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 박선애
고등학교 가느라 집을 떠났다. 꽤 오랫동안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어려웠다. 학교에서 배운 ‘가고파’가 내 처지에 딱 맞는 것 같아 혼자 있으면 즐겨 부르는 최고의 애창곡이 되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그 가락과 가사는 언제 들어도 그때의 기분이 살아나 금세 슬퍼진다. 대학생이 되어서까지도 집에 왔다 갈 때마다 버스 승강장에서 부모님과 헤어지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전해져서 친구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객지 생활이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고향은 늘 그리운 곳이었다. 그래서 모교 근무를 희망해서 1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꿈꾸던 삶이 펼쳐졌는데 생각처럼 행복하지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따로 사는 데 익숙해져서 같이 사는 것이 낯설고 불편했다. 이제는 싫든 좋든 부모님 말씀에 따르며 그 대가로 보호받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부모님과 나는 갑자기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서 서로의 일에 간섭하다 보니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에 사는 친척이 직장 생활 2년 차인 딸을 분가시켰다고 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같은 지역에서 사는데 이런 결정을 한 것이 의외였다.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할 것 같아서 주말에만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 경험을 떠올려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심지어 그때의 나는 이웃 할머니들에게까지 지나치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 간섭과 감시를 받는 느낌이었다.
벗어날 방법을 찾았다. 그 당시는 경기도로 일방 전출이 가능해서 많은 교사들이 가던 때였다. 관심과 간섭이 없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 전출 희망원을 냈다. 수도권 도시에서의 생활을 기대했다. 겨울 방학이 되어 한가해지자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 날은 장밋빛 앞날을 그려보며 꿈에 부풀었다가 또 다른 날은 향수병으로 마음 한편이 늘 우울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며 걱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보다는 걱정이 커져 안 가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도교육청에 알아봤더니 희망한 사람은 다 갈 수 있다고 했다. 전화 받으시는 분은 내 속도 모르고 좋은 소식을 알려 주는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교육청 담당 장학사님을 찾아가서 사정해 보라고 했다. 지금도 그런 것을 어려워하는데 그때는 어려서 더 용기가 안 났다. 누구한테 도와 달라고 할까 하는데 우리 학교에서 계시다 광주 근교의 고등학교로 옮겨 가신 김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분은 전 해에 우리 반 부담임이셨다. 대부분 차가 없던 때라 가정 방문하려면 애를 먹었는데 그분이 운전해 주셔서 쉽게 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서툰 나를 예뻐하고 도와주셨다. 또 학생들과 함께하고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이어서 내가 존경하고 따르던 분이셨다. 그분은 아는 사람도 많은 데다 인정이 많아서 부탁하면 자신의 일처럼 신경 써 주실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을 신중하지 않게 결정했다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 김 선생님께 전화해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알아보겠다고 했다. 마침 김 선생님과 같은 학교의 문 선생님이 도교육청에 파견 근무하고 계셔서 그 선생님께 부탁해 놨다고 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문 선생님의 도움으로 장학사님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졌다.
약속한 날 광주에 있는 도교육청에 갔다. 담당 장학사님을 소개받았다. 내 일인데도 나는 뒤로 숨고 김 선생님이 나서서 취소해 달라고 부탁했다. 장학사님은 단칼에 거절하셨다. 장학사님 말씀으로는 전임자가 “희망 인원의 50퍼센트만 경기도에 요청해서 협약해라. 나중에 취소해 주라고 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 곤란하다.”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은 선생님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이런 것이라도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희망한 수만큼 협약했는데, 이러면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냐고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들어 보니 충분히 그 사정이 이해되어 더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이 나오는지 갑자기 “장학사님, 얘가 우리 이종 사촌 동생입니다. 그렇게 시집가라고 해도 여태 안 가고 있더니(그때 내 나이는 서른을 갓 넘겼었다.) 이제야 신랑감이 생겼는데 전남에 있는 총각입니다. 늦게 결혼하는 데 어떻게 그 먼 곳에서 따로 살게 하겠습니까?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장학사님은 입을 쩝쩝 다시며 망설이더니 본인이 난처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런 사정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느냐고 알았다고 하셨다.
그때는 강 아무개 선생은 자기 집이 있는 도시에서 통근이 가능한 곳으로 가려고 인사 담당자에게 촌지라고 하기에는 큰 액수를 갖다 줬더니 바로 발령이 났다더라 하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이던 시절이었다. 원하는 대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촌지를 주는 것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아서 자그마한, 진도 특산물을 사 들고 가서 장학사님과 문 선생님께 드렸다. 그렇게 수도권으로의 진출은 끝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딴생각하지 않고 나주로 해남으로 목포로 무안으로, 전남에서만 이리저리 이사 다니며 살고 있다. 가끔은 ‘그때 경기도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아이들에 맞춰 똑똑하고 세련된 교사가 되어 있을까, 도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며 더 풍요롭게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작은 아쉬움이 솟아난다. 그러나 가끔 서울에 가서 공기는 탁하고 차는 막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유라곤 없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나처럼 느리고 어리숙한 사람이 살 곳은 아닌 것 같다. 보잘것없지만 여기에서 순박하고 착한 아이들과 웃고 부대끼며 사는 것을 택한 것이 다행이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발령은 한 순간에 여러가지를 바꾸어 버리는것 같습니다. 맞아요, 어디가 되었든 내가 있는 곳이 최고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때 옮겼으면 도시 사람이 돼 우리와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가지 않은 길은 생각으로 남아있고, 온몸으로 살아온 길은 행복과 고통이 함께했겠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에서 사랑받으며 보낸 시간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때 안 가셔서 다행이네요. 이제 우리 아이 담임선생님만 해주세요.
아이고, 그때 가셨으면 우린 못 만났겠네요. 참 다행입니다. 하하!
누구나 결정하고 뒤집고 멈추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때 결정을 잘 하셨어요.
그때 옮겼으면 글쓰기를 같이 할 수 없었겠네요.
가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요.
제 대학 동창들도 경기도로 많이 갔답니다.
저도 한때 고민하기도 했지만, 생각으로 그쳤고요.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는 미련을 갖는 모양입니다.
전남에 사는 학생들의 교육만 생각한다면 옮기지 않으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김선생님, 참 좋으시네요. 그래도 인복이 있으신 것 같아 저는 참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