고궁(君子固窮)과 내면적 성찰을 서술했다. '부헌록(負暄錄)'은 '겨울날 햇볕을 쬐며 쓴 기록'이라는 뜻으로, 유배지의 혹독한 환경과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담담히 기록한 일기나 글의 뒤(後)에 제(題)한 시다. 문학적 특징으론, '군자는 궁할지라도 지조를 지킨다(君子固窮)'는 선비 정신이 깊게 배어 있다. 외부 세상(조정의 정치적 소용돌이)과의 단절을 받아들이고, 쬐어오는 한 줄기 햇살과 같은 소박한 자연에 의지해 스스로의 도학적(道學的) 삶을 성찰하는 초연하고 맑은 시풍을 보여준다.
셋째 ③ 「봉정이자수 준민(奉呈李子修 俊民) 기미년(己未)」에선, 사화(士禍)의 아픔과 지조의 연대를 노래했다. 기미년(1559년)은 정황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1560년 졸)이자 유배 생활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동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자수(李子修, 이준민)에게 공손히 받들어 바친(奉呈) 글이었다. 이 글의 특징은 유배지에서 맞이한 노년의 쓸쓸함과 쇠약해진 병구완의 절박한 심경이 오언율시 특유의 절제된 형식 속에 흐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있는 동료(이준민)에게 자신의 결백함과 학문적 신념이 여전함을 전하며, 사화의 폭풍 속에서도 변치 않는 선비들의 '의리적 연대'를 노래했다.
● 다음으론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의 한시 문학적 특징을 살펴보겠다. 정황 선생의 한시는 거제도 유배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①강직한 지조와 의리의 문학(도학자적 면모)이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정황 선생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도학적 삶을 지향했다. 유배의 고통을 임금에 대한 원망으로 치환하기보다, 스스로를 다잡는 수양의 계기로 삼는 당당함이 시구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둘째 ②오언율시(五言律詩)의 엄격한 절제미이다. 감정을 가감 없이 분출하는 대신 5언 8구의 엄격한 율격과 대구법을 활용하여, 슬픔과 고독을 고도의 지성으로 정제하여 표현했다. 감정을 안으로 삭여내는 은근하면서도 묵직한 어조가 특징이다. 셋째 ③유배지 거제도의 풍광과 심경의 투영했다. 섬이라는 단절된 공간과 바다, 계룡산 등의 자연환경은 단순히 배경에 그치지 않고, 선생의 고독을 심화시키는 매개체이자 동시에 세속의 때를 벗겨내는 청정(淸淨)한 공간으로 그렸다.
● 정황(丁熿) 선생은 거제도 지역 문학사 및 교육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선생의 거제도 유배 한문학은 고려의 정서(鄭敍)로부터 시작된 거제 유배문학의 맥을 잇고 이를 한층 심화·발전시켰다. 그는 약 13년의 유배 기간 동안 시 창작에 머물지 않고, 거제향교에서 영남 전역의 후학들을 교육하며 섬 지역의 문풍(文風)을 일깨웠다. 그의 한문학은 개인의 문학적 성취를 넘어, 변방 거제를 '교육과 문학의 섬'으로 탈바꿈시킨 문화적 이정표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음은 정황(丁熿) 선생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등계룡 여김급(登鷄龍 與金伋)」, 「제부헌록후(題負暄錄後)」 2수(首), 「봉정이자수 준민(奉呈李子修 俊民) 기미년(己未)」 3편을 차례대로 소개하겠다.
1) 다음 ‘支’ 운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등계룡 여김급(登鷄龍 與金伋)」은 조선 전기 을사사화로 인해 거제도로 유배를 왔던 문신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작품으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작가가 유배지인 거제도의 주산(主山)인 계룡산에 제자이자 거제향교 훈도였던 김급(金伋)과 함께 올라, 눈앞에 펼쳐진 거제의 풍경을 바라보며 유배객의 쓸쓸한 심경과 임금과 나라를 향한 그리움을 고사(故事)에 의탁해 표현한 명작이다.
⇨이 시의 주제는 유배지(거제도) 계룡산에 올라 느끼는 대자연의 감회와 고국(조정)을 향한 그리움이다. 거제도의 시원한 바다와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풍경을 대구(對句)로 잘 묘사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유배 지식인들의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의 억울함과 외로움을 격조 높게 표현했다.
**「등계룡 여김급(登鷄龍 與金伋)」** 김급과 함께 계룡산에 오르다. / 정황(丁熿 1512~1560)
五年山下住 오 년 동안 이 산 아래 살다가
今爲爾登玆 이제야 너(김급)를 위해 이곳에 오르는구나.
蠻海連天杳 남쪽 오랑캐 바다는 하늘과 이어져 아득하고
頭流出霧危 지리산(두류산)은 안개 속으로 아슬아슬 솟아 있네.
懷英曾拭淚 (유배 간) 왕회영도 일찍이 눈물을 닦았고
子厚漫吟詩 (좌천된) 유자후도 그저 시를 읊조렸지.
蒼石題名姓 푸른 바위에 이름 석 자 적어 두는 것은
要留去國思 조정을 떠나온 외로운 마음을 남겨 두기 위함이라네.
[주1] 만해(蠻海) : 한양 중심의 시각에서 남쪽 변방의 바다(거제 바다)를 낮춰 부른 표현으로, 끝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바다를 묘사한다.
[주2] 두류(頭流) : 지리산의 옛 이름이다.
[주3] 회영(懷英) :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인 왕회영(王懷英)을 뜻한다. 그는 억울하게 변방으로 유배를 가며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해 눈물을 흘렸다.
[주4] 자후(子厚) : 당나라의 대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의 자(字)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영주(永州), 유주(柳州) 등 남쪽 변방으로 좌천당한 후 쓸쓸히 시를 지으며 삶을 달랬다.
[주5] 김급(金伋) : 당시 거제향교 훈도(訓導), 경북 청도 출신. 교관(敎官)은 향교에서 교수(敎授), 훈도(訓導), 교도(敎導) 등을 통칭하는 말인데 1550년대 거제향교 교관(훈도)으로는 정9품 김적필(金迪弼) 김급(金伋) 안교관(安校官) 등이 있었고 30명의 유생을 가르쳤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정황 선생은 동짓날 암자에서 제관으로 양기(陽氣)가 발효됨을 기원드렸고, 조선 중종의 제삿날 옛 계룡사에서 거제향교 훈도 김급과 거제선비 들이 함께 중종왕의 제를 올렸다.
○ 내용인즉, [1~2구]에선, 정황 선생은 1548년 곤양에서 거제도로 이배(유배지를 옮김)되어 왔다. 시 속의 '오 년'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 시는 1552년(명종 7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계룡산 자락 아래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5년이 되어서야, 자신을 따르는 향교 훈도(교사) 김급의 청이나 동행 덕분에 마침내 산 정상에 올라섰음을 말하며 시작한다. [3~4구]에선, 정상의 거대한 대자연의 풍경이 펼쳐진 거제 주산 계룡산 정상에서 멀리 안개 너머로 아스라이 솟아 있는 지리산의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느낀 장엄함과 고립감을 시각적으로 대비했다. [5~6구]에선, 자신의 처지를 중국 고대 인물들의 유배·좌천 역사에 빗댄 구절이다. 정황 자신도 을사사화라는 정치적 풍파로 남쪽 섬에 갇힌 처지이기에, 눈물짓던 왕회영과 시를 읊던 유종원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7~8구]에선, 예로부터 문인들은 명산에 오르면 바위에 이름을 새기곤 했다. 작가가 김급과 함께 푸른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이유는 단순한 과시가 아니다. '거국사(去國思)' 즉, 임금이 계신 조정을 떠나 변방에 머물며 느끼는 충정과 고독,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이 거제도 계룡산 바위에 영원히 각인해 두고 싶다는 유배객의 애절한 심사로 시를 마무리했다.
2) 다음 ‘先’과 ‘虞‘ 운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 2수(首) 「제부헌록후(題負暄錄後)」 ‘부헌록의 뒤에 쓰다’는 조선 전기 을사사화로 인해 거제도에서 오랜 유배 생활을 했던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연작시로,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부헌(負暄)' 또는 '부훤'은 '등을 햇볕에 쬐다'라는 뜻으로, 옛날 중국의 한 가난한 농부가 겨울날 햇볕을 쬐며 그 따스함이 너무 좋아 임금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는 고사(野人獻日)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변방에 처한 신하가 임금을 향해 품은 우직하고 순수한 충심을 뜻한다. 이 시는 정황 선생이 유배지 거제도에서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생각을 정리해 저술한 총 10권 규모의 책 『부헌록(負暄錄)』을 짓고 난 후, 책의 맨 뒤에 감회를 덧붙여 기록한 발문(跋文) 성격의 작품이다.
○ 이 연작시의 창작 배경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이배된 후, 배소에서 방대한 유배 저술인 『부헌록』을 집필하는 과정 혹은 마친 후의 소회를 읊은 시다. 주제는 유배지의 고독과 혹독함을 견디며 지켜내는 변함없는 우국지정(憂國之情)과 학자로서의 신념을 서술했다. 또 전반부(제1수)에서는 거제도라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고통스러운 계절감과 환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후반부(제2수)에서는 '화씨벽' 등의 고사를 통해 자신의 결백함과 뚝심 있는 선비 정신을 강인하게 표출했다. 이는 유배 문학의 전형적인 전개와 묘사를 보여준다.
<제1수 其一> 「제부헌록후(題負暄錄後)」 / 정황(丁熿 1512~1560)
中書君告倦 붓(중서군)이 피로함을 고해오니
第六負暄編 이것이 『부헌록』의 여섯 번째 편이로구나.
犬馬孤誠苦 견마(신하)의 외로운 정성은 애달프기만 한데
雲天俯聽玄 구름 낀 저 높은 하늘(조정)의 들으심은 아득하네.
汗流三伏月 삼복더위 달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心落一分年 한 해가 저물어갈 때마다 마음은 닳아 없어지네.
瘴雨無邊海 장마 섞인 비는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에 내리는데
斜陽底處穿 지는 석양빛은 어느 밑바닥을 뚫고 들어오는가.
○ <제1수> 내용인즉, [1~2구]에선, '중서군(中書君)'은 '붓'을 의인화하여 부르는 별칭이다. 거제도 배소에서 밤낮으로 저술에 몰두하다 보니 붓마저 지쳤다고 표현하며, 이 책(부헌록)의 제6편을 마무리 지었음을 밝혔다. [3~4구]에선, '견마(犬馬)'는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자신은 여전히 견마처럼 임금을 향한 고독하고 괴로운 충성을 바치고 있으나, 구름 너머 아득한 하늘(구중궁궐의 임금)이 자신의 억울함과 충심을 굽어살펴 들어주실지는 현묘하고 아득하기만 하다는 탄식이다. [5~6구]에선, 유배지의 혹독한 환경과 흐르는 세월에 대한 묘사다. 삼복더위의 찌는 듯한 유배지에서 땀을 흘리며 저술에 매진하는 육체적 고통, 그리고 유배 생활 속에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이 타들어 가고 허물어지는(심락) 정신적 애달픔이 대비된다. [7~8구]에선, 유배객의 절망적인 시공간을 시각화했다. 남쪽 변방의 거제 바다에는 독한 기운을 품은 비(瘴雨)가 끝없이 내리고 있다. 그 어둠과 절망 속에서 저물어가는 해(사양)의 희미한 빛이 방구석이나 유배지 어디를 뚫고 들어오는지를 바라보며, 혹시 모를 임금의 은혜(빛)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과 쓸쓸함을 교차시키고 있다.
<제2수(首) 其二>
哀我屛臣地 슬프도다, 내가 내쳐진 신하로 있는 이곳에서
負暄不耐愚 임금께 따스함을 전하려는 어리석음을 견디지 못하네.
擬持和氏璧 내 마음은 화씨의 보옥(화씨벽)을 지닌 듯하고
同愛賈胡珠 외국 상인(고호)이 아끼는 진주와도 같다네.
落筆非新字 붓을 내려 쓰는 글들은 새로운 글자가 아니요
留心是曩圖 마음을 머무르게 하는 것은 오직 예전부터 품어온 뜻이라네.
未知人厭舊 사람들이 옛것을 싫어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終始向前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앞길을 향해 나아가리라.
○ <제2수> 내용인즉, [1~2구]에선, '병신(屛臣)'은 조정에서 멀리 쫓겨나 변방에 물리쳐진 신하, 즉 유배 중인 정황 자신을 뜻한다. 자신처럼 버림받은 처지에서도 겨울날 햇볕을 임금께 바치고 싶어 했던 농부처럼(負暄) 우직하게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슬퍼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3~4구]에선, '화씨벽(和氏璧)'은 진가를 알아보지 못해 처음에는 발이 잘리는 고초를 겪었으나 결국 천하의 보물로 인정받은 옥이다. 정황 선생은 지금 비록 대역죄인처럼 유배를 와 있지만, 자신이 품은 학문과 임금을 향한 마음은 결백하고 가치 있는 '화씨의 옥'이자 '귀한 진주'와 같음을 고사에 빗대어 당당하게 선언했다. [5~6구]에선, 배소에서 저술한 책의 내용을 언급했다. 종이 위에 써 내려간 글들은 세상을 현혹하는 기이하고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성현의 도리이자 예전부터 자신이 품고 지켜왔던 유학자로서의 대의와 우국지정(낭도)임을 밝히고 있다. [7~8구]에선, 세상 사람들이나 조정의 권력자들이 자신이 고수하는 의리와 옛 도리(舊)를 고리타분하다고 싫어할지언정, 자신은 흔들리지 않고 처음과 끝이 한결같게 올바른 선비의 길, 학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굳은 의지와 지조로 시를 맺었다.
3) 다음 ‘虞’ 운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봉정이자수 준민(奉呈李子修 俊民) 기미년(己未)」 즉 ‘이자수(이준민)에게 받들어 올림, 기미년(155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이 기미년(1559년, 명종 14년)에 거제도 유배지에서 학문적 동반자이자 벗인 이자수(李子修, 俊民)에게 보낸 한시다. 이 글은 정황의 문집 『유헌집(游軒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정황 선생은 을사사화(1545년) 직후인 1546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오랜 유배 생활을 겪었다. 이 시는 유배지라는 고독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학문적 자부심(渊源)을 잃지 않고, 멀리 있는 동반자와의 정신적 교감(神交)을 나누며,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권면(莫窄眼前途)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유배문학의 양상을 보여준다.
참고로 이준민(李俊民1524~1590)은 조선시대 여럿 이름이 등장한다. 이번 한시 주제의 이준민은 정황 선생과 14살 차이 나는 학문적 동반자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조카(누나)다. 또한 거제향교에서 수학한 정황 선생의 제자 중에도 이준민이 있다.
**「봉정이자수 준민(奉呈李子修 俊民) 기미년(己未)」** / 정황(丁熿)
念子猿啼裏 원숭이 울부짖는 (유배지) 속에서 그대를 생각하노니
山明水秀區 그대 있는 곳은 산 맑고 물 빼어난 아름다운 곳이리라.
淵源承有自 (우리의 학문적) 연원은 이어받은 뿌리가 저절로 있으니
契分托非孤 서로 맺은 이 정분은 외로운 곳에 기탁한 것이 아니라네.
德備人何假 덕을 이미 갖추었으니 어찌 남에게 빌릴 것이 있겠으며
神交面不須 정신으로 교류하니 굳이 얼굴을 마주 대할 필요는 없으리.
詩書得恩暇 시와 책을 읽으며 나라의 은혜로 겨를을 얻었으니
莫窄眼前途 눈앞에 펼쳐진 앞길을 스스로 좁히지 마시게나.
[주] 이준민(李俊民 1524~1590) : 조선 전기에, 경기관찰사, 공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이건(李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윤(李貞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이공량(李公亮)이며, 어머니는 조언형(曺彦亨)의 딸이다. 영남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이 그의 외숙이다. 영월군수, 이어 1561년 강릉대도호부사, 강계부사,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 경기관찰사 · 공조참판을 거쳐 1575년 평안도관찰사,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 내용인즉, [1~2구]에선,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은 화자가 처한 험난하고 고독한 유배지(거제도)를 상징한다. 반면 벗인 이자수가 있는 곳을 '산명수수구(산 좋고 물 맑은 곳)'라 칭하며, 유배지의 고통 속에서도 벗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애틋한 그리움을 대비하여 표현했다. [3~4구]에선,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학(성리학)의 학문적 뿌리(淵源)가 정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임을 자부하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은 의리와 정분(契分)은 단순히 유배지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임시로 의탁한 가벼운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5~6구]에선, 벗의 뛰어난 학문과 인품을 격려한다. 스스로 덕을 갖추었으니 남의 평가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지만 '정신적인 교감(神交)'을 나누고 있기에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7~8구]에선, 시련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기개를 잃지 않는 유배문학의 핵심적 태도가 나타난다. 유배되어 처벌을 받는 와중에도 도리어 '시와 책을 읽을 수 있는 은혜로운 여유(恩暇)'를 얻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궁핍함에 좌절하여 눈앞에 남은 미래와 학문적 전도(眼前途)를 스스로 좁히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벗과 자신을 향해 굳건한 희망을 전하며 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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