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과음으로 내상이 심하지만..
어제에 이어서 하늘이 참 이뻐서
오랜만에 북악 스카이웨이를 라이딩하고
팔각정의 전망을 즐긴 다음,
자하문 밖을 둘러보고 성균관을 탐방한다.
[파일:166]
몸은 천근이지만 시원한 공기에 파란 하늘에..
날씨 덕을 보며 조금은 수월하게 북악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보현봉,누르면 확대됨)
좌측부터 쪽두리봉,향로봉,비봉,사모바위 승가봉,문수봉,
보현봉 우측으로 형제봉,칼바위..
눈이 다 상쾌해지는 시원한 전망이다.
(벌써 코스모스..)
다운힐하다가 북악길이 똬리를 꼬는 곳에서
백사실 능금 마을로 내려가 별서터로 간다.
(능금 마을을 지나면)
(시골이라도 온 듯 정겨운 계곡이 나온다.)
별서란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
백석동천의 별서는 백사 이항복의 것이라는 구전이 있으나,
조선시대 문인 화가인 허필의 것이 였다 하며
나중에 추사 김정호가 구입하고 6각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월암이란 암각자는 별서터 건너편 숲속 바위에 있다.
영정조때 문인 이광려가 암각하였다 한다.
(월암)
계곡을 내려가다 안내문을 보고
백석동천 암각바위를 찾아 별서터로 빽했는데
별서터에서도 지나온 길을 올라가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2m 정도에 바위가 있으니
예습을 안해와서 생고생..
(백석동천)
현통사 앞에는 와폭인 백사폭포가 있는데
서울도심에서는 유일한 자연폭포라고 한다.
(백사폭포)
계곡 입구에는 세검정이 있다.
인조반정때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인데(洗劍立義)
후에는 실록 편찬후 그 종이를 세초했다 한다.
세초를 한 다음 정자 앞 넓은 차일암에서 세초연을 했다고..
정자가 올라앉은 바위에는
'우리의 정기(精氣)'라는 암각문이 있는데
글씨가 흐려 다 알아볼 수는 없었다.
검색을 해보니 삼일운동 당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鄭在鎔 1886~1976)의 글이라 한다.(1955년)
(누르면 확대됨)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 이걸 근거로 복원함)
30년 전통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정의사지 당간지주가 있다는 세검 초교로 갔는데
정문은 잠가 놔서 뒤쪽 언덕으로 한바퀴 돌아
후문으로 들어간다.
장의사는 삼국시대 무열왕이 죽은 군사 영혼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로
세종 때에는 진관사와 함께 일종의 독서당 역활도 했다 한다.
즉, 임금이 신하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였는데(賜暇讀書)
집이 아니라 절에 서하는(上寺讀書)의 독서당으로 쓰였다는 것.
운동장 한편에는 기념비가 서있다.
(김교준 교육사업 기념비)
창의학교 유지회, 은평면 유지일동이 만든 것으로
창의학교는 세검초등학교 전신인 모양이다.
세검 초교후문에서 홍지문쪽으로 가다 보니
길가에 표지석이 보인다.
(신영동 어원이 여기서 유래)
(조석고개-조지서 고개 어원이 여기서 나옴)
(오간수와 탕춘대성벽)
(홍지문과 오간수)
창의문(자하문)쪽으로 올라가다 한정식집 '석파랑'을 들린다.
석파랑은 서에가 소전이 지었는데 30년 동안 전국 곳곳을 수소문해
운현궁·선희궁·칠궁·이완용의 별장 등의 자재들 구하여 1963년부터 6년에 걸쳐 건축했다 하며
원래는 문서루와 석파정 별당 그리고 맞은편 한옥의 세 채로 이루어졌는데
1993년 새로운 주인이 문서루와 석파정 별당만 인수하여 한정식집으로 문을 열었고
효자동의 한옥을 옮겨온 맞은편 건물은 소유주가 다르다.
(만세문)
만세문은 고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웠던 문을 옮겨 왔다.
만세를 누리라는 의미로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불로초를 물고 나는 암수 두 마리의 학과 박쥐 등이 그려져 있다.
(문서루)
문서루는 순정효황후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석파정 별당은
대원군 별서인 석파정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언덕위에 있다.
(별당에선 돌잔치 모임이 열리고 있다.)
(주차장서 본 석파랑 별당)
석파정은 창의문쪽으로 더 올라가면 나오는 서울 미술관 안에 있다.
입장료 만 천원을 내고 들어가야 볼수 있다하여 패스~
(저 동산 위에 석파정이 있다.)
자하문 터널옆으로 올라가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
우측 골목길 초입에 무계원이 나온다.
무계원은 종로구에 있던 우리나라 첫 요정,
오진암 건물을 이축한 전통문화시설이다.
(정문으로 들어가 시게반대 방향으로 돌아본다.)
바로 옆에는 현진건 집터 표석이 있다.
무계원에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사진이 걸려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보았던 무릉도원을 안견이 그린 것인데
무계정사가 그 배경이다.
‘나는 정묘년(1447) 4월에 도원꿈을 꾸었다,
작년(1450) 9월에 우연히 이곳을 유람하다가 국화꽃이 계곡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다래넝쿨과 바위를 부여잡고 계곡을 올라가서 보니
풀과 나무와 물가의 그윽한 모습이 내가 꿈에 본 도원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래서 금년(1451) 이곳에 서너칸의 집을 짓고 무릉계곡의 뜻을 취하여 ’무계정사‘라 했다.
이곳은 진실로 정신을 편안케 하는 은자의 땅이로다.
이에 잡영시 다섯편을 지어 찾아와 묻는 자들에게 대비하고자 한다
경태 2년 (신미년.1451)7월21일 천석주인 낭간거사 청지 쓰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병서)
계유정란으로 안평대군이 죽은 뒤 무계정사는 철거되고
무계정사 터 근처에 '청계동천'이란 암각자가 있다 하는데..
'부암동 329-4번지 무계정사터'
네이버 지도를 보며 찾아보다가 못찾고 반계별서로 간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현진건 집터 건너편이라 하는데 왜 못봤꼬?)
아쉽게도 반계별서는 개인집이라 개방이 안되어
잔디밭 정원의 네모난 연못과 바위, 언덕위 행랑채 대문.
양옥과 한옥(2층벽돌집)등
담장 넘어로만 보고 창의문으로 간다.
(창의문 역시 접근 금지, 잠겨있다)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으로 문 밖의 경치가
개경의 승경지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동천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여 신선이 노니는 선경의 계곡을 뜻하니
자하문 밖의 인왕산 청계동천, 백악산 백석동천,
이둘을 합하여 자하동천이라 할만하다.
아무튼 자하동천에 이어서 성균관으로 가는데
관람 시간이 오후 다섯시 반에 끝나니 맘이 바쁘다.
하지만 삼청동서 업힐을 하여
차량 통행이 적은 성균관대학 후문을 경유한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인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신위를 모신 문묘와 교육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묘가 앞에 있는 전묘후학의 배치이다.
성균관은 건물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1) 제향 공간의 건물
2) 강학공간의 건물
3)부속동 건물
성균관은 보수 공사중이라 어수선한데
유료 주차장에서 향문으로 들어가 3)->2)->1 )순서로 돌아 봤다.
보수 공사가 끝나고 다시 방문해야 할 듯.
(하연대-임금님 가마 내리던 곳)
(부속동 건물들)
(향문)
(좌측은 동재,우측은 보수공사중인 진사식당)
(고문과 고직사-사무공간의 문간채)
(유생들이 식사하던 진사식당)
(성균관 관리 사무소인 정록청)
(정록청 관리들이 머물던 공간,서리청)
(향관청)
향관청은 문묘 향사 때에 제관들이 숙식하던 곳으로
마당 좌우에는 향사때 집사들이 거주하던 동·서 월랑이 있다.
(서월랑)
(동월랑)
진사식당,고직사,정록총,서리청,향관청 등은
생활 공간이라 처마에 단청이 없으나
나머지 부속동건물에는 존경의 뜻인 단청이 있다.
(존경각,경전들을 보관하던 도서관)
(육일각)
궁술은 군자가 갖추어야할 육레중 하나이다.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곳인데
영조 19년(1743) 대사례大射禮를 행하고
이것을 기념하여 건립된 건물.
이제 강학공간으로 간다.
(강학공간)
(명륜당)
(동재)
(서재)
(은행나무)
명륜당에서 공사중인 후향문을 지나 비천당을 왕복한다.
비천당은 성균관의 별당으로
유생들의 학습 장소 또는 제2과거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후향문)
(비천당)
(명륜당 뒷모습)
은행나무 둘, 수령이 500년인 노거수는
너무 커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천연기념물 제59호)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한 이후로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는 곳을 행단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회화나무와 함께 은행나무는 ‘학자수’라 하여
서원이나 향교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나무가 되었다.
(숨쉬기를 돕는다는 유주)
(나무사이로 보이는 명륜당)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북장문을 지나
제향 공간으로 간다.
(제향공간)
(전사청과 포주)
전사청은 제수용품을 장만하고 준비하던 곳이고
포주는 제사에 쓸 짐승을 잡던 곳.
(수복청)
수복청은 문묘를 관리하던 남자 종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재학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제기고)
제기고는 문묘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
수복청과 마주보고 있다.
(대성전)
대성전은 향사 건물이라 바깥기둥 아래가 휜색이다.
월대 앞 서쪽쪽 향나무가 오륜목, 동쪽이 삼강목이라 하는데
(서쪽의 오륜나무)
(유흥준은 전사청 앞의 이나무를 삼강나무로 봤다.)
(어삼문또는 동삼문,임금이 드나들던 문)
(묘정비각)
묘정비는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이다.
주차장으로 되돌아 나오다가
동재 툇마루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린다.
동재나 서재나 건물 외측에 툇마루가 있어
그리로 유생들이 드나들었다.
(주차장서 본 동삼문)
(외삼문)
정문인 외삼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신문이라고도 하는데
신이 드나들기 쉽도록 문짝이 살짝 어긋나있다.
(하마비와 탕비각)
탕평채의 유래가 되었다는 탕평비와
그 옆 하마비를 둘러보고
헤화동역에서 전철을 타고 귀가한다.
2018.07.08 일요일 화창함.
(다움 백과,유흥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안재홍 blog,hanmun2014 blog 등등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