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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 푸른 줄기 굽이쳐 흐르는 청룡백호 기슭에 진리의 동산,한누리 정기 어린 궁동의 언덕에 세기의 빛을 받는 학문의 전당! 푸른 기상, 줄기찬 노력, 슬기로운 협동
2024년5월23일 오후 사울 구로구 수궁동에 자리잡은 우천학원 우신고등학교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보통 기념행사 처럼 지난날의 회고와 자랑스런 동문들 포상,유명 가수와 재학생들의 공연등이 있었다.
요즘은 평준화와 수도권 집중으로 거의 학교 근방 아파트 거주자 였던 학생들의 모임 처럼 되고 동문이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한류에 있어서 동문,동창이 주는 개념은 각별하다. 초등학교는 처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중고등학교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시험으로 들어간 적이 많았으니 동문이 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게 일생을 통하여 작용한다.
특히 동기,동창이 주는 의미는 매우 커서 한국인이 살아가는데 큰 자산이 되기도 한다.
우신고등학교는 독특하게 출발한 학교이다. 1974년 부터 소위 고교평준화, 그전의 1969년애서 1971년 까지 실시된 중고 동일계 진학등은 당시 명분없는 억지 교육개혁이었다는 설이 우세 하였다. 특정 권력자의 자식을 위한 제도였다고도 했다.
이에 조금 이색적인 학교가 등장하니 그 중 하나가 우신고등학교이다.
강북의 3대 명문고가 강남 벌판으로 이전하고, 1974년 부터 추첨으로 고교배정이 시작되었다.
이전 한국의 재벌급 주류회사 진로그룹이 당시는 변두리에 불과 한던 구로구 궁동 일대에 4만4천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대학을 설립하려다가 고교로 만들면서 전액 장학금, 기숙사등의 제도를 운용하면서 1974년3월1일 개교하였다. 여기서 서울 특수지역이라는 이유로 평준화에서 제외되니 일류고교 입학은 일류대학으로 가는 지름 길인데 이에 길이 막힌 인재들이 모여들어 1980년대 초반 까지 가히 최고의 고교 -물론 서울대 입학률로 볼 때- 로 등극하고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배출한 인재들이 현재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중추들이 되었다.
기업경제,공직 교육 각 기수별 추천 받은 인물들, 자랑스런 우신인 ! 사진 이관우 2회
이후 특수지역해제 일반고로 전환되어도 그 명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제 이와 같은 동문의 개념도 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따라 옅어지겠지만 그래도 국민소득 550달러에서 시작한 이 학교의 반세기 역사는 한국과 한류의 변천을 이야기 해주는 생생한 모델이 되기에 족하다.
설립자 우천(宇泉) 장학엽(張學燁, 1903년 7월 17일 - 1985년 4월 17일)의 일생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지금 진로그룹은 그의 후대에 와서 사실상 없어졌고 그의 다음 대의 스토리는 가히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천학원은 아직 살아있으니 그것 만으로도 구천(九泉)의 우천(宇泉)은 위안으로 삼아도 족할 것이다. 이토록 교육과 문화사업이 주는 의미는 강력하고 크다.
창립자는 결성(結城,충남 홍성 결성면) 장씨이고,1922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1923년, 조선인 동료와 함께 일본 규슈 지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광산의 인부로 생활 후, 1924년 22세 때 귀국하여, 다시 만학도로 학업을 이어나갔다. 결국 1928년 3월, 평안남도 진남포상공업학교 공과(전문학사)를 나왔다.
1929년에서부터 이듬해 1930년까지 평안남도 개천의 평남 개천보통학교 교원 등을 거쳐, 1930년에서부터 1931년까지는 황해도 곡산의 황해 곡산보통학교 교원 등으로 잠시 있다가 1931년, 교원직을 두 해만에 사퇴하고, 같은 해 1931년 평안남도 용강 향리에서는 주로 농업에만 전념하다가 1932년부터 평안남도 평양에서 주조 주류 판매업(평양 진천양조상회)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평남 평양에서 광복을 맞았고, 5년 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시기에는 경상남도 창원을 거쳐 부산으로 월남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약이 체결되자 경남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주조주류업 대표를 지냈으며, 그로부터 훗날, 주조 주류 판매업을 그만두며 주조 주류 관련 사업을 친동생과 친조카에게 모두 넘겼다. 1966년 진로(眞露)로 사명이 바뀌고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이후 경영권 다툼,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기업해체가 있었으나 그것은 이 우신고등학교의 발전에 비교할 것 까지는 없다,
은퇴할 때 까지 《사립 서울우신중고등학교 사학법인 우천학원》의 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1985년 폐암으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유산은 서울·인천·경기 전역의 사회 복지 관련 기금으로 희사된다.
이런 그의 이력이 바로 한국의 50년 역사와 너무도 닮아있다.
이날 50주년 기념행사에는 ‘우신’을 빛낸 인물이 소개되고 그 자랑스러움을 대내외에 발표하는 작은 잔치였지만 그 의미는 크고도 깊고 이런 동문 모임의 존재가 이른바 정(情)문화를 대변하는 한류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글 권오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