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측근 유금필ᆞ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
(후삼국의 전쟁과 큰 사건들을 쉽게
이해를 돕는 지도 ᆞ지도에 나타낸
지역의 전쟁 년도를 보시면 고려와 백
제의 전쟁에 유금필이 참가한 전쟁도
더 이해가 쉽게 됩니다)
곡도에서 군대를 조직하여 후백제의 군을 막아내고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 유금필은 정남대장군이 되어서 의정부에서 머물렀는데 왕건의 서찰을 받습니다.
"나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까 염려하여 일찍이 대광 능장영과 주렬, 궁총회를 파견하여 진수토록 했는데 ,백제 군대가 벌써 혜산진(충남 당진) 탕정(충남 아산일대)등지에 이르러 사람들과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신라 경도까지 침입할까 우려된다. 그대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
당시 백제는 충청도 서해안 지역과 경복지역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는데, 쇠락한 신라 경주는 신검이 이끄는 백제군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되
었습니다. 왕건이 그 점을 염려하여 급히 유금필
을 경주로 파견하고사 보낸 서찰입니다.
명령을 받은 유금필은 그날로 경주로 달려갔습니다.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그는 별동대 80명만 선발하여 경주로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그만큼 경주의 상황이 급한 위기에 놓인 상태입니다.
경주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백제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유금필이 부하들에게 같이 죽을 각오로 싸울것을 독려하자 수하 장사들은 모두 유금필의 명을따라서 소수 80명으로 백제의 저지선을 뜷고 경주에 도착했습니다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유금필을 눈물로 환영을 해주었고, 경주에서 7일간 머물며 신검의 군대와 싸워서 몇번이나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군 금달과 환궁등 7명을 생포하기 까지 했습니다.
승전보를 들은 왕건은 아주 크게 기뻐하며 유금필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수 있겠는가 라고 신하들 앞에서 큰소리로 소리쳤다고 합니다.유금필을 돌아오자 왕건은 다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습니다.
"그대 같은 공훈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내가 이 일을 마음에 새겨두고 절대 결코 잊지 않으리다."
그러자 유금필은 대답했습니다.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위기에 직면하여 목수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폐하께서는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 왕건의 지나친 찬사에 따끔한 충고
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건은 더욱 유금필을 아꼈습니다.
나하추의 군대를 물리친 이성계 부대는 고려의 전역을 누비며 외침을 막아내고 고려의 최고 장수로 맹위를 떨칩니다 늘 그 옆에는 이지란이 그림자처럼 같이 움직였습니다.
14세기 일본의 호죠정권이 몰락하며서 사무라이 군벌이 들어서면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내분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본내의 영주들은 공공히 주변국가와 상인들을 약탈합니다 .
이를 통칭 왜구라 칭합니다.
500여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한반도 곳곳에 출몰한 왜구는 해안지대를 약탈하는데 그치치 않고 때로는 고려의 수도 개경을 위협하기도 합니다.고려 우와의 재위 14년간 왜구가 침범한 숫자는 무려 387회에 이릅니다.
고려의 멸망에 이르게 된 원인중 가운데 하나가 왜구라는 진단이 있을 정도입니다.
우왕때 왜구들이 밤중에 강도성을 침입하여 부사 김인귀를 죽이고 착량으로부터 승천부로 침입하자 우왕이 가족들을 이끌고 몽진을 가려 했습니다.이때 이성계와 이지란은 해풍로 부터 급하게 승천부로 달려갔습니다
왜구는 백마산을 넘어서 이지란이 이끄는 군대에 공격을 했고 이지란은 활로 왜구을 공격하여 격퇴를 시켰습니다.당시 왜구의 규모는 해적의 수준을 넘어서 정규 군대의 수준입니다
다시 1380년 왜구가 다시 배 500척
을 이끌고 진포에 침입하여 여러 고을 백성들을 죽이고 가옥을 불태우는 만행을 자행하며 내륙의 지방인 호남을 걸쳐 운봉을 지나 인월에 머무르며 노략질을 하였습니다.
이성계와 이지란은 군대를 이끌로 정산으로 가서 적을 막았습니다.적이 창으로 이성계 등뒤로 가서 찌르려고 하는데 이것을 본 이지란이 이성
계를 향해 뒤를 보라며 외치고 급히 말에 뛰어올라 타면서 이성계가 뒤를 돌아보기전에 적을 쏘아 죽였습니다.
왜장 아기바투는 나이가 15세의 소년인데 그 용맹은 여러 왜장중에 으뜸입니다.
이성계는 아기바투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려고 했는데 이지란이 "그자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그자가 우리 군사를 크게 상하게 할것입니다."
하고는 아기바투에게 싸움을 걸었 습니다.
아기바투는 이중으로 된 갑옷을 입어서 얼굴과 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성계가 말했습니다.
"내가 저놈의 투구를 쏘아 맞출것이니 ,너는 그 틈을 타서 저놈의 얼굴을 쏘아라 그렇게 하면 저놈을 죽일 수 가 있을 것이다."
이성계가 적의 투구를 활로 명중시켜 투구를 떨어뜨리자,이지란이 곧 활로 그를 죽였습니다.
왜구들은 모두 대성통곡하며 달아났습니다. 이전투는 황산대첩으로 유명하며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가 왜구 섬멸에 큰 공을 세운 전투입니다.
1382년 여진족 추장 호바투가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며 단주에 침입하자 이성계는 동복면 지휘사가 되어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이지란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청주에서 상중에 있었습니다.이성계는 사람을 보내 이지란을 불렀습니다.
"국가의 일이 위급하니 상복을 입고 집에
만 있으면 안된다."이지란은 국가의 위기에 상복을 벗은 다음 무장을 하고 이성계를 따라 전장에 출전했습니다.
고려군은 적장 호바투군과 길주 들판에서 대치했고 , 이지란이 선봉으로 나가서 싸웠지만 크게 패했습니다.
이성계의 본진부대와 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적장 호바투는 세겹의 두꺼운 값옷을 입고 그위에 붉은 털옷을 걸쳤으며, 검은 암말을 타고 선두에 나서서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지란을 꺾은 호바투는 이성계를 얕보고 군사들을 무장한채 뒤로 두고 칼을 뻬어 들고 앞으로 달려나오니 이성계도 단기필마로 호바투를 상대했습니다.
두사람은 날이 날카로운 장검으로 승부수를 내려고 했지만 서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서로 지쳐갔습니다.
이성계는 재빨리 말을 돌려 호바투 등에 활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서 활살촉이 깊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호바투의 말을 쏘아 꺼꾸려 뜨렸습니다. 호바투는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으며 그의 부하들 달려와 그를 구출했습니다.
이때 이성계가 군대를 휘몰쳐서 적을 대패시키니 호바투는 겨우 목숨을 부지한 체로 폐주를 하였습니다.호바투 군대를 평정한 이후 이지란은 다시 어머니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쳤습니다.
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실권을 잡은 이후 당시 급진 개혁을 주도한 이성계와 정도전의 새 나라 건국에 정몽주가 반대하며 고려를 지키자며 이방원이 정몽주 살해를 이지란과 모의하니 이지란은 고려의 충신을 죽일수 없다며 거절했고, 이방원은 조영규등에 명을 내려 정몽주를 살해했습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에 이지란에게 이씨의 성씨를 하사했습니다.그리고 그에게 도명마사의 관직을 내려서 두만강 근처 삭방에 진주시켜서 여진족을 회유해 조선에 귀부를 유도하니 많은 여진인들이 귀부하여 조선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건국이후 태조의 세자 책봉에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이방원의 두 번의 왕자의 난때 이방원의 편에서 이방원을 도았습니다.
그후 이지란은 이성계 곁을 떠나 북청을 돌아가 있다가 이성계와 함흥에서 헤어진 뒤에 산속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두번째 왕인 정종은 추중병 의익대사정사공신 봉해지고 청해군의 벼슬을 내리고 , 태종 이방원은 이지란을 조정으로 수없이 불렀지만 끝내 거절했습니다.
이지란은 72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대로 화장을 하고 부도를 세웠습니다.
고향이 북평이며 고려에 귀하한 이후 새나라 조선에서 청해군의 군호와 이씨성을 하사받아 청해이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평생을 곁을 지키며 일생을 함께하다 싶이 한 이지란의 도움이 이성계 일생에 가장 큰 동료이자 지인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934년에는 왕건이 운주(충남 홍성)를 정벌하기 위해 친정을 나섰는데 견훤이 그 소식을 듣고 군사 5천여명을 선발하여 달려왔습니다.
견훤이 고려군의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화의를 요청했습니다.
왕건은 신하들의 의견을 물으니 신하들이 중론은 화의로 기울렸지만,유금필은 이번에도 싸울것을 주장했습니다.
왕건이 그의 주장을 받아드려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자, 유금필은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백제군대를 공략했습니다.
그결과 3천명의 적의 머리를 베고,백제 장군 상달과 최필을 비롯한 견훤의 여러 측근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고려군은 공주 이북의 30여성을 얻는 대승을 을렸고, 백제는 기세가 꺽겨 내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나주는 929년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나주를 거의 장악했고, 남아있던 고려군은 뱃길이 끊겨 고려 조정과 통교가 되지 않는 상항이었습니다.
왕건은 장군 견서,권직,인일 등을보내어 여러차례 나주회복을 시도했지만 실패 번번히 실패를 했습니다.그래서 다시 신하들에게 장수를 천거하
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홍유와 박술희가 자청했으나 왕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가 공훤과 제궁등이 유금필를 천거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역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자에 신라의 길이 막혔을때 그가 가서 열었는데 나는 그 수고를 생각하고 감히 다시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유금필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아뢰었다.
"저는 이미 늙었으나 이번일은 국가 대사인데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에 왕건 기꺼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대가 만일 이번 명령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기쁜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칭송을 뒤로 하고 유금필은 나주로 떠나서, 나주 공략에 성공하여 뱃길을 열고 나주의 상당부분을 안정시키고 돌아왔습니다.
그의 일대기에서 알수 있듯이 그는 승리의 화신이요 ,고려군의 수호신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단 하나번도 패한적 없고, 어떤 싸움에서도 물러선 적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백제군은 그의 모습만 보아도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뺄 정도였습니다
고려사는 유금필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 유금필은 장량으로서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했고, 집에 들러 잔 적도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나가 위로
해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이고 성종 13년에는 태사 벼슬으 추증받았고, 태조의 묘정에 배앙되 었습니다.
왕건과 고려의 위기때마다 불사신 같은 존재감을 보이며 늘 고려군의 사기를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유금필입니다. 그의 공은 고려의 많은 무장중에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의 시작에 왕건과 유금필의 활약이 있었고, 고려의 마지막에 이성계와 이지란의 활약이 있었으니 수백년의 시간을 넘어서 비슷한 역사의 인물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