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1971년 10월 군 입대부터 1974년 8월 제대까지 를 간추린
군에서 말하는 "추억록" 속의 한부분 임니다.
첫 페이지가 소실 되어버리고 두번째 페이지부터 임니다.
종이가 점점 낡아지고 장이 소실되구 있어서...
의지 할곳조차 없고 벗들도 없는
갓 벗어난 섬머타임 덕분인지 몹시도 더운날.
난 와이셔츠를 어께에 걸친채
한쪽구석에 구걸나온 거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꼭 잡아다가 도살을 기다리는 개새끼 마냥.
우뚜커니 따가운 태양을 피부로 감수한다.
진정 못이룬 꿈은 꿈으로 남긴채.
"state alleria tion of pain"
그렇다 젊음이 있어 여기 있는 것이고
그 처음의 장을 펼치는 것이리라.
그날 저녁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끌려만 가는 우리들.
차창을 스치는 부모님들의 손놀림과 붉게 충열된 동공은
못이 박힌체 떠날줄을 모른다.
내 어머니 아버지.
오늘 자식의 뒤를 보기 싫어서 새벽부터 평소대로 시장에 가셨다.
창밖으로 여인네의 수건이 홍건히 젖어드는 것을 보고
콧등이 시큰이 어려오는.
나는 소란속 고독이 뭔가모를 아쉬움에 젖는다.
여인의 소매 자락이 아니드라도 난 누군가 노스탈자의 손수건이라도
흔들어 주었슴하는 그런 아쉬움에 애뜨랑제는 애수에 젖어 눈을 감는다.
몇번이나 울부짖는 철마의 기적을 귓가로 흘리는 난
시린눈 다시뜨며 다진다
.
내일의 싸이렌이여!....
얼마나 시간이... 옆의 동료가 논산이라는 소릴 은근히 알려 온다.
논산!
지금은 충청도 땅이고 얼마전 까지만 해도 전라도땅.
황산벌..그곳에 현대는 군인을 양성하는 훈련소를 지었다.
난 내가 훈련소로 가는 장정임을 망각한체 감회에 젖어든다.
여기가 군 3년사의 첫발을 내디딘 육군 제2 훈련소.
행렬은 소란과 무질서의 연결이다.
안개는 뿌옅게 눈시울을 깔고 있는데.
어느 작고 귀여운 소녀의 "아저씨 건빵" 하는 소리가
내리눌린 졸음을 쓸어 내린다...
얹저녁 용산. 용사의 집에서 받은것.
가난의 소산으로 빵의 쟁취에 뛰어들어
맛도 모르고 그냥 고파오는 창자에 맡겨버린 그 쓰림
80의 직군에서 10으로 바귀어 버린 병과 155마일 최전방 한 초병으로 향하는가?
식기류에서 나는 비누냄새 땜에 한술도 못먹던 짬밥.
뒤늦게 한절기를 맞아 목에서 피가 어리어 드는 감기로
난 점점 의식을 잃어가고..
혼수상태가 계속 되면서 병든 병아리 마냥 양지를 찾던 그 2~3일간
10월14일 내게 12205115의 군번이 부여되고.
나는 이제 삼천만의 불침번인 것이다.
입소를 서둘러 찾아간 2336부대 7중대 5소대.
신이여!
세상은 좁고도 넓었다
훈련을 마치고 발령 대기중인 136기인 친구를 만났다.
우표의 궁함을 알고 우표를 주던 그친구.(현재는 여동생의 남편)
23도의 기온이 8~9도로 덜어질때 P,R,I 가 먼지도 모르는 놈이 요령이 늘어간다
날씨는 겨울의 문턱에 성큼 그 크고 찬 발을 내민다.
푸라타나스의 벌레먹은 잎새에 낙엽이 잉태되어
맑은 이슬과 서리가 깔린 아스팔트위에 구르고 있다
"시몬!
나무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계절의 미각을 음미하지도 못한체 시간은.
집에서 온 편지를 받는날 취사장 사역을 나가 변소옆 그더러운 곳에서
높게뜬 시린달에 난 숨죽여 울었다.
"달아!
넌 어머님을 닮은
소담스런 나의꿈.
달아!
너는 애환이 서린
젊은 병사의 꿈을
잉태한 나만의 영령.
달아!
너는 두고온 사람보다
더 고귀한
나의맘 모두실은
꿈의 오솔길.
"
처음 받는 훈련의 고됨과 쓰림속에서 난 내일의 삶을 점치는
고독한 철새를 닮아가고
고향의 내음을 음미하는 한 자의 사연에서 흙 내음을 맡는다
6주간의 교육이 마무리 될무렵 싸락눈이 대지위에 하얀 포장을 한다.
돌이켜 보면 소원 수리로 하여 배낭에 모래 채우고 구보 하던일이
같은 동료들에게 정당성을 내세우긴 해도 좀 미안한 맘이 뒤로 남는다.
103 보충대로 약 500명의 동기가 용산을 거처 춘천으로
춘천에서 보충병 생활을 하고 있을때 추위는 차츰 대지에 깊게 스미어 든다.
인재.원통.오음리.화천.양구로 분리된 병력
40명이 양구로 배치를 받았다 21사단 신병 교육대.석유 등불로 밤을 밝히는 곳..
공급계의 직책을 맡았다.
학생장에 피우명 향도에 정현모. 서무에 반홍기...
근무태만으로 M 1 의 가늠자를 입에물고 기합 받던일...
원산 폭격으로 침상모서리 각대로 이마에 굵게 잡힌 자욱..
얼음이 언 배수로 에서의 낮은 포폭.
우리 앞기가 동상으로 18명이 후송 되었다고 한다.
4주간이 교육이 아니고 기합으로 해가드고 기합으로 해가 지고있다.
진정 아수라가 이런것일까?
스파르타식 교육과 정신 무장들. 무엇을 위함인가?
명분은 적과 대치하는 장소에 투입되는 것이라지만.
문고리를 잡는손이 고리에 달라붙어 떨어질때 쩍쩍 소리를 낸다.
동상 직전 이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감히 울산서 이런 추위를 경험할수가 있었던가?
1972년1월1일 04시00분 갑짜기 비상소집이다.
연병장에 팬티 차림에 집합이란다.
양팔 벌린 사이로 뿌려지는 물은 피부가 타는듯한 따가움을 느낀다
1월4일로 예정된 신교대 졸업이 1월7일로 연기 되고
그간에 견뎌온 체력으로 인해 이제 생활에 조금 자신이 생긴다.
1월7일 65연대로 10명이 전출령을 받았다
그중 3명이 같은 중대로 배속되었다.
상주의 권오학. 영주의 정길호. 나.
이렇게 그 파란많은 생활의 장을 펼치게될 9중대로.
술이 먹고픈 동료들과 빼치카 속에서 쇠주를 들이키다 주번사령에게 들켜
군대말로 "촛대뼈 미시나우시" 당하던날
그래도 우린 마주보고 웃을만치 여유가 있었다
.D.M.Z. 근무명을 받고 가슴뿌듯함을 느낄수 있었던 것은.
명목의 분명함이 사명이라는 것을 인지한 때문인가?
배치 되던날..
눈 쌓인 산하. 두뚬한 양탄자 처럼 깔린 산악도로..
기는듯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던 병력배치운송 차량의 호로쳐진 뒷칸에서
기아(전진레버)의 변속 미스로 뒤로 빽하는 생과 사의 기로에 봉착되기도.
여긴 보병 제 21사단 65연대 3대대
백석산 옆으로 대암산.향로봉.빨지산.X.mas 고지
태백산맥의 지류중 가장 험준한 준령이 자리한 중동부 전선의 한곳.
산맥의 장쾌함에 억압된채 처다본 산정에 눈이 2 m 는 족히 샇여 있다.
강원도 어느골 인지도 모른다.
백엽상 온도계는 영상 5도에서 영하 29도 까지 오르내린다.
피부의 체감 온도는 영하 35도를 상회한다.
박영진 대대장님의 훈시를 뒤로하고.
G선으루 발길을 옮겨 닿은곳이1220고지 군단 통제 O.P가 있는곳
13 t.b로 배속 되고 보니 1소대 소총수 보직이다
마주 보이는 1420고지의 어은산.
도상거리 4 km. 적은 코앞에 있었다.
가까운 초소와 북한 초소와의 거리는 불과 800 m.
크게 소리치면 그들도 뭐라고 대꾸를 해온다.
남방한계선. 그리고 군사분계선(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북방한계선.
등이 가로쳐진 이곳.
점점 흥미와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아담한 분위기 속에서
야간 근무에 임할땐 생명의 존귀보다 더욱 절절한 사명을 자각한다.
거머진 car bin의총구를 북으로 향한 초병의 자세로
남방 한계선을 주시하는 난.
삼천만의 수호신이고 불침번인 것이다.
하얗게 쌓인 눈이 허리까지 오는 순찰로를 따라
긴장과 초조 로서 매분 매시간 매일을 점철한다.
그 하루 긴장의 날에 이채종 병장과 순찰중 무언가 움직이는 철책을 보고
확인을 하려고 총의안전 장치를 풀고 완장전 한후 한발씩 다가갈때
나는.생명의 존귀보다 임무를 생각 했다면 내가 미친것일까?
약 3개월의 G 선 근무를 마치고 C.O.P로 왔을땐 부대 최고 말단 사병이고
최말단 계급의 지위인 60M 탄약수겸 부사수로.
개인훈련 분대훈련 소대훈련을 거쳐 중대A,T,T. 연대R.C.T.까지
정말 걸으면서 잔다는것이 얼마나 쉬운일 인지 그때 배웠다.
응용 대대A.T.T때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걸으면서 부모님을 생각했고
고향을 그리워 했다.
1972년5월9일 3박 4일의 유격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오니
휴가 특명이 나 있었다.
첫휴가.
저녁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중대장님 대대장님 연대장님에게
휴가 신고를 한후 사단으로 가는 부식차에 몸을 맏긴다.
그 3대대 자리(궁동리)여울목엔 이름모를 꽃들이 봄이면 만개하고
짙붉은 진달래가 홍건히 젖어 오는곳.
휴가전 마지막 밤을 사단에서 자고 미명에 병창을 노크하는
햇살보다 먼저 일어난 난 괜한 설래임을 가누지 못한채
휴가 버스에 몸을 실어본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달려 홍천과 오음리를 경유하여 춘천으로 달려온
시간이 험한 길로 하여 무려 4시간 정도가 걸렸다.
나는 춘천 T.M.O 에서 국수로 때운 점심 한끼를 놓고
다른 명분의 다른 나를 나는 넘겨다 보고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선배전우 님들의 얘기들이 귓전에 맴돌고 있다
"첨보는 여성에겐 무조건 호감이 간다는것" .
첫 휴가 때는 엄마가 맨발로 뛰어 나오고.
두 번째는 신 신고 나오고.
세 번째는 마루에서 왔나? 하고.
네 번째는 문만 열더니.
다섯 번째는 또 왔냐구 묻고.
여섯 번째는 이제 오지마라"
한다는 그말이 생각나서
스쳐가는 전신주와 초가집 담장넘어 봄배추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용산이다. 벌써.
용산! 용산하고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다
"용산! 여기는 용산역이 올시다.
장병 여려분 피로한 여행에 얼마나 수고 하셨슴니까?
내리실 때는 앞다리는 앞문으로
뒷다리는 뒷문으로
대가리는 천정으로 나와 주시고
가지긴 물건은 창밖으로 던져 주십시요.
여기는 용산 T.M.O. 안내소 임니다."
이건 용산역에 가면 한다고 훈련소 에서 들은 소리다.
암튼 난 나의 존재를 확인 하려고 우측 가슴에
또 하나의 명찰인 "민정경찰"을 달고 서울을 걸었다.
저녁 21:30` 중앙선(청량리~부산)을 타고 새벽에 집에 도착 하였다.
여기 내 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생활의 안식이 있는 내 고향..
엄마하고 부억에 들어갔을 때 늙고 주름이 잡히신 얼굴을
눈물로 적시던 어머니.
빠르게 지나간 15일 간의 휴가..
귀대 길에서 나는 국민의3대 의무를 수행중 이라고 자신을 달랜다.
추계보수 기간에 들즈음 연대 R.C.T.훈련이 다시 시작되고
5박 6일간의 산악 훈련이다
장장 200 km가 넘는 산을 타고 넘어야 한다.
양구 인재 원통을 경유하는. 산을 기어오르고 헤메어야 하는
실전과 같은 산악전술 훈련이다.
어께를 파고드는 60mm의 포열 27.6kg 의 무게다. 그기에다 16kg의 배낭.
개인화기 기본 장비등 족히 50kg은 넘는 완 중장이다.
이 쓰리고 짖눌린 무게속에서 두 끼를 굶은채 산정을 헤메다 맞이한
부식차량에서 받은 한끼의 식사..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속에서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찬밥을 먹을때
판초우의를 타고 내리는 빗물이 얼굴을 거쳐 반합에 덜어진다 .
이건 눈물과 빗물과 한줌의 밥과 땀이다.
주린 창자는 탈이 없고 감기도 인간의 불굴에는 항거도 없나보다.
아!
지금은 이리 추회와 감회에 사모치는것을.
R,C,T,직후 2번째 휴가 그리고 3번째는 소양강 횡단 배로서춘천으로 향하고
3번째 휴가를 마쳣을땐 계급은 상병이였고 직책은 소대 기지계(향도)겸60mm사수겸
분대장 1인 3역을 하고 있었다 1973년.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무려 12장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6통의 위문편지를 받았다.
군 생활동안 견딜수 있게 도움을준 수많은 소녀들
=이글을 정사 하고 있는 지금도 감사 하면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18개월의 군 생활이 지났다.
다시 G선 투입 훈련이 시작되고.
사단종합 훈련인 4박5일의 F.T.X.
왜 이런 훈련은 꼭 겨울에만 하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이 훈련중 병사 한명이 3.5인치 로켓포 사격 자세로 탱크에 압사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때의 아찔함 .캐트필드위의 따스함 땜에 참 많이 타고 다니기도 했던
그 M28탱크. 나중에 알았지만 M28탱크의 최고 속도가 90km 가까이 나온다니.
정 자세를 취한 병사가 채 피하기도 전에 밀어버린 사고 였다.
하얗게 내린 눈 위에 붉은 선열.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중대장으로 복무중 이던 최석철 대위가 사단 항공장교로 발령이 나고
사단 수색 중대장 이던 김광배 중위가 전속을 오셨다.
그전부터 중대 서무병인 신영국 병장으로 부터 H,Q.요원으로 오라는 권유를
몇번이고 뿌리쳣던 나인데..며칠이 멀다하고 호출이다
G선 투입전에 보직을 중대 정보및작전병으로 발령을 받았다
D.M.Z (demilitarize zone)
중대섹터 1600m. 순찰번호 86~139. 23tb~30tb까지 G.O.P.302.303.304.
관측소 1220 O.P 1개. 1050m의15.000 volt.의 고압선 등
중대의 전반적 활동을 T.O.C로 보고및 기록보관 및 사병교육.
보고 공문작성.발송. T.B및G.O.P근무상황 감독.지시.보고등.
계절은 가을을 재촉한다.
산정서부터 붉게 물들어오는 정취에 소슬 바람은 운치를 덧대인다.
언제 가을이 갔는가?
바람은 매서운 북서풍으로 바뀌어 있다.
북한군은 금요일이 휴일인가 보다.
금요일만 되면 그네들은 배구도 하고 운동장에서 뛰어 다닌다.
영하 29도의 혹한을 내눈으로 매일 기록한다...
유독 겨울만 되면 북에서 울리는 스피커 소리가 크진다.
바람의 방향이 남쪽으로 불어오고 있기에...
뼈를 파는 추위 속에서 하루 평균 15시간을 책상에서
볼펜과.먹지 갱지.전지.싸인펜.구리스펜.아스테지.매직으로
브리핑 차드작성.1:25.000지형 지도 확대및 축소 복사.
그야말로 1분을 얼마나 쪼개어 썼는지 모른다.
=오늘 이글을 정사 하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지금은 복사기가 있어 얼마나 편한가?
그때는 일일이 그리고 뜨고 했으니 그리구 그때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G.O.P(철책근무)C.O.P(철책근무 철수후 근무지)나
석유등잔을 켜고 근무를 했었다
특수화력 조작및 제작 특수장비 운용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배우고 익히어야 했다.
제 2급 비밀 취급인가를 받고 그에 대한 교육을 이수하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조국을 위해 나는 투자 하였는가?
세월은 정상의 눈이녹아 아래로 흐르듯 흘러가고 있다.
결코 잊을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이 작전병이란 직책.
작전병이란 보직이 없는 관계로 명칭상 작전하사 보직을 갖이고
D.M.Z.근무중 병장으로 진급을 했다 본부행정요원이라는 특혜로.
혼자만 진급이 된것이 명단에 오른 40여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하나를 배우려 설치기보다.
떨어진 발등의 불 꺼기가 더 시급한 날들이다
이제 군 생활중 마지막 철책근무를 접고 철수를 했다
50/57의 작전 상황판의 투명도작성
(화력. 병력배치도,장애물 설치도.공격로 철수로.축차 계획도)
등을 아스테지위에 매직 잉크로 작성및 복사.정사.확대.
브리핑 초안및 챠드작성.공문초안및 작성.미니챠드.비취챠드.보안.
전술교안 80여권의 군사F.M 서적과 180여권의 군사관련 서적.
지역별 지도.군사음어.나는 모두 알고 있어야 했고 알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반복되는 훈련=
다행이 난 군입대전 태권도 유단자 였기에 훈련교관을 많이 했다=.
소대훈련.중대훈련.중대전술 훈련,대대 전술훈련을 마칠때 까지
밤을 새우며 작성한 전술 보고서를 들고 졸던나.
몰골은 수척 할때로 수척했다. 꼭 산 송장같은 자신을 보고
그래도 웃을수 있었던 것은 나의. 내가 작성한 이 보고서로 하여
기본 전술이 이루어지고 150명의 전우가
나의 그림대로 움직인다는 자부심 이였다
1974년 5월1일 군단 표어 모집에 응하여 1위 입상을 했다.
제 1군 제3군단 군단장 대장 정승화.
표창장과 함께 포상 휴가를 나오면서 조수인 김재선 일병에게
모든걸 맡긴채 집으로 향했다.
삶에 대한 애착과 전역후의 직업선택.
귀대를 하고보니 정기휴가 특명이 내려와 있었다.
군에서의 마지막 휴가.
부대에서 하루를 자고 다시 집으로 오니 깜짝 놀라는 부모님에게
마지막 휴가라고 말씀 드리고
시간은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금 인생은 오뚜기처럼 칠전팔기이며
부딪기고 받치는 우충좌돌의 수례의 습성을 지니고 돌아가나 보다
1974년 7월1일 김광배 대위가 중대장 임기를 만기로 O.A.C.(영관급)교육을 가는날
"내 지금까지 군생활 중에서 제일 고맙고 잊지 못하는 사람은 너뿐이다".
라고 말씀 하시던 그분. 서울법대 출신으로 제3사관학교 1기생 이며
속된말로 무지 악발 이었는데..
그 추운 겨울 그님은 완전군장에 전 섹타를 구보로 돌게할 만치 독한사람 였다
난 그때 철책에서 주어온 폭풍지뢰로 무언의 압력을 가한적도 있지만(철책 근무중에)
진정 내가 나의 소신껏 모든 일을 처리 했으며 뭔가 이루어 놓은일이 있는가?
하고 한번 더 자신을 되돌아 봐진다.
성질이 불갖이 날카롭던 김대위. 지금은 oac교육장에서
전술학 강의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세번째 맞이하는 중대장. 대위 리석형 대대본중대 장으로 있으시다
온 분이시다. 사람 좋으시기로 평판이 자자한.
아는가?
썩은 수박만 먹어본 사람은 덜 익어도 싱싱한 수박의 맛을?
나에게 첫 마디가.최병장 며칠 남았지? 였다.
앞으로 20일 임니다.하던게 그제 같은데. 8일 남았다.
이제 군에서의 모던것을 정리해야한다.
내일은 소대 전술 훈련을 나가는 날이다
조수인 재선이는 휴가 특명만 기다리고 지금 난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지명은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다.
생의 첨단을 치닫는 현실에서 나는 3년을 헛되이 보내고 있었는건 아닐까?
내일 보다 오늘을 주시하고픔 때문에 인간적인 인격과 평등을
소멸당한 군이란 특수단체 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악인이라 칭하던 사람들도 밑바닥부터 악인은 아니였고
환경에 적응하고져 빠져 나갈수 없는 구덩이속에서
악착이란 단어를 빌어 생활할려는 선한 사람였고
마음의 평화를 찾을땐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는 사람들 였다고.
인생 3년의 특별 수련기간.
이 황금의 시간이 나열된 군무를 뭐라 표현해둘 말이 없을까?
...................!
몸져 누워 계신다는 엄마.
시인 다눈치노는 "영원한 어머니"라 불렸고.
어느 시인은 "희생녀"라 했다.
우릴 키우시느라 가는허리 졸라매시고 주름과 흰 머리만 가지신
내 어머니.
오늘이 1974년 7월 17일 제헌절이고 7월 마지막 제출일.
박영수 대대통신병이랑 p.x의손영진 취사장의 김영진이가
개구리 복을 입고 군문을 떠난다...
습쓸한 웃음으로 마주잡던 손들의 교류속에 따스함 보다
차거움이 전해오는 것은 왠 까닭인가
=두장이 소실 되었습니다.15P.16P.=
=부대장은 말대가리다=
=전우야 고향가면 내 마누라 부탁한다.=
=하사관 개새끼들 죽일놈 좇같은놈=
=영자야!휴가 가꾸마. 목욕하고 이불펴 두그래이=
=우리 내무반장 좇은 말좇이다=
이것은 빠져버린 소나무옹이를 지닌
슬픈 화장실 문에 새겨진 낙서의 일부다
젊음의 활화산이 내리 퍼붓는 팔도 사내들의 숙연한 울분이
나열되고 토론되고 분출되는 분화구다.
어느 현대 시인은 변소를 가르켜
"자신의 생명력이 약동하고 내일의 설계가 그려지는 곳"이라했다
낙서를 읽어보는 마음을 괜한 미소로 배웅하며
꽝!! 하고 닫고 나오는 울림이 귓전에 맴돔을 뒤로하고 걷던 허무함.
지금쯤 고향 언덕엔 수많은 반딧불이 유광하는 혼령들처럼
광란의 장을 펼치고 정유공장의 불기둥이 시내를 밝힐것이다.
거리엔 황홀한 쇼원도의 불빛이 검은 아스팔트위에 반짝일 것이다.
군생활 만 2년 9개월 15일.
결코 짧지않은 기간. 하고픈 얘기도 남기고 싶은 얘기도 많으리라.
군 생활 동안 인간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누고.
형이 되어주고 아우가 되어 주었다.
아쉽다 .이 정들었던 3년의 병영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나같은 놈 처음 보았다는 장기 하사관과 위관들
박영규 소위 김옥섭 하사. 김대한 하사. 김문수 하사.
본부중대 요원들 작전참모 송철재 대위. 정보참모 이선종 대위.
박영규 대대장님. 최석철 항공참모님.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 되리라.
어자피 인생은 왔다 가는것.
만나고 헤지는것을 인지상정 이라 했던가...
속이고 속으며 사는 세속에서 한가닭씩 풀어 헤쳐야할 생의 실오리여!
타오르는 봉화처럼 영원히 내곁에 머물 생의 반려자여!
나에게 힘을 다오.
옳은길로 인도해주고 쓰러지지 않게 부축해 다오.
긍정도 부정도 필요치 않고 다만 믿음으로.
이제 2일 남았다.
재선이가 휴가를 간지도 5일이 지났다.
박종업 병장에게 중대 작전전술을 일임 시키고 떠날 채비를 한다.
8월 첫 출발 첫 출발이 턱걸이다.
출발일인 내일은 중대A.T.T 출발일이다.
전우가 귀대를 하면 나는 떠나고 없을것이다.
오늘이 7월 23일 화요일.
야간 교육을 틈타 P.X로 박영규.이종만.소대장이랑 콜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내가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기에 술은 먹지 못했지만.
그날밤 2시까지 투명도 작성과 비상출동 준비를 해두고 잠자리에 든다.
이제 모두 가슴에 새겨 두는거다.
이 그리운 얼굴들
이 그리운 산하를............
1974년에....
=====이글 마지막 부분은 전역시 귀향하는 길에 모두 적었습니다===
=====수정하지 않은 원본 임니다====
1974년 8월 1일이 만기 전역일..
이글을 읽으시는 여성님들은 좀 이상 할거구
나이가 차이나는 회원 님들은 이해가 안갈거구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동감을 가질걸루 압니다 .
지나간 우리의 젊음, 한번 되세김 하여 보았습니다...
2002.07.17 일
瓦村 최중기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와촌님 , 얹저녁이 혹시 어제 저녁 맞나요? 경상도 사투리인거 같아서요 향수가 느껴지네요
소녀님 네에 겡상도 토박이 입니다 ㅎㅎ 아버님 고향이 경산 하양이시구여 어머님 고향은 대대로 울산 분 이셨습니다 ㅎㅎ
ㅎㅎㅎ 글 잘 보았습니다
나중에 와촌님 글을 모아 책을 한 권 내 드려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