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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세상에 대한 헌신: 칼뱅주의, 노동, 자본주의(1)
16세기 교회사가 롤런드 베인턴(Roland H. Bainton)은 기독교가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면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을 지배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두 가지 입장 모두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대격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급진적인 종교개혁가 중 많은 이가 강압적이었던 당시 사회조직을 배척했다. 선서하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군 복무를 하거나 무기를 소지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정치에 무관심하고 속세를 등지는 태도로 일관하면 결국 세상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급진주의자들은 로마제국 안에 있었으나 로마제국에 소속되지는 않았던 콘스탄티누스 이전 세대의 교회를 본받아, 자기네 공동체를 더 큰 사회 안에 있지만 그 사회에 소속되지는 않는 '대안 사회'로 여기곤 했다.
칼뱅주의는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6세기 종교운동 중 세상을 긍정하는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칼뱅주의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세상을 긍정했다. 느긋하게 관념적 사색을 즐기기보다는 특정 상황에 대처했다. 재차 말하지만, 칼뱅은 신학 면에서도 영성 면에서도 안일한 일반화나 비현실적 관념을탐닉하지 않았다. 카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과 앤서니 트롤럽(Anthony Trollope)의 《워틀 박사의 학교DDoctor Wortle's School》를 통찰력 있게 비교한 글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바르트의 도 덕원리가 매우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바르트가 설명하는 도덕적 삶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트롤럽이 들려주는 구체적인 이야기와 비교하면 이 추상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트롤럽이 설명하는 도덕은 특정 개인과 상관없는 일반 원칙 대신 개개의 인물과 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바르트의 윤리 사상은 인간의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서 있지 않다.
칼뱅에게는 이런 약점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칼뱅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의 실제 사회생활,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다양한 문제와 기회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결의를 발견한다. 라인홀트 니부어(Reinhold Niebuhr)가 1920년대에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배운 교훈을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배운 것 같다. 니부어는 1929년에 출간한 《길든 냉소주의자의 노트에서 떨어진 잎새 Leaves from the Notebook of a Tamed Cynic》에 이렇게 적었다.
만약 목사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실제로는 부인하는 추상적인 이상理想에 헌신하지 말고, 자신과 타인이 현 문명사회에서 맞닥뜨린 사회문제의 타당성과 실행 가능성을 고민하라. 그러면 그 즉시 사역에 현실감각과 힘이 생길 것이다. 칼뱅의 설교집과 종교 저술에서 도드라지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칼뱅은 사회, 정치, 경제 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상황과그에 따르는 모든 위험성을 놓고 고민한다. 심지어 16세기 사상의주된 요소인 근심에 관해 분석한 글에서도 칼뱅은 추종자들에게근심을 이겨 내는 것을 딴 세상에 속한 활동이 아니라 명확하게 세속적인 활동으로 여기게 한다. '반신학적 신학'이라는 말을 신학의 결핍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명확하게 세상을 긍정하고, 사변적 태도에 반대해 온 칼뱅 사상의 궤적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칼뱅의 사상을 '반신학적 신학'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
칼뱅은 '거룩함의 세속화(앙리 아저)'를 통해 인간 생활의 전 영역을 거룩한 성화와 인간적인 헌신의 범위 안에 넣었다. 칼뱅은 이것이 바로 삶의 성화이고, 노동의 성화는 삶의 성화를 떠받치는 주요기둥이라는 인상을 추종자들에게 강하게 심어 주었다.
앞으로 살펴볼 테지만, 칼뱅의 후계자들은 이론과 실제를 연관시키려는 이 끈질긴 투지를 공유했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테오도르 드 베즈의 저술을 읽다 보면 세속적 수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글 전체를 지배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종교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러나 이런 집착이 세상을 긍정하는 베즈의 신학에서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후기 칼뱅주의자들이 세상일에 참여하는 것을 두고 칼뱅의 사상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라면서, 이를 두고 ‘영적 가르침에 관한 육체적 해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옹호하기 어렵다. 칼뱅의 신학은 본래 세속적 행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칼뱅의 후계자들이 발전시킴으로써 좀 더 엄격한 이념적 토대 위에 놓이게 된 칼뱅의 신학은 이런 세속적 경향을 원래부터 지향했다. 세속의 영역에서 불굴의 의지로 활동하는 칼뱅주의자들의 성향은 깊고 깊은 신학의 샘을 통해 키워지고 터득된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학자들은 이 샘을 간과하기 일쑤다.
그러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상은 세상에 지배당하는 자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기준에 굴복한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너무 많다. 칼뱅주의자의 인생관을 뒷받침하는 강한 긍정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절묘한 균형은 너무 쉽게 깨져서 결국 철저히 분리되거나 한 덩어리로 합쳐지기 일쑤다. 보통은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법이다. 칼뱅주의에는 삶을 대하는 아주 세속적인 자세가 잠재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세상이 대립하는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거룩한 것이 무너져 세속적인 것이 되고 만다. 도덕, 경제, 사회, 정치를 아우르는 칼뱅주의의 체계와 가치는 신학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지만, 쉽게 신학적 토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문화적 침식 과정을 거쳐 이런 체계와 가치가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서구 사회, 특히 북아메리카가 칼뱅주의를 수용하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다.
칼뱅은 신앙과 세상이 대립하는 정교한 관계를 구축하여 세상 속에서 긍정적인 행동을 할 기회를 주되 그에 따르는 위험을 인지하고 피할 수 있게 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칭찬할 만한 삶의 형태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삶이다. “우리는 수도사의 독신 생활이나 일상과 단절된 철학적 삶을 무척 존경하지만 교회와 사회를 관리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일상을 경험하고 그 습관에 열중해본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자신을 쏟아붓고 헌신하라는 격려와 요구를 받는다. 중세 시대에는 수도사 개개인이 세상을 등지고 그들이 섬기는 종교 기관은 세상에 찬동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칼뱅의 사상에는 이런 중세 수도사의 태도가 발붙일 곳이 없다(IIIxi3-4).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일과 세상 근심에 열중하는 동안에도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겉으로는 세상에 투자하고 헌신하는 한편, 속으로는 세속의 일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태도를 길러야 한다. 신자들은 능동적으로 세속의 영역에 열중하되 수동적으로 그 속으로 가라앉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고 그것들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고, 마치 외국을 지나가듯 이 세상을 지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태도로 볼 때 칼뱅주의는 자신들의 종교 체계 못지않은 역량과 포괄성을 갖춘 사회, 자본, 정치권력에 관한 이론을 개발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운동의 경제적 의의를 깔끔하게 요약한 '칼뱅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광범위한 주제에 주목하려 한다. 많은 사람이 칼뱅주의가 자본주의에 우호적이라고 믿는다. 칼뱅과 그의 후계자들이 자본주의를 대하는 태도의 기원과 특이성을 분석하기 전에 이 주제에 관한 학술 논의를 지배해 온 이론인 베버 테제를 소개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베버 테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난 때가 16세기라고 선언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에 격렬한 반감을 표출하던 아민토니 판파니(Amintoni Fanfani) 는 중세 가톨릭이 철저한 반자본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를 더 잘 아는 이들은 이런 주장을 부정한다. 중세 시대에 메디치 가문이나 푸거 가문같은 금융기관이 운영되었다는 것은 종교개혁 이전에 자본주의의 전제와 방식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종교개혁 직전의 앤트워프 아우크스부르크, 리에주, 리스본, 루카, 밀라노 같은 도시는 모두 중세 자본주의를 계승하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본주의의 종교적 의의도 무시할 수 없다. 메디치 가문은 돈을 주고 교황직을 샀고, 푸거 가문은 독일과 폴란드, 헝가리에서 주교를 암명할 때마다 거의 모두 관여했다(카를 5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할 때도 자금을 댔다. 이는 종교개혁 직전에 자본주의가 중요한 종교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1521년에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는 은행을 매각해서 교황직 매수 자금을 마련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회계사였다가 중세 사학자가 된 레이먼드 드 루버(Raymond de Roover)의 선구적 연구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전제와 방식은 중세 사회 전반에 깊이 배어 있었다." 단순히 성직 매수에만 관여했던 것이 아니다. 좀 더 최근의 연구들은 사회생활과 지성 생활 모두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자본주의가 중세 생활의 필수 요소였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을 만들어 냈다거나 프로테스탄티즘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겼다고 말하는 건 정말 터무니없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형태의 베버 테제, 즉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설명은 베버의 진의와도 어긋나고 역사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 ..… 종교개혁에 어떤 영향을 받아서 오직 그 결과로 생겼다는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펼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강조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꽤 오래전부터 의미 있는 형태의 자본주의 사업체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주장을 충분히 반박하고 남는다. 베버 테제는 훨씬 더 미묘하므로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베버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자본주의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물욕이나 소유욕은 중세 호상의 특징이자 전통적인 소농 사회의 특징이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근대 초기에 이 정신이 생겨난 것으로 파악했다. 베버는 스스로 '모험가적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인 중세 시대 자본주의와 근대 자본주의를 비교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짚어냈다. 베버에 따르면,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기회주의적이고 파렴치하다. 화려하고 퇴폐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본소득을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는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기초가 탄탄하다. 물품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금욕주의를 실천했다. 베버의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는 매우 부족하지만, 어쨌거나 베버는 삶을 즐기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할 정도로 근대 자본주의에는 향락주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극적인 방향 전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고 베버는 묻는다.
종교가 그 원인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베버는 중세 사회가 영리활동을 용인하긴 했지만, 보통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14세기와 15세기 피렌체에 관한 분석을 토대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금융회사를 운영한 푸거 가문의 역사를 이따금 거론하면서, 베버는 '자본의 축적'과 '자본을 축적한 자들의 영혼 구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야코프 푸거(Jakc Fugger)는 자기가 하는 금융 사업이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구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행동들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이 발흥하면서 자본의 축적을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가 나타났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Benjamin Franklin) 같은 17세기 칼뱅주의 저술가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발견했다. 이들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행동을 칭찬하는 한편, 그렇게 축적한 자본을 낭비하는 행동을 비판했다. 자본은 낭비하지 말고 늘려야 했다.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태도 차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성공한 중세 사업가들은 죄책감을 안고 죽었고,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 쓰도록 교회에 돈을 남겼다. 성공한 프로테스탄트 사업가들은 생전에 생산 활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죽을 때 다른 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본받도록 돈을 남겼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꼭 필요한 심리적 전제 조건을 만들어 냈다.” 실제로, 베버는 칼뱅주의가 신념 체계로 자본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심리적 충동을 유발했다고 보았다. 베버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리고 이 개념을 칼뱅주의의 예정론과 연결 지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세속적인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가톨릭교를 믿는 동시대인들은 불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본을 손에 넣거나 방탕하게 자본을 낭비하지만 않으면, 자본을 생성하고 축적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은 서구 문명의 형성에 견줄 만큼 중요하므로, 장 칼뱅이라는 종교개혁가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람들에게 근대 세계의 근간이 되는 충동을 부추긴 공이 있는 셈이다. 물론 칼뱅과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을 연결지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칼뱅이 그랬을까? 칼뱅이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과 정말 관계가 있을까? 베버가 분석한 것은 주로 17세기 상황이다. 존 버니언(John Bunyan) 과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처럼 베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증인들은 칼뱅이 죽고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전혀 다른 사회 상황에서 글을 쓴 잉글랜드의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칼뱅과 후기 칼뱅주의자의 태도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추적할 수 있을까? 만약 베버의 주장대로 이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그것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본주의를 대하는 칼뱅의 태도를 조사하고 후기 칼뱅주의자들의 저술에 나타난 변화를 추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