Μάρκος Βιψάνιος Αγρίππας
마르쿠스 빌사니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기원전 63년 – 기원전 3월 12일)는 로마의 정치인, 장군, 건축가였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위, 하사관이었으며, 로마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물들을 건설하는 데 책임이 있었고, 특히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군대에 맞서 승리한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이끌었다. 이 승리들로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고, 모든 로마인들이 모든 계층의 로마인들에게 고품질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수로교를 개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가이우스 마에케나,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그는 패권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중 하나였다.
청년 시절]
아그리파는 기원전 64년에서 62년 사이에 태어났다. [21] 우리가 모르는 지역에서. [22] 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비브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형과 누나인 빕사니아 폴라가 있었다. 이 가문은 로마 사회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23] 그러나 아그리파는 옥타비우스(후일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동갑이었기에 함께 교육을 받았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아그리파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연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은 기원전 40년 내란 당시 다른 편을 택해 카토의 명령으로 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의 군대와 싸웠다. 카토의 군대가 패배하자 그의 형제 아그리파가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중재로 석방되었다. [24]
아그리파가 아프리카에서 형과 싸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기원전 46년부터 45년 사이에 카이사르의 폼페이우스 영거와의 원정에 참전했으며, 이 원정은 문다 전투로 격화되었다. [25] 어쨌든 카이사르는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옥타비우스와 함께 아폴로니아로 보내 마케도니아 군대 근처에서 군사 수련을 하게 했다. 카이사르 자신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에 머물렀다. [26] 그곳에서 4년 차가 되던 중, 기원전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소식을 들었다. 아그리파와 또 다른 친구 퀸투스 살비디누스 루푸스가 마케도니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자고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우스는 소규모 호위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항해하기로 결정했다. 도착 직후 그는 위대한 지휘관이 자신을 입양하고 영지의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7] (옥타비우스는 이후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나, 역사가들은 그 시기에 그를 옥타비아누스라고 부른다.)
군 계급 내 상승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온 후,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군단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리파는 친구가 캄파니아 지역에서 군대를 찾는 것을 도왔다. [28] 옥타비아누스가 군단을 모으면서 마르크 안토니우스와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의하여 기원전 43년에 제2차 삼두정치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동료 퀸투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 살인범들을 기소하도록 주선했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대한 사건을 맡게 된 것은 아그리파의 몫이었다. [29] 아그리파가 정치 경력을 시작해 호민관 평민관(tribune plebis)에 당선되어 원로원 입 성으로 확정된 해일 가능성이 있다. [30]
기원전 42년, 아그리파는 아마도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필리피 전투에서 싸웠을 것이다. [31] 로마로 돌아온 후,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마르크 안토니우스의 형제와 풀비아(각각 마르크 안토니우스의 형제와 부인)와 벌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전쟁은 기원전 40년에 페루시아(현재의 페루자)를 점령하며 끝났다. 그러나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총사령관은 살비디에누스였다. [32] 전쟁이 끝난 후,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로 떠났고, 아그리파는 도시의 프라이토르(praetor urbanus) 직책을 맡아 로마에 남겼다. 후자는 삼두정치의 적이자 시칠리아를 점령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공격으로부터 이탈리아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원전 40년 7월, 아그리파가 신 아폴로(루디 아폴리나레스)를 기리는 경기에 몰두하는 동안, 이 경기는 도시의 프라이토르 관할 하에 있었고, 섹스투스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습격을 시작했다. 아그리파는 그를 성공적으로 맞서서 후퇴하게 만들었다. [33] 그러나 삼두정치는 불안정했고, 같은 해 8월 안토니우스는 식스투스와 함께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합류했다. 아그리파의 새로운 성공인 안토니우스가 점령한 시포둠은 분쟁 종식에 기여했다. [34] 아그리파는 중재자 중 한 명으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다시 평화에 동의했다. 협상 과정에서 살비디에누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배신하려 했고, 이를 통해 처형되거나 자살할 계획임이 밝혀졌다. 아그리파는 이제 옥타비아누스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35]
군사적 업적]
기원전 39년 또는 38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갈리아 알프스 너머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기원전 38년에는 아퀴탄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게르만 부족들과도 싸워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처음으로 라인강을 건넌 로마 장군이 되었다. 기원전 37년 옥타비아누스의 소환으로 그는 집정관직을 맡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법에 규정된 나이(43세)보다 훨씬 어렸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식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해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해 다음 군사 작전을 감독할 친구가 필요했다. 아그리파는 갈리아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개선식을 거행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역사학자 디온 카시우스는 친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축하를 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이유로 제시한다. [36] 식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장악한 후, 아그리파의 첫 번째 관심사는 함대를 위한 안전한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루크리노 호수와 바다를 가르는 육지 조각을 차단해 항구를 만들었고, 동시에 아베르노스 호수와 루크리노를 연결해 내부 항구를 만들었다. [37] 새 항구 단지는 옥타비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포르투스 율리우스(Portus Julius)라고 명명되었다. [38] 아그리파는 더 큰 선박과 개선된 갈고리 등 기술 혁신에도 책임이 있다. [39] 이 시기에 그는 키케로의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의 딸 세킬리아 폼포니아 아티카와 결혼했다. [40]
기원전 36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식스토스를 상대로 항해했다. 악천후로 인해 함대는 큰 피해를 입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그리파가 두 번째 시도를 이끌었다. 최고의 기술과 훈련 덕분에 아그리파와 그의 부대는 시칠리아 해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하나는 현재의 밀라초 인근에서, 두 번째는 나울로초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상대 함선 중 단 17척만이 이 참사에서 살아남았다. 적군 대부분이 항복했다. 힘을 되찾은 옥타비아누스는 옛 동맹인 레피두스를 물러나게 했고, 레피두스는 로마인들의 대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직책을 받았으며, 승리의 마음으로 로마에 입성했다. [41] 아그리파는 선박의 명상으로 장식된 해군 왕관이라는 전례 없는 영예를 받았다. 디온은 그런 물건이 "한 번도 받은 적이 없고 그 이후로 아무도 받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42]
공공사업 건설]
아그리파는 기원전 35년과 34년에 소규모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나, 기원전 34년 가을에는 로마로 돌아왔다. [43] 마르키우스 수로교(아쿠아 마르키아)라 불리는 수로교의 복원과 도시 전역을 덮는 관을 확장하는 등 일련의 공공사업이 빠르게 시작되었다. 기원전 33년에 얻은 대신(aedile) 직책(도시의 건축물과 축제를 담당)에서 출발해 거리를 개선하고 하수도 청소를 진행했다. 또한 그는 화려한 공개 행사를 조직했다. [44] 아그리파는 로마 도시를 크게 개선하고, 수로교를 수리·건설하며, 대하수도(클로아카 막시마)를 확장하고, 목욕탕과 페리스틸을 건설하고, 정원을 설계함으로써 재임 기간 동안 큰 흔적을 남겼다. 또한 예술 작품의 공개 전시를 장려했습니다.
전 집정관이 시장 노동자의 가장 겸손한 자리를 맡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45] 아그리파의 엄청난 성공은 이 전통을 깨뜨렸다. 생애 말기에 아우구스투스는 "벽돌로 만든 로마를 대리석으로 덮어 인도했다"고 자랑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M. B. 아그리파의 훌륭한 서비스 덕분이었다.
이집트와의 전쟁]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판테온은 아그리파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전에 파괴된 건물을 대체한 것이다. 이 신화에는 M·AGRIPPA; L·F· COS· TERTIVM· FECIT라는 뜻의 "루키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는 그의 집정관 3번째 임기 동안 지어졌다"는 뜻이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쓴 동맹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 마지막 결정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그리파는 다시 로마 함대를 지휘하기 위해 현역 군사 작전에 소집되었다. 후자의 곁에는 그의 정부와 이집트 법에 따른 그의 아내인 이집트 군주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의 군대가 있었다. 아그리파는 펠로폰네소스 남서부의 메토니 도시를 전략적으로 장악한 뒤 북쪽으로 항해해 그리스 해안을 약탈하고 코르푸를 점령했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군대를 그곳에 데려와 섬을 함대의 기지로 삼았다. [46]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악티움으로 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맞섰다. 동시에 아그리파는 파트라스에서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지지자 킨토 나시디오스를 패배시켰다. [47] 디온은 또한 아그리파가 악티움에서 다른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서둘러 가던 중, 안토니우스의 부하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소시오스를 만났다고 전한다. 소시오스는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동맹인 루키우스 타리우스를 기습 공격하고 있었다. 아그리파의 예상치 못한 등장은 전투의 결과를 바꾸었다. [48]
결정적인 전투가 코앞에 다가왔을 때, 디온은 항상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해상 봉쇄를 뚫고 탈출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회상한다. 처음에는 기함들이 통과하도록 내기하며, 자신의 가벼운 함선으로 그들을 잡고 나머지 적 함선들이 지휘관들의 비겁함을 보고 항복할 것이라 내기했다. 아그리파는 반대 의견을 제기했는데, 안토니우스의 함선은 무겁지만 모든 돛을 펼치면 옥타비아누스의 함선보다 속도를 초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악천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옥타비아누스가 즉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친구의 조언을 들었다. [49]
기원전 31년 9월 2일, 유명한 악티움 전투가 벌어졌다.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주로 아그리파의 업적이었다. [50] 감사와 인정의 표시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8년에 조카 클라우디아 마르첼라 장로의 손을 그에게 주었다. 같은 해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27년,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세 번째 임기를 수행했다. 같은 해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트'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악티움 전투를 기념하여 아그리파는 로마 신화에 헌정된 이 건물을 지었습니다. 후자는 기원전 80년 화재로 파괴되었습니다. 아그리파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최종 형태로 재건했으며,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로마 시내에 남아 있습니다. 기원전 125년경 완공된 이 건물의 외관을 장식한 비문은 아그리파를 원래 건축자로 기리는 문구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집정관 3기 이후 아그리파는 갈리아에서 행정 및 세금 징수 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는 도로망과 수로교 건설과 함께 진행되었다.
최근 몇 년]
악티움에서의 성공 1년 전, 당시 장인이었던 아티쿠스는 심각한 병에 걸려 기원전 32년에 자살했다. 후자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이 결정은 아그리파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51]
그의 아우구스투스와의 우정은 사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질투로 다소 흔들렸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세 번째 부인 리비아의 음모에 자극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리비아는 아그리파가 남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전통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그 결과 로마를 떠나 동방 지방의 통치를 맡았으며, 일종의 명예로운 망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 명의 사절을 시리아로 보냈고, 레스보스에 남아 대리로 통치했다. 또 다른 설은 그가 파르티아인들과 비밀 협상 임무를 수행하며 그들이 소유한 군사 문장을 돌려받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52] 마르켈루스가 유배된 지 1년 만에 사망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자신의 봉사를 포기할 수 없다고 느껴 그를 로마로 불렀다. 그러나 기원전 23년의 더 넓은 정치적 맥락에서 사건들을 살펴보면, 강한 반대에 직면한 시기에 아우구스투스가 망명 인물을 로마 군대 대부분을 지휘하도록 임명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더 가능성 있는 것은 아그리파의 '추방'이 기원전 23년에 그의 정착 시도가 실패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군사 지원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신뢰받는 군 장교를 대군 지휘관으로 조심스럽게 배치한 것이라는 점이다.
마에케나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와 더 강한 유대를 맺으라고 조언하여 그를 사위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 기원전 21년에 마르첼라와 이혼하고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 장로와 결혼할 것을 권유했다. 후자는 마르첼로의 미망인이었으며, 미모와 능력, 그리고 뻔뻔한 방탕함으로 악명 높았다. 기원전 19년 아그리파는 스페인에서 칸타브리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기원전 17년에 두 번째로 동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공정하고 신중한 통치는 특히 유대인들로부터 존경과 호의를 얻었다. 아그리파는 또한 로마가 킴메리아 반도(현재의 크림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시켰다.
아그리파의 마지막 임무는 다뉴브 강 상류 지역 정복의 시작이었으며, 기원전 13년에 이 지역은 판노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3월 12일 캄파니아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사후에 낳은 아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스 포스투모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어거스트는 그의 추모를 위해 화려한 장례식을 치렀고, 한 달 넘게 애도 속에 잠겼다. 그는 또한 아그리파의 모든 자녀들의 교육을 직접 감독했다.
유산]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형태로 안도감을 보냈다. 평화의 제단(아라 파키스 아우구스타), 로마.
아그리파는 또한 주로 지리학과 관련된 저작들로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지도 아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제국 전역을 탐험하겠다는 꿈을 실현했다. 그는 원형 지도를 만들었고, 아우구스투스가 나중에 대리석에 새겼으며, 이후 그의 누이 빕사니아 폴라가 세운 기념비에 세워졌다. 그의 저작 중에는 자서전이 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가이우스 마에세나,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패권 수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패권은 3세기 위기로 인해 로마의 전제적 시기가 시작될 때까지 제국을 지배했다. 그의 손자 가이우스는 역사에서 황제 칼리굴라로 알려져 있으며, 증손자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이노바르부스는 황제 네로라는 이름으로 통치했다.
가족]
마르쿠스 아그리파에게는 여러 자녀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 폼포니아 세실리아 아티카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