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수가 절반이나 되었던 조선
일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노비(奴婢)가 절반, 양반(兩班)이 약 10%, 너머지가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이었다고 합니다. 良民의 경우는 농사와 장사를 주업으로 하는 백성이 많고 장인(匠人)도 이에 속합니다. 천민은 아다시피 도살장이나 푸줏간의 '백정(白丁)', 신발 만드는 갖바치, 생선간이나 염간(염전 종사자) 등입니다.. 오늘날에는 톱클라스 '양반'이 할 수 있는 잘 나가는 영화배우나 아이돌 가수는 당시라면 광대에 속해 천민으로 분류되지요.
노비 즉 노예란 전쟁에서 승리하면 포로나 점령지 백성들을 끌고 와 부려먹은 사람으로,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가축과 다름 아닌 사유재산에 속하지요. 그런데 다른 나라를 점령하거나 전쟁에서 별로 이기지 못한 조선에서 노비가 절반을 유지했다는 건 아이러니 하지요. 노예를 쉽게 얻기 힘든 상황에서 그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苦肉之策이 필요했읍니다. 노비 사이에서 태어나 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노비와 양민, 심지어 양반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자식도 노비 신분을 벋어날 수 없게 만든 게 조선의 신분제도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이야기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노비는 백성(百姓)이 아닌 존재
백성에게는 마땅히 의무와 권리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백성에게는 호패(號牌)라는 '백성증'을 나누어주고 세금과 군역(軍役)의 의무를 부과합니다. 그리고 양반 사대부와 일반 양민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과거 등을 통해 출사(出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흉년에는 구휼미가 지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비는 세금과 군역도 부과되지 않고 출사할 기회조차 원천봉쇄 되었다는 게 큰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노비가 주인을 잘 만나 밥곯지 않고 힘들게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세금과 군역에서 자유롭지 못한 양민보다 못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특히 탐관오리의 횡포가 심해지고 먹고 살기 힘들게 된 조선 말기에는 스스로 노비가 되는 양민이 늘러나고, 심지어 양반을 반납(?)하고 자진하여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兩班 전유물인 '漢詩'를 넘본 노비
조선조에서 漢詩는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으로 사대부들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인 영·정조 시대에 정초부(鄭樵夫, 1714~1789)란 작자가 시단에 홀연히 등단합니다. 수소문해 보니 양반은 물론 아니고 中人도 아닌 노비신분이라는 겁니다. 초부(樵夫)란 말 그대로 그저 '나뭇꾼'이란 일반명사로 정가라나 뭐라나 하는 나뭇꾼이라는 말입니다.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柔櫓一聲飛去盡(유로일성비거진)
夕陽山色滿空潭(석양산색만공담)
위 시는 정초부가 지은 '東湖' 란 제호의 7언절구로 팔당대교 부근 한강의 風光을 읊은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읍니다. 그의 시는 조선 후기 쟁쟁한 詩人墨客들을 찬탄하게 하는데, 이를 지은이가 노비라는데 더욱 놀라게 됩니다. 당시 정초부의 시가 널리 회자되자 김홍도는 그의 그림(渡江圖)에 정초부의 시구를 인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암송할 정도였다고 하지요.
渡江圖 / 김홍도
어깨너머로 듣고 익힌 漢詩
그는 경기도 양평 월계 사람으로 참판을 지낸 여동식(呂東植) 집안의 노비였읍니다. 나무하러 오가는 사이 주인집 아들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따라 익혔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가 한시를 읊조리는 것을 듣고 신통하게 여겨 아들 글동무로 옆에서 같이 공부하도록 배려했다고 하지요. 그 아들이 바로 평생 글동무이며 시벗인 여춘영(呂春永, 1734~1813)입니다. 여춘영의 문집에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벗으로, 詩에는 오로지 나의 초부뿐(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 라는 구절이 나올 정도입니다. 후에 여춘영에 의해 면천(免賤)되지만, 먹고 살아가는 것은 더욱 곤궁하게 됩니다.
翰墨餘生老採樵 (한묵여생노채초)
滿肩秋色動蕭蕭 (만견추색동소소)
東風吹送長安路 (동풍취송장안로)
曉踏靑門*第二橋 (효답청문제이교)
*靑門 : 동대문의 별칭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어깨 가득 쏟아지는 가을 빛 쓸쓸하다.
동풍이 (나를) 한양길로 떠밀어,
새벽녘에 동대문 제2교를 밟누나.
'老樵夫(늙은 나뭇꾼)' 란 제하의 시입니다. 면천된 후에도 나무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데, 다만 뗏목을 타고 한강을 내려와 동대문 밖에서 팔아야 하는 더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士大夫나 中人들의 시 모임에 초대받기도
詩名이 알려지자 그를 찾아 오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인 신광수(申光洙)가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읍니다.
江上樵夫屋 (강상초부옥)
元非逆旅*家(원비역여가)
欲知我名姓 (욕지아명성)
歸問廣陵花 (귀문광릉화)
*逆旅 : 나그네를 맞이하는 곳
강 위에 있는 나무꾼의 집은
나그네를 맞는 집이 아니라오.
내 이름을 알고 싶거든
광릉의 꽃에게나 물어 보시오.
양반들의 시모임이나 한양 西村 中人들의 시회에 초대된 적이 종종 있었으나, 신분의 한계는 오히려 더욱 뚜렸해지고 곤궁조차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고닲은 삶의 편린을 짐작할 수 있는 시가 그외에도 많으나 여기에선 생략하겠읍니다. 사후에 그의 시명이 알려지고, 근래에는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발견 되기에 이르렀읍니다.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등 4명의 시만 골라 묶은 필사본 시집 ‘다산시령(茶山詩零)’에서 나왔다는 것만 봐도, 당시 정초부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말해주고 있읍니다.
黃壚*亦樵否(황로역초부)
霜葉雨空汀 (상엽우공정)
三韓多氏族 (삼한다씨족)
來世托寧馨 (내세탁녕형)
*黃壚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산다는 세상
저승에서도 나무를 하시려나
빈 물가엔 서리친 낙엽 비가 내린다.
우리나라엔 명문가가 많으니
다음 세상에는 부디 그런 집에서 태어나시오.
정초부가 쓸쓸하게 죽자 그의 시벗인 여춘영(呂春永)이 祭文으로 쓴 시구입니다.
♣ KBS역사스페셜 및 인터넷 카페 블로그 등을 참고하여 썼읍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면 댓글이나 전화로 알려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