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1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의 축복” 信仰の祝福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주의 말씀을 잠시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그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후사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적게 잡아 75세때부터 시작해서 99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를 먹어서, 이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포기를 해도 벌써 포기를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향 땅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섰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허탈 하기만 합니다.
그래. 내가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들었나 보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라도 갈대아 우르나, 아니면 하란
땅으로 돌아가자. 남은 여생을 마누라 고생이나 덜 시키고 우리끼리 편안하게 살아보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생각을 안 해 보았을까요? 아니요. 저는 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제
짐작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사람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행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수 백 년 동안이나 타향에서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부모도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도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갔습니다.
노예란 자기 인생이 없었습니다. 자기 재산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가치는 주인이 결정합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로서 평생 동안 살다가 그리고 주인의 소유물로서 죽어가는 인생이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내십니다.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죄인이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고, 정말 평생 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감옥에서 죽어야 할 어느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된다는 일은,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남의 나라 땅인 애굽에서 평생 동안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애굽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수가 몇 명이라고요?
민수기 1장 45절~4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민수기 1장 45절~46절
“45.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그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이스라엘 자손이 다 계수되었으니
46.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
一族ごとに登録された二十歳以上のイスラエルの子らで、イスラエルで戦に出ることができる者すべて、
登録された者の総数は、六十万三千五百五十人であった。
당시에는 인구 수의 가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인구 수를 세는 데에 있어서, 전쟁에 나갈 수 없었던 미성년자나 여성이 인구 수에 포함이 되지
않았던 데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인 남성만 세었을 때 60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레위 지파가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었는데, 레위 지파는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고 성막을 관리하고 성전을 관리하는 임무만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이 여성을 제외하고, 미성년자도 제외하고, 그리고 레위지파도 제외한 수가 60만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숫자를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았더니 당시 애굽을 탈출한 총 인구 수는 대략 200만명 가량 이었을
것으로 예상을 합니다.
노예 한 사람이 그 집안을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지금도 교도소에서 누군가가 탈출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영화에서보면 멋있고 감동적으로 그려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실제 상황이라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에 비상이
걸리고 경찰 군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한 명을 찾아내기 위해서 밤이고 낮이고 수색작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한 두 명도 아니고 200만명이에요. 무슨 작은 시설도 아니고 당시 최고 선진국, 최강의 군대를 소유했던 국가인 애굽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탈출한다는 것은,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탈출 좀 했다 싶었더니, 눈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일인데 뒤에서는
그 최강의 군대인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울만한 무기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끝이다. 여기서 다 죽는다. 이렇게 절망하고 있었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홍해를 갈라 주셨습니다.
길을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럼으로 인해서 200만명에 달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힘도 없고 무기도 없는 무력한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심으로 인해서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홍해를 건넜으며, 반면에 최강의 군대인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서 갈라진 홍해
사이로 들어가 추격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다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길을 막으심으로 인해서 모든 군대가 홍해
속으로 가라앉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수 십 년에 걸쳐서 본 게 아닙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고 직접 체험했습니다.
정말 이와 같은 것만으로도 평생 동안, 아니, 자손 대대로 전해주면서 하나님을 찬양해도 부족하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실까요?
출애굽기 14장 11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출애굽기 17장 3절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民はそこで水に渇いた。それで民はモーセに不平を言った。「いったい、なぜ私たちをエジプトから連れ上ったのか。私や子どもたちや家畜を、渇きで死なせるためか。」
민수기 11장 4절~6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彼らのうちに混じって来ていた者たちは激しい欲望にかられ、イスラエルの子らは再び大声で泣いて、言った。「ああ、肉が食べたい。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그들은 참으로 가지가지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놀라운 역사를 통해서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주셨는데, 그들을 정말로 광야에서 죽이기 위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들이 애굽에서 고기나 생선들을 값없이 배불리 먹어요? 그게 자기 것입니까? 아니에요. 노예에게 있어서는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신고 있는 신발도 주인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 내 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애굽에 있을 때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인 것을 몰래 훔쳐먹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계획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내 주셨는데, 그들은 과거에 종살이를 하면서 주인 몰래 훔쳐먹었던 것을
그리워 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불평 불만은 이제 가나안 땅을 앞둔 상태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이끌어내신 것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축복의 땅을 주시기 위해서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불평을 합니까.
민수기 14장 1절~5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하나님께서는 점령해라. 할 수 있다. 너희들이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함께 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합니까.
자신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다 죽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제 그 때까지 참고 참았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 22절~23절
“22.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わたしの栄光と、わたしがエジプトとこの荒野で行ったしるしとを見ながら、十度もこのようにわたしを試み、わたしの声に聞き従わなかった者たちは、だれ一人、
わたしが彼らの父祖たちに誓った地を見ることはない。わたしを侮った者たちは、だれ一人、それを見ることはない。
민수기 14장 27절~30절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몇 년 전도 아닌 불과 며칠 전에 애굽에서 내가 한 일을 못 봤어? 광야에서 내가 한 일을 못 봤어?
그래도 믿지 못한다는 거야?
그리고 뭐 어째?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었겠다고? 그래 좋아.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한테 행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시 성인들은 대부분이 이처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하시면서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 땅에서 죽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40년 후, 불평불만을 일삼았던 광야 1세대들은 다 죽어버리고, 이제 광야 2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 가나안 땅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불순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면서도, 평화로워지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워서 경고를 하십니다. 그러지 말고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회개를 안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고난이 다가옵니다. 갑자기 외부 세력들이 침략을 해서는 그들을 괴롭히게 되지요.
그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합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지도자를 세워서 외세를 물리치게 하시고는 구원을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끝인가요? 아니에요. 평화가 찾아오면 그들은 또다시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 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모세도 알았습니다. 출애굽도 알았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알았습니다. 광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야말로 헌신짝 버리듯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그는 모세도 몰랐습니다. 출애굽도 몰랐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몰랐습니다. 광야도 몰랐습니다. 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25절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3.しかし、「彼には、それが義と認められた」と書かれたのは、ただ彼のためだけでなく、
24.私たちのためでもあります。すなわち、私たちの主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を信じる私たちも、義と認められるのです。
25.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여러분,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는 성경을 전설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문학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편지라고 말합니다. 누구는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전설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어야합니까? 역사나 문학이나 편지나 환상이 부족해요?
누구는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유사 같은 건국신화도 있고, 내가 지금 조선시대 왕인 태정태세문단세도 헷갈리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전설이나 역사들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와 같은 전설로 끝나고 역사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에서 끝나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겨진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창세기에만 보더라도 노아의 홍수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출애굽기에
보더라도 애굽 군대나 애굽 사람들이 죽임을 다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셨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나 하나를 살려 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심판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 영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누구까지 희생시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희생을 시키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라 하더라도 어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적힌 글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아보았으나, 이를 읽고도 그래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내가 받은 축복이고, 이스라엘 자손들 받은 축복이 내 축복이요,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이 내
축복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51장 1절~2절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むしろ、あなたがたの咎が、あなたがたと、あなたがたの神との仕切りとなり、あなたがたの罪が御顔を隠させ、聞いてくださらないようにしたのだ。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다른 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더라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손 하나 까딱도 안 하십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무엇 하러 하나님께서 행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늘과 땅보다도 더 멀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우리와의 사이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어졌을 때에는 아무 일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도
들어주시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딱 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된 모습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복음 17장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흔들림 없이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축복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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