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티는 닛산의 프리미엄 브랜드다. ‘무한대’(無限大)란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된 영단어 ‘Infinity’를 떠올리기 쉬운데, 정확한 철자는 ‘Infiniti’다. 물론 브랜드 이름에 내포된 의미 또한 ‘무한대’다. 지평선을 향해 무한히 뻗어나간 도로를 형상화했다는 인피니티의 엠블럼이 그 증거다. 결국 마지막 한 글자를 살짝 바꿔 나름의 독창성을 부여한 셈이다.
뿌리를 되짚어 보면 인피니티는 엄연한 일본 기업이다. 하지만 토요타의 고급 브랜드 렉서스나 혼다의 럭셔리 디비전인 어큐라와 마찬가지로 인피니티 역시 세계 최대의 단일 자동차 시장, 미국에서 싹을 틔웠다. 아울러 나머지 브랜드가 그랬듯, 인피니티도 화려하게 출범하기 전까지 주도면밀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1985년 11월, 닛산에 ‘지평선’이란 이름의 태스크 포스 팀이 비밀리에 결성됐다. 닛산이 TF 팀을 짠 이유는 럭셔리카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히 일 년 뒤 닛산은 별도의 고급차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다음 달 새 브랜드의 첫 번째 차가 될 Q45의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7년 7월, 브랜드 이름을 ‘인피니티’로 결정했다.
1987년 8월 인피니티 고유의 철학, ‘토털 오너십 익스피리언스’(TOE, Total Ownership Experience)가 완성됐다. ‘TOE’는 철저한 품질 관리와 뛰어난 서비스로 인피니티를 소유하는 행위 자체를 즐거운 경험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은 해 9월, 미국 동부와 중부, 서부를 담당할 세 곳의 인피니티 현지 사무소가 에디슨, 내퍼빌, 어바인에 설립됐다.
인피니티의 첫 번째 딜러가 1988년 1월 계약서에 서명했다. 같은 해 11월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에선 딜러를 대상으로 한 인피니티 Q45와 M30 품평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9년 1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 모터쇼에서 Q45와 M30이 공개됐다. 같은 해 11월, 51개 딜러가 일제히 Q45와 M30 판매에 나서면서 인피니티의 역사가 막을 올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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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비자는 V8 4.5ℓ 278마력 엔진을 얹고 0→시속 96km 가속을 6.7초에 끊는 Q45의 가공할 성능에 깜짝 놀랐다. 오늘날 기준으로도 고성능인데, 거의 20년 전이었으니 경외심 어린 시선이 빗발친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인피니티는 닛산의 기함, 프레지던트를 기본으로 만든 Q45로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 등의 고급 세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 라이벌은 200마력 안팎의 엔진을 얹고, 0→시속 96km 가속을 10~11초대에 마쳤다. 당시 인피니티 Q45의 성능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현재 인피니티의 핵심 브랜드 이미지 중 하나인 ‘고성능’은 이때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아가 Q45엔 네바퀴 조향 시스템(4WS), 액티브 서스펜션 등 첨단 장비가 가득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판매는 시원치 않았다. 미국 소비자는 그릴 없이 밋밋한 Q45의 얼굴에 거부감을 느꼈다. Q45엔 고급 세단이면 으레 두르기 마련한 크롬이나 우드그레인 장식도 거의 없었다. 나아가 서스펜션은 물론 시트마저 딱딱했다. 그건 인피니티의 의도였다. 고급 세단에 드리운 고정관념을 거둬내기 위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소비자의 저항은 거셌다.
1994년 인피니티는 부드러운 서스펜션을 더하고, 스티어링 기어비를 조정하는 등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관심이 이미 싸늘히 식은 뒤였다. 게다가 광고 전략에도 문제가 있었다. 일본 특유의 분위기를 강조해 ‘젠’(Zen)을 주제로 만든 광고엔 돌멩이와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인피니티의 제품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일본제 프리미엄 브랜드’ 가운데 대중적인 선두 주자는 혼다의 어큐라였다. 어큐라는 한때 대우자동차 아카디아로 팔렸던 레전드 2세대 모델을 통해 1980년대 후반부터 그 자리를 굳건히 다졌다. 비슷한 시기 프리미엄 브랜드 전쟁에 뛰어 들었던 토요타의 렉서스 또한 LS400으로 초반에 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히 심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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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가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서서히 본궤도에 접어들기 시작한 건 닛산 알티마를 기본으로 삼은 J30을 선보이면서부터. 그러나 찬사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렉서스와 달리 인피니티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리기만 했다. 모기업 닛산이 경영위기에 좌초될 위기였으니 인피니티 역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인피니티는 그렇게 격동의 1990년대 중반을 보냈다.
1999년 마침내 역사가 이뤄졌다. 르노가 닛산과 동맹을 맺은 것. 르노는 메이저 브랜드로 도약하고 싶었고, 닛산은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다. 르노는 레바논 출신의 프랑스인 카를로스 곤을 닛산에 투입했다. 일본에 온 곤은 닛산이 일본에서 판매 중인 46차종 가운데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는 모델이 43차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곤은 망설임 없이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르노·닛산 통합 구매 조직을 세워 부품 구입비를 20% 줄였고, 2만1천 명을 감원했을 뿐 아니라 두 곳의 파워트레인 공장과 세 곳의 조립 공장을 닫았다. 아울러 플랫폼 통합 및 부품 공유도 서둘렀다. 그 결과 적은 비용으로 훨씬 다양한 모델을 쏟아낼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울 만큼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던 일본 제2의 자동차 메이커 닛산은 르노와 힘을 합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모기업 닛산이 다시 일어서면서, 2000년까지만 해도 존폐의 기로에서 방황하던 인피니티 역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인피니티의 극적인 반전을 이끈 일등공신은 2003년 선보인 G35와 FX 시리즈였다.
세단, 쿠페로 선보인 G35는 엔진을 앞 차축과 운전석 사이에 얹는 닛산의 FM 플랫폼을 뼈대로 삼아 무게배분(앞 52 : 뒤 48)이 뛰어났다. 여기에 명기(名器)로 손꼽히는 VQ35DE 엔진을 얹어 폭발적인 성능을 뽐냈다. FM 플랫폼을 이용한 크로스오버 SUV, FX는 미끈한 스타일과 강력한 성능, 자극적인 핸들링으로 인피니티의 인기에 불을 활활 지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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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SUV의 고정관념을 단숨에 허문 FX시리즈가 선보이면서 인피니티의 쇼룸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계층의 고객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아울러 G35 쿠페와 세단이 연이어 공급되면서 인피니티 딜러는 진출 이래 가장 튼실한 제품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판매 역시 2001년과 2003년 사이에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인피니티의 FX와 G시리즈는 ‘일본제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젊은 수요층의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중산층 가장을 위한 렉서스나 30대 중반 이후로 타깃을 잡은 어큐라와 달리 젊은 잠재 수요층을 럭셔리 세그먼트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인피니티는 20~30대 젊은이가 언젠가는 꼭 한번 갖고 싶어 하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인피니티는 이렇듯 경쟁력 뛰어난 제품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2세대로 거듭난 G35 세단과 G37 쿠페,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FX와 M 시리즈로 탄탄한 입지를 다지면서 인피니티는 이제 ‘일본제 프리미엄 브랜드’의 파이를 갈라먹는 입장이 아닌,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오리지널 프리미엄 브랜드’의 파이를 뺏는 입장에 서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2월 설립된 한국닛산이 2005년 7월말 공식 출범과 함께 인피니티 판매에 나섰다. 한국은 북미시장 이후 독립법인과 인피니티 독립 판매망을 갖추고 진출한 첫 번째 시장. 현재 Q45, M35와 45, FX35와 45, G35 세단, G37 쿠페, EX35 등 총 8차종을 판매 중이다. 지난해엔 총 3천4대를 판매해 전년 대비 75% 성장을 거뒀다.
현재 인피니티는 서울 강남의 SS모터스, 서초의 한미모터스, 경기 분당의 SK네트웍스, 부산 반도모터스 등 총 4곳의 딜러를 통해 판매 중이다. 한국닛산은 올해 안에 대전과 광주, 대구 등으로 딜러망을 확대해 2011년까지 8~11개의 딜러를 거느릴 예정이다. 아울러 닛산 기술 트레이닝 센터도 오픈할 계획이다. 한국닛산의 올해 인피니티 판매목표는 3천500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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