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넘어 존중하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드라마, 1973)
2차 대전 직후에 독일에서 태어나 70년대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 되는 파스빈더 감독은 코카인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37살 나이로 요절했다. 짧은 생애를 살았고 또 개인적인 영화 수업 이외에는 특별한 영화 교육을 받지 않은 채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양성애자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사실 천재 작가로 회자하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외국 평론가에게 많은 찬사를 받은 것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전후 독일의 상황과 정치적인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가 죽은 해에 제작된 <베로니카 보스의 갈망(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1982)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1973년 작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는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에 의해 파스빈더의 작품 중에 으뜸으로 꼽힌 영화다.
‘잠식한다’로 번역된 독일어 ‘aufessen’은 ‘남김없이 먹어 치우다’는 의미다. 누에가 뽕잎을 먹듯 그렇게 조금씩 먹어치우는 행위를 가리키는 ‘잠식한다’는 조금 거리가 있는 번역이다. 제목은 원래 ‘isst’로 되어야 하는데, ‘essen’으로 된 까닭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로코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알리가 아랍의 속담을 서툰 독일어로 소개하는 대사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서로 맞지 않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영화는 어딘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영화 감상의 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조화롭지 않은 듯이 보이는 장면들을 눈여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은 단순한 멜로드라마다. 폴란드 출신으로 독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했던 남편과 사별했던 60대 독일인 과부 에디가 외국인 노동자인 아랍인들이 자주 찾는 카페에 우연히 들르게 된다. 그녀 나름대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그녀는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모로코 출신의 한 젊은 외국인 남자 알리와 만나게 된다. 첫 만남에서 서로의 외로움을 교감하며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사랑에 곧 빠지게 되는데, 마침내 결혼까지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식들에게마저 냉정하게 외면당할 정도로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 또한 순수혈통을 중시하고 과거 나치 시대에 인종차별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독일인들의 편견에 맞서 관계를 지켜나가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알리의 표현에 따르면, 독일인은 주인이고, 외국인 노동자는 개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단지 소문거리를 넘어 비난의 대상이 된다. 파스빈더는 롱 샷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와 독일인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했고, 또 심리적인 충격을 표현하는 촬영을 통해 두 사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편견을 관객 역시 간접적으로 경험토록 했다.
멜로드라마로서 스토리는 다분히 식상해보여도 영화의 장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포된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독일의 전후 세대가 뼈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시각에서 나찌에 의해 심겨진 인종차별의 무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비록 에디의 남편이 폴란드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에 외국인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일 수 있다 해도, 피부색과 문화가 현저하게 다른 알리를 보는 주의 사람들의 편향된 시각에 맞서 싸우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알리에 대한 에디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에디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에디가 알리와 관계를 갖는 한, 그녀 자신은 공동체에 합류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리와 에디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 일부 독일인이 외국인 노동자보다 못한 도덕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또한 에디와 알리가 자신들의 아쉬움을 해결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곧, 동료 청소부 가운데 한 사람은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도주하였고, 아들은 자기 자식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고, 가게 주인은 매상을 올려줄 고객으로서 에디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웃집 여인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에디와 알리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이는 때에 감독은 또 다른 시각으로 에디에게 일어나는 당혹스런 일을 조명한다. 에디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여성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이러니한 태도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임금 인상과 관련한 대화에서 그녀를 배제시키자는 동료의 말을 그녀가 받아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알리의 친구인 아랍인들 사이에서 에디 자신이 나이듦의 문제로 차별을 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알리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아닌 그저 나이든 여자로 여겨지는 순간 에디는 자기 자신과 알리의 관계를 심각하게 돌아보게 된다. 게다가 알리는 또 다른 주인의 위치를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향수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에디 곁에 머물기를 주저하는데, 바로 이런 심리적인 갈등 상황에서 알리는 자신에게 아랍 음식을 만들어 주는 카페 여주인과 관계를 갖는다.
비록 숱한 편견에 맞서 싸워 이겨내었다 해도 과연 에디와 알리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주위 사람들의 예측대로 얼마 가지 못하고 끝을 볼 것인가? 만일 영화를 멜로 라인에 따라 감상한다면, 두 사람 관계의 미래에 대한 질문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멜로드라마로 한정해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비록 에디와 알리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다시금 처음 만났던 곳에서 재회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알리는 이미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다. 이것으로 감독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시종 알리와의 관계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 겪는 에디의 심적 고통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알리의 불안이 더욱 컸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영혼을 삼킨다는 말은 외국인 노동자로서 그리고 에디의 남편으로 살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며 불안해했던 알리의 삶에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아랍 속담을 영화로 표현하면서 파스빈더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치료 후에도 반복된 질병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에디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영화는 종결하지만, 사실 에디의 입을 통해 표현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다. 곧 각자의 삶은 자유롭다 해도, 서로가 함께 있을 때는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내며 전후 복구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독일의 특수한 정치 경제 상황을 반영한다. 외국인에 대한 정책에서 독일은 적어도 그들이 독일 내에서 있는 동안에는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심적인 스트레스가 그들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고, 또한 그 불안으로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침해당하는지를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후 독일의 국가 재건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이슈로 삼고 있는 영화는 결코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유린에 대한 소식이 끊이질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우리를 돕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존중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존중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외국인 노동자로서 살면서 겪는 불안은 그들의 영혼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이익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편견이 극복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외국인으로서 살면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을 이겨내도록 돕는 길은 우리가 그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해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