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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실크로드를 따라서 1부
2010년 7월 27일
인천항으로 가기 위해 11시에 집을 나섰다. 버스, 지하철, 택시 등을 갈아타면서 16시경에야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제2국제여객터미널 입구에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서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회원을 기다렸다. 회원 몇몇이 가까운 곳에 있는 E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겠다고 한다. 나도 따라갔다. E마트에서 여권과 지갑, 수첩을 넣을 만한 작은 가방을 25000원 주고 하나 샀다. 이 가방은 실크로드 여행중에 언제나 내 목에 걸려 있었다. 그만큼 유용하게 쓰인 것이다. 가방을 사고 나서 얼마 후 회원 몇 사람과 함께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환전소로 갔다. 한국돈 179원이 중국돈으로 1위안이었다. 나는 1003600원을 주고 중국돈 5600위안을 받았다. 달러는 며칠 전에 은행에서 300달러를 바꿔왔다. 300달러는 예비비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 경비는 한국돈으로 100만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산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중국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므로 예비비는 반드시 준비해야 할 터이다. 마침내 회원 15명이 전원 모였다. 우리는 정문을 통과하여 터미널 내로 들어갔다. 풀빛님이 배에 오르면 식사를 할 수 없으니 식사를 하자고 한다. 17시50분에 터미널 식당으로 갔다. 나는 5000원짜리 콩국수를 사먹었다. 풀빛님이 출국절차를 밞아 주었다. 우리는 19시 30분에 배에 승선했다.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자옥란호. 방은 깨끗했다. 침대에 누우니 솔솔 잠이 왔다.
방을 배정받고 보니 602호이다. 602호에 침대가 4개 있었고 그중 나의 침대는 B다. 배낭을 풀고 우선 샤워를 했다. 한낮에는 너무 뜨거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많이 났다. 세수를 하고 땀을 씻어내자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22시경 1차 선상모임이 이루어졌다. 팀장인 서까래님과 부팀장 흥부형님, 총무 봄이오면님을 비롯하여 전회원이 모였다. 모두의 표정에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기대와 들뜬 기분이 배어 있었다.
2010년 7월 28일
01시경 자옥란호가 안내선에 의해 움직이더니 부드러운 엔진소리를 내며 검은 바다로 미끄러져나갔다. 드디어 우리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나는 이번 해외여행이 처음이다. 그동안 여행준비를 하느라 신경을 많이 써서인지 금방 잠이 들었다. 05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뒤척거리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소리가 났다. 통화권 밖이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배낭에서 책을 꺼냈다. 책은 속도감 있게 읽혔다. 간혹 배가 조금 기울어지곤 한다. 넓은 바다로 나오니 파도가 거센 것 같다. 602호에는 나와 바람의 노래님, 그리고 산지기님 3사람이 있다. 방이 조용하다. 두 사람이 코를 골지 않아 다행이다. 09시에 일어나 앉았다.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바닷물이 쑥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파도가 심한 탓이다. 바람의 님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나는 만두를 주문했다. 1인분에 기다란 만두 5개, 죽 1탕기, 날계란 1개, 김치 조금, 무짠지 조금, 간장이 있었는데 가격은 3000원이다. 나는 만두만 먹기로 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만두를 3개째 먹고 있을 때 남자 직원이 식탁 옆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와서 토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식사를 하고 있는 옆에서 토하다니. 나는 만두를 먹지 못했다. 얼마 후 여성 회원 몇 분이 왔다. 이미 식사시간이 끝나 있어서 주문을 하지 못했다. 여성 회원은 내가 손을 대지 않은 만두와 죽을 나누어 먹었다. 직원이 토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선내에 한국인이 많았다. 그들은 여행객이 아니라 소위 ‘배타는 사람들’이었다. 연운항에서 물건을 배에 싣고 인천으로 들어와 화주에게 물건을 건네고 운반비만 받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육전지(71세) 씨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한번 물건을 가져다주면 10만 원 정도 받는다고 한다. 한 달이면 80만원이다. 그는 나이 먹고 놀기는 뭐하고 소일거리로 그 일을 한다고 한다. 하기야 놀면 뭐해. 그의 경력은 5년 남짓 되었다. 중국 음료수를 사서 그에게 건넸다. 13시에 점심식사를 했다.
자옥란호 식당에서 점심식사 때 먹은 밥.
쌀밥 한 그릇에 밍밍한 국, 양배추무침, 마늘쫑이 반찬으로 나왔다. 1인분에 2000원이다. 휴식을 취하고 나서 갑판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19시에 저녁식사를 했다. 원탁에 놓인 비빔밥 회원들이 나누어 먹었다. 식사 후 시계를 중국 기준으로 바꾸었고 휴대폰 로밍도 했다. 19시 30분에 2차 선상모임이 있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은 모두가 처음이다. 그런 만큼 우려되는 것도 있고 걱정되는 것도 많다. 모일 때 늦으면 벌금 20위안을 물리기로 합의했다. 하선 이후 일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지만 모든 것은 내려보아야 만 알 일이었다. 2차 선상모임을 마치고 23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1일결산 : 아침식사 3000원. 점심식사 2000원. 음료수 1000원. 합계 6000원.
2010년 7월 29일
02시경 자옥란호가 연운항에 도착했다. 배는 도착했지만 여행객들은 내리지 못했다. 06시 1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내릴 준비를 했다. 08시 30분부터 하선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배 타는 사람들의 배려로 선두에 내렸다. 자옥란호에서 하선할 때 아침식사라며 우유와 빵을 배급했다. 빵은 담백했고 우유는 고소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중국의 어떠한 고급 음식보다도 만두와 빵이 내 입맛에 잘 맞았다. 우리는 선박회사에서 제공한 미니버스를 타고 연운항 훼리터미널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여행하며 통역을 해 줄 강성희 씨를 만났다. 그녀는 중국 단동에서 미리 이곳에 와 있었다. 09시 10분 입국수속을 마쳤다. 우리는 터미널을 나와 길 건너편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연운항 동역으로 가기 위해서다. 연운항 동역에서 정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
연운항 동역으로 가기 위해 106번 버스를 타는 회원들. 요금은 1위안이다.
얼마 후 106번 버스가 왔다. 이 버스를 타고 연운항 동역으로 갔다. 연운항 동역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깨끗했다. 여기서 입석표를 표를 끊었다. 좌석이나 침대표를 사야 했지만 매진되고 없었다. 회원들이 역내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기에 나도 빵 1개 3위안, 물 1병을 2위안 주고 샀다. 사실은 기차 안에서 음식을 팔기 때문에 사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공금으로 쓸 돈 200위안을 총무에게 냈다. 개표가 시작되고 기차에 오르자 연운항 동역이 종점이어서 기차 안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되는 대로 아무 좌석에나 앉았다. 10시 20분에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이 올라왔다. 내가 앉았던 자리로 한 여성이 오더니 자기 자리라고 한다.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연운항 동역에서 정주까지는 9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서서 갈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다. 나는 중국 여성에게 니하오마 하고 인사를 건넸다. 중국땅에서 중국인에게 중국말로 처음 말을 거는 순간이다. 그녀도 내게 인사말을 건넸다. 문제는 그 후였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눈빛과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뿐. 얼마큼 시간이 우리 회원과 그녀는 친해졌고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중국인 왕민과 중국 주민.
그녀가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내가 중국인에게 가졌던 선입견을 말끔히 씻어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중국인들이 깨끗하지 않고 도둑이 많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나본 중국인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옷차림이 남루하기는 했어도 더럽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차창 밖으로 옥수수밭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철로변 집들은 거의 붉은 기와로 덮여 있었다.
중국인들과 어울려 기차 안에서의 지루함을 달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중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나의 앞자리에 임산부 가족이 있었다. 임산부는 진공 포장되어 있는 비닐봉투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녀가 봉투를 뜯더니 무엇인가를 꺼내 맛있게 씹어 먹었다. 자세히 보니 닭발이었다.
기차가 정주역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9시 20분이다. 역을 빠져나가 광장으로 나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광장 건너편 한적한 곳으로 갔다. 팀장과 부팀장, 강성희씨와 총무 등이 숙소를 잡기 위해 길을 건너 올라갔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는 것, 교통편, 먹는 것, 관광지 가는 것 등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하고 해결해 나가야만 한다. 정주역 인근은 복잡하고 차량이 많았다. 기온은 높았고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얼마 후 팀장 일행이 돌아왔다. 숙소가 정해진 것이다. 우리는 2.7광장에 있는 27병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자 정해진 방으로 갔다. 21시 40분이었다.
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27병관. 27광장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 숙소는 침대 3개가 놓여 있는 3인용 방이다. 방값은 공동경비에서 지출했는데 120위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샤워장은 없었다. 세면장과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누나 휴지도 없었다. 건물은 겉으로 보기에 꽤 좋아보였는데 시설은 우리 기준에 미비했다. 그나마 방에 에어컨이 있어서 조금 시원했다. 숙소에 짐을 놔두고 늦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숙소 근처에 우리의 분식센터와 같은 식당가 건물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자 영업시간이 22시까지라며 몇몇 식당은 문을 닫고 있었다. 나는 22위안을 주고 사천성식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들이 어떤 맛인지 알 수 없어서 비싸면 맛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성 회원 세 분은 아직 음식을 시키지 못했다. 나는 내가 시킨 음식이 1인분이 아니라 3인분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여성 회원 세 분과 함께 먹기로 했다. 얼마 후 음식이 나왔다. 하지만 첫 숟가락을 뜨고 나서 이 음식을 더 이상 먹지 못했다. 형태는 우리나라 선짓국 같았는데 너무나 짰고 혀끝이 아린 맛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 선짓국같이 보이는 사천성식 음식.
그래도 먹어두어야 했기에 국물에다 밥을 찍어 먹었다.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와서 여성분들은 27광장 쪽으로 갔다. 나는 야경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광장을 보았다. 그런데 입안에 묘한 맛이 남아 있어서 영 기분이 안 좋았다. 마침 내 앞에서 한 남자가 기다란 수박을 잘라서 팔고 있었다. 나는 과감히 다가가 얼마냐는 듯이 손가락으로 참외를 가리켰다. 그가 ‘얼 위안’이라고 말했다. 나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10위안짜리 지폐를 건넸다. 그러자 5위안짜리 1장과 1위안짜리 3장을 거슬러 주었다. 수박값은 2위안인 것이다. 수박이 그렇게 달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에 먹은 음식맛을 씻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22시 40분경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정주 중심지를 돌아보았다. 걷다보니 포장마차가 즐비한 도로를 지나 정주역까지 가게 되었다.
정주 시내 간선도로에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었다.
한밤의 정주역 앞. 차량들이 무질서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1일결산 : 빵 1개 3위안. 물 1병 2위안. 공금 200위안. 저녁식사 22위안. 수박1조각 2위안. 합계 : 229위안
2010년 7월 30일
하남성은 중국의 중부, 황하 이남에 위치해 있다. 면적이 16만 7천㎢으로써 한반도보다 조금 작다. 하남성을 중국의 ‘식량 창고’로 불릴 만큼 농업이 발달되어 있고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도 생산된다. 이 하남성의 성도가 정주이다. 정주시 인구는 736만 명(2007년)인데 시내에 사는 인구는 300여만 명에 이른다. 과거에 20여개의 왕조가 정주에 수도를 세웠다. 따라서 정주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다. 나는 06시에 일어나 정주의 중심지인 2·7광장을 돌아보았다. 광장에 2·7기념탑이 있다. 높이가 63m나 된다. 1923년 철도노동자들이 군벌 오패부(吳佩孚)에 항거하기 위해 총파업을 벌였다. 이때 오패부의 유혈진압으로 인해 40여명이 피살되고 2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태를 ‘이칠참안(二七慘案)’이라고 하는데 파업 주동자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피살된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1951년 정주시인민정부가 2·7광장을 조성했다. 2·7기념탑은 1971년 9월에 세워졌다. 탑 꼭대기에 영웅을 추모하는 커다란 별이 솟아 있었다.
정주에 도착한 밤에 27기념탑을 촬영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07시에 승합차가 숙소 앞으로 왔다. 1일 대여비 1300위안이다. 처음에 1000위안이었는데 우리가 한국인라는 것을 알고 차가 없다며 가격을 올렸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치졸한 상술이 발휘된 것이다. 승합차는 정주 시내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로 달려 낙양시로 향했다. 우리는 용문석굴(龍門石窟)로 가는 중이다. 08시 25분에 휴게소로 차가 들어갔다. 휴게소 매점에서 화우라고 하는 우유를 1.5위안, 빵 1개를 1.5위안 주고 샀다.
1시간 남짓 더 달려 09시 25분에 용문석굴에 도착했다.
우리 회원들이 용문석굴 정문 앞에 잠시 섰다.
아침나절인데도 날씨가 몹시 후텁지근했다. 입구에서 5위안을 주고 물을 샀다. 물 가격은 들쑥날쑥하다. 일반 상점에서 1.5위안이고 병관에서 2위안, 조금 번화한 관광지에서는 3위안, 많이 번잡한 관광지나 산 위에서는 5위안이었다. 하긴 한국에서도 산 위에서는 물건 값이 비싸다.
제1용문석굴 위에서 내려다 본 강 풍경.
낙양시 남쪽 12km 지점 이수(伊水) 변의 석회암 암산에 동·서로 나뉘어 조성되어 있는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불린다. 용문석굴은 494년경에 처음 건축되었다. 그 후 동위(東魏), 서위, 북제(北齊), 수, 당 등의 왕조가 이어지면서 보수와 증축을 거쳐 지금은 불교의 대표적인 석굴 유적지가 되었다. 2345여 개 석굴, 2800여 개 비문, 50여 개 불탑, 10만여 개 조각상이 조성되어 있는 용문석굴은 세계문화유적지로 등록되어 있다.
제1용문석굴 전경과 암석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들.
우리는 다음 일정 때문에 용문석굴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사진을 찍느라 석굴을 많이 보지 못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지만 발길을 돌렸다.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11시 30분에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으로 향했다. 1시간 남짓 달려가다가 어느 조용한 시골마을에 차가 멈췄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마을 한가운데에 사거리가 있었고 이따금 자동차가 지나갔다. 식당은 깨끗한 편이었다. 나는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콤팩트 디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곳에서 빨래비누를 4위안 주고 샀다. 점심식사 때 우리는 맥주 8병, 밥 5그릇, 닭 2마리를 나누어 먹었다. 근처 산에서 뜯어왔는지 취나물과 같은 나물과 버섯 요리도 나왔다. 여성 회원들이 작은 닭대가리를 가리키며 서로 먹으라고 했다. 식사비는 380위안이 나왔다. 13시 20분에 승합차가 다시 출발했다. 13시 40분에 소림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서 보니 승합차의 번호판이 없었다. 그래도 되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중국말이 안 되니 물어보지 못했다. 숭산 입구 소림사 천하제일문 쪽으로 가자 매표소가 나왔다. 1인당 입장료 100위안, 케이블카 승차비 60위안,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버스비 10원 등 170위안은 공금에서 지출했다. 나는 입구에서 물을 5위안 주고 샀다. 하늘에 옅은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날은 몹시 후텁지근했다. 땀이 저절로 솟아났다. 이럴 때 물이 최고다. 케이블카를 타고 숭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중국의 5대 산 중의 하나인 숭산은 골이 깊은 산이다. 길이가 60km에 이른다. 숭산의 최고봉인 위자이산(御寨山)은 해발 1,512m이다. 산행을 해야 한다면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정상에 전망대가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스님 몇 명이 무엇인가를 팔고 있었다. 스님들이 만행을 하여 먹을 구하기는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땡초인 것만 같다. 아주머니 한 분이 음료수와 공예품을 팔고 있었는데 한글로 가격이 쓰여 있어서 조금 놀랐다.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오는 것일까. 정상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케이블카를 타고 숭산을 내려갔다. 저 아래에 그 유명한 소림사가 있었다. 무술 영화배우 이연걸도 이곳 소림사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승산 이곳저곳에 무술학교들이 보였다. 바야흐로 숭산 일대는 중국 무술의 메카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소림사는 생각보다 유서 깊어보였고 넓었다.
소림사 경내 비문 앞에 서 보았다.
커다란 비문과 불경탑, 그리고 달마대사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고풍스럽고 어떤 성스러운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소림사는 496년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인도 스님 발타선사(跋跎禪師)를 위해 창건했다. 그 후 달마대사가 530년부터 9년간 이곳에서 면벽(面壁) 수행을 했다. 수행을 마치고 신체가 약해져서 수련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발달하여 소림파 무술의 일부가 되었다.
커다란 오석에 조각되어 있는 달마대사상.
소림사 인근에 탑림(塔林)이 있어서 많은 탑이 흩어져 있었다. 탑은 거의 붉은 벽돌로 쌓여져 있었다. 이 탑들은 소림사 고승들의 무덤이다. 다시 말하자면 묘탑인 것이다. 그 수는 약 240개가 되는데 높은 것은 15미터에 달한다. 탑은 정방형, 장방형, 육각형, 나팔형 등 여러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다.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는 묘탑. 역대 고승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우리의 팀장이 소림사 정문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소림사를 다 둘러보고 18시 30분에 승합차를 타고 떠났다. 20시에 정주역에 도착했다. 팀장과 부팀장, 강성희 씨가 숙소를 정하기 위해 시가지로 갔다. 나머지 회원들은 배낭을 내려놓고 한쪽에서 기다렸다.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그게 어려웠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서안이다. 원래대로라면 정주에서 우루무치로 가야 한다. 하지만 기차표를 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역순으로 가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배낭여행은 이런 것이다. 계획을 완벽하게 짜왔다고 하더라도 현지 사정에 의해 바뀔 수가 있다. 이러한 결정은 그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장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판단할 일이다. 서안 가는 기차 시간은 7월 31일 04시 43분이었다. 다행이 침대칸을 구했다. 기차표를 구한 팀장의 노고가 고맙기만 하다. 어쨌든 일찍 떠나야 하기 때문에 거리에서 노숙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안은 부결되었고 조금이라도 누워 있다가 가는 것으로 합의가 된 것이다. 우리는 가로등 불빛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정주의 보도 위에서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몸은 피곤한데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배가 고팠다. 회원들이 가게에서 빵을 사먹었기 시작했다. 나도 빵 1개 2위안, 물 1.5위안을 주고 사서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길가에 호떡을 굽는 가게가 있어서 5위안 주고 5개를 사서 회원들과 나누어 먹었다. 담백하고 맛이 있었다. 한참 뒤에 방을 구하러 간 팀장과 부팀장이 왔다. 우리는 인근에 있는 국영초대소로 갔다. 초대소라면 과거 중국 공무원들이 출장 갈 때 이용하던 숙소이다. 하지만 이제는 허름하고 지저분한 숙박시설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초대소의 누추한 방. 그래도 이 방에서의 몇 시간은 중국여행의 한 부분이 되어 오래 기억될 것이다.
남자 회원 4명이 한 방을 쓰기로 했다. 이 방이 1박에 25위안이라고 한다. 샤워할 수 있는 방은 두 곳이었는데 여자와 남자가 각각 알아서 씻기로 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몇 시간 눈 붙이고 나면 기차를 타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더운데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초대소 주인을 불러 에어컨을 고치라고 닦달했다. 주인 남자가 와서 스위치를 다시 켜고 에어컨을 매만지자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더위를 쫓을 수 없었다. 천장에 붙어 있는 오래된 선풍기를 작동시키자 탈탈거리며 돌아갔다. 덥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침대에 눕자 슬슬 잠이 왔다. 여행이란 다 이런 것이다.
1일 결산 : 빵 2개 3.5위안. 물 3병 11.5위안. 호떡 5개 5위안. 합계 : 20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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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도 한 팀이었는데 왜 이리 낯선지 아니 새삼스러운지... 쩝! 암튼 그 뒷이야기도 궁금해지네요!
반갑습니다. 이야기는 3부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머지 2, 3부도 기대하겠습니다....
풀빛님, 이번 여행을 위해 자리를 주선해 주시고 여러 모로 애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첫 해외여행을 행복하고 즐겁게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여행이 되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어렵고 힘든 여행일수록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이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봄이오면님 수고많으셨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한 만큼 더 보이고 더 느낀다더니..
유작가님의 눈을 통해 이번 여행일정을 되돌아보고 있노라니, 몇배의 감흥이 일어나고 정리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배경음악 또한 너무 좋아, 커피 한잔 하면서 여행기를 두번,세번 보았습니다.
후속 여행기 고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흥부형님 그 더위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어떤 기회가 있어서 동행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여행중님 깊은 통찰력으로 그동안의 여정이 한눈에 보입니다. 다음편이 기대가 됩니다. 좋은 작품 많이 남기세요
실크로드 여행기 즐감하구 갑니당~!~@@여려운 여행 일것 같은데 ~~@@좋은정보와 사진들 덕분에 여행 잘햇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