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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태복음 24:32~39
(마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인사말 중 하나가 바로 ‘마라나타’ 였습니다. 이 말은 원래 아람어인데 헬라어로 표기된 것으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단 한 번 쓰였는데 “우리 주님 오시옵소서”(Come, Our Lord)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만나고 헤어질 때 마다 ‘마라나타’를 외치면서 저들의 신앙을 새롭게 했습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닥치는 여러 환난과 시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염원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고 담대한 믿음을 지녔을 때 주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확고한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더욱 ‘마라나타’ 신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실 때가 너무나 가까이 임박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 때 우리는 더욱 믿음의 열매를 맺어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죽음과 생명에 대한 긴장관계를 잘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 자체가 상반된 개념을 지닌 죽음과 부활이란 생명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15:3~4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내게 들려질 때 나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예수님이 죽음을 뚫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영광이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죽음 이후에 나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하고 거기에 답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준비할 때가 지금 이 때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놀랄 만큼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260장 가운데에 318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계실 때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실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계 1:7).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시는 주된 목적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에는 죽어 있던 성도들의 몸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빌 4:21).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몸의 부활을 고대하며 구원의 완성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영혼 뿐 아니라 그 몸까지 전인격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또 다른 목적은 불신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징조에 대하여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 시간에 나눈 마태복음 21:18-22 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잎이 무성하신 것을 보시고 열매를 찾으셨으나 이를 구하지 못함으로 저주하시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고자 한 핵심은 주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시점과 내 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영혼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세상에서의 화려함과 인기를 좇아 살아왔는데 주님은 내게 열매를 구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내가 원하는 시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뤄질 것을 말씀하면서 그 징조를 일러주시므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무화과(無花果)를 글자 그대로 풀면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무화과나무에서는 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식물도 꽃을 피우지 않고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화과의 또 다른 명칭이 있는데 바로 ‘은화과’(隱花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은화과의 은(隱)은 숨는다는 뜻으로 여기에 무화과나무 꽃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무화과가 ‘꽃이 없는 열매’라면 은화과는 ‘꽃이 숨어 피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즉 무화과나무에서는 꽃이 없는(無) 게 아니라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피어날 뿐 분명히 피어난다는 말이다.
모든 열매는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 안에 향기와 꿀을 준비하여 벌과 나비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그런 화려함이 없습니다. 단지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서 그 안에 감춰진 열매를 은밀하게 맺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는 이 세상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실 때에 마구간의 구유에 누이신 것처럼 은밀한 중에 예수님의 영,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즉 크고 멋지게 지은 교회당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찬양하고 소리 높여 찬양하는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연한 가지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곳에 숨겨진 모습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용 있고, 활기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연한 가지에서 잎사귀를 내면서 나타나게 될 까요?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잘 하여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살아있고, 활력 있는 말씀이 내 안에 떨어져서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성취를 이루기 위한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의 부인으로 이뤄진 겸손과 회개입니다. 철저한 자기부인은 하나님과 나와 긴밀한 관계형성으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외적인 조건이 화려하면 그것이 자기와 동등하다고 여겨 스스로 영광 가운데 있다고 여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아멘’을 외치고 찬양을 부르게 되면 거기에 자신이 도취되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정직한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란하고, 화려한 곳에서는 자기 부인과 더불어 회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무화과 비유를 통하여 겸손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 회개하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노아의 홍수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7절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기 시작한 것은 노아가 셈을 낳은 502세를 기준으로 볼 때 98년이 못되며 노아의 세 아들이 결혼한 연수를 고려하면 훨씬 짧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노아가 세 아들을 빠르게 연년생으로 낳았다 하더라도 노아 502세부터 3년이 더 걸렸을 것입니다. 또 결혼하여 자부를 얻으려면 아들의 나이가 최소한 15세가 넘어야 하는데, 이것을 고려하면 방주를 지은 기간은 어림잡아 70-80년이 될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방주의 크기에 대하여 창6:15에 보면, 길이는 300규빗이요, 넓이는 50규빗이며, 높이는 30규빗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규빗이란 성인의 중지 끝에서 팔꿈치까지 길이로 약 45cm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배의 크기는 건물 7층 높이, 축구장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규모로 약4,300톤가량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방주는 오늘날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의 갑절의 크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렇게 큰 배를 장기간에 걸쳐 만든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식구들이 온 마음을 다해 여기에 매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노아는 자기의 마음대로 그렇게 큰 배를 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준행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순종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가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묵묵히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의지입니까?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노아는 그렇게 강철 같은 의지가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홍수에서 벗어나 노아의 식구들이 포도농사를 짓고 난 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 9:21) 그는 자신에 대한 절제심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70~80년 동안 변함없이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의지에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마음이 약해질 때 하나님께 나와서 자기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뜻이 이뤄진 것처럼 내 안에 성취되는 열매입니다. 35절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였습니다. 이처럼 노아에게 임하였던 말씀이 그대로 성취하였습니다. 창세기 6:22절에서 “노아가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고 하였고 창 7:1에서는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을 때 선포되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시들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이뤄지는 것이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이 성품이 저와 여러분 안에 이뤄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무화과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나를 연약하게 하십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미련한 것과 약한 것이 내게는 큰 흠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자기부인을 하게 됩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명령이 내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능력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이 능력을 얻는 비결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세례요한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선포하신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외쳐야 할 내용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능력을 맛보지 않고는 말씀을 품고 살 수 없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야 세상에 속한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유란 ‘free’ 즉 묶였던 것에 놓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나라가 열려져서 그 날에 소망을 지니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세상에 있는 것에 묶여 살게 됩니다.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때는 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한 밤중에 찾아드는 도적같이, 해산하는 여인에게 임하는 고통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임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 날의 징조는 말씀하시도 정확한 시기를 감춰두신 근본적인 이유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38절에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라고 하신 것처럼 세상에 묶여 살게 됩니다. 먹는 것에 묶여 먹을 것이 없으면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졸이게 되고 마실 것이 없으면 그 영혼마저도 메말라 갑니다. 장가들고 시집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을 위하여 땅의 것에 매달리게 됩니다.
땅에 속한 것에 매이면서 우리는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대로 믿어 온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잘 하셨던 권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남편을 일찍 잃고 슬하에 외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줬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은 제 앞가림을 못합니다. 직장에 들어갔다고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하고 이리저리 취직자리를 알아보느라 혼기도 놓쳤습니다. 권사님은 이 아들을 바라보면 늘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기도를 하는데 울기부터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자기연민에 빠쳐 하소연하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이 분의 신앙이 성장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감정에 매여 있고 자기의 어두운 환경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면 될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내 생각과 판단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선은 내 마음에 묶여있는 것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이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무었입니까?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를 묶고 있는 것을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십시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씻어주실 것을 구하십시오! 언제까지요? 내 안에 묶여 있는 것들이 툭툭 끊어질 때까지입니다.
39절에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깨닫지’할 때 ‘깨닫다’는 ‘기노스코’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뜻은 ‘감각과 시각으로 알아차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라는 의미는 그 당시 사람들의 양심과 본능에는 심판의 때가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의적으로 모른 척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미련하게 살다가 홍수의 심판에 드러가냐 말입니다.
하나입니다. 회개가 빠지면 그렇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담아 그 말씀이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세상에 묶여 있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며칠 전 제 아내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에 사는 것이 당신과 나에게 최고의 날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 저는 행복을 선언했을까요? 제 마음에 불안이 다가오고 염려와 두려움이 있으면 회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하면서 제게 불안을 주고 염려를 주었던 것을 제 자신이 극복하였더니 더 이상 그런 환경이 내게 임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나라의 성령이 통치하시고 다스리기 때문에 저는 담대하게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는 회개의 기회는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로 살고 있을 때 회개하여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십시오! 내 안에 임한 말씀이 이뤄지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말씀과 나는 상관없다고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는 회개하므로 주님께 담대히 나오십시오! 회개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능력이 내게 임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