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바다’라는 것
출처 조선일보 : https://www.chosun.com/opinion/every_single_word/2022/05/23/M6QMJF4EWRETDCIIS33TK4PBZI/
디즈니 픽사의 영화 ‘소울’을 인상 깊게 보았다. 그중 이런 장면이 있다. 젊은 물고기가 나이 든 물고기에게 묻는다. “저는 바다라 불리는 곳을 찾고 있어요.” 나이 든 물고기가 대답한다. “지금 네가 있는 이곳이 바다야.” 그러자 젊은 물고기가 말한다. “여기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내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만한 의미 있는 장면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 저마다 기준을 세운다. 경제적인 풍족함, 학벌, 커리어, 이상적인 배우자 등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다양하다. 아마도 젊은 물고기는 수심과 온도 같은 바다의 조건을 상상하며 기준을 세웠을 것이다. ‘바다는 분명 이런 색이겠지’라거나,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일 거야’라고.
나 역시 등단하면 엄청난 바다가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 내가 꿈꾸는 바다는 ‘창작하는 삶’이었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내 글을 쓰는 삶을 바랐다. 하지만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선 통보를 받은 날의 감격이 무색할 만큼. 나는 여전히 머리를 싸매며 될 만한 글감을 찾아 헤매고 기약 없는 글을 쓴다. 바다가 아니라 아직도 그냥 물속에 사는 것 같다. 앞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할 것처럼.
나는 나이 든 물고기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아무래도 더 가야 하나 봐요.” “여기가 바다라니까.” “무슨 바다가 이래요?” “해류에 단단해진 비늘을 보고도 모르겠어? 진주조개가 그득하고 인어공주가 뛰노는 곳만이 바다라 생각했니? 넌 이미 바다에 살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등단 이전에도 줄곧 습작을 해왔다. 오래전부터 ‘창작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인정하지 않았을 뿐, 행복은 이미 내 곁에 있었다. 어쩌면 바다는 도달해야 하는 어떤 곳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현재를 섬세히 느껴 보는 것일지 모른다.
김다혜 2022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자
빛viit명상
힘든 당신과
세상을 위한
빛viit명상
때로는 이러한 모든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있는 그대로 빛viit을 잘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우리 어린이들이다. 빛viit명상은 어떤 특정한 규율과 방식에 얽매이기보다는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빛viit마음을 통해 근원의 빛viit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어린 시절, 순수했던 그 마음을 곰곰이 되돌아보며 우주의 마음에 한 발짝 다가서 보기를 권한다.
어린 시절,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올라 하늘을 밝히고 저녁노을과 함께 사라지는 태양의 모습, 어둑해진 하늘 위로 돋아나 반짝이는 별과 달의 모습에서 이 모든 하늘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거대한 힘에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엄격하게 유지되는 자연의 질서 중심에 있는 빛을 통해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을 배웠으며, 훗날 이것이 빛viit명상의 으뜸가는 근간이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 친구들에게 강냉이 빵을 내주고 추운 겨울 해어진 옷을 입고 벌벌 떠는 각설이 친구에게 입은 옷을 벗어주며 그렇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 풍요롭고 행복함을 느꼈다. 그 외에도 무수한 일들을 통해 마음만이 아닌 몸으로 애인(愛人)을 실천 할 때 그것이 보이지 않는 복으로 쌓여 큰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하였고, 훗날 이것이 빛viit명상의 또 다른 근간이 되었다.
앞마당에 서 있던 감나무와 함께 놀고 마당 한구석에 피어난 나팔꽃, 채송화와 친구가 되면서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모든 자연의 소리가 마음의 복잡한 고민과 생각들을 씻어주니 그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 소중한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애생(愛生)을 배우고, 훗날 이것 또한 빛viit명상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종교의 엄격한 규율과 전례 속에서 약 이십 년간 복사 생활을 하며 하늘에 올리는 진심의 마음과 예를 표하는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고, 아버지와 함께 거닐었던 사찰과 도경의 가르침을 통해 민족 고유의 고귀한 정신과 그 안에 담긴 우주의 숨결을 배웠으니, 이 또한 빛viit명상 안에 녹아 숨 쉬고 있다.
답답하고 힘이 들 때면 바다를 바라보며 우렁이 각시 이야기를 생각하고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하니 그 마음에 우주마음이 함께하며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위급한 순간 빛viit을 생각하여 모면 할 수 있게 부탁하였더니 그대로 이루어져 이것이 소원을 이루어주는 빛viit명상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 모든 과장이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실제 빛viit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으로 거듭 확인되면서 오늘날 빛viit명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루 중 언제든 고요히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보자. 근원에 대한 감사와 함께 내 안의 빛viit마음으로 돌아가 보자. 명상, 묵상, 기도도 좋고 빛viit명상 이라면 더 좋다.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는 소중한 시간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 생명의 즐거움, 써도 써도 소진되지 않는 무한의 풍요로움을 느껴보라. 한 번뿐인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육체를 벗어난 ‘내 안의 나’가 원래 온 그곳으로 되돌아갈 때 이 행복순환의 에너지, 빛viit이 당신을 영원한 평안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출처 : ‘빛명상’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초판 1쇄 발행 2009/09/14
2021/06/01 초판 45쇄 P. 247-249 중
에너지의 바다
“선생님, 도대체 우주의 ‘빛viit’ 이 뭡니까?” 하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원래의 ‘빛viit’ 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굳이 말로 표현해 보자면 ‘빛viit’ 이란 모든 우주만물을 움직이며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무한의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인간은 물론 지구와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천적인 힘이며 빅뱅 이전의 무차원적인 에너지이다. 따라서 인간은 물론 우주만물은 이 에너지를 통해 삶을 부여 받았고 그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 ‘빛viit’ 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때로는 부정하기까지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 때문이 아니가 한다. 즉 자신의 머리와 판단력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식별해나갈 수 있다는 엄청난 무지와 교만이 어두운 마음을 부르고 결국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빛viit’ 을 눈앞에 놓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왔다. 그 가운데에는 세상과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생명에 대한 의문, 보다 안락한 삶의 추구, 절대적 진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있는데 이 모두가 오랜 세월 쌓이고 체계화되면서 신앙이나 사상, 학문의 형태로 발전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에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귀의하여 무언가 높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기에 그 누구도 도달해본 적 없는 것을 놓고 저마다 자기 방식이 옳다, 그르다 하며 말을 늘어놓고 때로는 다투기까지 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맛이나 모양이 비슷한 초콜릿을 들고는 서로 자기 것이 가장 맛있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나 사상, 학문의 갈래는 그 뿌리가 결국 하나, 우리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 ‘빛viit’ 이다. 이 ‘빛viit’ 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매달려있는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무서운 생각의 틀은 원래의 순수함을 갉아먹고 인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구축해 놓은 학문과 사상, 종교라는 이름의 것들은 완전하지 못하고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하고 수정되어져야 하는 대상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끝인 동시에 완전한 에너지, 우리의 마음이 유래한 근원의 ‘빛viit’ 뿐이다. 마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앎 그리고 그 외 모든 학문이나 진리를 전부 포함하는 것이 우주마음의 ‘빛viit’ 이다.
따라서 ‘빛viit’ 을 앞에 두고 자신의 지식이나 사고,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여 고개를 돌리는 이들은 결국 인간의 유한함으로 무한한 우주 전체를 판단하려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리를 향한 인간의 노력과 그 결과물 전부를 부정 하자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제 겨우 작은 실개천의 수준에 다다랐을 뿐이면서 큰 바다가 이렇다 저렇다 논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물줄기들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들어가듯 오늘날의 종교, 사상, 학문과 같은 것들도 결국에는 거대한 원래의 진리, ‘빛viit’ 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이는 오늘날의 과학이 밝혀놓은 빛(파장)의 단계에 대한 도식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게 될지 예견한 것이다. 혹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이 ‘우주초광력’이라는 우주의 빛viit이 이 파장들 가운데서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밝혀두었다고 할 수 있다. 오백년이 될지 천년이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몇 백 년 후의 과학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우주초광력’을 인식하고 밝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다음의 예견 도표에서 보듯이 지금가지 과학이 밝혀낸 광선의 종류 중 가장 상위에 있는 광력(光力)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우주초광력’이라고 본다. 이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밝혀 낼 수 없지만 언젠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다음의 도표를 한 번 보자.(물음표 P. 226 참조)
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종교보다도 신뢰하고 추앙하는 것이 과학이기에, 과연 그 과학이 보편타당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빛viit’ 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나타내본 것이다. 그러나 빛viit명상을 통해 빛viit과 교류할 때 나타나는 금, 은, 수정빛의 결정체인 빛viit분의 결정조차 40퍼센트 수준 밖에 밝혀내지 못한 현대 과학의 수준으로 우주의 빛viit 전부를 밝혀내겠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교만함과 무모함이 아닐까?
우리는 종교적 관념에 따라 천동설을 굳건히 믿던 중세인들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비난하며 종교재판에까지 회부했던 일화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현대인들은 그러한 중세인들의 무지함을 우스갯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그 때 그 중세인들과 똑같은 교만과 어리석음의 전철을 밝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부신 과학기술이라며 자화자찬하고 으스대기 전에 과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관조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최첨단 기술 장비가 개발되어 사람의 몸을 훤히 들여다본다 해도 그 기게로 우리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도, 찾아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주의 빛viit은 우리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이나 과학으로써 100퍼센트 정확하게 표현한 모범 답안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커다란 전체 속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한 우리의 존재 그리고 그 작은 존재 속에 깃든 우주마음의 커다란 뜻을, 우리는 머리가 아닌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모든 강줄기가 큰 바다로 모여들 듯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갈구했던 진리의 근원이 이 ‘빛viit’ 에 있으며 결국 이 본래의 마음, 빛viit알갱이를 통해 우리가 원래 왔던 그곳,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야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출처 : 물음표? 정광호 著 2005.07.20 초판 2쇄 P. 223~228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의 글 볼수있게해주셔서 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제 삶이 빛의 바다로 흘려들어가기를 기원드립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끝인 동시에 완전한 에너지, 우리의 마음이 유래한 근원의 빛viit뿐이다.
< 에너지의 바다 > 빛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