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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상)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01.13.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상)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교동도는 강화나들길 9ㆍ10코스와 평화나들길(자전거길 130km)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지금까지 군사적 요충지다. 이런 까닭에 역사적 유물이 많이 남아있고, 1960년대 모습을 지닌 대룡시장과 간척사업으로 인한 드넓은 벌판과 고구저수지ㆍ난정저수지가 있다. 육지의 때를 덜 탄 다양한 생물과 철새 등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북한과 거리는 가장 가까운 곳이 2.5km로 우리나라 섬 중에서 북쪽에 가장 근접한 섬이다. 그래서 관광객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교동도에 들어가기 위해 군부대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교동도의 넓은 농지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이뤄진 것인데, 화개산(260m)을 중심으로 남서쪽 수정산(100m)과 서북쪽 율두산(밤머리산, 89m)은 원래 각각 나눠진 섬이었다.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군량미 확보가 문제가 됐다. 이에 매립이 이뤄졌고, 일제강점기에도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해 현재와 같은 농지와 농수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개인 저수지인 ‘물꽝’으로는 농사짓기가 어려워 대규모 저수지인 고구저수지(1978년 완공)와 난정저수지(2006년 완공)를 축조했다.
2014년 7월에 교동대교를 놓았다. 그 전에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하는 카페리호를 타고 월선포로 들어갔다. 그래서 차를 가져가지 않으면 교동도를 여행하기 위해 자연스레 1박을 했다. 이제는 배가 아니라 차량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다. 여행이 훨씬 편해졌다. 그런데 숙박시절은 전과 다름없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당일치기 여행객만 늘어 식사 한 끼 하는 것 외에는 교동 관광수입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대룡시장은 황해도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져 옛 풍물시장의 풍취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데, 매해 들어갈 때마다 가게들이 현대식으로 바뀌어 안타깝다. 교동 주민들이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조선 후기부터 사용한 한증막
교동면사무소 뒤로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안내판이 있어 길을 잃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산 밑자락에서 만나는 한증막, 연산골에 있는 연산군 유배지, 화개산성, 효자묘, 봉수대 터, 산 정상에서 조망, 그리고 산을 넘어 내려오면 남향으로 화개사와 향교가 있다.
면사무소 뒤로 500여m 산책하듯이 길을 가면 골짜기 쪽으로 커다란 돌무덤 같은 것이 보인다. 주민들이 1970년대까지 사용한 한증막 시설로 조선 후기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뿐만 아니라 수정산을 비롯해 여러 곳에 한증막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터만 남아있다. 이곳 한증막은 현대 찜질방의 근원이라 할 수 있으며,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 문화를 알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시설이다.
황토와 돌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안에 불을 피워 온도를 높인 후 재를 꺼내고 생솔가지를 깔고 누워 땀을 낸 다음 옆 개울에서 냉수욕을하고 다시 이를 반복했다. 안에 들어가면 천장까지 돌들이 까맣게 그을려 있고 가운데는 불을 피웠던 자리도 확인할 수 있다. 한증막 옆으로는 물을 담았던 샘물터도 같이 보존돼있다. 체험학습장으로 만들어 땀 한번 흘리고 가면 좋을 텐데, 구조만 살필 수밖에 없다.
연산군 유배지에 세운 교동도유배문화관
2018년, 연산군 유배지에 교동도유배문화관을 만들었다. 이곳 골짜기에 ‘연산군유배지(위리안치)’ 비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연산군이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것)된 집과 폐위된 연산군이 유배올 때 탔다는 함거(죄인을 호송하거나 맹수를 잡아 가두는 데 사용하던 우리처럼 만든 수레)를 재현해 놓았다.
그러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을 보면, 중종반정(1506년)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4인이 메는 평교자(조선시대 종일품 이상이 타던 뚜껑 없는 가마)에 올라타 창덕궁을 나와 김포ㆍ통진ㆍ강화를 거쳐 5일 만에 교동에 도착했다고 한다. 함거가 아닌 평교자를 탄 모습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유배문화관 안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강화와 교동에 유배된 왕과 왕족들에 대한 설명이 걸려있다. 아마도 한양과 가까이 있어 감시와 격리가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때는 희종ㆍ강종ㆍ충정왕ㆍ우왕ㆍ창왕이, 조선시대에는 광해군ㆍ안평대군ㆍ영창대군과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특히 이 골짜기는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는데, 골짜기 지명이 연산골이고 주민들의 말을 들어볼 때 이곳에 연산군이 유배돼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화개산성 안에 있는 약수와 효자묘
화개산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으로 무너져내린 산성을 볼 수 있다. 더 허물어지기 전에 보수해야할 정도로 많이 무너졌다. 화개산성 축조 시기는 알려진 바 없고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된 포곡식 산성으로 내부에 우물과 샘이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둘레는 약2168m로 강화군 향토유적 제30호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있는데 1591년(선조 24) 교동현감이었던 이여양이 외성을 헐어 읍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1677년(숙종3)과 1737년(영조 13)에 개축했는데 군창(軍倉)을 뒀다는 기록이 있다.
산을 오르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 화개약수에 도착하기 전에 산 아래 고구저수지와 북쪽 연백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겨울 사진은 을씨년스런 느낌을 주지만 시야를 가리는 나뭇잎이 하나도 없어 풍경을 담기엔 제격이다. 꽝꽝 언 고구저수지 곳곳에서 사람들이 얼음낚시를 하고 있다. 연백평야는 마치 강물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보인다. 실제 북한 주민이 헤엄쳐 탈출하는 사례가 빈번할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그러나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에게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산 9부 능선 정도에 화개약수가 있다. 이쯤에서 잠시 쉬어 약수 한 모금 축이는 것도 좋다. 약수터 오른쪽으로 석천 김홍기라는 사람이 쓴 시가 걸려 있는데 한번 읽어보며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을 음미해보자.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효자묘가 있다. 봉분만 있는데 희한하게 봉분 앞에 깊게 패인 자국이 있다. 그 이유가 봉분에 얽힌 이야기에 있다.
효자묘는 대략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환 중인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청주골의 지극한 효자인 신 씨가 아버지 공양식 제공을 대가로 부유한 자제 대신 화개산성에 병사로 징발됐다. 자식의 안부가 걱정인 아버지는 고목근현(현재 고읍마을)으로 이사를 해, 살아있다면 매일 해가 질 무렵 북루에 하얀 적삼을 걸어 생존을 알리라고 아들과 약속했다. 그러나 이를 수상히 여긴 장수가 적삼을 못 매달게 했다. 이에 자식이 죽은 줄 안 아버지가 목숨을 끊자, 나중에 이를 안장수가 산성 안 이곳에 무덤을 만들게 해줬고 삼년 시묘를 허락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효자를 기리며아침마다 참배했는데, 그 참배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화개산 정상에서 조망
화개산은 해발 259.6m의 낮은 산으로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산정에서 사방으로 움직이며 조망하면 탁 트인 시야에 교동도와 주위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눈 속에 담을 수 있다. 화개산 표지목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간척된 드넓은 벌판이 보이고 바로 아래로는 고구저수지와 바다 건너 북쪽 황해도 연안군에 위치한 연백평야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정자 바로 아래에 향교와 읍성, 바다 한가운데 응암(상여바위), 그 뒤로 석모도와 강화도가 보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기장섬ㆍ미법도ㆍ서검도, 그 뒤로 주문도ㆍ아차도ㆍ볼음도 등 올망졸망한 섬들이 수평선을 끌어당기며 활짝 펼쳐진다. 일망무제, 거칠 것 없이 섬들이 끝 간 데 없이 뻗어있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다.
화개산 정자에서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이어진 봉우리 정상에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다는 봉수대가 있는데 하부 석축이 잘 보존돼있다. 강화군 향토유적 제29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남쪽으로 강화도 망산(덕산, 내가면)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동쪽으로 하음산(봉천산) 봉수로 응한다고 돼있다. 현재는 가로 8m, 세로 6m가량의 석단만 남아있는데 봉수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중)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02.04.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중)
화개사로 가는 길
화개사로 내려가는 길은 산을 에둘러 내려가기에 경사가 급하지 않다. 봉수대를 바로 지난 능선에서 난정 저수지 왼쪽 수정산과 오른쪽 율두산 사이를 간척한 농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반듯하게 정리된 농지와 이를 관통하고 있는 곧게 뻗은 수로, 그리고 산자락 밑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들, 한눈에 들어오는 정겨운 풍광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내려오다 보니 문무정(文武井) 표지판이 있다. 그 내용을 보니, 이곳 동쪽에 문정(文井)과 서쪽에 무정(武井), 두 개의 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그 흔적만 남았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이, 무정에 물이 많으면 무관이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의 북쪽 섬으로 매립돼 삼산면 상리와 하리가 됨)에 비춰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고, 이에 노승의 말에 따라 소금으로 메우자 진정됐다고 한다. 지금은 하나로 합해져 흔적이 남았다고 하는데,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조금 더 내려가니 화개사가 나온다. 화엄사에서 화개암, 그리고 화개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은 지금 비구니 사찰이다. 고려 때 지어진 사찰인데 ‘목은집’과 ‘속수증보 강도지’에 고려 말 문신인 목은 이색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단다.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됐고, 1967년 다시 화재를 겪고 다음해 중건돼 과거에 건물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법당은 팔작지붕에 겹처마나 서까래, 부연이 가는 나무인 것으로 보아 견고하게 짓지는 않았다. 기둥도 원기둥과 사모기둥이 섞여있고 문틀과 문들은 새로운 나무로 기둥 안쪽에 덧대어 만들어 고풍스런 맛이 전혀 없다. 아무튼 법당에 주칠한 서까래와 기둥들, 덧댄 문틀, 황토벽들을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고 생뚱맞다.
그래도 이곳 화개사 법당 옆에 하늘을 찌를 듯 줄기를 뻗어 올려 넓게 펼친 솔가지를 산자락 위에 살포시 걸어놓은 노송의 늠름한 자태가 멋지다. 수령 200년이 넘었다. 한 폭의 수묵 담채화를 보는 느낌이다. 법당 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좋다. 구름장 터진 틈으로 햇살이 바다로 떨어져 상여바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석종형부도 한 기 있는데 계단 아래 조성한 축대 위에 쓸쓸하게 서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가 하나의 몸돌로 이뤄졌다. 세월의 흐름이 조각의 형상을 깎아낸 탓에 기단부의 앙련(仰蓮,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의 무늬) 문양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읍내리 비석군
화개사에서 내려오다 향교로 꺾어지는 삼거리 길목에 1991년 교동 관내에 있던 비석들을 모아 비석군을 조성했는데, 2018년 향교 홍살문 옆 주차장 뒤로 다시 옮겼다.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교동지역 목민관인 수군 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선정비 등 비석 총 40기가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모두 선정을 베푼 것은 아니다. 철저한 고증으로 위선적인 비는 따로 구분해 놓아야할 것이다.
특이한 것은 가로가 세로보다 폭이 넓은 선정비 4기다. 거사대(去思臺)라 적혀있어 유래를 찾아봤다.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인 ‘일성록’에 평안도 어사 박내겸(朴來謙)이 보고한 별단(別單, 순조 22년 1822)을 보면, “도내 수령들이 비를 세우고 공적을 기리는 것은 조가(朝家)에서 금하는 것인데 혹은 거사석(去思石)이라 하고, 혹은 거사대(去思臺)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어 비석을 세우니 그렇지 않은 읍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거사비는 중앙정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한 수령들의 꼼수라 할 수 있다.
교동향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8호인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세워졌다. 원래 화개산 북쪽인 고구리 향교골에 세워졌는데 교동읍이 읍내리로 옮겨짐에 따라 부사 조호신이 영조 17년(174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향교 243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 안유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려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임시로 봉안했다 개경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자의 초상을 모신 의미 있는 장소다.
향교 입구에는 항상 홍전문(紅箭門,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붉은 칠을 한 문으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는 붉은 살을 꽂고 가운데 태극문양을 새긴 삼지창 모양을 새겨 넣었다. 이 문부터가 향교의 영역이라고 보면 된다. 하마비는 보통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쓰여 신분에 관계없이 말을 타고 오지 말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수령이나 장수라도 말에서 내리라 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니 멀리 외삼문이 보인다. 이는 양쪽으로 담장을 둘러 영역을 구획해 주며 출입을 위한 기능적 용도 외에도 상징적 의미로서,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 또한 출입을 한다고 보아 가운데는 신문(神門), 양쪽 문은 인문(人門)이다. 또한 중앙간의 지붕은 양협 간의 지붕보다 한 단 높게 한 솟을삼문으로 해 상징성과 권위성을 부여했고, 가운데 신문은 항상 닫아두는데 영혼이 다니는 문으로 제례가 있는 날만 열린다.
외삼문에서 왼쪽으로 담장을 따라 돌면 성전약수가 있다. 물이 대성전 밑에서 발원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교동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아토피성 피부염에 좋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 약수를 먹고 문성(文成)을 이룬 명륜당 유생이 많아, 교동도를 문장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문향(文鄕)이라 불렀다. 그래서인가, 누군가 약수 앞에 하트모양의 돌무지를 쌓았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ㆍ서재
향교는 공자 이하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와 학생들을 모아 강습하는 학교가 병설돼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서 필요한 건물들이 배향공간(配享空間)과 강학공간(講學空間)으로 이뤄져있다. 교동향교는 구릉지에 세운 관계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니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명륜당이 바로 나온다. 외벌대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막돌초석 위에 사모기둥, 홑처마로 된 팔작지붕 굴도리집이다. 중앙의 2칸은 대청으로 하고 양 옆면을 대칭으로 1칸씩 온돌방을 배치했다. 향교의 본래 기능인 공자의 사상을 받들어 유생들에게 강학을 하는 교육장이다.
동재와 서재는 ㄱ자 집으로 이곳도 역시 팔작지붕으로 납도리집인데 규모는 동재가 서재보다 조금 크며, 동재에는 부엌이 서재에는 창고가 딸려 있다. 유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하던 곳이다. 명륜당에서 강학한 후동ㆍ서재에 와서 공부하다가 의문 나는 사항은 직접 스승에게 묻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데 대학원식 교육법이다.
특이한 것은 보통 집을 지을 때 칸수를 홀수로 하는데 명륜당은 4칸으로 짝수라는 것과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과 일렬로 배치된 것이다. 아마도 향교 건물의 초창기 형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명륜당의 단청을 제외하면 강학공간의 구조는 일반 민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명륜당과 동ㆍ서재의 정감 있는 굴뚝을 비교하는 것도 재밌다. 아, 동재 뒤에 장독대가 있는데 동재의 부엌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ㆍ서무
내삼문은 대성전과 동ㆍ서무가 있는 제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명륜당 바로 뒤 축대 계단 위에 있다.
그러나 굳게 닫혀있다. 계단 오른쪽 아래에 노룡암(老龍巖)이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교동현 관아 동헌의 북쪽 층계에 있었던 돌로, 숙종 43년(1717년)에 이봉상이 ‘노룡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49년(1773년)에 손자 이달해가 글을 지어 새겼던 것을 순조 20년(1820년)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이라는 글제를 새겼다. 돌 아래쪽이 깨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동제 뒤로 대성전으로 오르는 길이 따로 있다. 길 오른쪽으로 정면 3칸 홑처마에 방풍판이 달린 맞배지붕집인 제기고가 있다. 판장문을 달았는데 내부에는 제사용기들이 보관돼 있다.
왼쪽으로 사주문을 들어서면 배향공간인 대성전 영역이다. 대성전은 막돌허튼층쌓기를 한 축대 위에 높다랗게 자리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방풍판이 달려있다. 건물의 퇴간부에는 팔각 장주형 주춧돌과 원형 기둥을, 나머지는 방형초석에 사모기둥을 올렸다. 공포는 초익공에 겹처마를 써 권위 건물 특징을 드러낸다.
축대 아래 양옆으로 동무와 서무가 똑같은 구조로 서있다. 외벌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방형초석에 사모기둥을 올렸고 홑처마에 맞배집붕집으로 방풍판을 달았다. 양쪽에는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가운데는 창호를 달았다.
교동향교는 올 때마다 정감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곳이다. 계절마다 보는 느낌도 다르지만 마치 시골집에 들렀을 때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기운이 있다. 향교 앞 코스모스, 동ㆍ서재의 시골집 분위기와 굴뚝들, 대성전으로 오르는 길 주변, 대성전에서 바라보는 풍광, 담장을 타고 올라 기와를 덮은 담쟁이덩굴 등이 눈에 어른거린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하-1)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02.17.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하-1)
왜구 침입 맞선 교동읍성, 그리고 느티나무
교동읍성 남문으로
향교에서 화개사 정류장까지 내려와 오른쪽으로 200여 미터쯤 가면 길 건너편에 교동읍성으로 가는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들어가는 길 입구에 폐가 두 채가 있다. 올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이 새겨지는 것을 본다. 슬레이트 지붕에 마치 이끼가 내려앉듯 바래가는 아련한 빛깔, 한 축이 허물어져 내리는 돌담,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집, 스쳐지나가며 보는 것이지만 세월의 흔적이 순간순간 생채기를 낸 듯 아득해진다.
교동읍성은 인조 7년(1629)에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이곳으로 옮기며 쌓은 석성이다. 인조 11년(1633)에는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 경기ㆍ충청ㆍ황해도 등의 수군을 관할하는 수군 최고사령부)을 이곳에 설치하고 경기수사(京畿水使)에게 3도 통어사를 겸하게 했다. 그만큼 해상교통의 중심지로서 교동도는 한강과 서해를 잇는 역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교동읍성은 영조 29년(1753)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女墻 성가퀴,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게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문루와 성벽을 수리했는데 공사를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고종 27년(1890)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다고 한다. 1921년 폭풍으로 남문의 문루가 무너졌고 동문과 북문은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성의 형태와 구조는 1750년대 초 전국의 군현을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집인 ‘해동지도’와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남문ㆍ북문ㆍ동문 위에 모두 누각이 올려져있고 이중 성벽 역할을 하는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이 설치돼있다. 성벽 위에는 여장도 둘러진 견고한 성이었다. 부내에 5채의 건물이 보인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옹성은 보이지 않으나 객사와 영문(營門, 조선시대 각 도의 감사가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 홍살문이 그려져 있다.
성의 둘레는 430미터 정도여서 둘러보기 좋은데, 길이 나있지 않아 다 둘러볼 수 없어 아쉽다. 성벽을 따라 산책길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문루 높이는 6미터로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했다. 홍예만 남아있던 남문은 2017년 12월에 유량루(庾亮樓)를 복원해 문루를 올렸다. 올해까지 옹성과 성벽, 치(雉,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내밀어 쌓아놓은 돌출부) 등을 복원할 예정이란다.
남문 앞에는 비석의 몸체는 없고 비좌를 꽂았던 홈만 파진 귀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마도 선정비의 귀부일 것 같다. 2005년께 인근 주민이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문루 왼쪽으로 무너진 성벽이 맞물려 앞으로 나와있는데, 옹성의 일부로 보인다. 전에는 홍예만 남아 황량한 느낌이었는데 문루를 올리니 번듯한 모습이다. 문 뒤쪽 홍예의 안쪽에 ‘南樓(남루)’가, 뒤 홍예에는 삼도수군통어영을 의미하는 ‘三道通門(삼도통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교동도호부지
남문을 통과해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가면 아전청으로 추정되는 곳에 개인주택이 들어섰다. 초석과 기타 석조물들을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집 옆으로 밭으로 사용하는 공터가 있고 그 뒤축대 위 밭두렁에 누각 건물에 많이 쓰는 장주초석 2개가 보인다. 안해루가 있던 곳이다. 장주초석은 본래 4개가 남아있었는데, 나머지 2개는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져 뜬금없는 자리에 덩그러니 서있다. 문화재 가치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쓰려고 옮기고 돌 표면도 깎아 크기도 작아졌다고 한다.
안해루 터 뒤에 돌계단이 있는데 여름에는 잡목과 풀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고 올라가기도 힘들다. 그 위에 동헌과 객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식 주택 폐가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가고 있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다던 남산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교동도에는 예부터 왜구들이 눌러 살다시피 할 정도로 침입이 잦았다. 그래서 읍성을 쌓고 읍성 안에 주요 기관들이 들어앉았다.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내아ㆍ외아 같은 관청 건물과 안해루ㆍ상문루 같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이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민가가 들어서거나 텃밭으로 일궈졌다.
황룡우물과 연산군적거지
다시 길을 내려와 보니 길 건너편에 돌을 우물 정(井)자로 짜 맞춘 우물이 있다. 조선 태종 때 황룡이 출현했다고 해서 황룡우물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8년(태종 18)에 허리 굵기가 기둥과 같은 황색대룡(黃色大龍)이 수군 군영 앞 이 우물 안에 가득 차게 보였다고 한다. 교동 수군첨절제사인 윤하가 조정에 보고해 기록됐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강화유리로 덮어놓았다.
계속 길을 가면 밭에 연산군잠저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 비석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연산군적거지(謫居, 귀양살이를 함)란 비석으로 바뀌었다. 그 앞에 있는 우물 안 벽에서 나무가 뿌리를 박고자라 줄기를 자르고 철조망으로 막았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정비하고 강화유리를 덮었다. 이곳 외에도 고구리 연산골과 봉소리 신골에 유배지가 있다는데 집을 옮겨 다녔는지, 아니면 이 세 곳 중 하나인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연산골이 유배지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읍성 느티나무
연산군적거지에서 밭 위로 올라가면 수령 3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성벽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이고 있다. 표지판에 보호수로 지정된 날짜가 1982년 10월 15일로 돼있고, 수령은 317년이라 적혀있다. 보통 보호수는 100년 단위이거나 10년 단위로 추정하는데, 317년이라고 정확하게 적힌 것을 보면 느티나무를 심은 연도가 어딘가 기록돼있을 것 같다. 성벽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뿌리와 뻗어있는 가지들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느티나무 한 그루 보는 것만으로도 교동도 여행을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읍성 성벽은 무너져 석성임에도 불구하고 흙으로 덮여 마치 토성처럼 보인다. 관리하는 것인지 군데군데 아래를 보면 바깥은 다듬은 막돌들로 허튼층쌓기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성벽의 돌들은 세월이 내려앉아 겉 표면이 검은 색을 띠고 있다. 무너진 성벽에서 거무튀튀한 색과 대비되는 안에 박혔던 돌들의 원색, 시공을 거슬러 과거로 걸어 들어간다. 전립을 쓰고 순시하는 군관이 위풍당당하게 읍성을 걷고 있다.
성벽에 오르면 북쪽으로 화개산의 화개사와 향교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월선포와 교동대교, 강화도의 별립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삼도수군통어영과 사신당이 있던 남산포와 석모도가 보인다. 북쪽은 화개산이 막아주고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읍성을 쌓은 것이다. 이곳에 한참을 앉아 읍성에 절묘하게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를 생각하며 졸시 한 편을 올린다.(다음 편에 계속)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교동읍성 느티나무 단상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뿌리를 내렸다.
시작은 아무도 몰랐다.
야금야금 성벽을 가르고
돌 틈을 따라 벌려가는 촉수처럼
하늘도 조금씩 조금씩
길을 내주었다.
땅 속에 흙들을 움켜쥔 힘만큼
하늘은 부챗살을 빚었고
그 너비가 커지자
누구도 베지 못했다.
삶의 몸부림이
활짝 펼쳐진 파아란 하늘
족적이 찍히자
아무도, 아무도
벨 수가 없었다.
북녘에 가장 가까운 섬, 교동도(하-2)
기자명 천영기 시민기자
인천투데이 기사 입력일 : 2020.03.02.
|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교동도(하-2)
교동팔경에 나오는 동진포(東津浦)
교동읍성 남문을 나와 왼쪽으로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밭 위에 객실이 두 개인 농원형 엔젤펜션이 나온다. 그 언덕에 올라서면 석모도와 미법도, 서검도, 남산포가 눈앞에 펼쳐진다. 풍광이 좋은 곳이고 운치도 있어 이곳 식탁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부리고 싶다.
교동도에는 숙박시설이 거의 없다보니 여행객 대부분이 강화도에 묵거나 당일치기로 섬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날이 추운 겨울, 하얗게 눈이 덮인 날 이곳에 묵고 싶다.
계속 길을 따라 바다 방파제 길을 조금만 걸으면 배 한 척 매어있지 않은 동진포가 나온다. 동진포는 읍성이 축조된 후 사용된, 교동에서 조선시대에 가장 규모가 큰 포구다. 황해도에서 오는 세곡선이 주로 머물렀으며, 서울ㆍ인천ㆍ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래서 강화도를 오가는 어선들은 이 포구를 이용했다. ‘교동군읍지’를 보면, 이곳은 교동팔경 중 하나로 동진송객(東津送客)이라 해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광경이 볼만했다고 한다.
또, 중국으로 가는 하정사신(賀正使臣, 새해를 축하하러 가는 사신)이 교동에 와서 일기를 살펴본 후 서해로 나갔으며, 사신들이 임시로 묵는 동진원이라는 객사가 있었다는데 장소는 현재 알 수 없다. 조선시대 배를 정박하고 사람들이 오르내렸던 동진포의 석축은 조금씩 물살에 무너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조선시대 부두 원형을 동진포에서 만날 수 있는데, 시급한 보수가 필요하다. 바로 앞에는 상여바위가 석모도를 병풍처럼 두르고 바다에 둥실 떠 강태공의 한가로운 정취만 돋우고 있다.
월선포와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 터
동진포에서 월선포로 가는 길은 제방을 따라 바다를 끼고 가는 2.3km 길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다. 월선포는 교동대교가 건설되기 전 강화도 창후리에서 여객선이 들어오는 교동도의 유일한 선착장이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자 여객 항로 역할은 끝났고 이와 함께 인적도 거의 끊겼다. 그러나 강화나들길 9코스 출발ㆍ도착지여서 간혹 사람들이 찾지만 지금은 낚시꾼들만 보일뿐이다.
월선포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옛 교동교회(교동면 교동남로 423번길 71) 건물이 있다. 교회 입구 길 건너편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을 1926년에 창안한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 터(교동면 상용리 516번지)가 있다. 2009년에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 복원 및 기념공원 사업회’가 창립된 후 우여곡절 끝에 인천시에서 터를 매입해 올해까지 생가를 복원하고 주변에 기념공원도 만들어 흉상을 설치할 계획이란다.
진망산(남산)에 있는 남산포와 사신당
동진포에서 서쪽으로 수로 앞으로 난 포장길을 따라 1km 정도만 가면 진망산(남산) 밑에 있는 남산포가 나온다. 포구로 들어가는 삼거리 못미처 왼쪽으로 시멘트로 벽을 바른 집 옆에 배가 정박할 때 밧줄을 묶는 계류석(繫留石) 한 개가 있다. 담벼락 옆에 있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예전에는 여기까지 바다였다. 간척하면서 수로를 만들고 이곳에 집이 들어섰다고 한다. 안유가 원나라에 가서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처음으로 가져오며 들어왔던 포구이기도 하다.
동진포가 섬사람들이 이용하던 부두라면, 남산포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던 포구다. 남산포는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어영의 함선이 정박했던 나루터였으며, 바로 앞 바다가 수군의 훈련장이었다. ‘해동지도’와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남산포 주변에 군기고와 육물고, 선창 등의 창고와 어변정이라는 누각이 있었으나 현재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남산포구에는 차량 20여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혼잡하다. 그래서인지 천막을 크게 쳐 새우튀김과 꽃게튀김을 판다. 매우 고소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에 이끌려 일부러 찾아갔는데, 문을 닫았다. 아마도 평일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어 장사를 하지 않는 것 같다. 혹시 이곳에 들르면 한번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남산포구 주차장 뒤로 보면 사신관지와 사신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돌길이 가팔라 밧줄이 매여 있어 줄을 잡고 오르는 것이 안전하다. 과거 송나라와 사신이 왕래할 때 사신관으로 가기위해 바닷가 바위를 징과 끌로 쪼아 계단을 만들어 사신 등선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배가 정박하기 어려워 남산포에 축대를 쌓으며 거의 묻혔다고 한다. 아무튼 줄을 잡고 오르면 사신관지는 보이지 않고 사신당 건물만 한 채 있다.
건물 내부에 임경업 장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 확인하지는 못했다. 한국전쟁 때 당집이 없어진 것을 1969년에 다시 세웠는데, 중국 사신이 교동도 앞을 지날 때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 곳이라 한다.
빛바랜 추억의 대룡시장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 연백 등에서 온 피란민들 중 전쟁이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대룡리로 들어와 산 사람이 많았다. 이곳에는 원래 우거진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들이 땔감으로 쓰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골목시장인 대룡시장이 만들어졌다. 원래는 읍내리가 교동의 중심지였는데, 이 시장이 번성하자 학교ㆍ면사무소ㆍ경찰지서가 대룡리로 다 옮겼다. 이렇게 대룡시장은 50여년 성세를 누리며 교동도 경제 발전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나 실향민 1세대가 거의 돌아가시고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대룡시장은 1960~70년대의 풍모를 간직하며 퇴락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게를 실향민 2세대가 운영하고 있는데, 발전되지 않는 이유는 땅 주인과 집 주인이 다른 것, 섬에서 육지로 학교를 보낸 많은 2세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대룡시장은 빛바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과거 향수가 묘한 매력을 풍기던 곳이었다.
교동대교가 연결된 후 관광객들에게 소문이 나며 이곳도 서서히 현대화 바람이 불고 있다. 2017년부터 인천시와 강화군은 대룡시장 골목길 조성 사업과 재정비 사업을 펼쳐왔다. 그러나 원래 시장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가게 리모델링과 벽화로 인해 깔끔하게 보이지만 이곳을 일군 실향민들의 역사와 상관없이 부조화한 모습에 당황할 뿐이다. 과거의 풍물을 간직한 곳이기에 적절하게 보존하면 좋을 텐데, 갈 때마다 너무 많이 바뀐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나만 일까.
게다가 관광객들이 몰려오자 이곳도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 연세(年稅) 30만 원 정도 하던 것이 월세 30만 원으로 10배 이상으로 올랐다. 소문보다 장사가 잘되는 것도 아닌데, 세는 오르고 관광명소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외지인들이 서서히 상권을 잠식하고 있어 오히려 임대를 내놓거나 방치된 가게와 건물도 늘고 있다.
대룡시장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장소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게 될지, 아니면 너무도 변한 모습에 관광객들이 발길을 돌리게 될지는 오로지 주민들의 몫일 것이다.
교동8경
1경 교동향교, 2경 교동읍성, 3경 연산군 유배지, 4경 화개산, 5경 화개사, 6경 대룡시장, 7경 망향동산(망향대), 8경 난정저수지
교동도 지도
교동8경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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