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
기원전 334년의 봄이 되면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 동맹'과 마케도니아 병사들을 이끌며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게 된다. 아시아에 도착한 후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트로이 유적지로 알려진(사실은 아니지만) 일리움으로 가서 트로이 전쟁의 유물들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영웅 아킬레스와 아이아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서 제물을 바친 뒤, 일리움의 아테나 신전에 안치된 아킬레스의 갑옷이라고 알려진 갑옷과 방패를 그의 것으로 맞바꿨다.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스의 옷과 방패를 페르시아군과 처음 맞닥뜨리는 그라니코스강에서 차려입었다. 그라니코스강의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살해당할 지경에 이를 만큼 힘들게 전투를 치렀지만, 그의 승리는 완벽했으며 다리우스로 하여금 알렉산드로스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첫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나머지 경력을 특징지을 리더쉽의 자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는데, 전투 속에서 그는 무모할 정도로 위험 속으로 스스로를 들이밂으로써 용맹을 과시했다. 필리포스 2세의 가장 신뢰하는 장군 중 하나이자 알렉산드로스의 부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그에게 주의 깊게 행동할 것을 꾸준히 주문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새겨듣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비교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미약한 해군과 희소한 자원만을 가지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원정을 나왔다. 따라서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될 수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망설임 없이 주사위를 던졌다. 그가 출정할 때면 필리포스 2세의 신뢰받던 다른 장군인 안티파트로스에게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을 맡겼지만, 만약 자신이 죽을 경우에 대비해 후계자를 임명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기 전에도 그의 첫 번째 결혼과 후계자 문제에 대한 조언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두 세대가 지나면 헬레니즘 세계는 그의 무책임함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다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소스였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군을 직접 지휘하며 알렉산드로스가 산맥과 바다 사이의 좁은 평원에서 전투를 벌이도록 교묘히 이동시켰다.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자신이 재능 있는 전략가임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정예 기병대를 이끌며 다리우스가 있는 페르시아군의 중심부로 돌격을 감행했고, 다리우스는 자신의 근위대를 도륙하며 다가오는 이들을 보자 뒤돌아서서 도망쳤다. 여기서 전투의 향방은 결정되었고 그는 승리를 쟁취했다. 이소스 전투가 끝난 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보물 상자와 그가 전장에 데리고 왔던 가족들을 생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부유해져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지중해 동부 해안선을 따라 쭉 내려가며 이집트에 다다랐다. 거기서 그는 앞으로 그가 세울 어떤 도시들보다도 으뜸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상업 기지 중 하나이자 그리스 과학과 문학의 중심이 될 터였다.
그러는 동안 다리우스는 두 번째로 군대를 조직하여 BC 331년 10월 1일 가우가멜라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맞서 싸웠다. 가우가멜라에서, 다시 한 번 알렉산드로스는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이끌며 페르시아군의 중앙으로 돌격했고, 또다시 다리우스는 전장에서 도망쳤다. 다리우스의 도주가 전투를 결정지었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향하여 바빌론에 도착했고, 바빌론의 페르시아인 사트라프(태수 직책)이자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마자에우스는 도시 바깥으로 나와 그에게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자에우스로 하여금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하도록 한 뒤 다시 그에게 바빌론의 사트라프 직위를 맡겼다. 하지만 마자에우스는 사트라프로서 모든 권력을 갖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권력을 두 명의 마케도니아인과 나눠야 했기 때문인데, 두 명의 마케도니아인 중 한 명은 바빌론의 군사 주둔지의 지휘관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공물을 모아야 할 임무를 맡은 자였다. 그럼에도 이 인사 조치는 페르시아 귀족이라 하더라도 알렉산드로스의 편에 가담한다면 환영받음과 동시에 보상 또한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점을 널리 보여 주었다.
(영화 알렉산더의 한 장면, 바빌론으로 입성하는 알렉산더)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수사로 이동했다. 그곳은 페르시아 궁정이 바빌론의 혹독한 더위를 피하기 위해 피서지로 애용하던 곳이었다. 수사의 사트라프는 페르시아 귀족인 아불리테스였고 그는 싸우기도 전에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다. 수사의 궁전에는 페르시아 왕들이 쌓아 놓은 막대한 양의 금괴와 은괴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에서 복무하는 그리스 용병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주조한 금화들이 산더미처럼 놓여 있었다. 이 호화스러움은 마케도니아인들을 경악시켰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전우들의 취향을 더욱 고급스럽게 바꿔 놓았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리우스가 여전히 알렉산드로스에 대적할 군대를 모집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BC 330년 초가 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아불리투스를 수사의 사트라프로 재임명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적인 수도이자 제국의 복속민들이 매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페르세폴리스를 향해 출발했다. 페르세폴리스는 수사보다도 더욱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창설자인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그는 7,000 마리의 낙타를 비롯한 여러 짐승들을 통해 그곳의 보물들을 수사로 실어 나르게 했다. 그러고는 그의 병사들에게 페르세폴리스를 원하는 만큼 약탈하고 겁탈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후 이 거대한 도시는 불타게 된다. 고대의 전쟁은 잔혹한 일이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원칙을 충실히 따르며 이따금씩 관용과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간헐적으로 행하곤 했다. 봄이 되면 그는 엑바타나에서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던 다리우스를 쫓아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군대 소집 명령은 무시되었다. 제국의 사트라프들은 그를 패배자로 여겼고 그의 명령에 불응하고 나섰다. 알렉산드로스는 엑바타나에 도착하기 전에 탈영병들로부터 다리우스가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도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계획을 수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 70살이 된 고령의 노인인 파르메니온에게 군대의 일부를 맡기며 페르세폴리스에서 빼앗은 보물과 함께 엑바타나로 가게 했고, 그는 나머지 군대와 함께 찌는 듯한 더위 아래서 다리우스를 추격했다. 마침내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에서 다리우스를 붙잡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발견했을 때는 다리우스가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다. 다리우스는 동행하던 사트라프에게 배신당해 칼로 여러 번 난도질당한 뒤 그곳에서 죽었던 것이다. 그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에 매장하며 왕의 지위에 걸맞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준 뒤, 스스로를 다리우스의 계승자이자 그의 복수자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코린토스 동맹의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수여하며 집에 갈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군대에 남겠다는 자들에게는 추가로 보너스를 지급했다. 코린토스 동맹이 인준했던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는 이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해의 영토)
제국의 건설
하지만 코린토스 동맹의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인들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군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헤카톰필로스(현재의 Qumis 지역)에서 머무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 사이에 팽배한 불만으로 초래된 파업에 직면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있음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들이 새로 얻은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해야만 한다고 간곡히 부탁하며 새로운 목표의 어려움을 낮춰 불렀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로 하여금 곧 임무가 완수될 것이라 믿게 했고, 아마 자신조차 그렇게 믿었을지 모른다. 사실 그들의 과업은 이미 시작됐지만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제까지 그리스인들이 본 적 없는 종류의 도시들이 있는, 새롭고 낯선 영토에 발을 디딛고 있었다. 이미 이집트에서 그의 이름을 본떠 알렉산드리아를 건립한 적이 있던 그는, BC 330년에 아레이아의 페르시아 속주에서 두 번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게 된다. 그는 20개의 알렉산드리아를 더 지었다. 그가 지은 도시 중 가장 멀리 있는 도시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가장 멀리 있는 알렉산드리아)로서, 알렉산드로스는 제국 곳곳에 이러한 도시들을 심어 놓았다. 이러한 '알렉산드리아' 도시들은 처음엔 용병들이 정착한 군사 주둔지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도시로 인식되었으며, 점차 그리스 문화를 페르시아 제국의 후미진 영토 곳곳으로 전파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이 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이 공고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저항을 겪지 않았지만, 점차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 상황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배후에서 꾸며진 반란을 발견했다. 자신의 밑으로 흡수한 페르시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신속하고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를 다리우스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인식시키는 데에도 신경 썼으며, 이 일환으로 다리우스 살해 주도자들의 처벌을 페르시아인들에게 맡김으로서 그들의 충성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처럼 차려입었고 이에 마케도니아 장교와 군대는 경악했다. 복장은 민족성의 상징이었고,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의 의상을 버린 것은 그의 마케도니아 유산의 일부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2년 동안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북부 원정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박트리아 원정에서 그는 옥수스 강 남쪽의 비옥한 평야 지대를 차지했다. BC 327년의 이른 시기에,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부족장의 딸 록산나와 결혼했는데, 이는 결혼을 통해서 박트리아 원주민들의 지원을 얻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록산나는 아름다웠지만 그는 단순히 사랑뿐만이 아닌 정치적인 계산까지 감안해서 결혼한 것이었다. 록산나의 아버지 옥시아르테스는 강력한 부족 지도자였고 그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박트리아의 반란군 지도자들을 그의 편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을 때 록산나는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태중의 아기가 바로 마케도니아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그마저도 결국은 계승자 간의 투쟁과 모략 사이에서 죽고 아르가이 왕가의 혈통은 끊기게 된다.
그의 다음 목표는 인도였다. 같은 해에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침공했다. BC 326년, 알렉산드로스는 젤룸 강에서 인도인들과 대전투를 치렀다. 인도군의 '라자'이자 그리스인들이 포로스라고 부르는 지휘관은 12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대동한 상태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포로스를 전략으로서 압도했고 패배시킨 뒤 포로로 사로잡았다.
하지만 승자도 손실이 너무 큰 싸움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투가 끝나자 포로스를 가신으로 삼은 뒤 그와 그의 왕국을 풀어 주었다. 예전부터 페르시아인들은 이 지역의 라자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즐겨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관습을 따랐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 나아가길 원했다. 그는 갠지스강 유역에 있다는 거대한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탐험가가 아닌 정복자로서 그곳에 방문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계속된 원정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베아스 강둑에서, 그리스인들이 히파시스라고 부르는 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알렉산드로스는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이들이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도 여전히 힘든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펀자브 하류 지방의, 호전적인 부족이 거주하는 말리의 성채를 공격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무모할 정도로 몸을 들이밀었으며 거의 죽을 뻔 했다. 귀향길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이후 그는 크라테로스라는 장군에게 군대의 일부를 맡긴 뒤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질러서, 카르마니아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인도의 젤룸강에서 만든 함대에게 페르시아 만 연안 지방을 탐험하라고 명령한 그는, 함대가 앞서 나가는 길을 따라 나머지 군대를 이끌며 해안가로 이동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했다. 함대는 계절풍에 의해 발이 묶였고,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경로는 너무 힘이 들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함대가 알아서 헤쳐 오도록 내버려 둔 뒤 게드로시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혹독한 행군을 감행했다. 이 행군에서 여자와 아이들, 병든 자들, 부상병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함대도 시련을 겪었지만 적어도 이들은 페르시아 만에 도착할 때까지 두 명의 희생자밖에 나오지 않았다.
BC 324년, 그해 3월에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도착했다. 예로부터 페르시아 왕들이 여름 궁전으로 사용했고 이미 그가 6년 전에 다녀왔던 곳이다. 수사에 머무르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얻은 광활한 제국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 극적인 계획을 보여 주었다. 그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을 주문했다. 그의 91명의 장군들과 1만명의 병사들은 아시아 여성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 스스로도 페르시아 왕실 가문으로부터 두 명의 아내를 맞이했다. 그중 첫 번째는 다리우스 3세의 딸이었고 두 번째는 그 선왕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3세의 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유전자가 아우러진 새로운 통치 계급을 양성하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인들은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오리엔트인 애호에 철저히 냉담하게 반응했다. 마케도니아의 선대 왕들은 '제1인자'였지, 동방의 폭군이 아니었다. 수사부터 바빌론까지 이어지는 페르시아 왕실 도로가 놓인, 오피스에 군대가 다다랐을 때, 마케도니아인들의 불만은 흘러 넘쳤다.
그곳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거대한 헬레니즘 도시인 '티그리스강의 셀레우케이아'가 반대편 강둑에 건설될 곳이었다. 오피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큰 규모의 젊은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 식으로 싸우는 방식을 훈련하고 군대에 합류시키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보냈다. 이에 군대는 불안함과 역겨움을 동시에 내비치며 이 젊은 페르시아인들을 억지로 받아들인다. 그러고 난 뒤 알렉산드로스는 집회를 열어 발표했다. 내용인 즉, 나이가 들고 복무에 부적합한 병사들은 명예 제대시킬 것이란 것이었다. 마침내 불만이 공공연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폭동에 직면했고 이에 대한 그의 대응은 신속하고 무자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호위병에게 반란의 주동자 13명을 색출한 뒤 처형해 버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군대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설득하기 위해 이틀을 소요하고는, 마침내 그들이 두려워마지 않던 친페르시아 정책을 직접 행동에 옮겼다. 그는 군대의 마케도니아인들을 페르시아인들로 교체해 버렸다. 군대는 이에 경악했다. 그들은 용서를 빌기 위해 왕의 궁전 앞에 모였고, 알렉산드로스가 이들을 사면하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과 마케도니아인이 똑같이 9,000명씩 초대된 화합의 만찬을 열었으며, 연회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일어서서 기도했다. 그 기도는 아시아의 통치자로서,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조화로운 동반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제 그의 장래의 계획이 무엇이 될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BC 323년의 이른 때에,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 도착했다. 그는 이제 향신료 무역으로 부유해지고 있는 아라비아 원정을 계획했으며, 그 누구도, 심지어는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딘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뒤 음주 연회에서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BC 323년 6월 10일에 죽었다. 원인은 아마도 말라리아이거나 과음으로 인한 급성 장염일 것이지만 정확히 진단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32년 하고도 8개월 동안을 산 그의 짧은 인생은 지중해 세계를 송두리째 돌려놓았다.
(그가 남긴 세계)
그가 얻은 성취는 과연 무엇일까?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부터 아프가니스탄과 인도까지 뻗어 나가는 광활한 제국을 정복했지만, 그가 국제 결혼을 통해 구상했던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간의 화합에 기반을 두는 통치 계급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그의 장군과 아시아 여성들이 했던 결혼 중 끝까지 유지된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창시자인 셀레우코스 니카토르는 그의 박트리아인 아내인 아파마에게 헌신을 다했고, 그리스와 아시아의 피가 섞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DNA는 마케도니아부터 박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아시아인들과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거대한 제국은 이제 리더쉽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졌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부 형제 아리다에우스가 있었고, 그의 아기를 임신한 록산나는 얼마 뒤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을 낳게 된다. 하지만 이 둘 모두는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뒤따르는 싸움 속에서 장기 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각자가 왕국을 얻기로 결심한 장군들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지게 된다. 그가 구상했던 인종 간의 화합은 그의 죽음과 함께 벌새의 날개 짓처럼 끝나 버렸고, 그의 아들과 형제, 그리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모두가 죽음으로서 아르가이 왕실의 혈통은 단절되고 만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그의 정복 이전에 그리스 도시들은 오직 지중해와 흑해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를 가로질러 향하며 그리스 세력을 이끌고 왔다. 그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들을 세웠고 이들 중 다수는 그리스 문화의 전초 기지로서 살아남았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 왕들이 왕실 재산으로 축적했던 막대한 부를 풀었다. 그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화폐 경제를 도입했으며 그리스의 은행 시스템도 함께 도입했다. 이는 오늘날에 비교하면 여전히 기초적인 시스템이지만, 이전까지 고전 그리스가 알고 있던 고대 세계가 확장되고 그 확장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했던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들은, 고전기 그리스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호화로운 신전과 공공 건물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 문화는 전에 없을 만큼 크게 번성했다. 비록 그리스인들의 일상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스는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까지 확장된 지평선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갔다. 이와 함께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도 번영을 구가했다. 아테네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벌어진 해전에서 패배한 뒤 제해권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문화 중심지로서 기능했고, 그 자리를 로도스가 이어받아 중요한 무역 중심지이자 해상 세력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 시대를 지배한 것은 바로 전제 권력을 휘두르는 세습 군주의 통치를 받는 헬레니즘 왕국이었다. 이러한 전제 군주는 새로운 정치적 도입이었다. 그리스는 이전에도 왕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헬레니즘 시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왕실 초상화를 동전에 새겨 주조하고 호화스럽게 지배하며 신으로서 숭배 받는 관습을 가진 대군주는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이 헬레니즘 왕국들은 이후 수세기동안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으로서 근동에 그리스 문명을 이식하며 뿌리 내리게 된다.
출처: 네이버 부흥 카페 anas156님
첫댓글 여샤 넘 재미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