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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권사님 몸 좀 괜찮으세요? 여전히 진행형 아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성경에도 오늘 피곤할 텐데 감사합니다. 우리 권사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장로님도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는데요. 여러분 이번 주 주일이 무슨 주일이라고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날 우리가 종교개혁주일로 종교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겠지만 오늘 말씀도 약간 종교개혁 정신 중의 한 부분을 약간 이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자들에게 땅끝의 사람이 되라. 너희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라.
땅 끝 사람이 되라고 하는 명령을 맡기신 이후에 하늘로 예수님은 승천하셨죠?
근데 여러분 하늘로 승천하실 때 퀴즈 예수님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아니면 예수님의 이 육이 하늘로 올라가셨다 1번 2번 뭘 것 같으세요?
네 한번 네 영육이 같이 올라갔다. 네 그게 더 맞죠?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예수님이 제자들이 만약에 예수님이 영으로만 하늘로 올라가셨다면 사람들의 눈에 영은 보이지 않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예수님이 올라가시는 모습을 직접 다 봤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이 영과 육이 같이 하나님 앞에 이제 승천해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승천하는 과정은 지금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이 승천의 일이 일어나도 이거는 엄청난 일이 될 거예요.
그쵸? 아마 요즘에는 또 카메라 막 이런 조작이 많아가지고 유튜브로 생중계를 해도 사람들이 저거 뭐 만든 거야 막 조작일 거야 막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아마 안 믿을 것 같습니다.
근데 이 당시에는 그런 것도 전혀 없는 시대 아닙니까? 직접 자기들 눈앞에서 자기들과 3년 동안 동거 동행하던 예수님이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자신들 눈앞에서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는 이 승천의 장면은 그들 안에 경이롭고 감탄이 정말 돋아나오는 그래서 온전히 그들의 시선이 오직 예수님께만 향해 있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승천 장면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확고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침내 이제 예수님이 구름에 가릴 정도로 이제 보이지 않는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보고 목격한 그 신비한 그 광경에 여전히 사로잡혀서 여전히 그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그들에게 말하죠.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여러분 지금 천사가 그 황홀경에 빠져서 막 뭔가를 감격하고 감탄하고 있는 그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의 제자들이요라고도 말할 수 있고, 또는 사도들이요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그들을 향해서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갈릴리 사람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쫓아가다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드러났을 때 저 사람도 갈릴리 사람이야 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불리는 몇 군데, 이렇게 지칭하는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긴 하는데, 하나님을 대리하는 천사가 갈릴리 사람아라고 표현한 거는 여기가 유일하게 한 구절이 있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이다라고 하는 표현을 할 때 썼던 헬라어는 갈릴라이오스라고 하는 말로 단순히 말하면 갈릴리 사람 우리 말과 지금 똑같이 연결이 되죠.
그런데 천사가 지금 제자들을 향해서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좀 다른 단어가 쓰여졌어요. 원어적으로 보면 안드레스 갈릴라이오이 이 말은 갈릴리의 사람들 약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사람들은 단순히 갈릴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태어난 갈릴리의 출신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 갈릴리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전히 예수님의 승천을 다 쳐다보면서 그 감격스러운 장면을 쳐다보고 넋을 놓고 있는 그 제자들을 향해서 천사들이 뭐라고 해요?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불렀어요.
근데 왜 그 많은 호칭 중에서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불렀을까? 그 이유가 뭘까요? 특별히 제자들이 갈릴리 출신인 거 다 알고 있는데 왜 굳이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불렀을까?
지금 이곳에 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이 제자들 가운데는 가롯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3년을 동거동락에서 물론 좀 부끄러운 그들의 과거도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 40일간의 그 예수님과의 동행하는 여정들 제자들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직접 한번 뵀으면 하는 게 얼마나 우리의 소원입니까? 꿈에서라도 내가 주님을 한번 만나봤으면 혹시 그런 꿈 안 꿔보셨나요?
꿈속이라도 내가 그리던 주님을 한번 만나봤으면 그런데 지금 이들은 그냥 잠깐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특별하게 3년 동안 공생애를 같이 했고, 그 뒤에 엄청난 역사들을 직접 목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 승천의 과정까지도 직접 보게 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2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지금 이 3년의 공생에 이 모든 걸 다 본 사람들은 유일하게 그 11명인 거예요. 그 11명의 제자들 어쩌면 이 11명의 제자들 안에는 다양한 마음들이 들었을 겁니다. 지금 막 엄청난 감격도 있을 것이고 또 언제 예수님이 저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라고 하는 걱정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제 앞으로 이 제자들 마음속에 그 예수님과 내가 동행했던 3년의 시간들, 또 예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의 역사 가운데 내가 쓰임 받았던 일들, 그것들이 그들에게는 자긍심, 자부심으로 굉장히 크게 남아 있을 겁니다.
근데 그런 제자들에게 천사가 뭐라고 했다고요?
갈릴리 사람들아 여러분 이 갈릴리라고 하는 곳은 지금이야 이제 관광지가 되어버렸지만 당시에 갈릴리는 빈민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러한 촌구석을 상징하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지금 이 제자들을 향해서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하는 그 이유가 여기에 명확하게 담겨 있는 것은 그들이 갈릴리 출신임을 상기시키시면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생애와 모든 과정들 승천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들을 목격한 영광을 누림으로 행여나 제자들이 빠지게 될 교만의 위험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갈릴리 사람이었어라고 하는 걸 기억하는 순간 그들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내가 뭔가 대단해서 예수님이 야 너는 똑똑하구나 야 너는 물질이 많구나 너는 건강하구나 너는 내 제자가 돼 이게 아니잖아요.
그들이 한 건 다만 그냥 예수님이 부르셨어요 따라와 그러면 얘 따라간 것밖에 없거든요. 단지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뿐인데 그 놀라운 일들을 다 경험한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할 때 교만 성경에서는 교만을 굉장히 아주 안 좋게 여기잖아요. 가장 안 좋은 것 중에 하나로 교만을 보통 우리의 행동과 연관지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뭔가 인사를 잘 안 한다거나 또 말투가 약간 이렇게 자기중심적이거나 고분고분 안 한다 이런 경우 약간 저 사람은 교만해 약간 반대적으로 인사를 잘하고 또 막 겸손한 말투를 쓰고 막 이런 사람들은 저 사람은 겸손해 이렇게 보통 우리가 표현을 합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요.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그런 눈으로 보는 행동과 연결점보다는요.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거기에 성경이 말하는 교만의 중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는 것, 내가 의식하든 못하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겸손인 거예요.
요즘에는 학생들이요 선생님들을 굉장히 무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히 염려스러워요. 우리의 첫째 아이도 이제 선생님을 하겠다. 둘째도 지금 누나 따라가지고 선생님 된다고 그래서 지금 심이 더 걱정이 큽니다.
네 근데 선생님이 진짜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를 사는데요. 초등학생들이 요즘에는 선생님보다 더 크니까 얘네들이 막 선생님한테 달려들어요. 그런 얘들을 막 듣고 보게 됩니다. 달려들고 자격 띄어놓고 싸우자고 막 이렇게 달려드는 애들도 있대요.
그 아이들이 왜 그렇게 선생님보다 자신이 옳다고 우기고 달려들고 왜 그럴까요?
그거는 내가 선생님보다 더 많이 알아 내가 선생님보다 더 힘세 라고 하는 그러한 착각 속에서 자기가 그냥 그렇게 달려드는 거예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스스로 우리 자신을 보면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질책할 정도로 우리가 아주 성경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질적인 차이는요. 솔직히 거기서 거기예요.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은혜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지,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죠.
근데 중요한 건 그런데 그 은혜로 받았던 사람들이 왜 그 은혜대로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그 이유가 바로 교만이라는 거예요.
그냥 내 인생은 내가 잘 알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될 거야.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안다라고 착각을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이 더 우선되고 내 경험이 우선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에게 아주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는데 세 가지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두 번째 질문은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며, 세 번째 질문은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에 빠진 우리에게 정곡을 찌르고 있는 질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되어서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내 능력 내 자격 때문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죠. 죄의 종 노예였던 우리가 영적 빈곤과 무지 속에서 정말 보잘것없던 우리가 갈릴리 사람이었던 우리가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의 절대 주권 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예. 우리가 교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나올 때 우리는 벌거숭이로 나오죠. 그리고 빈손으로 나오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 중 본래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어디 있냐고요 내 생명부터 시작해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내 건강도 내 물질도 내 가족도 또 나의 시간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빈손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든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들을 지금 누리고 있다라고 하는 기본적인 전제하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셔도 감사합니다. 또 주지 않으셔도 하나님께 주지 않은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주신 것을 보며 감사.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본래 우리의 소유인 것처럼 자랑하고 하나님보다 오히려 그것들을 더 신뢰하는 우리의 모습들이 혹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교만 때문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우리가 갈릴리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교만해지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하고 3년이나 동행했는데 내가 제일 잘 알아. 내가 지금 신앙생활 몇 년째인데 내가 지금 직분자로 몇 년을 지금 섬기고 있는데 내가 목사로 얼마나 말씀을 읽었는데
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해져 버리는 거예요.
주님의 승천하는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 황홀광에 사로잡혀서 계속 보이지도 않는 그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그때 그들을 부르십니다. 갈릴리 사람이라 어쩌면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로서 정말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다가 끝날 뻔 끝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특별히 사도로 그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사용해 주십니다. 직접 주님의 가르침을 보고 듣고 배우고 그리고 부활과 또 승천의 그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받은 은총이 이렇게 큰데 그냥 그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교만해지기가 십상이라니까요.
여러분 이번에 우리가 임직자들이 6명의 임직자들이 임증을 받았는데요. 임직을 처음 받을 때 그 마음 그 마음을 잊어버리면 금방 교만해집니다. 첫 마음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저희가 이제 개척 7년을 맞이하면서 리셋을 외쳤습니다. 하늘 소망 교회가 개척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곳으로 다 가는 순간 더 겸손해지는 거예요.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습니까? 우리를 공동체 삼으셨습니까?
더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종교 개혁에 이제 총을 쏜 지가 이제 507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는 이제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교만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카톨릭은 너무나도 교만했죠. 본래 갈릴리 사람들같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들이 그들은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로마의 카톨릭의 막강한 조직 제도 그리고 자신들의 어떤 권위 그것들이 더 우선시되고 신봉시되었습니다.
그것에 반기를 든 것이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오직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주창한 그게 바로 종교 개혁 아닙니까? 이걸 역으로 말하면 겸손의 회복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개신교회가 또 종교개혁 그 당시처럼 우리 안에도 교만한 모습이 혹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향해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갈릴리 사람들하고.
여러분 사도행전은요 겸손한 사람들이 쓰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책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순종하는 자들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 사도행전이라 믿습니다.
지금은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하는 시대임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길 원합니다.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그냥 머리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삶으로 그냥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붙들기를 원합니다.
개혁은 우리 각자가 말씀 앞에서 겸손해질 때 개혁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번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이번 한 주간,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르시는 그 이유, 그 목적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겸손하게 이번 종교개혁주의를 더욱더 기대함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