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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 복이 있다
1981.02.11. 김준호 선생
마태복음 20장 20절 보겠습니다.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 그때 제베데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왔는데 그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청할 량으로 엎드려 절하였다.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형제들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 이말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으로 인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였다. 26절 이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온 것이다. 하였다.
저녁에 성경말씀을 보고 제가 무슨 설명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손님들도 오시고 그랬다고 해서 대체로 옛날에 이현필 선생님께서 뭔 말씀하시더냐? 어떻게 들었냐? 그런 것을 참고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정신 연령이 어려서 그랬던지 뭔 말씀하셨는지 그게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마디의 이야기를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 말씀드리고요. 다음에 참고하실만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능주 한나 어머니 가족으로부터 부르시고 교회 사택에 계실 때 모두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그때 구 장로님 박복만 집사님 그런 분들이에요. 그때 신자들이니까요. 한 이십 명 모여서 한 삼일동안 말씀을 해주실 때에 우연히 박복만 집사님 댁에 찾아갔다가 모인다고 그래서 찾아갔었습니다. 해방이듬핸가 되는데 말씀은 이 선생님이 주시고 아침 오전시간 오후시간 세 번 밤까지 세 시간 말씀하셨어요. 그 줄거리를 3일간 다 들어보고 결론이 나옵디다요. 무슨 말씀을 했던지 주제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런 주제인 것 같아요. 성경 누가복음 6장 20절 이하에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그런 줄거리를 쭉 말씀하셨는데 제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다 말씀을 듣고 어떻게 법열이 일어났는지요? 가슴이 터질 것같이 기뻐요. 그래 찬송을 부릅시다. 찬송을 시작하면 웃음이 터져 나와서 도저히 찬송을 발음을 못하겠어요. 막 입만 띠면 버글버글 웃음이 터져나와갖고요. 웃음이 나올라하는데 점잖은 분 앞에서 입을 꽉 막고 발음을 않고 억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제 성경말씀이 끝나면 밖에 교회 앞뜰에 나가서보면 천지만물이 전부 반대로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가난한 것은 부자로 보이고 부자는 가난하게 보이고 좋은 것은 나쁘게 보이고 나쁜 것은 좋게 보이고 전도가 되어버렸어요. 관찰력이 그런데 인제 그 말씀 3일전까지는 공부도 많이 하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그랬는데 감성에 빠져서 그랬는지 완전히 이렇게 되어갖고 전혀 생각이 바꿔졌기 때문에 돈을 벌 것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가난해지는 연구를 한다. 그런 쪽이거든요. 그래서 인제 이 표현을 어떻게 하나? 저 나름대로 걱정을 했습니다. 그때 소감인데요. 인류가 지금 30억인지 40억인지 모르지만 인류가 믿음 따라서 쭉 한 줄로 서고 있다. 마음으로 한번 그려요. 쭉 이렇게 돈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고 제일부자부터 제일 돈 없는 사람, 그럼 인류의 40억이 쭉 제일 가난한 사람이 제일 뒤에 서게 되지요? 그런데 자꾸 한사람씩 하늘로 올라가는데 제일 인류가운데 제일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들어가요. 어떻게 그것이 부러운지요? 3일전에는 인류가 40억이면 제일 부자 그 사람을 모방 할라고 그랬거든요. 자기마음에, 이제 바꿔져가지고 제일 가난한 사람을 본받아야 쓰겠다. 그럼 제가 선자리가 가난한 쪽이니까 희망이 생겼어요. 그 말씀을 듣기 전에는 제가 부자 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망했는데 그러면 인류가 부자 서열로 선다면 가난한쪽에 제가 훨씬 가까웠기 때문에 가난하기로 하면 어떻게 인생이 쉬운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낙관하고 마음이 기쁨이 생겼다니 그런 요령을 체험했는데 자꾸 인류가 서요. 그러니깐 제일 끝에 머리가 천국에 간다. 그거에요. 제일 밑에 사람이 그러니까 지배하는 사람이지요. 지배하는 사람이 앞에서고 지배당하는 사람이 뒤에 섰는데 제일 많이 지배당하는 사람이 제일 끝에 섰지요. 제일 끝자리 그 사람이 천국 간다. 그렇게 믿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일 끝자리서기는 훨씬 인생길이 쉽겠다. 싶디다요. 내가 일생 방향은 제일 끝자리에 들어서도록 만 길을 가야겠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뭔 예를 들었나 아실 거예요. 성경에 말씀하기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이 믿어지도록 설명하세요. 자꾸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그때 무렵에 선생님 슬하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러니까 이 부자들이 털털 털고나오네 그냥 돈이 있던지 집이 있던지 전토가 있으면 부끄러우니까 그냥 전혀 부끄러우니까 감춰버리고 나는 없는 듯이 선생님의 옆에 있었거든요. 가진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못해요. 부끄러워서, 그날도 옷을 잘 입은 사람은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해요. 부끄러워서 옷을 제일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이 활발하고 분위기가 그래요. 저는 제 나름대로 그때 기억을하고 선생님이 설명을 하던 분이 안자님 생활입니다. 공자님 제자지요. 대개 청중이 노인들이고 구식 학문을 하신 분들이 들었으니까 그래 안자님 설명을 하신 것 같습니다. 동양의 현인 안자님은 한 표주박 제일 돈 안 드는 바가지이지요. 한바가지 물을 떠 잡수시고 한 도시락밥 그러니까 산에 가서 비산 대를 꺾어다 엮은 밥그릇 아닌가요? 한 도시락밥에 한 표주박물을 마시고 그 거처하는 곳이 누추하기가 이를 데 없고 거적을 깔고 누워계시면서도 그 영혼이 어떻게 평안한지 기쁨이 충만하고 평화한지 공자님이 가서보면 부러웠다. 제자가 덕이 높으니까 아 나는 아내를 더럽혔기 때문에 구겨졌는데 너는 어쩌면 어떻게도 이처럼 가난하고도 마음이 평안하냐? 아 네 덕은 나를 앞선다. 그래서 인자라 하여, 인자라 하여 아 어질다 하여 어질다하여 그 청빈낙도 안빈낙도지요? 그 가난가운데 행복을 취했던 안자님 설명을 죽 해주실 때요, 어떻게 그 안자님이 흠모 되었어요. 그 시간에 예수님 이야기도 많이 하시지만 동양식으로 안자님 생활이 그리워 집디다요. 참 안자같이 된다면 얼마나 쉬운 인생길인가? 그런데 나는 속도모르고 돈을 벌어서 이렇게 꿈을 많이 꾸었구나 하니까 그 자기 허영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평화가 왔었어요. 인제 그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어찌되었든지 밑에서 남을 섬기는 사랑의 희생자가 되어라. 그 다음에 성경말씀 쭉 보시고 이론적인 말은 다 잊어버렸어요. 그 이야기 거리는 잊지 못해요. 그 당시 들은 이야기 거리가 참 금 그릇에 사과를 담아놓은 것 같이 어울리더라고요. 그때 일정시대니까 일정시대 서울장안에 동경 유학 간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 의과대학이지요? 의과대학에 다닌 사람이 한 7명 있었다고 그래요.
그 당시에 그런데 7명이 똑같이 그때 졸업반 이었어요. 그래서 인제 내년 정월에 졸업하면 금년 여름이니까 졸업반 여름방학 때 한국에 본국에 돌아와서 여름휴가 여름방학 때 일곱 사람이 한강에 목욕을 하러나갔답니다. 그때만 해도 기차도 없고 그런 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천서 한강까지 연락선이 있었다고 그래요. 사람을 태우고 왔다갔다하는 연락선 옛날이야기니까, 그런데 그 연락선에 사람들이 많이 타고 마포 저쪽 부두인 것 같아요. 그쪽 마포부두에 올라오는데 여울이 엷어가지고 그랬던지 배가 뒤집어져버렸습니다. 대개 한강가본 분들은 알지요?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둑이 가까우니까 다 헤엄쳐 나오는데 부녀자들이 어린애들이 못나오고 떠내려가고 있으니까, 내년이면 졸업하고 의사될 사람이 있었는데 한분이 짝 옷을 벗고 물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는데 여덟 사람이 가로막으면서 막 아 자네는 내년에 의사될 사람 아닌가? 개죽음 말게, 개죽음 말 어. 막 손목을 잡고 물로 못 뛰어 들어가게 말리는데 웃으면서 아니 사람이 죽어 가는데 내년이 어떻게 내년을 참는가? 푹 뛰어 들어가더니 아 헤엄을 잘 치는 청년인지 몰라요. 그 부녀자를 꺼내와 살려주고 이제는 옷을 모두 가지고 있던 청년들이 붙잡으려고 그러면 또 푹 뛰어 들어가고 그래서 여섯 사람까지 건져냈었습니다. 인제 벌써 사람이 지쳐가지고 숨이 다 붇는데 마침 보니까 애기가 떠내려가니까, 그냥 그 일곱 번째 푹 뛰어 들어가는데 친구들이 붙잡으려고 그랬는데 뛰어 들어갔다 그래요. 그런데 인제 애기를 붙잡아가지고 나오려고 하더니 그냥 물살에 떠밀려가지고 확 떠 밀려가는데 아 저사람 안 되겠다. 그 자기친구들이 같이 따라 내려가 버렸는데 어떻게 그 애기를 밀어 전심을 다해서 밀고 나와서 강가로 착 밀어내놓고 자기는 떠내려가, 기진맥진해. 떠내려가는데 친구들이 건져냈다고 그래요. 인자 물가에 건져내놓고 인공호흡을 시키고 물을 많이 먹었으니까 인제 사람이 한 일곱 사람을 건졌지요? 그래 인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눈을 이렇게 떠보니까 친구들이 옆에서 ‘아, 살았다.’기뻐하니까 빙그레 웃더라. 그럽니다. 빙그레, 심장마비가 된 것 같아요. 이 뭐이라고 말하는가 하니 ‘내가 최선을 다 하던가?’그렇게 물어 보더라 그래요. 친구들 보고 내가 최선을 다 하던가? ‘아, 자네는 생명이 죽도록 최선을 다했네.’하니까 아주 만족해서 환하니 웃더니 심장이 탁 멈춰갖고 다시는 심장이 살아나지 않고 죽었다. 그러지요.
그래서 그 사람을 장례를 지내고 친구를 장례를 지내고 여섯 친구가 동경을 가서 유학을 졸업하고 서울 와서 다 병원에 취직했다고 그래요. 여섯 사람이 다 그렇게 해서 의사가 되어가지고 인제 한 30년 후에 연, 년 그 물가에 죽은 친구 때문에 이렇게 모여서 그날을 예배를 봤든 기념을 했든 하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박사도 되고 돈도 많이 벌고 재벌이 된 다음에 모여서 ‘야, 그 사람 한 30년 전에 죽은 친구, 아 참 그 사람은 진실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는 뭔가? 우리는 그 친구 보고 개죽음했다하고 우리는 의사가 되면 아주 독립운동에 아주 몸을 바치자하고 또 무슨 이 자선사업을 하자. 그랬지? 아, 나는 아직까지 환자에 대해서 한 번도 사랑을 베풀어 본적이 없네.’한사람이 그러니까, 여섯 사람이 다 ‘나도 똑 같네. 이거 뭐야? 인생이 이렇게 인생이 거짓됐냐하면 학창시절에 그렇게 열렬하던 그 마음이 어디 가버렸는지 모르겠다.’고, ‘아, 나도 그런다’고 여섯 사람이 다 탄식을 하면서 그때 죽은 친구에 대해서 늘 존경을 하고 아주 흠모하고 아 그분 잘 죽었다고 할 일을 다 했다고 그렇게 칭찬을 하고 자기들은 참 이상과 실천이 이렇게 어려운가? 아 나는 참 사람 바보 됐다고, 자기들을 자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십디다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아 일이라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일인가 보다. 그런 정도로만 기억했어요. 기회를 잘 찾아서 최선을 다하고 생명을 바치는 것 그 이선생님 말씀은 대개 죽 말씀하실 때 적절한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선생님 말씀 그만 그치고요. 또 제 나름대로 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참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어요. 좋은 지도자를 만나가지고 성소를 잘 아십니다. 아주 나를 불러주셨다고 성소를 잘 아시고 수도에 들어가서 참 완성단계에 있겠지만, 지금 일흔 한 칠 팔세 되셨을 거니까요. 오기선 신부님이 추천하신 분 그런 경우 학문한 사람으로서 제2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 대개 다 아실 겁니다. 책을 보셨으면 그분을 제가 이야기하고 우리 서있는 자리를 같이 비교해보고 싶습니다. 지금 전주에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신부님이 신학교 졸업반 동경신학교 졸업하신 분인데 졸업반 이니까 아까 이야기와 비슷하겠어요. 한 6개월 후면 졸업하지요. 그래서 인제 졸업 후에 신부가 된 다음에 전도하는데 그 학창시절에 견습 전도를 한다고 합디다요. 동경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신부 된 다음에 전도할 자기 실제 생활훈련 전도훈련 전도연습을 이렇게 하는데 그런데 빈민굴에 가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하고 돌아오는 길인데 아주 일류 자가용하나가 탁 앞에서더니 아주 멋진 여대생이 착 내려서, ‘아 신부님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그랬다고, 그걸 인연이라 그러지요. 깜짝 놀라서 ‘아 저는 신부가 아닙니다. 지금 신학교 졸업반이에요.’옷을 신부 같은 옷을 입었으니까, ‘저는 부제올시다.’그러니까 ‘좋습니다. 부제님 그러면 제가 부제님 숙소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어디로 가십니까?’‘아 나 신학교로 갑니다.’그래서 그 여대생이 운전을 하고 신학교까지 자기를 바래다줬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디다녀오십니까? 아 나 빈민굴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아 빈민굴이라는 것이 뭣인데요? 너무 부잣집 딸이라서 우리 동경에는 아주 굶고 배고프고 병든 사람이 아주 다리 밑에 많이 있습니다. 빈민촌에 많이 있습니다. 호기심을 바짝 놀래가지고 아 부제님 나 좀 가볼 수 없어요? 나 좀 데리고 갈 수 없어요? 아 그렇게 원하시면 제가 다음 주일 아무 날 갈 수 있습니다. 그래 시간을 맞춰가지고 그 여대생이 자가용으로 인도하고 그 빈민굴에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아 차로는 곤란한데요. 너무나 불쌍한 사람들한테 어떻게 차를 타고 가요? 아 그러면 그 뜻 알겠어요. 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어서 늘 심방을 해봤는데 너무 애기 때부터 부잣집에서 커서 일생에 가난한 사람을 못 봤지요.
첫날부터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해가지고 아주 인생을 놀래버린다. 그럴까? 아 사람이 이렇게 불행한 것인가? 어쩌면 한사람은 부자고 한사람은 가난한가? 그 인생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가지고 아주 정신고통이 일어나기 시작했다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늘 가서 빈민굴을 답사할수록 그 여대생은 정신 고민에 빠져들어갑니다. 아 인생은 이렇게 비참한가? 인생은 이렇게 죄가 많은가? 그래 신부님 어디 갔다 오십니까? 저는 부제입니다. 어떠한 집을 다녀오세요? 아 오늘 다녀온 집은요, 아버지와 딸하고 사는데 아이를 낳았어요. 그 말하자면 도덕을 못 지킨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개라고 일체 상종을 안 해줘버립니다. 그러니까 농사를 하지만 생활이 안 되고 아주 굶어죽게 생겼어요. 거기 좀 돌보고 오는 길입니다. 아 그래요?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걸 찾아보니까 패륜이고 아주 부도덕하고 가난하고 더러운 그런 곳에 보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심방 후에는 정신고통도 심해지고 나 어찌하나 그런데 그 사람은 의과대학 졸업반이에요. 여자는 내년이면 내가 의사가 될 텐데 나는 어찌하나? 또 신자에요 보니까 그래 늘 가볼수록 마음에 의문 때문에 내가 의사가 되어야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럼 가난한 사람은 내버려 둬야하나? 나만 부자가 되어도 되나? 나만 의사 질해도 되나? 자기 앞길이 자꾸 당황이 되니까 부제님 나는 어찌해야 되지요? 그러니까 자꾸 인도자가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 사람들 위해서 대신 죽으실 텐데 지금 예수님이 다시 오셨다면 그 사람들 위해서 지금 사랑을 베풀어 주실 텐데 어찌할까? 그러니까 부제님 나는 안 되어요. 그랬단 말이에요. 끌려들어가. 아 세시아말로 자격자라고 그랬다고 아 대학 다 졸업하고 의사되고 그 사람들 건져낼 사람은 세시아가 자격자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만족해서 그래요. 내가 자격이 있어요. 아 자격이 있다고, 세시아야 말로 예수님 대신해서 능히 그 사람들을 위해서 피 흘리고 죽을 사람 아니냐고 희생은 할 수 있다고 그래서 희망을 품고 아 그럴 수 있냐고 그렇게 정신적인 할례를 받아가지고 그다음에는 같은 학생으로서 인도를 하면 덕이 안 되니까 그 때만해도 남녀 구별이 엄할 때 아닙니까? 아무리 신부라지만 그러니까 외국 자기 선생님 외국 신학교 교수님 어느 신부님한테 그 여자 여대생을 인도해서 교수에게 지도해주시라고 일임을 해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신학교 측에서도 그 영성이 아주 새 출발하려는 그 여대생의 영혼을 인도하기를 그렇다면 이 인류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는 것이지만 그 일본사람들의 죄가 이렇게 많은데 일본사람을 평 하기위해서 일본사람을 아까 그래서 몸값으로 대신 자기가 이 여자가 대신 죽겠다고 했는데 이 죄 많은 사람의 몸값으로 세시아가 죽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민족을 구원해야 쓰지 않냐? 그런 쪽으로 계몽을 해가지고 인제 자각을 했다하지 않습니까? 아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내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 자각을 해서 선택을 하는 데 그러니까 의사가 될 사람이니까 세속수도원에 입회를 하면 의사로 일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일도 급하지만 순수 제물이 되어서 그 제단에 참 제물이 되기 위해서 의사까지도 포기하고 봉쇄 수도원에 가서 깨끗이 제물이 되는 것이 났겠다. 그쪽을 택해가지고 북해도 수도원에 일생 사람을 만나보지 않고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제물이 될 수 있는 길을 택해서 그 아까운 공부를 해서 의사되지 않고 그냥 제물이 되어서 수녀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환갑 때 신부님한테 편지 온 것을 소개하지 않습디까? 신부님 그럼 신부님이 세속에서 전도 많이 하셨으니까 그래 신부님이 전도한 그 영혼을 구원한 수가 많은지? 이 수녀가 골방에서 기도해서 전도해서 구원한 영혼이 많은지? 우리 천국 가서 내기합시다. 그런 조목 누구 힘으로 구원받은 영혼이 많은지 우리 천국에 가서 봅시다. (끊김)
그렇게 편지가 하나 왔더라고 그러는 사연이에요. 그런데 역시 그래요. 하나님께 봉사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끊김)
마르다형 수녀원은 이렇게 구제사업 학교 교육사업 하는 수녀원이 있고 마리아형은 은둔해가지고 일평생 예수님께만 사랑을 바쳐드리는 것 일평생 공방에서 기도해서 구원받은 영혼이 확실히 많다는 증언이 다하고 있지요. 그렇게 구원받은 영혼이 더 많다. 전도하는 수인데 신부 수녀들이 밖에 나와 전도하는 수보다 한국 서울에도 갈멜 수도원 있지 않습니까? 거 갇혀있는 갈멜 수도원 수녀들이 한 23명 있는데 수녀들의 정신적인 감화로 참 그 은총의 기도로 구원받은 영혼이 훨씬 많다는 것 아닙니까? 대체로 여기 세례를 받고 교회를 다닌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해서 교회를 다니고 있지, 신부나 수녀나 목사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라는 거 감화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그 신비한 감화력에 끌려서 그렇게 다니고 있다고 그래요. 그 세계적인 어른들의 증언이지요. 성 프란치스코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웅변적인 설교를 하시고 그러면 당신 설교를 듣고 그 영혼이 회개를 하는 줄 압니까? 아니라고, 하늘나라 가보시라고 이사야 선지자께서 과부 자식이 남편 있는 자식보다 많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 만나지 않고 골방에서 기도한 사람이 기도로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게 풀이하셨어요. 그래 물론 말로 가르친 사람들이 있어야겠지만 성령이 일하시고 또 주님께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이 역사하신 그 실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영혼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 쪽으로 설명하셨지요. 그러니 참고하시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학교를 다닌다던지 학부를 졸업한다든지 꼭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2의 사명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 못했던 정신적인 사명, 영적인 사명, 지능적인 사명, 그 사도로서의 사명은 별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럼 그건 하나님께로 특별히 부른 사람이 있지요. 아무라도 되는 게 아니고 그 특허를 내리신 분이 그 사도바울선생님 같으면 설명하시기를 모태 잉태되기 전에 이미 그 영혼은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예정되었다는 거 하나님의 참 일꾼이라는 것은 사도바울 자신도 직접 예수님 하나님께서 직접 택했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사명을 주셨다고 하니까 변화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되었지만 직접 예수님이 직접 불러 쓰셨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보통 일할사람은 신학졸업 하시려는지 몰라도 특별히 하나님이 불러쓰시는 사람은 신학도가 아니어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무시해버리고 아까 그런 수녀 같은 분도 우발적으로 의과여대생인데 불러가지고 제물이 되도록 인도하신 일이라든지 그게 특은이라고 그래요. 아까 새신랑 이야기는 더 재미있지요. 그러니 이제 졸업이 며칠 남아있기 전에 부모님이 오시도록 초청했는데 그 자가용을 타고 그 동경거리를 빠져나가는데 보니까 놀라버렸답니다. 이렇게 엄청난 부잣집 자식인데 지금부터 근 50년 전 이야기이겠지요. 약 50년 전인데 그때 자가용이 스르르 원내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부자인지? 그런데 부모님이 맞이하면서 대합실에 맞이하면서 인사할 때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가 신부님 내 딸 데려가 버렸다고 부제님이 내 딸 데려가 버렸다고 그래. 옆에서 자기 엄마가 미안해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냐고 어떻게 큰절하면서 부제님 감사해요. 이 내 딸 그렇게 사명을 다시 받도록 해주시니 감사하다고. 그러니까 또 뒤따라 아버지도 아까 그 말은 잘못했습니다. 진실로 감사하시다고 두 분이 굽실굽실 일본사람들 절 많이 하지요? 진실로 부제님 감사해요. 난 아들도 없고 딸 하나인데 너무나, 너무나 귀엽게 키웠다고. 그러니 이 우리가 늙어가지고 이 딸을 세상에 남겨두고 우리가 죽을 텐데 만일 여울라고 생각해보니 이것이 남자가 일찍 죽어버리면 어떻게 과부로 사냐? 너무나 걱정이 되고 어떻게 죽을 남자한테 죽을 가능성이 있는 남자에게 내 딸을 주냐? 그 고통이 컸다고,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죽을 수 있는 남자한테 어떻게 내 딸을 주나? 그렇게 고민하던 부모인데 내 딸을 영원히 죽지 않는 배필을 만나게 해줘서 이렇게 예수님한테 결혼을 하게 됐으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냐고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냐고 그래서 너무나 감사해서 부제님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심을 했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랑하는 딸을 영원히 죽지 않으실 예수님한테 여우시고 그 부모님은 죽었다고, 배를 만드는 큰 조선장 사장인데 그렇게 갑부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상식을 초월해요. 돈이 그렇게 많고 그렇게 귀한 집 딸인데 봉쇄 수녀원에 보내고 부모도 안심하고 본인도 안심했다는 것은 그것은 성소다. 거룩한 부르심이다. 라고 할 수 있어요. 거룩한 부르심이에요.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상식으로서는 될 이치가 만무하거든요.
사람이 가르쳐도 될 것도 아니고요. 하나님의 크신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참 새사람이 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게 생각해볼 때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 거 어떠한 초자연적은 능력이 지배해버리면 인생을 새 출발 한단 말씀입니다. 새사람으로서 새 출발 해.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세계지요. 180도 달라지지 않습니까? 어떠한 초자연의 그 성소 자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을 못했던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도바울 자신도 그런 분 아닙니까? 유대 전통신자로서 자기가 그렇게 변화를 받아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 어떤 특별한 인재는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 쓰시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사야서 53장. 그럼 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받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으로 아는 사람 사람들의 병들어 얼굴을 가리워 피해 갈만큼 멸시만 당했으므로 우리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나님께 매를 맞아 학대를 받는 줄로만 알았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쓰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으므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이런 대목을 그 예수님이 읽으셨지요? 설명을 보면 그런 거 같아요. 예수님도 30대까지는 자기가 과연 메시야인지 본인이 아닌지 실상은 그 메시야인지를 늘 자꾸 더듬고 계셨지 확신을 얻은 때는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던 시간이야 요.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셔서 그렇게 확실히 드러났을 때 자기가 메시야임을 자각했다. 예수님이시더라도 본인이 내가 메시야 같기는 과연 난지 딴사람인지 본인도 그렇게 늘 메시야의식이 불확실했는데 30대에 메시야를 자각했다. 확실히 내가 보내신 사람이다. 그럼 메시야는 어떻게 내가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럼 이런 사람이야. 이사야 53장. 그러면 공자님이 사랑하던 회란사람도 이런 사람이거든요. 그 인류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인류를 섬기는 식모랄지 머슴이니까 종이기 때문에 참 볼품이 없거든. 희생자니까 섬기는 쪽에 있는 사람은 지배를 당하기 때문에 인류를 안고 섬기는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초라해요. 볼품이 없어요. 그게 사랑이고 희생이니까 희생하다보면 사랑하게 되니까 자꾸 사랑하게 되면 희생이 되어버려. 그래 이거는 확실히 사랑의 모습 참 어진 모습 아닙니까? 참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이에요. 그 개가 새끼를 많이 나면 젖을 빨려버리면 어떻게 보기 싫은지요? 털은 다 빠져가지고 비글 비글해요. 힘을 못 찾고 새끼를 떼어버려야 살이 찌거든요. 그러니까 참말로 형제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면 그렇게 아주 볼 품 없어진다고. 그래,
이 선생님을 조금 이야기하고 말았는데 해방 후에 전란 후에 버스가 없으니까 트럭 아닙니까? 그럼 장에나 다시 말하면 중촌 장에서 요 능주 쪽으로 많이 다니셨지요. 도암 쪽으로 식구들이 자매님들이 세 명 저 선생님하고 한 네 명이 트럭을 타지요? 그럼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면 이십 명 삼십 명 선생님이 제일 앞에 서계시는데 자꾸 밀려 어떻게 추리하고 코는 뚝 떨어지고 그냥 손으로 휘져 쌓고 옷은 그냥 땔 나무군 같이 입었고 맨발벗고 그러니까 ‘저만큼 가,’그럼 물러나고 ‘저 만큼 가’물러나고 제일 뒤에 밀려버린다고요. 할 수 없어요. 그래 추리하니 그냥 덜덜덜 떨고 앉아있어요. 옆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 창피해 볼 수가 있어야지. 우리 선생님이라고 아주 창피해서 말도 못하겠어. 너무 덜덜덜 떨고 코를 질질 흘리고 참 볼품이 없다고요. 얼굴을 싯노래 갖고 밤송이같이 털은 서고 아주 사랑하시니까 이십사 시간 형제를 사랑하느라고 본인은 볼품이 없어졌거든, 그러니까 이 이사야 53장이 이런 글을 볼 때 아 예수 자신이 이 메시야가 내가 아닌가? 그 자각하신 것은 30대에 확실했다. 그렇게 전해집디다. 그걸 그 말씀이 맞는지 몰라도요. 그러니까 여기 앉은 우리들도 30 40이 되고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는지 안 부르는지는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느 때고 나를 불렀다. 그럼 사명이 확실해지지 않습니까? 나를 하나님이 쓰신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면 자기는 인류를 위해서는 희생하고픈 성령의 불이 덮어지잖아요? 자기는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지요? 조그만 일이라도,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시켜서 일한다. 그렇게요. 그게 사명 자각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있어야겠다. 그 점이지요.
그러면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아니 요한복음 10장 17절 18절 보겠습니다. 여기 우리 보모님들도 그래요. 선생님들이 어머니가 시켜서 일하는 것과 아 나는 하나님이 불렀다.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 나는 예수님의 여종이다. 나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원한다. 그렇게 된다면 한사람이 열배 백배 일하게 되지요. 그 능력을 주시지요. 이렇게 썼습니다. 17절 18절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이건 자기 자각, 어떤 의미에서 그 자원, 사명,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18절 상반절만 같이 요절로 따라 읽으십시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이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이런 구절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성소의 자각이지요. 예수님 자신이 누가 나를 시켜서 그러는 것 아니다. 나는 스스로 사명에 불타가지고 자원하는 것이다. 인류의 종으로서 인류의 섬기는 자로서 나는 이렇게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겠다. 는 자각, 그러니 우리 사이에도 이렇게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자각을 가지고 자원해서 일할 사람이 나온다면 인제 그분이 나오시지요. 앞으로 그렇게 하면 이일을 완성하시지요. 사랑을 완성하시지 않겠습니까? 또 한절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봅니다. 유다인의 대사제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나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3절.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13절에요.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수치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이 섬기는 자 지배를 당하는 자, 섬기는 사람은 역시 참 치욕을 당하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를 당해. 시험을 당해. 인류의 종으로서 그쪽에 이 13절을 영가로 부른 것이 ‘서쪽하늘 붉은 노을’그 성가 아닙니까? 이 히브리서 13장 13절 요절이거든요. 이따 그거 부르십시다요. 마지막으로 이 선생님의 모습 다 아시는 이야기 하나 더 이야기 하겠어요. 또 서울 가실 때 옛날 3등기차라는 거 참 아주그냥 터질 만큼 사람 많이 타고 가지 않습니까? 그래 선생님 추우신데 안으로 들어오세요. 겨우 기차 3등 칸 안에 계시다가 차근차근 밀려나시지요. 쪼금가라고 쪼금 나가라고 그럼 이제 밀려 나와 가지고 변소 간 옆에 서계시지요. 거기서 또 밀려나시거든. 그래가지고 계단, 계단 문 옆에 밀려나가지고 난간에 밀려나 앉아계신데 그럼 여기 평택으로 올라가던지 서울거의 갈만하면 거기서 올라온 농부들이 있지요. 거기서도 옛날 인사니까 어디까지 가시오? 나 서울까지 갑니다. 나 아무개올시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지요? 코 쑥쑥 빠치며 아니 이름도 모르요? 아 성이 뭐에요? 그랬사면, ‘네 헌가올시다.’ ‘이름이 뭐요?’‘신짝 올시다.’‘헌 신짝?’‘옛기,여보시오.’자꾸 인사하자고 성가시게하면 ‘헌 신짝이올시다’‘엣끼, 여보시오’아주 치욕을 당하시거든. 무참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러셨어요. 알아 본 사람은 잘 믿는 분들이 알아보시니까 ‘아이구, 우리 선생님’이리 오시라고 그랬지 이 밖에만 나가버리면 치욕덩어리야. 아주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볼품이 없다. 이 말씀입니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을 부르십시다.
영문 밖의 길
1.서쪽하늘 붉은놀이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신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을 온몸에는 붉은옷을 힘이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에 길이라오
2.한발자국 두발자국 주님가신 자욱마다 뜨건눈물 붉은피가 가득가득 고였어요
간악한자 제사장들 포악한자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욱마다 갖은악고 당했어요
3.눈물없이 못가는길 피없어도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오
영생복락 얻었으니 이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오
4.상한이몸 싸매주고 저는다리 고쳐주오 칠전팔기 용기얻어 백절불굴 신앙으로
내십자가 바로지고 주님같이 가려하오 골고다의 본을받아 저도가게 하옵소서
5.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아니 가오리까
주님제자 베드로도 거꾸로로 갔아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