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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세원 미리내 ROSA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일송정
단편소설 (短篇小說)
이 말동(末童) 집사
김광한
다시 내가 소속한 신문사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신문사 형편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화가의 그림을 표지에 게재해 남은 그림을 전시장에 내다 팔아 수입을 올려 보았으나, 그것이 회사의 만성적 적자를 메꿔 주지는 못했다. 그림 값이 나가는 화가의 그림이 게재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습작 정도를 겨우 벗어난 재야(在野)란 이름이 붙은 화가들의 그림 값이란 물감 값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매일 아침 회사 경영 타개를 위한 간부 회의를 소집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겨우 30여 명 되는 직원을 반으로 줄이는 방법을 택했으나, 직원을 감원시키기 위해선 밀린 월급을 줘야 하는 법, 밀린 월급을 주지 않을 경우 집단행동을 불사하겠다는 직원들의 으름장에 정 사장은 생애에 처음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거나, 가정이 몰락할 때는 꼭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과 같이, 신문사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송도 말년에 불가사리란 이상한 동물이 나타나 전국의 쇠란 쇠는 모두 집어 먹어 결국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도 있거니와, 신문사가 경영난에 허덕이자 신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들쭉날쭉 하면서 신문을 더욱 타락시키고 있었다.
이때 만났던 몇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맨 처음 신문사로 찾아온 사람은 뱀 장사를 하는 박살모란 사람이었다. 뱀을 많이 잡아먹었던지 아니면 양기가 눈으로 나와서인지 늘 눈이 충혈 돼 있었고, 첫 보기에는 섬뜩한 인상의 40중반의 사내였다. 그는 청계천 6가에 생사탕 집을 차려 놓고 자신도 직접 땅꾼 노릇을 하며 전국의 뱀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신문과 뱀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뱀을 우수 고객에게 팔아먹기 위해서는 신통치 않은 매스컴이 약간 필요했던 것이다. 즉 뱀의 효용을 신문에 기사로 게재하면서 뱀에 읽힌 설화라든가, 뱀을 장복해 건강을 되찾았거나 명사들의 인터뷰를 게재해 뱀 장사 영업을 번성시키자는 의도였다. 정 사장은 박살모란 사람이 자본을 투자한다는 말에 그를 회장 직에 앉히고 경영을 맡겨 자신은 손해난 돈을 챙기려 한 것이다. "앞으로 나는 일선에서 물러나 여러분들의 뒷바라지에 힘쓰겠습니다. 대신 박 회장님을 중심으로 전 직원이 일치단결하여 신문 부수 확장에 진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살모 씨는 뱀을 잡아 파는 일에는 선수였지만 신문의 경영에는 까막눈이었다. 그는 신문의 표지를 들여다보면서, "여기에 뱀 사진을 넣도록 합시다. 선전도 되고 흥미도 있을 테니까‥‥‥‥ 내가 어이없어 하자 그는 화를 벌컥 냈다. "김 부장, 나는 이 회사의 경영자요. 경영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할 것 아니요."
하며 얼굴을 붉혔다. 화가의 그림 대신 징그러운 뱀의 사진이 경건한(?) 신문에 게재가 되었고, 전국의 유명 생사탕 집을 소개한 기사가 반이나 차지했다. 지성인들의 독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신문이 아니라 뱀 장사를 위한 신문이 되고 말았다. 명사(名士) 탐방 란의 기사도 생사탕 서울 영업소장의 얼굴이 들어갔고, 사무실에는 뱀 장사들이 들락 거렸다. 그들은 가끔씩 유리병에 꿈틀거리는 뱀을 들고 와 자랑을 하기도 했다. 기겁을 한 여기자들은 회사를 그만두었고, 갈 데 없는 몇 명의 기자들만 신문사에 남아서 호구지책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뱀 장사가 인수했다는 신문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신문의 경영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뱀을 표지로 실은 신문을 본 신문 윤리위원회에서는 당장 경고가 내려왔고, 혐오 동물인 뱀에 대한 일체의 기사를 게재하지 못하게 하자, 박살모씨는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정 사장은 박살모 씨가 퇴진을 하자 그나마 뚫렸던 자금줄이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의 큰 처남 안씨였다. 상계동 쪽에서 금은방을 하는 처남을 찾아가 신문에 투자할 것을 제의 했다. "형님, 남자로 태어나서 평생 금붙이만 조몰락거리다가 세상을 떠나시겠습니까?" 하며 그는 안타까운 눈총으로 응시했다. 어려서부터 금은방 직공으로 따라다니다가 배운 기술이 금은세공 기술이었고, 안씨는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돈벌이는 좀 됐지만 어쩐지 직업이 조금 조잡스럽게 느껴지던 터에 그의 말을 들으니 그럴 듯했다. "나야 배운 기술이라고 이것밖에‥‥ "형님, 좀더 큰 사업에 투자하시죠." "무슨 사업?"
"신문 사업입니다.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신문 사업이야말로 대장부가 태어나서 한번쯤 해 볼 사업이 아닙니까? 신문사 사장이라면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쩔쩔맵니다. 텔레비전 뉴스 보셨죠? 수입도 괜찮습니다. 광고 수입도 괜찮고‥‥‥‥ 안씨는 계속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내가 뭘 알아야지." "누가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까. 제가 사장이니까 형님을 회장으로 추대하겠습니다.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약간의 자금을 투자 하시면 됩니다." 매제인 정 사장의 달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그는 한 달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 성격이 치밀하고 꼼꼼한 안씨는 여기 저기 신문사를 찾아다니면서, 혹시나 투자해 잘못하면 어떻게 되지 않나 생각해 경영 상태도 남몰래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가 찾아다닌 신문사는 회사의 경영이 튼튼한 4대 일간지였다. 정 사장이 발행하는 오자투성이의 주간 신문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안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금은방을 처분, 매제가 경영하는 신문에 투자를 했다. 그리고 회장이란 감투를 얻어 썼다. 그에게 큼직한 책상이 주어졌고, 책상 위에는 '주식회사 사서신문 회장 안필선'이란 이름이 품위 있게 놓여져 있었다. 생전 처음 가져본 직분에 안씨는 너무도 황홀했다. 직원들이 그에게 절을 하면서 회장님이라고 호칭할 때는, 너무나도 황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신문에 문외한인 그가 하는 일이라곤 고작 직원들의 가불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 주는 일과 신문 발송 때 포장을 돕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투자한 돈이 두어 달 동안 회사에서 돌아다닐 때는 직원들에게 대우를 받았으나, 기름(?)이 떨어지니 고용인으로 하락해 버렸다. 국민 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에 금은방을 경영해 온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안씨는, 비록 삼류 신문이지만 학력이 좋은 직원들에게 무례함을 받기 일쑤였다. 그는 하루 온종일 무료하게 회장 명패가 붙은 책상에 앉아, 발행되는 재미없는 신문을 돋보기를 쓰고 읽는 것이 일과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허울 좋은 신문사의 회장 직을 때려치우고 다시 상계동 시장 골목으로 가 금은방을 차리고 싶었으나, 일단 신문사에 투자한 돈을 매제가 호락호락 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를 틈타 매제에게 넌즈시, “아무래도 본업을 되찾아야겠는데 투자한 것 좀 돌려줄 수 없겠나?” 하고 물었다. 이미 사기꾼이 다된 정 사장이 그 말에, “형님도 무슨 말씀을‥‥‥‥.조금 있으면 대통령 각하 취임식에도 가야하고 사업장도 확장해야 하는데, 가만 계십시오. 영광된 자리를 보장해 들릴 테니까” 하며 초장에 말을 막아 버렸다. 몇 달이 지나도 회장에게는 월급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직원들은 회장인 안씨에게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그가 전주(錢主)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마다 그는, “나 없어, 나 회장 안 할래요.” 하며 시장 상인 근성을 내 보였다. 이미 그가 투자한 돈은 공중분해 된 지 오래였다. 명함만 금박으로 박았지 자가용 한대 없는 회장이었다. 직원들은 고물 자동차라도 타고 다녔으나 안씨는 버스를 타고 출근, 고작 허름한 술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는 것이 하루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이 나오는 오후였다. 안씨는 방금 나온 신문을 읽어보고 수상쩍은 글자에 눈이 갔다. 글자에 들어간 주먹만한 글자가 무식한 자기가 보아도 오자(誤字)가 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표지의 글씨는 ‘송나라가 무문(無紋) 토기의 원조(云祖)’ 라고 돼 있었는데 ‘云祖’란 말이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안 회장은 기사를 쓰고 교정을 본 기자를 불렀다. 기사 작성자는 이말동 기자였다. 이말동 기자는 평소에 안 회장을 우습게 알던 터였다. 무식한 금은방 주인이 회장이란 감투를 쓴 데 적지 않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말동 기자, 이 글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목에 힘을 주고 거의 가성을 내다시피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잘못이라뇨?” 그 말에 안 회장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말동 기자가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云祖’ 말이오!” 안 회장은 언성을 높였다. “云祖가 뭐가 잘못입니까?” 이말동은 태연스럽게 답변했다. 작달만한 키에 영악하게 생긴 얼굴을 한 이말동 기자는 눈만 도마뱀처럼 깜빡일 뿐 이었다. “원조(元祖)가 맞지 않습니까? 운조(云祖)라니요.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 기자가 돼 놔서‥‥‥” 이말동이 안 회장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빙긋이 웃었다. 안 회장의 얼굴에는 어떤 확신이 없었던 것을 눈치 챘다. “회장님 한자어는 상형 문자라는 걸 모릅니까?” “상형 문자라니?” 알 턱이 없었다.
“물체의 생긴 것을 골라서 만든 글자란 말입니다. 상형 문자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송나라 시대에는 원조(元祖)가 아니라 운조(云祖)라고 썼죠. 학자들에게 확인을 홰 보십시오. 확신 없는 지식은 외부에 내보이지 않는 것이 유리합니다. 가만있으면 반은 맞는데 안타깝군요." 하며 면박을 주었다. 안 회장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누구에게도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말동 기자는 가끔씩 탁현총의 화실에 드나들면서 그의 그림을 선정해 준다는 명목으로 용돈을 뜯어 쓰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화실에서 침식을 함께 하기도 했다. 탁현총과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월급이 나가지 않자, 이말동은 하숙비를 못 내 쫒겨나 회사의 사무실에 보따리를 싸들고 들어왔다. 회사의 낡은 소파에 이불도 없이 웅크리고 잠을 자다 새벽녘에 한기를 느껴 깨어 보면, 밤새도록 갈탄 난로에서 나온 매캐한 연기가 그의 콧구멍 언저리에 날아가지 않고 붙어 얼굴 전체가 연탄 배달원처럼 때묻어, 그렇잖아도 궁상맞게 생긴 그의 얼굴을 더욱 측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집사답게 자신 있게 말했다. “내일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하물며 사람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지 않겠는가.” 하는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즐거운 얼굴을 했다. 그의 생김새는 중국 소설 ‘수호지’에 나오는 장수 무송의 형처럼 등짝이 바짝 붙어있어 첫눈에도 체격이 빈약하고, 콧 잔등이 권투 선수처럼 내려앉고, 눈 가장 자리가 쳐져서 남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측은하고 처량한 얼굴을 소유했지만, 명랑하고 긍정적인 사고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때때로 점심을 사주면서, 월급도 잘 나오지 않고 장래성도 희박한 직장을 다니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묻곤 했다. 그는 특히 식사 전 남이 보거나 말거나 두 손을 얌전히 모아 우렁차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곤 했다. “신앙 때문이죠. 신안의 힘이 저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온갖 두려움이 없어져요. 김 부장님도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영접하세요. 김 부장님도 내일 모래면 오십인데, 이제부터라도 과거의 나쁜 죄들을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세요. 웬만하면 제가 집사로 활동하고 있는 교회로 나오세요.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부장님의 얼굴에는 여러 마리의 마귀가 날뛰고 있어요. 척 보면 압니다.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하며 나를 이세상의 악의 부류에 집어넣었다. 그때마다 나는 지난날 죄지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십시오. 잠깐 왔다 가는 인생길에 뭐가 필요한 게 있습니까?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너무 집착 하지마세요. 욕심이 많으면 그 종말이 죽음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그런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런 이말동 기자, 아니 이 집사가 기특하고 신통하게 생각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이 없는 사람은 용모가 비록 다소 흉측하게 생겼어도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날 때 이말동 기자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이 집사라고 불렀다. 이 집사가 더 인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말동 기자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상급자인 나와 그의 관계를 인격적으로 합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집사는 말이야. 신학 공부를 해서 훌륭한 목회자가 됐으면 싶어. 그래서 나처럼 타락한 사람도 구제도 하고, 우리 회사에 영혼이 타락한 사람이 어디 하나둘인가. 정 사장을 좀 보게." "그렇지 않아도 신학 대학에 가려 합니다." "오, 그래. 그럼 아주 잘됐어. 이 집사가 목사가 되면 나도 거기 나가지." 그 후 나는 그를 따라서 그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 목사로부터 안수 기도도 받고 종교에 대한 관심을 더하게 되었다. 그는 목사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우리 회사의 부장님으로 계시는데, 영혼 구제가 시급해서 모셔 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하며 내 영혼의 상태가 긴박함을 알렸다. 목사 역시 그의 말에 동조했다. "아주 잘 오셨습니다. 이분도 지난번 분처럼 영혼이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단 말이죠?" 지난번에 어떤 분을 모셔왔는지 모르나, 나를 가운데 두고 얼굴이 어쩌고 하는 말이 오가는 것이 기분이 썩 개운하지가 못했다. 목사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 집사님이 잘 보셨어요. 이분의 눈 안이 충혈된 것으로 봐서 ‥‥‥‥" 하면서 내 머리에 한 손을 얹었다. 그리고 꾹꾹 찍어 눌렀다. "이 더럽고 추잡한 마귀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썩 물러나가라! 썩 물러나가라!." 하며 나를 중죄인이나 된 듯 머리를 한 손으로 찍었다. 연약한 몸에 신이 들렸는지 그 악력이 대단했다. 종교만 달랐지 무당이 하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40여 년 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나는, 죄인의 입장에서 그 기도를 감사히 듣고 있었다. 이젠 나쁜 짓하지 말아야지. 열심히 교회에 나가야지. 교회에 손잡고 나와 찬송가를 기쁜 마음으로 부르는 젊은 부부를 보면서 때 묻은 영혼이 부끄러워 그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였다. 모두가 날개만 달려 있지 않지, 당장이라도 천당에 갈 천사들 같이 그들이 부러웠다. 특히 이 집사가 그랬다. "이 집사는 이담에 천당 일등 좌석에 있을 거야. 그땐 내 죄 많은 영혼도 수첩에 적어 놨다가 기억해 줘." 그는 내 말에 만족한 듯, "그야 물론이지요. 내게 잘 해주시는데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천사장이나 하다못해 말단 천사를 시켜서 빨리 뫼시죠." 하면서 당연히 천당 일등 좌석은 기정사실이란 듯, 나를 천당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했다. 나는 시원시원한 그의 말이 고맙고 또 사무실에서 혼자 질이 나쁜 음식으로 숙식을 하는 그가 딱해, 내가 입던 내의와 담요 등을 세탁해 가져다 덮어 주기도 하고, 틈틈이 집에 데려다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 고생 하지 말고 맘에 드는 여자를 얻는 게 어때?" "생각중입니다. 그러나 학벌보다도 신앙심이 있는 여자라야죠. 이담에 목회를 할 텐데‥‥‥‥" "하긴 그래." "부장님이 추천해 주십시오. 용모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으면 되니까요." 하며 내 말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사가 내게 즐거운 얼굴로
"부장님, 제게 배필이 한 사람 생겼는데, 세속의 때가 조금 묻었지만 조금만 회개시키면 되는 여자예요. 같이 만나 보실까요?" 하는 것이었다. 그날 저적, 이 집사는 회사 근처의 대폿집으로 배필이 된다는 여자를 데리고 나왔는데, 첫눈에 보아도 여염집 규수 같지가 않아 보였다. 얼굴 전체를 빨간색, 파란색, 까만 색깔이 도는 화장품으로 두껍게 도배를 해서인지 윤곽이 잡히지 않는 여자였다. 특히 쌍꺼풀을 크게 만들어 놓아선지 눈동자가 크기에 비해 줄어든 것 같았다. "인사하지, 우리 회사의 부장님이셔. 영혼이 문제지만 세속적으로는 아주 인자하신 분이지." 그는 나를 소개할 때마다 영혼을 거들먹거렸다. "예, 미스 송이라고 해요. 귀엽게 봐 주세요." 이 집사가 부연설명을 했다. "미스 송은 이래봬도 장래가 촉망되는 가수입니다. 비록 지금은 무명이지만, 일류 작곡가 선생으로부터 곡을 받고 오디션 중입니다. 밤무대 월드컵에 출연중이죠." "아, 그러세요?" 거기서 우리는 여러 병의 소주를 축냈다. 평소에 술은 마귀의 물이라고 말하던 이 집사도 그날은 분위기가 그래선지 꽤 취했고, 미스 송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밤무대에 서다 보니 손님들로부터 얻어 마시는 술이 이골이 나 내성이 붙은 것 같았다. "저, 화장실 갔다 올게요." 하며 뻔뻔스럽게(?) 한 시간에도 여러 차례씩 드나드는 미스 송이란 여자가 과연 목회자 후보자인 이 집사에게 배필이 될 것인가는 내가 보아도 문제가 있었다. 이 집사가 마침내 미국말을 해댔다. "부장님‥‥‥ 앞으로 제가 미스 송의 매니저를 할 모양입니다. 잘 아시는 밤무대의 영업부장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하며 미스 송의 얼굴에 혐오스런 술을 비벼 대면서 집사로서의 품위에 벗어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 집사도 인간적인 데가 있어, 예수님만 믿는 것 같더니 ..... "예수님도 오늘 같은 날은 봐주십니다. 미스 송이 비록 때는 묻었지만 제가 회개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옛날 막달라 마리아 있죠? 남편 다섯 명과 살았던 지저분한 여자죠. 그 여자를 예수님이 회개시켜 구원을 주었지 않습니까? 예수님 발을 씻긴 게 신통스럽게 생각됐거든요. 이 여자 비록 밤무대 나가서 니나노 노래 부르지만 심성은 착한 여자랍니다. 사실 난 총각, 딱지 떼지 않고 총각으로서 희생하는 겁니다." 그 말에 미스 송은 화를 벌컥 냈다. 여자가 갖는 최후의 자존심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거 왜 이래? 날 뭘로 알아. 지가 언제 봤다고 그래. 내가 얼마나 때가 묻었길래. 내가 막달라 마리아란 말이야? 막달라 마리아란 년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놀았길래 아가리에서 튀어나오면 다 말이 되는 줄 알아!." 하며 거품을 물고 이 집사를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나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그들의 술값을 치르고 술집 문을 나섰다. 그 이튿날 가뜩이나 갈탄 연기 때문에 궁상맞아 보이는 이 집사의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소주를 먹어선지 더 새까맣게 돼 나를 쳐다보더니 미안한 얼굴로, "부장님, 죄송합니다." 하면서 사과를 했다. "미스 송이 화나지 않았어?"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아닙니까?"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부장님, 아시다시피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다 보니 몸이 엉망이 됐어요. 그래서 ‥‥‥‥ "하숙을 얻겠단 말인가?" "여자가 딸린 아주 좋은 하숙이죠, 마침내 미스 송과 합치기로 했어요." "돈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미스 송이 그 동안 번 돈으로 월세방 얻는 데 투자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그 여자가 손해가 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난 엄연히 총각이고, 그 여자는 이미 두 번 결혼한 전과자거든요. 전실 자식도 있고, 그냥 관대하게 봐주기로 했어요. 그런 여자 데리고 사는 것도 하늘나라 복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잘 해 봐요." 그들, 이 집사와 밤무대 가수 미스 송은 그 후 합의가 됐는지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고 주거가 부정인 이 집사는, 그 여자의 과거야 어떻든 간에 한꺼번에 의식주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 세 살이나 위인 누님 같은 밤무대 여가수 송정자는 경기도 과천에서 과수원을 하는 집의 맏딸이었다. 얼굴값을 하느라고 고등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디스코 클럽이나 다니고 가끔씩 외박을 해서 부모로부터는 '내논' 자식이었다. 그의 부모는 이런 딸을 일찌감치 시집이나 보내 골칫거리를 없앤다는 식으로 자기 집 과수원의 머슴이나 다름없는 마흔 살이 넘은 홀아비에게 떠 맡겼다. 40대의 홀아비인 관리인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장인 될 사람에게 백배 절을 하고 약간의 재산을 분배받아 딴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미스 송은 자기보다 나이가 두 갑 절이나 위인 늙은 홀아비가 맘에 찰리가 없었다. 미스 송에게'아씨, 아씨' 하고 존칭어를 부르던 관리인은 하루아침에 자기 색시가 되자 보물을 다루듯 아꼈다.
첫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본성이 드러났다. 주인집 대학생과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갔다. 어린애까지 낳은 경력이 있는 여자를 앞길이 창창한 아들의 부모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데니까. 화냥 짓을 한 년이 어따 대고 감히 또‥‥‥" 이런 으름장에 미스 송은 댁의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니 어쩌느니 하는 말이 먹혀 들어갈 리 없었다. 대학생도 부모의 설득에 이성(?)을 차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이가 손가락 수만큼 위인 그 여자와 살아 봤자, 장래가 뻔할 것 같아서였다. "날 용서해줘요. 한때의 불장난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잊지는 않겠어요. 영원히‥‥‥‥" 미스 송은 그런 그가 오히려 불쌍했다. 그래서 되돌아섰다.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미스 송은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으나, 아직도 자기를 잊지 못해 기다리는 늙은 서방의 손길이 닿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에 친구를 통해 밤무대 자리를 얻은 것이었다. 이름 있고 인기 있는 가수들은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골드 타임에 출연해 패 많은 개런티를 받는다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명 가수인 그녀는 고작 손님이 뜸한 초장이나 파장 시간에 장식품으로 등장해 남이 부른 노래 리바이벌이나 하니까 출연료야 의상 값도 안 돼 언제나 궁기가 핀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다.
몇 군데의 밤무대에 출연해야 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여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겠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모 잡지사의 기자라는 미스터 장을 알게 됐다. 미스터 장도 미스 송의 풍만한 몸매에 반했는지 자진해서 PR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름이 알려지기 위해선 우선 PR을 해야 합니다. 무명 가수 생활이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합니다. 제가 미스 송 PR을 전담하지요. PR비가 꽤 많이 드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마침 친구들이 신문사, 방송국, 잡지사에 널려 있으니까 그 애들을 이용 하는 거지요." 하며 수첩을 꺼내 미스 송에게 보여 주었다. "여길 보십시오." 그가 보여준 수첩엔 친구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옆에 방송국이나 신문사의 직위가 붙어 있었다. "나훈아나 남진 같은 인기 가수도 이 친구들의 손을 거쳤죠. 그놈들도 별것 아니었어요." 하며 그는 남진이나 나훈아를 우습게 입에 올렸다. 그의 입놀림에 미스 송은 황홀해졌고, 이 친구를 꽉 움켜잡고 있으면 출세는 따낸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장 기자는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PR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장 기자님만 믿겠습니다." "믿어 보십시오. 저를 빽으로 여기시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사진하고 프로필이나 많이 만들어 놓으십시요. 언론계에 돌려야 하니까요." "저 같은 무명 가수도 잘 받아 줄까요?" 미스 송은 관심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PR을 하자는 거지요. PR을 하면 밤무대 개런티가 갑절로 뜁니다. 또 방송 출연도 앉을 틈 없이 바빠지고, 레코드 취입 길도 트이고요. 바이브레이션이 좋던데. 그 길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장 기자 곁에 앉아 있는 친구도 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힘을 얻은 미스 송이, "저도 장 기자님처럼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뽕짝은 맞지 않고 민요풍의 노래가 어떨까‥‥‥‥ "맞아요," 미스 송은 그날 밤무대에서 받은 개런티를 모두 풀어서 아낌없이 장 기자의 술값을 치루었다. 그래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인기 가수가 되고 바쁜 몸이 될 것 같아, 어쩌면 지금의 고생은 그 시절을 예비한 시절 같기도 했다. 이미자나 김부자는 안 그렀나? "잡지는 말입니다. 내가 현직에서 뛰고 있으니까 염려 마시고, 문제는 TV인데‥‥‥‥ 미스 송은 그런 장 기자를 철썩 같이 믿었다. 마치 황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장 기자는 그 후 미스 송이 출연하는 밤무대에 가끔 찾아서 그녀의 출연료를 축냈다. 그때마다 그녀를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MBC PD를 만났는데, 이번 주에는 신인 무대가 꽉 찼다고 그래서 기다리라고‥‥‥‥“ "그럼 언제 쯤요? 사례는 얼마쯤?" "미스 송이 지금 사례할 형편인가? 그 친구들 불러 내 술이나 한 잔씩 사주면 되지." 장 기자는 가끔씩 방송국의 누구라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모두가 공짜 손님이었다. 그들의 술값을 대느라고 어느 때는 쥐꼬리만한 한 달 출연료가 적자가 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장 기자와 함께 온 친구들이 협조(?)해 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등장한 것이 이말동, 이 집사였다. 이미 PR을 전제로 장 기자에게 두어 번 몸을 허락한 미스 송이었다. 그 후부터 장 기자는 아예 미스 송의 출연 업소를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남편 행세를 했다. "미스 송, 여기 술 좀 더 시켜." 그 말이 밉살머리스러워 미스 송이 짜증을 냈다. "방송국 출연은 언제나 되는 거야? 내가 죽기 전에 될는지...“ "좀 기다리라니까." "그 말 믿어도 돼?" 한 달이 지나도 장기자의 장담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긴, 장 기자가 나간다는 잡지사는 간판만 붙어 있는 유령 잡지사이고, 또 자신이 연예 바닥에서 안면이나 익힌 건달이기 때문에 PR이고 워고 처음부터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미스 송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에게 몸을 바치고 술값을 뜯기고, 이제 기다리는 것도 지쳤다. 나이는 자꾸만 들어가고, 속절없는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그러던 차에 이말동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 친구야. R신문사 취재부장이시지 알아 두면 하나도 손해나지 않을 거야." "잘 봐 주세요."
이말동은 미스 송의 얼굴과 몸매를 보고 당장 황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휘황찬란한 조명등이 번쩍이는 이런 고급 술집 출입은 처음인데다가, 그 여자가 입은 잠자리 날개처럼 망으로 된 의상에 투명된 풍만한 젖가슴이며 허연 허벅지가 허기진 그의 욕구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말동은 이 여자가 장 기자와 가깝다는 걸 알고 질투심이 생겼다. 그래서 기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의리 없이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했다.
"장 기자가 사람은 좋지요. 그런데 맺고 끊는 것이 별로 없어요. 사실 저 친구완 오래 사귀었지만, 너무 말이 신용이 없어 가끔 실망을 느껴요. 누구를 출세시켜 준다고 공수표만 남발하고, 약속도 못 지키고 쩔쩔매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혹시 미스 송도 그렇지 않았는지요?" 하며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미스 송이 가만히 듣고 보니 그의 말이 그럴 듯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가요? 깊이 사귀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꼭 짚어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본의 아니게 약속을 이행치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우리 같은 신앙인의 입장으로 볼 때는 그 점이 못마땅하거든요" 이말동은 신앙이란 말을 특히 강조했다. 미스 송이 물었다. "예수 믿으세요?" "모태 신앙이지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으니까요." 저도 괴롭고 답답할 때는 교회 같은데 나가고 싶어요." "당연하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셔야죠. 주님도 미스 송 같은 영혼이 메마르고 헐벗은 사람을 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아오시지는 않습니다." 미스 송이 눈을 깜빡거렸다. "늦지 않았을까요? 너무 죄를 많이 진 것 같아서‥‥‥‥“ 그녀는 고아원에 맡긴, 대학생과의 사이에 난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댔다. "심령이 깨끗하시군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성경에 뚜렷이 적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죄인이 아닌'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 역시 죄가 많죠. 그래서 매일같이 죄를 씻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한 사람에겐 의사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며 이말동은 미스 송에게 특유의 신앙 강좌를 했다. 미스 송이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피니 꾀죄죄하고 조잡한 얼굴인데 말하는 건 청산유수였다.
그 동안 부모 속을 썩이고 남편을 배신하고 달아난 것과 대학생과 놀아난 것,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은 것 등등 질이 나쁜 죄를 저지른 것들을 이 사람과 상의해서 씻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셨어요?" "한동안 시험을 당한 것 외‥‥“ "그럼 교회에서 감투 같은 건?" "감투가 아니라 직분이죠. 하나님 나라에서는 감투란 말은 쓰지 않죠." "죄송합니다. 무식해서‥‥‥‥“ "집사 직분을 갖고 있죠.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이때 화장실에 갔던 장 기자가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 앉았다. 장 기자는 이때쯤 미스 송으로부터 '죽일 놈'이 돼 있었다. '그는 계속 횡설수설했다. "이제 봤더니 이 녀석 알건달이로군." "사실 전 외로운 사람입니다. 조실부모 했거든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안 해 본 것 없었지요." 술이 만취된 장 기자는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이말동은 열심히, 그러나 은근히 미스 송에게 자기선전을 했다. 그리고 마무리를 지었다. 장 기자가 다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미스 송과 내일 오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얻는 데 성공했다. "알았죠. 약속 이행해야 합니다. 미스 송의 영혼을 위해서 입니다. 장 기자 그 친구는 경멸해도 좋습니다. 아주 나쁜 놈입니다."
미스 송은 동의하듯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 이튿날 이말동은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 미스 송을 만났다. 두 번째 회동은 둘을 더욱 친밀한 사이로 만들었다. 미스 송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품격이 나쁜 여러 종류의 사내들에게 시달려 심신이 피곤하던 차에, 비록 생긴 것은 볼품없지만 자신을 위해 따뜻한 말을 해주는 이말동이 싫지가 않았던 것이다. 또 나이도 자신보다 세 살이나 아래인지라 어느 면으로 보면 동생 같기도 했다. 그래서 여자로서의 보호본능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밤무대 서기 힘들죠? 제가 능력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답니다. 이 험난하고 가시밭 같은 세상, 도와 가면서 살죠." 국어사전에 나오는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이말동에게 부쩍 호감이 간 미스 송은 자기의 인생 이력, 인생 역마차와 같은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그 말을 관심 있게 듣고 있던 이말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역시 제 예측이 맞았군요. 첫눈에 봐도 범상하지 않게 살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사실이지 저도 외로운 몸입니다. 원래 저는 신문 기자가 전공이 아닙니다. 법학도이죠." "법학도?" 그녀가 놀란 듯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법을 다루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사법고시 일차 합격하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잠시 해 보는 거죠." "그럼 미래 검사님이시겠네요."
"검사는 죄인들에게 구형을 때리는 직업이라 인간적인 면이 덜하죠. 그래서 변호사 지망을 할까 해요. 약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서 일해 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같아서‥‥‥‥“ "아, 그래요?" "우리 고향에선 젊은 나이에 출세했다고들 하지만, 전 세속적인 출세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출세가 따로 있나요. 맘 맞는 사람과 대화 나누고, 정들여 사귀고, 그리고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고, 이렇게 미스 송과 같이‥‥‥“ 하며 조그맣고 앙증맞은 손으로 두 배나 되는 미스 송의 손을 꼭 쥐었다. "부끄러워요." 그러나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 자주 만나죠." "그래요." "하나님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거든요." 하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어 낮선 남녀는 단시간에 하나가 됐고, 마침내 강서 구 화곡동에 있는 연립 주택의 지하방에 월세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 즈음 그가 다니던 회사의 경영이 어려워 여러 명의 기자를 감축하게 됐고, 이말동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았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그는 미스 송의 돈으로 얻은 월세방에 돈 한 푼 안들이고 틈입된 것이다. 이말동은 미스 송과 하루 온종일 방구석에서 화투를 친다거나 팝송을 부르며 노닥거리며 지냈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면 밤무대 나가는 미스 송의 큼직한 화장품 가방을 들고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미스 송 은 미래의 검사보다도 현재 자기를 위해 자상한 말로 위로를 해 주는 이말동이 결코 싫지가 않았다.
거칠고 난폭한 사내를 만나 그 동안 혼 줄이 났기 때문이다. 또 아는 것이 많고 자상하고 정이 많아, 출세를 해도 전의 대학생처럼 결코 자기를 버리고 야반도주를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스 송이 두 군데의 밤무대에 출연하고 자정이 넘어 돌아올 무렵, 이말동은 그녀가 내리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자기의 앙증맞은 손으로 움켜잡았다. "당신 생각하면서 이겨냈어요. 손님들이 어찌나 술을 마시게 하는지 ‥‥‥ 그녀는 거의 매일 술 냄새를 풍겼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잠자리에 듭시다." 하며 그날 하루도 주님의 은총으로 은혜롭게 복된 하루를 보냈다는 기도를 우렁차고 씩씩하게 했다. 미스 송도 그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됐고, 많은 교인들 앞에서 새 신자로서의 인사까지 했다. 이렇게 아기자기한 몇 달이 지났다. 이말동은 법관 발령이 나오는 대로 미스 송과 함께 그의 가족을 찾아뵙기로 했고, 우선은 동거로서 만족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달인 그에게 법관 발령장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느 날 미스 송은 이말동의 귀여운(?) 손을 자기의 배에 대면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무슨 소리? 글쎄?" "봄이 오는 소리‥‥‥‥ "왈츠인가?" "왈츠보다 더 좋은 것" "오, 이제 알았다. 생명의 소리였군."
이말동은 감격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방주인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몇 달 됐어요. 자기한테 속인 거 미안해. 그러나 확실 해진 담에 이야기 할려고 그랬어." "내가 무관심했나 봐. 자, 우리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아기를 잉태하게 했으니 그 이름 임마누엘이라 칭 하느니라' "우리 이제부터 각자의 몸이 아니에요. 새로 태어난 아기를 우리가 겪은 그 고통스럽고 참담한 시절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해요." 미스 송이 이말동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벼댔다. 싸구려 화장품이 훅하고 풍겼고, 너무 힘차게 얼굴을 비벼대선지 화장품이 이말동의 얼굴에 묻어났다. 미스 송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자기 나, 일본 가는 거 싫지? 자기 말대로 우리 열심히 돈벌어 우리 아기 훌륭하게 키워. 이번에 말이야. 연예 협회에서 일본 가는 케이스가 있는데, 돈 많은 한국 교포가 경영하는 살롱이래. 술잔 나르는 일은 아니고, 당신 나 보내 줄 수 있지? 너무 염려 하지마. 비아이피 대접을 해 준다니까.그 교포가 교회 집사라고 하는데 그래서 믿고 가는 거야. 몸 관리 잘 할게." 이말동은 그녀의 이 말에 금방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그만, 너무 미안하구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무슨 말 내 탓도 있지." 그녀는 눈을 예쁘게 흘겼다. 이튿날 그들은 동네 사진관에 가서 기념촬영까지 했다. 비록 두 달간의 기간이지만 약혼 사진 겸해서 촬영을 미리 해 둔 것이다.
"좋은 한 쌍입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남매 같습니다." 사진사는 그들에게 공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스 송은 이말 동과의 미래 설계에 괜히 새색시처럼 가슴이 두근대기만 했다. 그녀는 이말동에게 어머니나 누님처럼, "내가 없더라도 하루 세 끼 식사 거르지 말아요. 당신 건강이 걱정이 돼요. 가끔 술 생각이 나면 요 앞 갈비집으로 가요. 내가 돈 맡겨 놨어. 안주는 될 수 있는 대로 기름진 걸로 드세요. 건강을 버리면 안 되니까." 하며 미스 송은 자기가 없는 동안의 식사 걱정까지 했다. 그 동안 정에 굶주린 탓이다. 마침내 미스 송이 일본 가서 입을 의상과 화장품이 든 큼직한 가방을 챙겨 김포 공항으로 떠나던 날, 그들의 이별을 아쉬워하듯 늦가을의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같이 떠나는 동료들 틈에서 빠져나와 대합실 벤치에서 우두커니 앉아 눈물짓고 있는 이말동의 손을 잡았다. "당신 몸 생각하세요. 내 염려 말고요 내가 송금한 돈은 연예 협회에서 찾아가세요. 편지 자주 할게요." 하며 그의 양 볼에 입을 맞추었다. 정겨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왜 이렇게 쓸쓸하지? 자, 우리 기도나 합시다." 이말동은 미스 송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난 다음 이말동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님의 응답이 왔어요. 기뻐해요." 하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들의 모습을 흘끔흘끔 같잖게 보며 지나쳤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후부터 두 달간,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사랑이 담긴 사연의 편지가 오갔다. 미스 송이 깨알같이 쓴 편지에서 그 곳의 생활이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과,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의 미소 띤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며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말동은 오늘도 새벽에 교회에 가서 당신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는 것과, 그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는다는 것과, 송금 받은 돈을 꼬박꼬박 저축해 당신과 함께 할 조그만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데 같이 보탬을 하자고 했고, 오늘밤에는 꿈에 당신의 얼굴이 보이길 간절히 기도한다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낯부끄러운 내용으로 가득 채워 보냈다. 여기까지는 흔히 텔레비전이나 옛날 통속 소설, 이광수의 '사랑'이나 '무정' 같은 소설의 전반부 주제가 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반전된 것은 한 달 반이 지나고부터였다. 일본 히로시마의 연예인 합숙소에 있는 미스 송에게 이말동의 편지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뚝 끊어진 것이다. 그 동안 하루가 멀다고 편지가 도착했는데, 일주일을 기다려 도통 연락이 없었다. 이말동이 있는 화곡동의 연립 주택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했으나,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지만 종종 무소식 이었다.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좋게 해석했다. 평소에 몸이 부실하더니 혹시 병이 난 것이 아닌가? 아니면 교통사고? 그것도 아니면 누구와 시비를 벌이다가 사고를 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신앙심이 독실한 그분이 설마? 얌전한 개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는 데‥‥‥‥ 같은 방에 함께 있는 민요 부르는 언니에게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언니란 여자는 ' 정색을 하며 충고를 했다.
"요 맹추야! 요즘 사내새끼들이 얼마나 영악한 줄 아니? 그 새끼 주민 등록 확인이나 했어?" "아뇨. 주민 등록 확인하고 그걸 못 믿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언니가 혀를 찼다. "이거 히로시마에 춘향이 하나 또 생겼네. 내가 그런 인간들 때문에 신세 조진 년이야. 줄행랑쳤을 거라. 돈 그 새끼한테 송금 했지?" "예." "이 병신아. 왜 그런 새끼한테 송금을 해? 주민등록도 확인 않고‥ 전과도 많을 거다." 그 말을 듣자 덜컥 의심이 난 미스 송의 가슴이 두근댔다. 만일 그 말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해외 기술자 마누라가 바람이나 제비와 놀아나 송금한 돈 홀딱 날린다던가? 이건 그 반대가 아닌가?" 그러나 심성이 착한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좋게 생각을 했다. 남을 의심하면 죄 받는다고 이말동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었는데, 그런 당사자인 이말동이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스 송은 이말동에게 편지를 썼다. "여보, 사정이 생겨서 앞당겨 귀국을 가했으니 00일 00 시까지 김포 공항으로 나오세요. 선물 많이 갖고 갈게요." 그녀는 두 달 만에 앞당겨 귀국을 했다. 그녀가 귀국을 하는 날, 그녀의 심상치 않은 장래를 예견이나 하는 듯 눈보라가 심하게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출입문을 통해 공항 대합실로 가 이말동이 나왔나 두리번거렸으나 예측한 대로 아는 사람이라곤 한명도 없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사고가 났나?"
미스 송은 차례를 기다려 공항 택시를 집어탔다.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제발 이말동이 죄를 범하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다 왔습니다. 여기서 세워 주십시오." 미스 송은 이말동의 연립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웬일인지 그 연립 주택이 낯설게 보였다. 집 앞에 내려 주인 노파에게 인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은 썰렁했다. 그 동안 연탄을 넣지 않았는지 찬바람이 불어 왔다. 역시 그녀가 예상한 대로였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조그만 방에서 이말동과 아기자기한 사랑을 나누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기가 감돌았다. 오직 있다는 것은, 이말동이 며칠 동안 빨지 않아서인지 겨울철에도 고린내가 폴폴 풍기는 양말짝이 똘똘 말린 채 방 한 가운데 시위라도 하듯 발딱 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미스 송의 가슴은 분노로 벌떡 벌떡 뛰었다. 금방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주인 노파가 부엌에서 나오다 말고 방 가운데 우두커니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색시, 그 동안 어디 갔다 왔 수?" 하고 물었다. "멀리는 어디?" "일본요." "바다 건너? 멀리도 갔다 왔네." "할머니, 그런데 이 방에 있던 사람 언제 나갔어요?" "그 조그만 청년 말이야? 이마가 홀딱 벗겨지고 눈 가장자리가 늘어진‥‥‥‥ "예, 맞아요."
"어제 이사했지. 느닷없이 이사 간다고 해서, 기간도 안 됐는데, 보증금을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조금 떼라고 하더군. 마침 갖고 있던 돈이 있 길래 조금 떼고 돌려줬지." "제 얘길 안하던가요?" "이야기가 됐다고 하길래‥‥‥‥ "어디로 간다고 하는 말 없었어요?" "등촌동이라고 하던가. 가까운 데야." 미스 송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어디 이 새끼 봐라. 이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집사? 검사? 예수 사기꾼한테 내가 당했군, 어째 말끝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이 새끼를 어쩌지?" 두 달 동안 장아찌보다 더 짠 쪽 바리들 비위를 맞추며 번 2백만 원도 이미 십 원 한 장도 없이 이말동에게 송금한 후였다. 남은 것이라곤 용돈 아껴 써 가며 산일용 잡품 몇 가지였다. 뱃속의 망할 놈의 종자는 바깥 세상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책없이 발길질을 해가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 미스 송에게는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전기면도기, 다리미 등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배신자를 찾아 끝없는 추적에 나선 미스 송은, 제 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어디로 가느냐면서 밥도 굶어 가며 강서구 일대를 모조리 뒤졌다. 배가 고프면 풀빵을 사서 때웠다. 등촌동, 신월동, 목동, 화곡동, 신정동 등 강서구가 왜 그리 넓은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장 모통이에서 이말동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도 미스 송이 밤무대 나갈 때 이말동이 한 번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 친구를 꾀어 술까지 사주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제 사정이 급해서요. 인간적으로 이야기해 주세요. 친구 사인 줄 알지만, 정의를 위해서 말씀해 주세요,"
그녀는 울상을 한 채 애원을 했다. 그 친구는 미스 송의 참담 한 심정에 동정이 간 듯, "며칠 전에 만났더니 얼굴색이 좋아졌더군요. 장가를 들었다면서 연립 주택을 얻어 새 살림을 차렸다고 하더군요." "장가를요?" "장가를 들었다지 뭡니까?" "무슨 놈의 장가를 또 들어요?" 미스 송은 이미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혹시 가질 수 있는 미련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됐다는 허탈감에서 이번엔 가슴조차 뛰지 않았다. "그 친구 원래 그런 인간이에요. 보기보다 영악하죠. 얼굴은 우습게 생겼지만 조조같이 꾀가 대단해요. 말주변도 따라가는 사람이 없고요. 피해자가 많죠. 유부녀 등치기도 하고, 그러다가 여러 번 경찰서에 갔는데, 왜 피해 사실이 있나요?" "아니에요. 제 친구가 약간의 피해를‥‥‥‥“ 미스 송은 창피해서 그에게 자신의 처지를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친구 앞으로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돈거래 같은 건‥‥ "등촌동이라고 했나요?" "확실한 건 모르고 어설피 들었는데 등촌동 무슨 연립이라고 했어요." 미스 송은 그와 헤어져 등촌동 일대를 뒤졌다. 그러나 등촌동 일대가 여간 넓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추적 이틀 만에 어느 연립 주택의 공동 마당가에 있는 빨랫줄에 서, 그녀는 낯익은 팬티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 가기 전에 롯데 백화점에 가서 미스 송이 사다 준 검은 팬티였다. 사랑의 표시로 이말동에게 일곱 가지 빛깔의 팬티를 사다 주었는데, 검은 팬티는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팬티가 이말동의 것이라는 확증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팬티의 임자를 가리기 위해 하루 온종일 연립 주택 근처의 어린이 놀이터에 앉아 추위를 무릅쓰며 기다렸다. 아이들 뛰어 노는 모습을 보니 자기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고아원에 맡겨 놓은 아이가 컸으면 그들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해가 저물었어도 그 팬티의 주인공이나 그 팬티를 거둬 가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 팬티는 다른 빨랫감이 모두 없어졌는데도 그냥 빨랫줄에 혼자 달랑 남아 외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걸 들고 가가호호 호구 조사를 할까도 생각했으나 무리인 것 같아 그냥 참고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때 그녀의 눈에 뜨인 '물체'가 있었다. 파자마 바람의 조그만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는 아장아장 앙증맞게 연립 주택 계 단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두렵다는 몸짓이 역력했다. "아, 저자로군!." 역시 이말동이었다. 미스 송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가슴 속에 억지로 내려 누른 채, 그가 다른 길로 도주 할 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그의 뒤편으로 접근을 했다. 그리고 팬티를 걷기 위해 깡충 깡충 뛰는 이말동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 집사, 나 좀 봐요. 나 모르겠어요?" 그는 돌아서는 순간 금방 얼굴빛이 납빛으로 변했다. 지옥에서 염라대왕을 만난 그런 얼굴이었다. 이말동은 미스 송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동공이 크게 열렸다
그녀는 이말동의 푹 죽은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벗겨진 앞이마에서 빛이 발했다. 이웃집에서 흘러나온 형광등에서 반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사, 나 누군지 기억나요?" "아는 사람일 텐데‥‥‥‥" "........." "모르시나?" 미스 송의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지어졌다. "이 집사, 요 앞 다방에 앉아 기다릴 테니 옷 줏어 입고 나와요. 괜히 서툰 수작하면 그냥 놔두지 않겠어요. 주소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연립 주택 앞 다방으로 가 있었다. 그녀는 곰곰이 짧은 기간 동안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놈의 정이 뭔지 상대의 신원도 미처 확인하지 않은 채 행동한 자신에게 큰 잘못이 있었으나, 이말동의 비인간적이고도 가증스런 행위는 도저히 하늘이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한참 후에 이말동이 다방 문을 비쭉 열고 죄수처럼 고개를 숙인 채 미스 송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미스 송의 독 오른 얼굴을 정시하지 못한 채 먼저 말을 꺼냈다. "면목 없습니다. 사탄이 그 시간에 유혹을 했나 봅니다." 미스 송이 그의 입에서 예수와 관계된 용어를 꺼내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려 하자, "이 집사! 이 자리에서 예수 용어 자꾸 끌어들이면 나 불쾌해져. 이야기해 보세요. 가능하면 아주 재미있게 소설로 쓰게‥‥ " "면목 없습니다." "면목 없다는 이야긴 빼고‥‥‥‥" "죽을죄를 졌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 "왜 그랬을까?"
미스 송은 이제 다소 여유가 생겼다. 자기 옆에 죽을죄를 졌다고 고개 숙이는 한 사내 앞에 그는 이상한 우월감을 맛보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요?" 그녀는 이 한심하고 가증스런 작자를 어떻게 처분 할까 도대체 대책이 서질 않았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죠?" "아닙니다." "우발적이었단 말입니까? 돈에 그만 눈이 멀어서‥‥‥‥" "아닙니다." "상습범이란 말이 있던데." "무슨 말씀을‥‥‥‥“ “"피해자가 많다고 들었는데‥‥‥‥” "무슨 섭섭한 말씀을‥‥‥‥“ "섭섭한 말씀?" 미스 송은 그 대목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결론을 내릴까 하다가, 너무 싱거울 것만 같아서 분을 우선 가라앉혔다. "이 집사, 이제 와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니 해 봐야 흘러간 옛 노래이고, 영창 안 보낼 테니 그 동안 송금한 돈이나 내놓으시지." 그러나 이 말에는 대꾸를 못했다. "왜 말이 없으시죠?" "형편이 좀‥‥‥‥“
이말동은 그제야 미스 송의 얼굴을 보면서 어려운 얼굴을 했다. "형편이라니?" "말미를 달란 말씀이죠." "말미?"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이거 언어의 희롱을 잘하시는군. 검사 후보생이라 뭔가 다르군." "틀림없습니다." 미스 송은 그 부분에서 더 이상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유흥가에서 배운 상소리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놓은 것처럼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이런 말은 평생 쓰지 않노라고 다짐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사내냐! 너도 X달린 사내야! 이 새끼 웃기네, 생긴 대로 논 다구. 이것도 제비 축에 속하나? 참 기가 막혀서 ‥‥‥‥ 그러나 이말동은 도무지 동요하는 기척이 없었다. 이런 경험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입니다. 진심입니다." 이말동은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이제 미스 송의 응고된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심기를 돋구어 줄뿐이었다. "사나이로서의 다짐 입니다." 미스 송은 그 말을 듣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냉소를 띠며 "이 작자가 울려고 폼 잡고 있네. 여긴 극장이 아냐, 까불지 말고 돈이나 내놔. 그게 어떤 돈이라고‥‥‥ 일본 가서 쪽바리들 한테 몸 내주고 얻은 돈이야, 나 시간 없어. 그리고 내 헌 흑백텔레비전은 왜 가져갔어. 성경에 텔레비전 가져가라는 대목 있어. 예수님이 시켰어? 이거 도둑놈 아냐?"' 이말동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전혀 동정하지 않는 상대방을 설득하기에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그 점은 죄송합니다. 사실은 고향에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결혼을 독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올라오라고 했죠. 댁에게 미리 그런 말씀을 드린다는 게‥‥‥“ "댁 ?" 미스 송이 어금니를 더욱 힘차게 깨물었다. "그래서 나중에 변제할 요량으로 우선 그 돈으로," "그 돈으로? 뭘 어떻게 했단 말이오?" "전세방을 얻었죠." "누구에게 허락받고‥‥‥‥ "글쎄, 그건 제가 죄송하다고 그랬잖습니까?" 이말동이 조금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신경질적이었다. "내 허락 안 받고 그 돈 맘대로 해도 되는 거예요?"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피곤해집니다. 한 말 또 하‥‥‥‥“ 이말동의 신경질이 이번엔 노골적으로 나왔다. "아니 이 치가 어따 대고 신경질이야. 죄인이‥‥‥‥“ "죄인이라뇨?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아니 이걸 그냥‥‥‥ "계획적이라면 몰라도 단순 우발적이 아닙니까?" 이때 이말동이 이야기한 자칭 약혼자라는 여자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들 그러세요?" 그녀는 이말동 보다 몸매가 두 배나 되었다. 여자 씨름 선수처럼 몸매가 큰 그녀가 미스 송 앞에 버티고 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남편이 될 사람이 여염집 규수 같지 않은 야한 화장을 한 여자 앞에 연신 수모를 당하는 걸 보자 사정도 모른 채 냉정하게 물었다. "댁은 누구시죠? 이분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는 거예요. 이분은 제 남편이에요. 무례하게‥‥‥‥ 하며 이말동의 곁에 않았다. 체격이 이말동의 두 배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 말에 더욱 화가 난 미스 송은 일어나면서 이말동의 이마빡을 핸드백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다방이 떠나갈 듯이 소리쳤다. "야 X년아! 난 선임자야! 어따 대고 감히 아래위도 없어!" 마침내 두 여자 사이에 치고받는 싸움이 붙었다. 두 여자 중간에 선 이말동은 울상을 하면서 두 여자 틈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참아, 다방에서 이게 무슨 짓 들이예요." 독이 오른 미스 송이 밀치는 바람에 이말동이 발라당 나자빠졌다. 간신히 레지들이 와 사태는 겨우 진정이 되었다. 금전 관계는 다시 해결하기로 하고 그날은 그대로 헤어졌다. 이튿날. 사랑하는 연인 사이가 아닌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로 만난 남과 여. 미스 송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돈은 언제 해 줄 거야?" "한꺼번엔 곤란하고‥‥‥‥ "그럼 월부로 하겠단 말이야?" "제 사정이 여의치 못해요." "정상 참작을 해 달란 말이지?" "그렇지요." "전셋돈 빼면 될 것 아냐?" "그럼 우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미스 송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이 집 사!" "자꾸 집사 집사 하지 마십시오," "그럼 검사라고 해 줄까? 집사 감투 벗어 봤어요?" "송구스럽습니다." "돈 안 받을 테니 얌전하게 기도나 해 보시지. 눈감고 있을게." "농담이 과하시지 않습니까?" 이말동의 약혼자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자 다소 기가 살았다. "이게 아가린 달려 있어서 야! 너에게 우리라는 복수 개념이 처음부터 있었냐? 내 건 내 거고 네 것도 내 것이고, 이게 또 욕심은 많아 놔서 마누라는 제 두 배나 되는 걸 얻어 갖고‥‥‥‥“ "제 집사람 얘긴 꺼내지 마세요." "자존심 상한단 말이지?" "인격 침해가 아닙니까? 그 잘난 돈 몇 푼 때문에‥‥‥‥“ "돈 해 주겠단 말이지?" "말미를 달라지 않았습니까?" 이말동은 약혼자가 들으란 듯 악을 썼다. 결국 이말동은 교도소에 가긴 싫었는지 미스 송에게 네 차례에 걸쳐 분담해 주기로 하고 금전 문제를 해결했다. 전세방 빼서 미스 송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나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이말동에게 미스 송이, "내 뱃속에 발길질하는 물체는 어떻게 할꺼야?" "그건‥‥‥‥ "그것까지 책임지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치사해서 내가 알아서 하겠어." 미스 송은 돈을 받고 다방 문을 열고 나오다가 문 앞에 걸려 있는 흉측스런 탈을 보았다. 그녀는 그 탈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걸 떼어다가 이말동의 얼굴에다 씌워 줄까 하다가 그냥 나왔다. 거리에 나서면서 문득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송은 그 길로 산부인과에 가 낙태 수술을 받았다. 병원 문을 나서는 그녀의 몸은 천근이나 되듯이 무거웠다. 시장 바닥을 지나면서 좌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줌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아줌마들은 모두 저녁이면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가난 하지만 그녀들은 집에 가면 반갑게 맞이해 줄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말동에게 돈 받을 약속을 했지만 돈이란 그녀에게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잃은 것은 돈이 아니었다. 인간의 사랑이었다. 그때 이말동이 시장에 나타나 무엇을 사려고 하는지 기웃 기웃거렸다. 그녀는 이말동에게 다가갔다. 이말동이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미스 송은 문득 그가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말동에게, "아까 너무 화내서 미안해요. 돈 안 갚아도 돼요. 잘 사세요." 하며 돌아섰다. 그녀는 눈물이 쏟아지는 걸 억지로 참았다. 현기증이 났다. 어디 가서 쉬고 싶었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교회나 성당 같아 보였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노인들이 보였다. 그녀도 신자들처럼 노인들 곁에서 성모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눈길로 자신의 더럽혀지고 갈기갈기 조각난 영혼을 인자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성모. - 그냥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면 정답게 차근차근히 대답해 즐 것 같았다. 이때 그 성당의 보좌 신부가 허탈하게 벤치에 앉아 상념에 젖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곁으로 다가왔다. "신자십니까?" "아니에요." "근심이 있으신가요?" "저와 이야기나 나눠 보시지 않겠습니까? 사제관으로 가시죠." 그녀는 보좌 신부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사제관은 크고 넓었다. 책꽂이에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앉으시지요." 그녀가 앉자 보좌 신부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이 곳은 죄 없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고 해결해 주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녀는 그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젊은 신부의 온화한 얼굴을 대하니 자신의 겸손하지 못했던 과거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말씀하세요." 보좌 신부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모두 말씀하시면 마음이 편해질 거예요." 그녀는 용기를 내며 지난 몇 여 년 동안 겪었던 일들을 다이제스트 해 주었다. 보좌 신부가 물었다. "그분을 증오하십니까?" "예," "용서 할 수 없습니까?" "아직은‥‥‥‥“ "용서하십시오. 그래야만 자유스러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기뻐하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증오하는 마음이 있는 동안 평화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신부는 그녀에게 조그만 묵주를 한 개 선물해 주었다. "이걸 갖고 다니면서 미운 사람이 생각나면 알맹이 하나씩 돌려 보세요. 그리고 용서를 청해 보십시오. 응답이 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 언제라도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청하세요."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길 기도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성당 문을 나설 때 자신도 모르는 기쁨이 마음 안에서 서서히 자리 잡히고 있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느꼈다. "이 세상의 행복이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마음 안에 평화를 모시는 것, 그것이 사랑이란 것이구나. 나는 그 동안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이말동도 내가 사랑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로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허망하게 떠났던 것이다." 그녀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당장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곳이 많을 것 같았다. 거리에서 동정을 구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다리가 절단돼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들, 그 모든 생명들에게 입을 맞춰 주고 싶었다. 그녀는 이제 진정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한편 이말동은 미스 송이 송금한 돈으로 친구가 자주 다니는 종로 2가의 카페를 드나들게 되었고, 거기서 지금 동거하고 있는 여자를 사귀었다. 미스 송보다 나이도 적고 집안 사정도 그녀 보다 나은 것 같아 접근, 미스 송과 똑같은 수법으로 그녀를 손아귀에 넣었다. 미스 송의 돈으로 월세방을 얻어 동거 생활에 들어갔는데, 일정한 수입원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미스 송에게 발각 당하게 되었다. 미스 송에게 유용한 돈을 돌려주고 나자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게 되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몇 달간 파자마만 입고 방구석에 죽치고 있던 이말동에게 일자리가 생겨 거기서 나오는 월급으로 생활은 그럭저럭 했는데, 이번엔 부인의 성격이 포악해 매일같이 얻어맞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힘이 장사인데다가 입이 거칠어 남이 듣기에도 민망할 말을 함부로 해대 미스 송 생각이 간절했다. 월급날 한 푼이라도 축을 내면 꼬치꼬치 따지고 멱살을 붙잡고 패대기치는 그녀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넓게 까진 이마는 늘 반창고가 떠나질 않았다. 볼따구니엔 손톱자국이 가시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년 만에 낳은 딸이 심장판막증으로 생명을 잃는 불행이 겹쳤다. 죄는 지은대로 가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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