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에 평화[平和](평평할 평, 벼화 입구)를 주소서
초토의 시·8
-적군묘지(敵軍墓地)앞에서
구상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설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땅은 30리면
가로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중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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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대하여
김사인*
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기면
퍼렇게 날 선
칼이 된다.
나중에는 날이다 뭐다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살은 거멓게 타고 마르고
눈에는 핏발이 오른 뒤
그것도 지치면 차라리 누레지는 것이다.
악물고 악물어 어금니가 주저앉고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나면
칼이 된다.
입은 웃는 것처럼 잇바디가 드러나고
한기가 피식피식 웃음처럼 새는 것이다.
무딘 듯 누더기인 듯 온몸이 서는 것이다.
한두십년에 오지 않는다.
진펄에 멍석말이로 뒹굴며
피떡이 되어
이백 년 삼백 년
비로소
칼이 서는 것이다.
꺼먼 칼이
되는 것이다.
김남주가 그랬다.
*56.충북 보은
서울대 국문과 졸업
81.《시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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