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26: 52. 칼로 망한다. - 마 26: 54. 성경을 이루심
마 26: 52. 칼로 망한다.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
예수는 칼을 휘두른 제자에게 네 칼을 칼집에 다시 꽂도록 하셨다.
그리고 칼로 다스리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가르치셨다.
1]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이 명령은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2]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2-54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평행구가 없다.
계 13: 10에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는 말이 나오며, 창 9: 6에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하나의 격언구로 사용된 듯하며 예수에 의해 영원한 진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 창 9: 6 -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예수께서는 이와 흡사한 맥락에서 5: 39 이하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바 있다.
이 말씀 속에는 생명에 대한 존엄 사상이 들어있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신성하며 그것을 해하는 자에게 징벌이 주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意志)가 내포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단순한 평화주의에의 호소라고 해석한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한 것이지 내어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며 칼의 사용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려 한다.
두 가지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나 본문의 직접적인 뜻과는 거리가 멀다. 문맥상 칼의 사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근거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무력 앞에서의 무기력한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몇 가지 저의는
① 칼을 사용함으로써
불의한 판결을 일삼는 사악한 집단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Luther).
② 칼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에 반하는
세상 국가들의 힘의 통치력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칼의 사용을 금하신 것이다.
* 요 18: 36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2) 배후 세력에 대한 선언
이와 함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해하려고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올라온 무리와 그 무리의 배후 세력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다.
즉 너희들이 '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고귀한 생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너희 자신들이 '검'앞에 거꾸러짐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기독교는 칼을 사용하지 않는다. 폭력이나 물리적 힘으로 사람들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돈이나 사람의 지혜나 조직력을 의지하여 일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 전하고 사랑으로 실천하고 순교적 죽음도 사양치 않는다. 사람들이 볼 때 무력(無力)하게 보일지 몰라도,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3] 폭력과 비폭력
겟세마네 동산에 밤이 깊어졌다.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기도'를 드리시던 예수님께서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 45)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가룟 유다가 나타나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실로 가증한 입맞춤이었다. '친밀'을 '배반'으로 바꾸는 입맞춤이었다. 유다의 뒤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파송한 큰 무리들이 칼과 몽치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잡으려 했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다. (요 18: 10). 그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52절)고 하셨다. 이것은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1) 폭력의 개념
뉴우톤 가아버는 폭력에 대해 규정하기를 '개인적 폭력에는 강간, 살인과 같이 개인에 대하여 물리적인 공격을 하는 것과 개인이 위협과 강요를 당하게 하는 심리적 공격이 있는데 전자는 드러난 폭력이고 후자는 숨겨진 폭력이다'라고 했다.
제도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전쟁과 같은 공식적 제도에 의한 물리적 폭력과 노예제도같이 사회 구조로서 인간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공격이 있는데, 전자는 드러난 폭력이고 후자는 숨겨져 있는 폭력'이라고 했다.
로버트 아우디는 '폭력이란 사람이나 동물에게 가하는 물리적 공격, 심한 물리적 악용, 또는 물리적 투쟁과 사람이나 동물에게 가하는 심리적 악용이나 신랄한 공격이며, 재산을 악의적으로 파괴하거나 손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론들을 요약하면, 폭력이란 그것이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공격과 상처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상처 없는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2) 폭력을 지지하는 견해
폭력을 지지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두 가지 생활 양태로 구분한다. 즉 퇴폐적 생활 양태와 재생적 생활 양태다.
퇴폐적 생활 양태는 정치인들이나 소유자들로서 소위 사회의 지도 계층 또는 부유 계층을 이름인데 이들의 생활 양태는 자기 평가가 없고 직무 이행 과정에서 타락될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이어서 자기만족만을 추구하여 대중을 기만, 통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반면에 재생적 생활 양태는 위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마음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당장에 얻을 수 있는 어떤 결과 때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명령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생활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후자는 전자의 생활 양태를 정복할 수 있는 도덕적 명령으로서의 행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에 수반하는 폭력은 지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파농은 폭력에 대하여 '폭력은 하나의 정화 시키는 힘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주민은 부하고 원주민은 가난한 남미의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부의 재분배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원만히 진행되지 않을 때 폭력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 폭력은 사회 정화의 힘으로써 지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 폭력은 그들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논리다.
(3) 폭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폭력에 대하여 반대한다. 본문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타인을 살상할 수 없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출 20: 13-17)는 계명은 인간에게만 있는 계명이며 이 모두는 한결같이 폭력을 거부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폭력을 배제하는 데에서 그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폭력은 동물적인 인간에게서나 가능한 것으로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결코 폭력적일 수 없다.
둘째는 진정한 힘은 '폭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비폭력적 힘이다. 지식의 힘, 영혼의 힘은 물리적 힘보다 강하며 그 차원이 높다.
비폭력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수단으로서, 또 사회 질서와 정의를 회복하는 방법으로서 힘을 가지고 있다.
비폭력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권력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관계 개선의 호소다. 비폭력은 사랑과 화해를 목적으로 한다.
셋째, 폭력은 다시 새로운 폭력을 유발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볼 때 폭력은 궁극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랑과 믿음만이 죄악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가 있다.
마 26: 53. 천사를 보내시게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
군단(영, 營)이라는 원어(레게온)는 6천명 정도의 군인들로 편성된 로마제국의 군대 단위이다. 열두 군단은 7만 2천명 가량의 군인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수의 천사들을 뜻한다.
1]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성부께 대한 성자의 귀속이나 의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성부와 하나 된 자이신 성자께서 마치 동맹군의 원조를 호소하듯 성부께 청원하는 것을 의미한다(the Pulpit Commentary).
2]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열둘'이라는 숫자는 제자들의 수와 열두 지파의 수와도 일치하는 매우 의미 깊은 숫자로서 성경 문학적으로 '완전수'에 해당한다.
'군단(영, 營)'으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λεγεών)은 로마 군대의 일개 군단(軍團)을 뜻하는데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팔레스타인에는 상당수의 로마군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했었다. 아우구스투스 당시의 일개 군단은 보병 6100명, 말 726필 규모였다(Robertson).
따라서 '열두 군단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호출하기만 한다면 불과 몇백 명에 불과한 체포자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었다.
예수께서 저들에게 잡히신 것은 자기 자신을 막아낼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에 열 두 영도 넘는 천사를 보내셔서 원수들을 쳐부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진중에서 하룻밤에 18만 5천명을 쳐서 죽이신 일이 있으셨다.
* 사 37: 36 -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이것은 왕하 6: 17처럼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지식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불병거(왕하 6: 17), 스랍(사 6: 1-3), 그룹(창 3: 22-24), 천천만만의 천사(단 7: 10)의 통치권자로서 광야 시험 후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으며(4: 1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천사의 도움을 받으셨다(눅 22: 43).
* 왕하 6: 17 -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사 6: 1-3 –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창 3: 22-24 –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단 7: 10 -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마 4: 11 -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눅 22: 43 -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다만 예수께서는 성경에서 가리키는(54절) 바와 같이 아버지의 뜻 곧 인류 대속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혀 주신 것이다.
* 히 1: 14 -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마 26: 54. 성경을 이루심 -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힘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예수님 잡는 그들을 당장 다 멸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잡혀 죽으셔야 했다. 성경의 성취는 곧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에 대한 예언들과 예표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예언들과 예표들은 성취되어야 하였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는 그 예언들과 예표들대로 죽어야 하셨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셨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이었다.
1]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베드로가 휘두른 '칼'로나 하늘 천군 천사의 도움을 빌어 저들에게 잡히지 아니하면, 즉 순간적인 인간의 충동대로 행동하면 이라는 뜻이다(Bruce).
2]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철저한 마태의 신학, 즉 예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누가복음의 경우,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예는 드물다.
마가 역시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막 14: 49) 말이 있지만 마태의 거듭되는 강조적 표현보다는 그 강도가 약하다.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당하는 배반과 체포, 그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은 결코 단순히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에 당신의 전 관심과 의지를 집중시키셨다.
본문의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은 예수의 수난과 관계된 구약의 여러 예언들로 가룟 유다의 배신(시 41: 9), 은 삼십에 팔림(슥 11: 12),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힘(사 53: 12), 수족이 찔리심(슥 12 : 10) 등이다.
* 시 41: 9 -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슥 11: 12 -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 슥 12: 10 –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 사 53: 12 -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장면에 대한 예언으로서 사 53: 7에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성경의 예언대로 잡혀 죽어야 하셨다.
성경의 성취는 곧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다. 구약성경의 많은 내용은 예언적이다. 특히, 메시아의 강림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많이 있다.
성경의 예언들은 성취되어야 했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는 예언대로 죽어야 하셨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셨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이다.
3]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주님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시고 계실 때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와 입을 맞추자 곧이어 원수의 무리가 손을 대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 성급한 제자 베드로가 그의 사랑하는 주를 보호하고자 대제사장의 종. 말고란 자의 오른편 귀를 잘라 떨어뜨렸다. (요 18: 10).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라는 말씀으로 책망하시고 곧이어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에게 교훈의 말씀을 주셨다.
(1) 인간이 보기에 좋은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베드로는 병사들로부터 주님을 지키려고 많은 로마 군사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칼을 빼들고 일어섰다.
이러한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의리 있고, 용기 있고, 스승을 사랑하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지 않고 도리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책망하셨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해서 너의 인간적인 정에서 나오는 능력이나, 또 원수들의 능력보다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큰 능력이 내게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면 메시야의 수난에 관한 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이루겠는가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대적과 대항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은 인간이 보기에 좋은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가르쳐 주셨다.
구약성경을 보면 베드로와 같이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중 아합 왕은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벤하닷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냄으로 하나님께 아람 왕의 생명 대신 죽음의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전에 인간이 기뻐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먼저 찾지 않는가? 인간이 좋아하는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 생각지 않는가? 인간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 인간의 소유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54절)라는 주님의 교훈은 '베드로야 너의 소유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간접적인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님과 계속적으로 같이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떨어져야 했고 죽음을 감내하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떻한가? 좀더 빠르게, 좀더 높이, 좀더 많이라고 욕심을 내면서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더 큰 건물의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좀더 나은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현재보다 부하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지 않는다. 빌립 전도자가 큰 시장가에 가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 한 사람에게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사막으로 간 것같이, 우리의 지나친 욕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3) 충동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는 말씀은 충동을 받은 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교훈하시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병사들의 위협으로부터 사랑하는 주님을 보호해야겠다는 충동을 느껴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그것이 주님과 하나님을 위하는 최선의 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잘못한 일이라 책망하셨다.
우리도 역시 충동이 이는 대로 행할 수 있다.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전도하고 싶을 때 전도하고, 봉사하고 싶을 때 봉사하고, 성경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하고, 그러다 하기가 싫으면 그만 두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충동적으로 행한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에 이끌려 갈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뜻은 까마득히 잊고 인간들의 체면만을 생각하여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베드로처럼 혈기를 부릴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온전치 못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시길 바란다. 욕심에 이끌려 갈 때 주님의 뜻을 구하시길 바란다. 인간들의 거울에 비쳐진 내 자신의 모습보다는 하나님의 거울에 비추어진 모습을 찾으시길 바란다.
우리의 마음에 충동이 일어날 때는 조용히 찬송을 부르시길 바란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아름다운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