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영산전(靈山殿) 출입문 위에는 100여년 된 벽화가 한 점 있습니다. 이 벽화는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인데 샅바를 잡는 법도 현대식 샅바법이 아니라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옛날법이며 그 한편에는 시념인(時念人)이라는 글이 씌어있습니다. 그것은 씨름의 이두(吏讀)표현으로 '시시때때로 생각, 생각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안내문에서 인용 -
씨름에 있어 한 찰라 잠깐이라도 방심하거나 놓치는 순간, 승패가 가리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든 책임감을 갖고 시시때때로 생각, 생각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흔히 "책과 씨름한다, 일과 씨름한다, 화두와 씨름한다."고 말하듯이 어디에 집중하고 몰두하여 하고자 하는 일에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이, 씨름판에서 천하장사일 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진정한 의미의 일류 씨름꾼이요, 천하장사인 것이다.
벽화의 윗부분에는 나뭇가지에 윗옷이 걸려있고 적구리(適口理)'라 씌어 있는데 그것 또한 윗옷인 저고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씨름에 의해 저고리를 벗듯이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일의 성취를 위해 불필요한 번뇌망상을 그렇게 벗어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이렇듯 씨름은 단순히 승부(勝負)를 짓고 우열(優劣)을 가르는 투기종목(鬪技種目)이 아니라 몸으로 서로 교감(交感)하며 서로 소통하고 화합함으로써 상생(相生)의 삶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공부(工夫)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념인(時念人)의 정신으로 돌아가, 언제 어디서나 각자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일가를 이룰 때 우리 사회는 자연 아름답고 향기로운 공동체의 이상인 정토(淨土)가 될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팔공총림 동화사 주지 효광 합장-
● 씨름의 역사
● 씨름의 명칭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부족국가 시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씨름에 대한 자취는 “치우희” 라는 씨름의 명칭이다. 중국의 “25史”와 우리나라 “한단고기”중 “삼성기”상ㆍ하 편에 보면 치우천왕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전설적인 군신이며 무신인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중국의 “후한서”와 우리나라의 “조선상고사”에 씨름에 관한 명칭 “각저희”와 “씰흠”을 사용하며 씨름에 관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각저총의 씨름도
고구려 고분 '각저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우산촌에 있다. 우산 남쪽 기슭에 무용총과 나란히 자리잡은 고분으로, '각저총'이라는 이름은 최초 조사 당시 널방 왼벽에서 발견된 씨름도로 말미암아 붙여졌다. 북한측은 씨름무덤으로 부르며, 중국측의 일반적인 표기로는 '각저묘(角抵墓)'이다. 1935년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만 유일하게 벽화에서 씨름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만주 길림성(吉林省) 집안현에 있는 각저총의 벽화와 장천1호분의 벽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발견된 이 두 벽화만을 볼 때도 고구려인들의 생활에서 씨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열전 중 김유신 대목에 유신과 춘추공이 씨름을 하다가 옷고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발견된 정도이고, 백제는 백제의 씨름 방식이 일본으로 전파 되었다는 것이 일본과 양국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삼국시대는 앞으로 더욱 많은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씨름은 15세기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충숙왕(1330년)과 충혜왕(1343년)시대에는 상ㆍ하의 예가 없을 정도로 왕을 위시한 신하 등 용사가 씨름을 즐겼는데 이때는 원나라의 지배아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씨름을 통하여 민족 자주성 회복의 염원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 씨름
조선시대 초.중기의 씨름에 관한 문헌상의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소 찾아 볼 수 있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군사들로 하여금 씨름을 겨루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에는 “송경지”, “중국세시기”, “경도잡지”, “해동죽지”등의 문헌 중에 씨름에 관하여 많이 서술되고 있다.
또한 그림으로도 몇 점 남아 있는데 檀園 金弘道의 풍속도ㆍ箕山 金俊根의 풍속화ㆍ蕙山 劉淑의 大快圖 등은 귀중한 사료이다. 그 외 구한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 동화사 영산전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씨름은 오늘 날까지도 널리 행해여 오고 있는 민속놀이이다. 특히 음력 5월 단오절에는 빠짐없이 씨름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4월 초파일, 7월 백중절과 8월 추석 등의 명절에 즐겨 행해지는 씨름은, 경기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품으로도 당시로서는 매우 귀중한 재산이 될 수 있었던 황소 한 마리를 주는 등 우리나라의 남성들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스포츠의 하나로 각광을 받아왔다.
씨름의 종류는 샅바를 오른쪽 다리에 끼고 하는 ‘왼씨름’ 또는 샅바를 왼쪽 다리게 끼고 하는 ‘오른씨름’, 그리고 허리에 띠를 매고 하는 ‘띠씨름’ 등 원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요즈음에는 대부분 ‘왼씨름’만을 한다. 상대방을 완력이나 여러가지 기술로써 제압하여 쓰러뜨리는 씨름은 다른 격투기처럼 상대방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지 않고도 이길 수 있으므로 매우 신사적이다.
경기의 기술은 손을 이용하는 ‘팔재간’과, 발을 쓰는 ‘다리재간’, 두 손과 다리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땅에서 들어올리는 ‘들재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세부적인 기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오늘날에는 씨름이 스포츠로서 체계화되어 공식적인 운동경기로 인정을 받고 있다.
-자료출처:대한씨름협회 "씨름의 역사" 참조-
혜산 유숙(蕙山 劉淑) : 대쾌도(大快圖-큰 놀이판)
대쾌도(大快圖)의 部分 - 씨름과 택견
혜산(惠山) 유숙(劉淑:1827~1873)이 20세가 되던 1846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대쾌도(大快圖)」는 씨름과 택견, 또 이를 즐기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당시의 풍속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젊은이와 노인, 어린아이, 양반, 서민, 상인, 선비, 관원, 스님에 이르기까지 연령이나 신분계층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자그마치 81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비록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세상이 되기를 희망하는 작가의 상상력의 일환으로 조선말기 풍속화중 역작으로 평가된다. 「대쾌도(大快圖)」는 지금의 중구 광희문(光熙門) 남쪽에서 벌어진 유희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첫댓글 애독자가 되었습니다. 동화사는 두어 번 가본 적 있고 씨름은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였습니다.
꽃살문만 정리하려 했는데
사찰마다 꼭 보아야 할 것이 있기에 자꾸만 꼬리가 붙네요.
애독자가 되셨다니 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