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감탄스러운 설교가 화이트필드 목사와의 우정
1739년에는 아일랜드에서 순회 목사로 이름을 떨치던 화이트필드 목사가 필라델피아로 왔다. 처음에 와서는 몇 군데 교회에서 허락을 받고 설교를 했지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목사들이 더는 교회를 빌려주지 않아서 야외에서 설교를 해야 했다. 그가 설교를 하는 곳에는 종단과 교파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수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는데, 목사가 청중들을 향해 반은 짐승이고 반은 마귀라며 저주를 퍼붓는데도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고 목사를 열렬하게 찬양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목사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난 주민들의 행동 변화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교에 별 생각이 없거나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신앙심으로 가득 찬 것처럼 행동했다. 저녁에 시내의 거리를 걷다 보면 집집마다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모이는 장소가 야외다 보니 날시라도 궂은 날이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곧 바로 교회를 짓자는 의견이 나왔고 모금 위원들이 임명되었으며 금세 돈이 모아져서 땅을 사고 길이 100피트, 폭이 70피트가량 되는 웨스터민스터 강당 크기의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공사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 예정보다 훨씬 빨리 완성되었다. 교회 건물과 땅은 관리 위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어떤 종교의 어떤 설교자든 이 교회에서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교회 건물은 특정 종파가 아닌 일반 시민을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회교 법전의 이론가가 이슬람 교리를 전하러 왔다 해도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화이트필드 목사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각지를 다니며 설교를 하다가 조지아 주까지 갔다. 당시 조지아에는 사람들이 막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여서 개척 사업에 맞는 힘세고 부지런한 일꾼들이 필요했지만 대개는 파산하거나 빚에 쪼들려 도망치거나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들이었다. 게으른 습관이 몸에 밴 이들은 산림을 개간해 정착할 곳을 마련해야 하는 힘든 개척지 생활을 이기지 못해 무더기로 죽어 나갔고 어린이들만 의지할 곳 없는 채로 남았다. 이 비참한 상황을 보고 인정 많은 화이트필드 목사는 그곳에 고아원을 지어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사는 필라델피아로 돌아오면서 고아원 건립에 대한 설교를 해 많은 돈을 모금했다. 이번에도 그의 힘있는 설교에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고 지갑을 열었으며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화이트 목사의 계획에는 찬성했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때 조지아에는 자재와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화이트 목사는 그런 것들을 필라델피아에서 보내자고 했다. 그러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나는 그러느니 필라델피아에 고아원을 짓고 아이들을 데려오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얘기를 목사에게 해보았지만 그는 내 충고를 거절하고 자신의 계획을 고집했다. 그래서 나도 기부금을 더 이상 내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에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기부금을 거두려고 하면 한 푼도 내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날 내 주머니에는 동전 한 줌과 은 달러화 서너 개와 금화 다섯 개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계속하는 동안 마음이 약해져서 동전은 내기로 했다. 조금 있다가는 설교 중에 어느 한 구절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은화까지는 내기로 작정했다. 마지막에는 그가 설교를 감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하게 끝맺는 바람에 결국은 주머니에 있던 돈을 전부 기부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우리 전토 클럽 회원 하나도 있었는데, 나처럼 조지아에 고아원 짓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모금을 하더라도 절대 내지 않으려고 아예 주머니를 비우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가면서 기부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 결국 옆에 있던 사람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필이면 그 많은 청중 가운데 유일하게 목사의 설교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홉킨스 씨, 다른 때였다면 얼마든지 빌려주었겠지만 지금은 안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굉장히 흥분하신 것 같아서요.”
화이트필드 목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기부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쓸 거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와 글 등을 인쇄하면서 그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나는 그의 결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목사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언제나 정직하게 행동했다고 굳게 믿는다. 우리가 종교로 이어진 관계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하는 내 말에 더욱 신빙성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 기도가 응답받았다고 믿을 만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정중하고 진실한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였으며 그 우정은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얘기를 하면 우리가 어떤 관계였는지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화이트필드 목사는 영국에서 보스턴으로 오자마자 내게 편지를 보냈다. 곧 필라델피아로 가려고 하는데 늘 자기 집에 머물게 해주었던 오랜 친구 베너젯 씨가 저먼타운으로 이사를 가버려서 묵을 곳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누추해도 괜찮으시다면 우리 집에서 묵으시는 게 어떨까요? 전 언제는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목사는 내가 예수님을 위해 그처럼 친절을 베푸니 반드시 보답을 받을 거라고 답했다. 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 목사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 둘 다를 알고 있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움을 받으면 부담을 벗어버리려고 하늘에 맡겨버리는 게 성직자들의 수법인 걸 알고는 당에 묶어두려고 한 거군요.”
화이트필드 목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런던에서였다. 그때 그는 고아원 문제와 이와 관련해 대학을 짓겠다는 목표를 내게 상의했다.
화이트필드 목사는 목소리가 아주 크고 낭랑한 데다가 단어와 문장을 또박또박 발음했기 때문에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설교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청중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완벽하게 침묵을 지켰다. 어느 날 저녁 화이트필드 목사는 시장 거리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2번가가 직각으로 교차해 있는 법원 계단 꼭대기에서 설교를 했다. 양쪽 길의 꽤 먼 곳까지 청중으로 들어찼다. 시장 거리의 맨 뒤쪽에서 듣고 있다가 그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들릴지 문득 궁금해진 나는 길을 따라 강쪽으로 계속 걸어가보았다. 프론트 가에 이를 때까지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거리의 소음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내가 온 거리를 반지름으로 해서 반원을 그린 다음 그 안이ㅔ 청중을 가득 채웠다고 가정하고 한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을 2평방피트로 잡아보니 최소한 3만 명은 그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가 야외에서 2만 5천 명의 청중을 모아놓고 설교를 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거나 장군들이 전 군대를 호령했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신반의 했는데 이제 그 말들이 믿어졌다.
화이트필드 목사의 설교를 자주 듣다 보니 어떤 설교가 새로 쓰인 것이고 어떤 설교가 순회하면서 자주 하던 것인지 쉽게 구분이 되었다. 자주 해봤던 설교는 아무래도 많이 다듬어지니까 억양이나 강조점, 목소리의 변화 등이 듣기 편하게 조절되어서 사람들은 그가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하든 집중하고 좋아했다. 마치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희열을 느꼈다. 이것이 전속 목사에 비해 순회 목사가 갖는 이점이다. 전속 목사는 같은 설교를 여러 번 해볼 기회가 없으니 솜씨가 좀처럼 늘지 않는다.
화이트필드 목사는 가끔 글을 써서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적대자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설교를 할 때는 경솔한 표현이나 잘못된 의견을 말했다 해도 나중에 해명을 할 수 있고 보충 설명을 해서 문제를 가라앉힐 수도 있다. 아니면 부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은 영원히 남는다. 적대자들은 화이트필드 목사의 글을 매섭게 공격했다. 그들의 비난이 타당해 보였기 때문에 목사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수도 점차 줄었고 다시 늘지 않았다. 화이트필드 목사가 글을 쓰지만 않았더라도 아마 신자 수도 많고 영향력도 큰 교파 하나는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그의 명성은 더 높아졌을 것이다. 글이 없었더라면 남들이 그를 흠잡거나 깎아내릴 구실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광적인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그에게 바라는 대로 온갖 장점들을 꾸며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