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49, 탈출, 그 깊은 잠
잊을 수 없는 내 친구 D, 부산의 모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을 다니는 중에 믿음이 솟아나서(특출하다는 세칭 동방교식 표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빈집초월(무단가출)하여 나와 같이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로 들어온 친구다.
그는 세칭 동방교 대기처중의 중심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용산 ‘수원정’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낮에는 종로5가에 있는 ‘주간 기독교’ 사무실로 출근해서 신문 발간을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용산 '수원정' 대문 안쪽 한켠에 붙어 있는 부속건물의 소위 ‘제2성전’ 전도사, 후에 용산 철도병원 인근에 건물 하나를 세를 얻어 확장 개점(?)한 용산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면서,
새벽이면 연단선님(가정을 무단가출해서 주로 껌을 팔아 지성(헌금)을 바치는 전업 돈벌이 일군들을 이렇게 불렀다)들이 기거하는 장소를 세군데 순회하면서 그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신앙심을 북돋우고 지성(헌금)을 회수해오는 순회자로 일하고 있었다. 새벽에 '수원정'을 출발해서 김포공항쪽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 화곡동과 마포, 다시 시내로 들어와 서대문쪽의 영천, 세군데를 매일 다녔다.
연단선님들은 적당한 가옥에 방 한칸을 빌려서 보통 3-4명이 합숙하면서 생활하는데 밥도 해주고 빨래등 뒷바라지를 해주는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라고 불리는 조금 나이든 여자 한명과 같이 한 조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곳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드나들면서 지시전달, 신앙점검, 수금조치를 하게 되는데 우선 나부터 정신상태가 솟아나야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지성(헌금)외에 그들은 ‘잡비’라고 해서 순회자에게 약간의 돈을 주게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교통비등 잡비 용도에 충당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물론 이 잡비도 금전출납부를 만들어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결코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 돈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세칭 동방교를 탈출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야하기 때문에 우선 그만한 돈이 필요했다. 수금한 지성(헌금)을 가지고 튈 수도 있겠지만 도망을 갈지언정 그런 큰일 날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도록 이미 뇌 구조가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끼고 아껴서 경부선 열차표를 끊을 수 있을만큼 되었을때 나는 친구 D에게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넌지시 운을 떼었다.
밤12시 전후해서 '수원정'에 기거하는 여러종류의 대기자들이 모두 모여서 점호형식의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보통 남녀 도합 20여명 정도 되었다. 오늘 하루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반성하고 내일의 정신상태를 가다듬는 칼바람부는 일종의 점호같은 시간이다. 세칭 동방교에서의 중심거점인 이곳 '수원정'의 정신무장 상태가 무너지면 동방교 전체의 정신상태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전국 각지의 세칭 동방교에 정신무장의 강도가 파급되는 것이다. '수원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어떤 진리말씀(설교를 그렇게 불렀다)이 나왔더라는 등 순회자들을 통하여 각 지교회로 일파 만파 퍼져 나가는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남자들은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잠을 안자고 경내를 지키는 경비를 서게 된다. 보통 30분 정도씩. 그러고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되는 강행군이니 얼마나 피곤이 쌓이겠는가,
연단선님 순회 나가는 길 버스안에서 골아 떨어져서 내리는 정류소를 지나치기는 다반사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수원정'의 동쪽에 있는 골방에 일부러 내 친구 D와 같이 붙어 자면서 ‘나는 (부산으로) 내려 갈란다’ 말하고 물론 그는 한사코 말렸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그러면 나는 좁은길(세칭 동방교를 그렇게 불렀었다)을 배반한다는 자책감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 참!’을 연발하곤 했었다.
드디어 어느날 그동안 망설이던 결심을 실행하게 되었다. 한방에서 같이 딩굴던 내친구 D에게도 비밀로 했다. 만일 내가 그에게 결심을 실행하겠다고 실토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보고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고자질이 아니라 그의 충성스런 신앙 양심(?)이 보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처럼 태연스럽게 새벽에 연단선님 순회를 나가는 것처럼 '수원정'의 쪽문을 지키는 ‘뚱’에게 미소를 건네면서 손을 흔들고 나와 그길로 바로 서울역으로 가서 그동안 알뜰하게 모아두었던 잡비로 기차표를 끊어 부산으로 줄행랑, 아... 드디어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날이 왔다.
그때 서울--부산이 10여시간 이상 걸리는 완행열차를 탔는데 차창가에 앉아 용산 제1한강 철교를 넋 나간듯이 언뜻 보면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구포대교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깊은잠에 빠졌던지, 내 평생 그렇게 정신없이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본적이 다시는 없는것 같다. 그 구포역에서 나는 기차를 내렸다. 만일 종점인 부산역까지 가서 내린다면 틀림없이 부산의 '초량12교회'에서 '수원정'으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은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 !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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