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요셉이 형들을 사랑하다/창 44:1-17
요셉의 내면
지난 번에 창세기 말씀을 나눌 때에는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요셉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번 주제는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 요셉입니다.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요셉의 외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이 그를 보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빈정대기도 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고, 해석할 줄 알았고, 꿈대로 살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미래가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고통과 고난과 역경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꿈을 향해 갑니다.
이것이 꿈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 땅의 꿈이 아니라 하늘의 꿈, 순간적인 꿈이 아니라 영원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눈이 반짝거리기를 바랍니다. 희망에 불타는 복이 요셉처럼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꿈을 이루는 원동력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이르게 합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꿈은 하나의 ‘백일몽’에 불과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일 때도 신뢰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신뢰했습니다. 환경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신뢰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에도 신뢰했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외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면적인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이 했던 가장 위대한 일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용서,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다면 인생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완전한 성숙에 이른 사람입니다.
복음의 끝은 사랑입니다. 이것을 요셉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내면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요셉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조건 있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요셉의 사랑은 어떤 종류의 사랑일까요?
요셉의 사랑은 우리가 하는 사랑과는 다른 특별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랑합니다. 형제도, 부모도, 조국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갈등이 많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사랑합니다. 나한테 잘 해주면 나도 잘 해줍니다. 그러나 나한테 잘 못하면 나도 잘 하지 않습니다. 대개 부부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자기한테 잘 못하면 이혼합니다. 이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건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상대적입니다. 잘 해주면 나도 잘 하고, 잘 못하면 나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에는 목이 마르고, 갈등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참는 사랑’입니다. 화가 나는데도 애써 참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참고 사니까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사랑하는데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셉을 보면서 우리는 감동을 받고 충격을 받습니다. 요셉의 사랑은 우리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배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모님 밑에서 살 때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결혼하고 분가해서 살게되면 경쟁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형제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포기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이려 했고,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배다른 형들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사랑하는데 애쓰거나 고민하는 흔적이 없습니다.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사랑합니다. 여기에 감동을 받습니다.
요셉은 사실 형들을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충격입니다. 이 본문을 그냥 지나가면 안됩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사랑을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목사인 나의 사랑은 가짜로구나’하는 것입니다. 저는 참습니다. 사랑하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때는 승리하지만 어떤 때는 승리하지 못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다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요셉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요셉의 사랑이 충격적인 이유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잘 해줘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요셉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부터 형들을 무조건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다른 형들로부터 요셉은 자랄 때 많은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미움을 받았으면 우물 구덩이에 그를 집어 넣었겠습니까? 얼마나 미움을 받았으면 애굽에 노예로 팔았겠습니까? 형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은 형들에게 그런 감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적입니다.
그런 사랑을 보면 치유받기 시작합니다.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을 가졌던 내가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감동을 하게 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이 조건없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충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동기를 선하게 보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의 본질
우리가 이 지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두 종류입니다.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다가도 순식간에 이혼하고, 돌아섭니다. 부부는 서로 잘 할 때는 좋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배신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다릅니다.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어도 사랑합니다.
죄를 지어도 사랑하고, 부모의 가슴에 못질을 해도 부모는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오늘 부부의 사랑이 자식의 사랑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잘못을 해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처음 잘못을 한 것처럼 사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이런 사랑을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아버지 집에 있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형들을 미워하거나 경쟁하기 위해 했다기 보다는 요셉의 정직성 때문에 말한 것 뿐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아무리 자기를 힘들게 해도 순진하게 사랑했습니다. 형들을 위해 식사를 갖다 주고, 형들이 죽이려 할 때에도 ‘아니, 형 왜그래요?’라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였습니다.
요셉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애굽에 팔려가서, 감옥에 들어가서도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형들에 대해 한을 품고 원망을 한 기록이 한 군데에도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들이었지만 요셉은 감정이 없었습니다. 잊은 것입니다. 오히려 20년 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고 헤어져 있어도 요셉의 마음 속에는 형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요셉이 형들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권위로 형들을 제압하기 보다 단순히 ‘형’하며 달려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가슴이 너무 벅차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것은 마음 속 뿌리에서부터 형들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한테 잘해주면 나도 잘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화나게 하면 화를 내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나한테 잘해주거나 못해주거나, 화를 나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거나, 인생을 파멸로 끌고갔다 할지라도 그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이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부러워합니다. 제 안에 이런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든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일지라도 순식간에 모든 것을 다 잊고 내가 천진난만하게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과 기름부으심이 흘러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내 사랑으로 사랑하지 마십시오. 내 감정으로 사랑하지 마십시오. 내 느낌으로 사랑하지 마십시오. 실패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배신을 경험할 것이고, 자신에게 실망할 것입니다. 나의 선행, 나의 의, 나의 사랑은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른 눈으로 사랑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조건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했는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그렇게 결정하면, 상대방의 동기를 선하게 해석해 주십시오. 우리는 너무 똑똑해서 수를 쓰는 사람을 금방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동기가 불량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의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비록 그 사람이 불량한 동기로 내게 왔다 할지라도 속아주시고 좋은 동기로 왔다고 믿어주십시오.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속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믿어 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상대적이고 조건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의 대상을,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의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바꾸십시오. 여러분을 괴롭히고 불편하게 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별히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의 사랑을 보십시오. 자기 부인이 그렇게도 배신을 하고 음란하게 굴어도 호세아는 끝까지 그녀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을 배신하고, 여러분의 부인이 여러분을 배신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사랑해 주는 사랑,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변화시킨다
오늘, 본문에 숨어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요셉이 형들을 사랑하면서도 형들에게 고통을 주는가?’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요셉입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을, 병주고 약주는 듯한 일을 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에게 돈자루까지 보냅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자루에는 은잔을 숨깁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짐을 수색하게 합니다.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용서하고, 잘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요셉의 형들은 기가 막히게 성숙한 사람들로 변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 많던 아들들이 변화되어 이제는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다른 형제들이 서로 질투하고 경쟁을 했었지만,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사랑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냐민을 보호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배다른 형제라도 사랑하고 보호하고 팀웍을 이루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요셉의 형들의 모습을 통해 부탁을 드립니다. 요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형들을 용서한데 있다면, 요셉의 형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아버지 중심의 가족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복이 여러분의 가정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도 아버지를 중요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머리입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십시오. 배다른 형제라 할지라도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