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126주일 [내 안에 주님의 인격적 임재를 의식함]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 복종하는 자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함께 계셔서, 인도하심을 느끼고 있는 자다.
성령충만은 신자가 자기 속에 임하신 성령께 자신을 내어주어, 자신의 마음과 뜻, 삶 자체까지 그의 뜻에 복종시키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성령은 신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변하러 오신 분이시다.
또, 성령은 각 신자의 마음에 임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신자라도 성령충만한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이 그 안에 충만하고, 그의 인격조차 충만함을 느끼고 있다.
성령충만은 예수로 충만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충만해지는 대상은 성령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그에게 나를 맡기는 우리 의지가 충만해지는 대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충만일까.
유리잔에 물이 들어있다고 하자.
[충만의 내적 지배의 개념]
잔에 얼마큼 물이 차 있는지로 성령충만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에서 보면, 자주 취하는 표현이 있다.
돛단배는 바람이 돛을 채워서, 움직인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믿는 자가 그 삶속에서 움직여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언하는 선지자들도 이와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홀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 생고기를 오래 보관하려면, 소금간을 한다.
그러면, 소금이 떨어진 부분만 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간이 배어든다.
성령충만은 이와같은 것으로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의 일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원하시는대로 말하고, 행한다.
그러므로, 그의 임재하심이 우리의 행위와 말을 통해 나타난다.
또, 전면적인 통제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향력이 와서, 거기에 지배되고, 통제되면, 그것이 충만이다.
요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주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니,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근심으로 충만해진 것이다.
눅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경우도 있다.
중풍병자가 병낫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놀라, 심히 두려워했다.
심히 두려워하다. 두려움으로 충만한 것이다.
눅6: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유대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친 것 때문에, 분기가 가득했다.
화가 잔뜩나서, 선을 행한 것은 보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분노로 충만하다.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것을 베드로는 사단이 가득하다고 했다. 사단으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그 머릿속에 돈에 대한 집착이 가득했다.
감정이 어떤 것의 영향 아래 지배되고 있는 것. 충만의 개념이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단지 성령을 양적으로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도 신기하게 성령충만함으로 움직이셨다.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예수께서 성령으로 이끌리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성령이 예수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셨다.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다.
단어는 다른 단어인데, 개념을은 똑같은 개념이다.
막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가복음에서는 더 강한 단어로 나온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
각각 다른 단어인데,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충만으로 인해, 예수께서 움직이셨다는 것이다.
성령이 예수를 몰아내신다고, 예수께서 억지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와 성령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얼마큼 성령의 이끄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놓았는지 표현한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성령충만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갑]
이것은 장갑과 손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장갑은 그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런 힘도 없고, 볼품도 없다.
장갑은 오직 손이 통제할 때만 일한다.
겉으로 보면, 장갑이 움직이지만, 사실 손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한참 하고나서, 장갑이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다.
실제로 일한 것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에게 공이 돌아가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날까지 성령의 채우심으로 거룩한 일을 하는 자다.
성령충만함이 없이, 어떤 것도 영적 열매는 아니다.
고전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성령없이 한 일은 아무 것도 계수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성령충만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
초대교회는 사도를 돕기 위한 일곱집사를 세웠다.
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그 중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도 있었다.
믿음충만, 성령충만은 같은 의미다.
사실 일곱중에는 니골라도 있었다. 니골라는 원래 이교도인데, 유대교로 개종하고 나서, 기독교로 들어왔다. 그는 성령충만하지 않았다. 교회에 뼈아픈 아픔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데반은 완전히 충만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믿음을 지켰다.
그는 죽을 줄 알면서, 진리를 선포했다.
행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령충만은 세상의 체제나 사람의 형편을 위해서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열어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을 느끼게 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것은 덜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을 잘 구분한다.
이 세상사람과 성령충만한 자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베드로는 오순절 때 다른 사도들처럼 이미 성령충만함을 입었다.
그 때, 성령의 첫 임재를 경험했다.
그 이후, 그가 예수를 증거했는데, 성령이 충만하다고 표현한다.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성령임재로 충만했는데, 또 충만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성령의 의지와 뜻에 자기를 허락하여, 그 의지로 충만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느닷없이 성령받고, 사도로 일한 것이 아니라, 그도 성령충만함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기 위해,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시켜서, 그에게 안수하도록 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의심했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안수했다.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그래서, 사울은 성령충만함을 입었다.
이제부터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감화시키라고 하셨다.
그렇게 사울이 자기를 성령께 드리는 것으로 안수를 받았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충만도 중요하지만, 착한 것도 중요하다.
악한 사람은 성령충만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악한 자, 간사한 자는 성령충만함을 받기가 어렵다. 착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훨씬 쉽다.
착한 사람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훨씬 가깝게 되어 있다.
이후에 바울이 사역할 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박수(거짓선지자)를 만났는데, 무서운 말로 심판을 쏟아내며 저주했다. 성령충만한 자가 나타나서, 악한 자를 저주하니까, 형벌이 거기 임했다.
행13:9-11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행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는데, 핍박을 받았지만,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그들은 쫓겨나도 슬프지 않다. 자신 속에 하나님이 가득했다.
우리는 이런 초대교회 모습을 볼 때, 우리도 그 때처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방법론이 아니다.
어떤 방법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에 좋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충만함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다.
나는 교회가 모든 일을 할 때, 성령충만으로 하기 원한다.
능력이 있다 없다, 훌륭하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충만의 문제다.
[말씀을 자기 속에 채우는 것]
성령충만을 위한 선제조건이 있다.
자기 이기심을 죽여야 한다.
또, 자기 의지도 죽여야 한다.
이기심은 육신적 욕심이다. 그것을 죽이고 나서,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신다.
이 부분이 많은 신자들이 잘못하는 부분이다.
자기 잇속을 위해,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고, 남의 가정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 속이고, 남도 속인다.
성령충만은 무슨 의욕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령충만을 무슨 흥분상태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열정, 열심이 문제가 아니다.
내 이기심이 죽고, 내 자신의 의지가 죽는 것이 필요한데, 인간의 욕심이 계속 도사리고 있는데,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는가.
그러므로, 자기 죄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해야 한다.
죄를 하나도 짓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죄에 대해서, 정말 하나님께 죄송하고, 아파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성령충만은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편히 거하는 것이다.
내 안에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열어놓는 것이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하라. 성령충만하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다.
성령충만이라니까, 흥분하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특별히 정한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다.
나는 충만한데, 왜 너는 충만하지 않느냐고 할 수 없다.
성령이 채워진다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된 상태다.
성령이 나를 지배하도록 그를 영접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의미의 성령충만은 없다.
그렇게 해서, 주의 말씀으로 불어서, 나를 일하게 하고, 나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을 따르는 자, 주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
요한복음에서 계명이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무 단순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안에 모든 계명이 포함된다.
그런데, 어떤 교회가 사랑을 가르치지도 않으면, 그 교회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요, 성령충만하지 않은 것이다.
성령충만은 그의 말씀 앞에 내가 엎드려, 그의 말씀이 내게서 시행되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 함께 하실 때만 능력이 빛났던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빛나는 능력자이고, 영감충만한 자였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일반인보다 못할 정도로 어리석고 부족했다.
그는 항상 예수와 함께 움직였다.
산이나 바다, 다 따라갔다.
그가 바다에서 예수님 없이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는데, 멀리서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주님께 오라 하소서 하고, 오라 하니까,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갔다.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너무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중에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니까 물에 빠지기도 했지만, 예수 계실 때는 이렇게 놀라운 활약을 했다.
또,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며, 녀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주님도 그의 답변에 깜짝 놀랐다.
사람의 모습 이면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 놀라신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집중력이 있는 것이다. 머리가 좋은 것과 관련이 없고, 예수님을 볼 때, 자기가 가장 소원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놀라운 진리도 자기 입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엄청 활약했다.
군사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닥칠 때, 군사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밀려 넘어졌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칼을 꺼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다.
예수께서 그것을 억지로 말리셨다.
만약, 예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그날 죽을 때까지 싸웠을 것이다.
그는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예수께서 되었다 하시고, 자기를 포박하게 하고, 끌려가고 나서는, 일반인보다 못한 비겁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예수를 세번 부인하면서, 예수를 버렸다.
베드로는 사도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하고,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영감있던 제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초라하게 넘어지는 상반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격적 내제하실 때 되살아난 베드로의 힘]
이제 성령이 임하신 후, 베드로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두려움없이 담대하게 예수를 선포하고, 그분의 의를 외쳤다.
바로 두어달전에 예수께서 고초당하시고, 돌아가셨는데, 그곳에서 다시 한 것이다.
두어달전에 그는 아무말도 못하고, 부인했었는데, 이제 담대하게 전하고, 삼천명이 넘는 사람이 변화되었다.
행3:6-7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고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잡혀갔다.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백성의 관원들과 장로들아 하는 것은 오늘날 국회의원들아 하는 것과 같다.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예수의 능력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위협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고 했다.
행4:19-20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정말 너무나 담대했다.
주를 부인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을까.
[예수님의 인격적 내재를 느끼는 것]
성령이 임하셔도, 악한 짓을 구상하고 있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성령을 모신 자로서, 성령충만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주 예수의 살아계신 인격이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함께 계신 분이 내 삶을 지배하시도록, 내 정신을 지배하시도록, 그에게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분을 느끼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가까이 계시다. 함께 계시다.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격으로 함께 거하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말씀이 우리를 채우는 것과 똑같다.
주님의 말씀을 채우는 자는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고,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주님의 비전도 내 비전이 된다
성령충만한 자가 하나님의 일을 말할 수 있고, 그의 하시는 일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속에서 행하기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합당하게 행하라. 일회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계속 걷는 것을 말한다.
성령으로 하는 것은 매순간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갈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의 모든 순간, 매일의 걸음, 성령으로 이끌림 받아야 한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일회적 행동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행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라.
육신의 욕심은 인생내내 도전이 되고, 걸림돌이 될 것이다.
[육체, 죄, 사단을 이기는 유일한 힘]
우리 육신은 사단의 유혹에 잘 넘어간다.
사단은 특별히 힘쓸 필요도 없이, 입만 써도 성도들 다 넘어간다.
우리 육체는 죄의 교두보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몸의 약한 부분부터 문제가 생긴다.
육체는 구원받지 못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약점은 육체다.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인간은 이것을 절대 못이긴다.
사단이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할 때,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자는 이길 수 있다.
예수께서 돕는 자만 이길 수 있다.
자기 삶이 예수께 보호되고, 이끌림 받는 사람이 원수를 이길 수 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뒤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신의 일을 하는 모든 것은 사단과 근접해 있다.
사단은 망하게 하지만, 성령은 살리신다.
누가 우리를 위해 싸워주어야 한다.
성령충만한 자만 우리를 싸우시는 성령, 예수를 체험할 수 있다.
그가 우리 안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 회복하고, 구축해 나가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계속 맺고 있어야 한다.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으로 걷는 자는 주 예수와 걷는 자이다.
우리 성도들도 성령충만을 오해하지 말고, 성령께 다 드려, 예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고 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