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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10월 1일 토요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873년 프랑스 파리의 외곽 도시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지성으로 수도 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영혼들의 구원과 선교사들을 위해 남모르는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살았다. 성녀는 자서전을 세 권 남겼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다. 1925년에 시성된 성녀를 비오 11세 교황은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소화(小花) 데레사’ 성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고, 이스라엘의 운명과도 같은 곳이다. 주님께서는 그곳에 위로를 보낸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세상일에 대하여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하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을 권한다(제2독서). 제자들은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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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주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늘 나라와 인간 세상을 동일하게 보는 제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 질문입니다. 크다-작다, 많다-적다, 세다-약하다 따위의 상대적인 말들은 모두 인간인 우리의 기준입니다. 형편없는 우리의 잣대로 하늘 나라의 상태를 재 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우시고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이는 영혼이 없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불러 놓고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또 자신을 낮추고, 이런 어린이를 당신 이름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인간의 현실적 잣대로 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서로가 자신을 낮추는 나라이고, 서로 섬기는 나라이며, 서로 사랑으로 대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아집, 체면과 명예, 학력과 혈연 등으로 결코 가늠해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데레사 성녀는 일찍부터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살면서,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공통주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대’라는 주제에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함께 공부를 했던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오랫동안 말을 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군인신학생은 군인신학생 끼리만 어울리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상담했던 내용이 떠올려졌습니다. 그 자매님께서는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잘 기도가 안 되어요. 나름대로 기도를 하려고 해도 집중이 되지 않고, 딴 생각만 많이 나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기도를 집중해서 할 수 있죠?”
기도가 안 되는 이유. 바로 신학생들 안에서 공통주제를 맞추지 못해서 서로 함께하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과의 공통주제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에 우리들이 집중하면서 대화한다면, 우리들은 주님과 깊은 나눔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다른 것들이, 즉 주님께서 별 관심을 두지 않거나 싫어하는 것들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끊임없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사랑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에 관심을 두는 어른들과는 달리, 순수하고 단순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갔기에 그녀는 주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요?
주님의 주관심사는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사랑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주님과 대화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공통주제인 사랑에 주목하도록 합시다. 그래야 우리 역시 데레사 성녀와 같이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덕의 길
-김희준 신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을 보면, 다른 성인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감동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 감동과 위로는 ‘지극히 평범함’에
기인합니다. 마냥 아름답고 거룩할 것만 같은 성녀의 삶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성녀의 부족한 - 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 모습들은,
성덕을 어렵고 도달하지 못할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큰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리어져 있던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시며,
어린이처럼 사는 것이 곧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어린이들은 부족하지만 부모의 보호 아래 행복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곧 우리가 성덕에 오를 수 있는가는, 내가 가진 부족함을 얼마나
줄이고 덮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닌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겸손의 덕을 지닐 수 있고,
겸손의 덕을 지닌 자만이 성덕에 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팔 벌려 한껏 끌어안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역설 - 나영훈 신부-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시종일관 어린이를 언급하십니다. 하늘나라와 어린이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회개하여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어린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누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내세우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 곧 어린이가 될 때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엄마는 백화점의 명품을 갖고 싶어합니다. 또 자녀들은 누구나 1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하늘나라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은 무엇입니까?? 어린이와 같은 작은 이의 삶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알아주는 큰 사람의 삶입니까??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 작은 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맞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러한 예수님의 역설적인 삶을 일찍 깨우치고 살다간 작은 꽃의 성녀입니다.
어린이의 사랑
-김찬선신부-
우리가 소화 데레사라고 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축일을
우리는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축일을
세자 성 요한이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축일과 함께
주일 급 대축일로 지내는 이유는 성녀 소화 데레사가
우리 모두 본받을 만한 위대한 성인이기는 하지만
그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성녀 데레사가 선교의 수호자이기 때문이고
우리나라가 선교 대상지역이기에 이 축일을 대축일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녀 데레사는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선교는커녕 일생 담장 안에서 사셨던 봉쇄 수녀원의 수녀였고
25살에 세상을 뜨신 분이십니다.
이런 성녀 데레사를 교회가 일생을 선교에 헌신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선교의 주보로 정한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두 가지 형태의 선교가 있음을 교회는 이로써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몸으로 하는 선교,
직접 선교지역에 가서 행동으로 하는 선교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선교 지역에 직접 가지는 않지만 담장 안에서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삶과 기도로 하는 선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선교가 바로 이것입니다.
거창하게 선교 지역에 가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복음화하기 앞서
소박하게 먼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우리 이웃을 복음화하고
우리 이웃을 복음화하기 앞서 자신을 먼저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복음적인 사람은
데레사와 같이 이렇게 소박하고, 어린이와 같은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어린이는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도 아니고
세속적으로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좋은 의미에서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도 아닙니다.
힘없고, 작고,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에 완전히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어린 아이는 남을 호령하지도 자기 좋을 대로 하지도 않고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이렇게 착하기에 좋은 것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좋은 것을 주시리라 완전히 신뢰하고 맡깁니다.
그래서 안 줄까봐 걱정하지도 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내일을 걱정하며 축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사랑만을 갈망하고, 그 사랑에 머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놀다가도 엄마가 없으면
울며 엄라를 찾습니다.
건방지게 자기가 사랑하겠다고 하지 않고
사랑을 갈망하고 주시는 사랑을 잘 받습니다.
어린 아이는 이렇게 사랑을 받아서 성장하고
이제 받은 사랑으로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한다기보다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무슨 큰 자선사업은 하지 못하고 그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직접 사랑하시도록
맡기며 기도합니다.
데레사는 사랑을 위해 순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창하게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핀 하나를 희생으로 줍고
의자에 앉을 때 등을 기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데레사가 자기 성소로 받아들이고
실천한 어린 아이의 사랑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게 속도위반을 했다는 사실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지요.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왜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분명히 속도위반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해야 할 텐데, 저는 그 경고 소리를 듣지 못했거든요. 이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내비게이션을 업그레이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로 사정은 계속 바뀌지요. 따라서 내비게이션의 자료 역시 최신 자료로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우리의 신앙 역시 이렇게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단순히 처음에 ‘영세 받으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활로 인해서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물론,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종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차량용 내비게이션은 컴퓨터에 연결해야만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차량용 내비게이션을 제 몸에 연결한다고 해서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며, 전기 콘센트에 꽂는다고 해서 업그레이드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컴퓨터에만 연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어디에서 연결해야 할까요? 당연히 주님께 연결해야만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즉,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연결한다고 해서 내 신앙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주님과의 연결을 끊지 않으셨지요. 바로 어린이가 순수한 마음과 굳은 믿음으로 부모에게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처럼, 성녀께서는 철저하게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녀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 자신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연결되어 있는 곳임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것보다 주님께 관심을 갖고 주님께 연결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될 수 있습니다.
시작은 작은 길, 어린이처럼
- 이요한 신부-
복음 묵상을 시작하면서 인간에 대해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느님께 받은 것이지요. 따라서 내 마음대로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생명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잇는 것은 무엇일까요? 결국 '내 것'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 누구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라고 하십니다. 자신은 낮춘다 또는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겸손을 말하는 것 같지만 저는 오히려 자신이 자유를 잘 이용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돈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자유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논리나 설명 없이 가장 단순하게 '자유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마음에 어떤 거부감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나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우선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무엇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자유를 완전히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이기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가장 큰사람이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 '작은 길'을 실천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성녀를 '소화데레사'라고 부릅니다. 성녀는 자신을 하느님 정원의 많은 나무와 꽃들 가운데서 작은 꽃(小花)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자유가 정말 가장 소중한 것인가? 그리고, 나는 자유로운 사람인가?
사랑 받는 아기처럼 -김찬선신부- 오늘은 성녀 데레사의 축일입니다.
성인들 중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파두아의 성 안또니오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성인이십니다.
왜 사랑을 받으실까요?
여러 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오늘은 아기 예수의 성녀이시기에 사랑 받으심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독서 중에 두 번째 독서는 동정녀로서
오롯이 주님을 사랑함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독서와 복음은
아기, 어린이의 사랑 받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데레사가 저에게는
남성과 여성으로서 性이 다른 같은 영혼,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갈멜 수도회로서 會가 다른 같은 영혼입니다.
어떤 면에서 같습니까?
작음이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살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산 것은 같지만
어떻게 사랑을 살았는지는 두 성인이 조금 다릅니다.
두 분 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래서 많이 사랑했지만
프란치스코가 남자이기에 자기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그것도 대단한 사랑을 하려 하였다면
데레사는 주님께서 더 많이 사랑하시도록 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얘기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데레사입니다.
다시 감히 얘기하지만
하느님을 가장 행복하게 해드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데레사입니다.
사랑은 어른보다 아기가 많이 받습니다.
행복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하는 이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가장 행복하시고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사랑을 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기는
하느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도 그러하지만 아이가 어린이보다 더 사랑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더 행복하게 합니다.
얼마 전 저의 누이 둘과 어디를 갔습니다.
둘 다 손자가 있습니다.
만나서 저와 간단한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손자들 얘기에 하는데
손자 없는 저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동생인 저를 무척 사랑하지만 손자 얘기가 나오니
저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적지까지 즐겁게 손자 얘기하도록 봉사하는
운전 기사에 저는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무시하며 얘기해도 그 얘기를 끊을 수 없었던 것은
손자 얘기를 할 때 저의 누나들이 너무도 행복해 했기 때문입니다.
맘껏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그러므로 아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데레사는 이런 아기였고
그래서 자기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그러하기를 바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아기처럼 나의 사랑을 받아다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한 없이 사랑하길 원하는 나의 사랑을
아기처럼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십니다.
소화(小花)
-전삼용신부-
저는 가끔 신자 분들께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신자 분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보셨습니까?
왜 우리들은 매일 성체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까요? 작은 빵조각에 불과하지만 성체는 분명히 예수님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 생각에는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있습니다. 차도 큰 차가 더 좋고 집도 큰 집이 좋고 나라도 커야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으니 밀떡 조각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좀처럼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톨릭 영성은 커지는 영성이 아니라 작아짐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작아지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큰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빵조각 안에 들어오실 만큼 작아지실 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크신 분인 것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힘이고 사랑입니다. 커지는 것은 이와 반대로 동물적 본성에 불과합니다.
오늘은 소화 데레사 축일입니다. 소화란 ‘작은 꽃’이란 뜻입니다. 왜 별명이 작은 꽃이 되었냐면 이 성녀가 작은 희생의 꽃다발을 많이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십대 중반에 갈멜 수도원에 들어와 십년 더 사실 때까지 사실 겉보기에는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교의 수호성인이라지만 또 다른 전교의 수호성인이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그 분은 세계를 돌아다니시며 수만 명에게 세례를 주셨지만 소화 데레사는 단 한명에게도 세례를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교의 수호성인이 되셨을까요?
그녀는 수도원에서 바칠 수 있는 작은 희생들을 전교를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나 미사 할 때 등을 의자에 붙이지 않고 앉는 희생을 바치는가 하면 기침을 많이 하는 수녀님 옆에 앉아 그것을 잘 참았고 빨래할 때 자신에게 물이 튀어도 그저 희생으로 맞고 있었습니다. 몸이 아파도 아프단 소리를 안 하고 참고 그것을 전교를 위해 바쳤습니다.
실제로 다른 성인들이 이루어놓으신 업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봉헌, 작은 꽃들이었지만 어떤 누구도 이 작은 봉헌으로 회개시킨 이들의 숫자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세례를 준 숫자보다 적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성인이란 큰 업적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밀떡을 그리스도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당을 몇 개 짓는 것보다 한 끼 식사를 거르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하느님 눈에는 더 크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 사람을 선교하는 것보다 선교를 위해 정성껏 묵주기도 한 단 바치는 것이 하느님 눈엔 더 크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하루에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작은 보석 같은 희생거리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습니다.
순교복자수도회의 가장 핵심적인 영성은 ‘麵形無我(면형무아)’입니다. ‘면형’이란 밀가루 모양, 즉 성체를 의미합니다. 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밀 알갱이들이 잘게 부서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버리는 ‘무아’입니다. 자신을 비워야만 밀떡과 같이 작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 손 위에 올라오는 성체, 사실 성당 안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온 세상도 담을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비우고 당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아지셨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또한 작은 성인이지만 대축일을 지내는 큰 성인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작은 것을 작지 않게 보고, 그래서 더 자신을 버리고 작아져 그리스도의 성체를 닮은 인간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옛날 한 작은 외딴 마을에 '천 개의 거울'이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늘 행복한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그 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한번 가 보기로 마음먹었지요. 그곳에 다다른 강아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 앞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섰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흔들면서 문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안에는 천 마리의 다른 강아지들이 자기를 쳐다보면서 귀를 세우고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 강아지는 너무나 즐거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천 마리의 강아지도 따뜻하고 친근한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 강아지는 그 집을 떠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지요.
“정말 멋진 곳이야. 자주 놀러와야겠다.”
같은 마을에 또 다른 강아지가 한 마리가 더 있었습니다. 이 강아지는 앞의 강아지와는 달리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요. 이 강아지도 ‘천 개의 거울’ 집 이야기를 들었고, 자기도 그 집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그 집 계단을 올라가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천 마리 강아지들이 불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강아지는 깜짝 놀라서 순간적으로 으르렁거렸지요. 그런데 천 마리의 강아지들도 이 강아지에게 으르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곳이 다 있담. 다시는 오지 않을 테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바로 나의 모습을 비치어주는 거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하지, 내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착각 속에 항상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그랬지요. 내 마음 안에 각종 안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찰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였나요? 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으로, 내게 유익한 사람으로 비춰졌나요? 아닐 것입니다.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사람들의 모습도 분명히 바뀌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하라고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순수하고 꾸밈없는 마음,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간직할 때,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데레사 성녀가 바로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하셨다고 하지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고,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그 결과 수도원 밖을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수호성인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곳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 멋진 곳을 형편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더욱 더 멋진 곳, 더욱 더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도록, 내 마음부터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빠다킹 신부
회개, 어린이, 하늘 나라
-이성우 -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다른 사람들의 가치?
세상의 명예, 세상의 권세와 부에 마음이 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들로부터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그곳을 향해 있는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을 향하십시오. 밖을 향해 있는 마음을 돌이켜 안으로 향하십시오.
나 자신을 향하십시오. 나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합니다. 자신을 예쁘게 포장하거나 크게 꾸미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서 어린이처럼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순수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의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정훈 신부 -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앙 안에서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누구인지,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입니까?”(18,1)
현시대를 가리켜 ‘자기 PR(Public Relations) 시대’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튀어야 산다’는 말도 나왔으며,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고 희귀한 것만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등’만을 치켜세우고, 무엇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매스컴도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다. 공부나 대학도 일류, 기술도 일류, 운동도 일류, 심지어 도둑질이나 사기도 일류가 되어야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때로 지극히 평범한 것,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에 신선한 충격을 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평범하고 가슴 찡한 이야기가 감동을 준다 해도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싫어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서 대접받으며 살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솔직한 마음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한 세속적 마음을 아직 버리지 못한 모습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와 병행구를 이루는 마르 9,33-35을 보면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였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세속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니 그 대가로 하늘나라에서 한자리, 그것도 예수님 다음가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하면서 핏대를 세우고 있는 터라 논쟁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몸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위대하다거나 모두 그럴 자격이 없다거나 하는 대답을 주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제자들의 생각이 세속적이라고 꾸짖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조용히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신다. 스스로 자기 생각이 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깨우치고 참된 제자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장 큰사람’에 대해 묻는 자리에서 ‘가장 작고 낮은 사람’의 상징인 어린이를 내세우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크고 작음’에 대한 하늘나라의 개념과 기준이 세속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18,3ㄷ).
‘어린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순진무구함’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천진한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어린이처럼 나약하고 미천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사실 어린이는 스스로 삶을 헤쳐갈 수 없기 때문에 돌봐주는 이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어린이는 돌봐주는 이(특히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간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회개하여(마음을 바꾸어) 이러한 어린이처럼 되라고 촉구하신다. 제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과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면서 하느님으로 인해 가장 행복하고, 하느님 없이는 가장 불행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런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망각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우매함을 깨우치고 본모습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18,4)라고 가르치신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은 강하고 완벽하여 하느님 없이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그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18,5), 곧 하느님 앞에서 그런 어린이와 같은 존재가 되라고 촉구하신다.
자신만으로 가득 찬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아낼 수는 없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손길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것을 가장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추고 비워야 한다. 곧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와 같은 존재, 그분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완전히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아이를 목마 태운 아버지처럼 우리를 당신 어깨에 태워주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에 의해 높여지고 큰사람으로 대접받는 삶임을 명심해야 한다.
묵상과 기도
▷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은 누구인가?
▷ 나는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느님 아버지, 때로 제 잘난 맛에 우쭐거리며 혼자서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 저는 당신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당신의 사랑과 용서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 없이는 결코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당신으로 인해 기쁘고 만족하고 높여지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소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배광하 신부-
“천국은 작고 순수한 이들의 것”
순수함과 작아짐
순수함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은 천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일의 세대인 어린이들을 제대로 돌보아야만, 저 드넓은 미래의 시야가 바로 보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이들의 것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린이를 돌본다는 것이 과연 천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닦듯이 미래의 발전된 세상을 향한 돌봄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어른이, 부모들이 오히려 깨뜨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영악스러워 지고 더욱 이기적이고 더욱 계산적인 경쟁 속에 내팽개쳐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가 걸맞지 않게 느껴지는 오늘의 우리 마음입니다.
제 자신은 “가끔 세상이 이토록 삭막해지는 것은 인간이 달나라에 발을 내딛고 난 다음부터이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달에는 계수나무가 있어야하고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어야 합니다. 신화는 신화로, 동화는 동화로, 전설은 전설로 남아있어야 하며, 신비는 신비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큰 슬픔은 신비의 순수함이 사라지는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류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어린이들의 순수함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이 또한 어른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어린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셨던 오늘 축일의 주인공이신 소화 데레사 성녀의 삶은(1873~1897) 또 다른 일깨움을 우리에게 준다고 하겠습니다.
열 다섯 살 나이에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 스물 네 살에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온전히 작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셨던 성녀의 삶은 ‘낮아짐과 사랑’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첫 영성체 때,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께 바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라는 약속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지켰던 성녀는 마지막에도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끝맺음 하셨습니다.
작아짐과 순수함을 잃지 않을때 나올 수 있는 기쁨의 삶,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마지막으로 이 같은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나는 지상에서 선을 행하면서 나의 천국을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듯 자신을 끊임없이 비우면서 작아짐의 삶을 사셨기에 지상에서 천국을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사셨기 때문에 그 같은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 18, 4)
작아짐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자주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습니다. 더욱 많은 재물을 쌓으려 하고, 더욱 많은 고집 속에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더 큰 욕망의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면서 끝내 그곳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불행한 삶을 스스로 자초하며 삽니다. 때문에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 세상 온갖 부귀영화와 영예가 결코 영원하지 않기에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 31)
그러므로 사라질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계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느님 영광의 나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이사 66, 12)
이 같은 약속이 계심에도 우리는 자주 나를 내세우고 내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의 자리에 세상 것을 두었습니다. 때문에 시련인 것이고,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기쁨과 참 평화는 우리를 향하여 팔 벌리고 있었건만 우리가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잊지 않아야 하는 진리는, 교만은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에덴 낙원을 포기하게 된 것도 실은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였던 교만이었습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죄도 역시 교만입니다.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하느님 은총의 구원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꼴찌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낮추는 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1코린 1, 21)
제 인생 저녁에 빈손으로
-양승국 신부-
착복식이 끝나자마자, 원장수녀는 데레사에게 명했습니다.
"오늘부터 주방 일을 맡아주세요."
데레사는 기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예, 수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하느님, 오늘부터 가르멜수녀원 주방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게 첫 소임으로 이렇게 좋은 일을 맡겨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자신을 낮추고 오만한 마음을 성모님 발밑에 봉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참아내며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데레사는 하루 일과 안에 벌어지는 작고 사소한 일에서도 하느님을 찾았고, 그 하찮은 사건을 통해서 크나큰 영적 진보를 일궈냈습니다. 데레사는 다른 수녀님들이 함부로 내팽개쳐놓은 이불을 개거나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옷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해 옷장 안에 넣는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작고 하찮은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데레사는 정리정돈 및 청소의 대가였습니다. 그리고 데레사는 그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작은 영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은 선물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지난 날, 지나친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영혼을 놓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지는 않겠습니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데레사는 24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선종하기 직전 데레사는 각혈을 하는 등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도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럴수록 데레사는 더욱 기도에 매진했습니다.
데레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의 특징은 아주 독특합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레사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성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일상에서 매일 우리가 접하는 아주 작고 하찮은 일을 열심히 함을 통해서도 높은 영적 생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매일의 작은 수고와 번거로움, 귀찮음을 기꺼이 참아내고, 그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것, 그것이 데레사가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준 영성의 길입니다.
좋으신 아버지께 대한 어린이다운 완전한 의탁, 아버지 품에 꼭 안기려는 자녀다운 신뢰, 아버지께 모든 것을 다 걸고 모든 것을 다 바치려는 순수한 봉헌, 그것이 데레사가 개척한 성성(聖性)의 특징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고, 남을 딛고 올라서려고 하지요. 그러나 데레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한낱 작은 모래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조그마한 모래알을 찬란히 빛나는 별로 만드셨습니다.
다음은 첫 서원식 때 데레사가 품에 지니고 있던 기도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오직 예수님, 당신만이 저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시오."
"제가 절대로 수녀원의 짐이 되지 않게 하여주시고,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게 하시며, 제가 예수님 당신의 작은 모래알처럼 잊혀져 발에 밟히게 하소서."
"예수님, 저로 하여금 많은 영혼을 구하게 하시고, 오늘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하나도 없고, 또 연옥의 모든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하소서."
"예수님, 저는 다만 제 존재가 당신께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나이다."
과거에 우리는 이 성녀를 소화(小花) 데레사라고 칭했습니다. 의미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정녕 하느님 앞에 한 송이 작고 예쁜 꽃이었습니다. 데레사는 작음의 소중함, 작음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보여준 성녀였습니다.
확대지향적 물질만능주의 영향 아래 큰 것, 많은 것들에만 각별한 의미를 두는 이 세상에서 작은 꽃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 데레사였습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게 됐던 데레사, 마치 하느님의 손수건처럼 가벼운 존재가 된 데레사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큰 사람, 너무도 높은 사람, 너무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 머릿속에 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은 너무 무거워서 하느님 품에 쉽게 안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버릴 만큼 버린 사람, 밑으로 밑으로 내려간 사람, 작아질 대로 작아진 사람,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구부린 사람은 그 무게가 너무나 가벼워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 자비의 품안에 머무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제 인생의 저녁에 빈손으로 저는 당신께 나아갑니다."
낮은 사람이 가장 위대합니다
-이기양 신부-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인 10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날인 오늘은 선교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참을성이 더 생기고 남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인내하지 못하고 점점 옹졸해 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평균 연세가 70~80이 되시는 할아버지들의 모임에 나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되면 그 답이 확연해집니다. 어르신들이 음식을 시켜놓고는 기다리지를 못하는 겁니다. 재촉을 하고 사소한 심부름을 수도 없이 시키며 목소리들이 커지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어릴 때는 친구도 많습니다. 아무하고나 쉽게 사귀고 싸움을 해도 또 금방 친해지며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지고 내 것도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이라고 우기는 못된 이기심으로 사방에 벽을 쌓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나이가 들어서도 유아적인 상태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순수해지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 의지하여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 또 있고 없고, 배우고 못 배우고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성녀가 되셨으니 세상에 오염될 시간도 없이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꽃 피우고 그 깨끗한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돌아가신 분으로 교회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시성이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신심이 충만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난 데레사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14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마침내 그토록 소원하던 봉쇄 수도원인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여서는 성덕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과 싸움을 했고 그 어떤 여타의 덕보다도 순명의 덕을 배우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가 이 소화 데레사 성녀를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지정했다는 사실입니다. 24세가 되도록 봉쇄 수도원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이 어린 성녀를 교회는 왜 선교지의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 수호 성인으로 모신 것일까요? 우리 상식으로는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는 선교사 중의 한 분이 적합하리라고 생각이 되지요. 우리 교회 내에는 이방의 나라에서 열심히 선교를 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은 성인도 많습니다. 그런데 선교지에는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봉쇄 수도원의 데레사 수녀가 ??선교 사업의 수호자?‘가 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신앙의 근본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통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우리는 주일마다 신앙 고백을 하지요. 통공이란 서로 상통한다는 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신앙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성인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안식을 기도하고 연옥 영혼들은 우리의 기도와 선행에 힘입어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천국에 이른 그 영혼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성인의 통공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生)과 사(死)를 떠나 누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을 두고 드리는 기도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하고 회의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성모님께 초를 봉헌하며 이것이 과연 가납될 것인가 의심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도는 분명히 이루어지고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모니카 성녀는 아들 아오스딩 성인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함께 있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기도했던 그 결실이 바로 아오스딩 성인의 회심이지요.
데레사 성녀는 언제 어디서나 선교지의 선교사와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기도의 지향이 그 곳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성녀를 지정한 교회의 확고한 결정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가지만 신자들의 기도가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교황님과 교구장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 만큼 필요하고 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또 은인들을 위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하여 끊임없이 정성껏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께 가납이 되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오늘 데레사 성녀 축일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을 맞아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녀의 가정입니다.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네 명이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 집의 관심사와 부모의 지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교육했음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부족할 전망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의 쫓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가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기만을 기도하는 부모들이 지나치게 많은 요즈음입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녀들은 이기적으로 자라고 자기만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희생적인 뒷바라지로 세상에서 출세를 했지만 늙은 부모는 양로원에서 외롭게 힘든 노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만 욕심을 둔 부모의 잘못된 교육이 그대로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요즈음 나이 든 부모는 자식을 의지하지 못하고 노후 보장 보험 같은 것에 노년을 의지한다고 합니다. 신자들이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녀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기도하고 가르치고 길렀다면 그런 보험 따위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란 자녀는 부모의 든든한 힘이며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하느님을 의지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자녀를 가르친 데레사 성녀의 가정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전교의 달이 시작되는 오늘 우리는 데레사 성녀의 축일을 지내며 성녀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닮기를 기원해 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18,3)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늘 기억해 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이를 삶으로 증거한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소화 데레사 성녀이십니다. 성녀의 겸손과 단순함에 가득 찬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본받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가정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복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지난 토요일 선배 신부님께서 자전거 복장을 한 채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근처로 자전거를 탔다가 제 생각이 나서 잠시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방에 들어와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글쎄 내가 성당에 들어서자 성당 마당에서 놀던 꼬마 아이들이 네게 ‘신부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더라. 나는 깜짝 놀랐지. 이렇게 꽉 끼는 쫄 바지를 입고 있는데, 나를 어떻게 신부로 알았을까 하고 말이지. 그런데 어떤 아이가 이러더군. ‘야~ 신부님 아냐.’하면서 모두들 내 얼굴 한번 쳐다보더니만 신부 아닌 것이 맞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거야. 아마도 네가 자전거 복장을 하고서 나타난 것으로 알았나 보더라.”
제가 자주 자전거 복장을 한 채 돌아다니다 보니, 그 모습을 보았던 아이들이 자전거 옷을 입은 사람이 성당에 나타나자 저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제가 아니었고, 그래서 “신부님 아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에 선배 신부님이나 저나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본대로 믿으며, 틀린 것은 곧바로 틀리다고 말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즉, 꾸밈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떻게든 자신을 꾸미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대방을 대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렇게 순수성을 잃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주님께서는 마음의 변화, 즉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자신의 부모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듯이, 교만의 마음보다는 겸손의 마음을 그리고 이기적인 마음보다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녀 데레사처럼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단순함 그리고 겸손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 중에 ‘바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보'라는 말은 보통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을 뜻하지요. 하지만 이 당시 ‘바보'라는 말의 뜻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바라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랍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바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이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데레사 성녀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 사람들이 바라봤을 때, 바라보면 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수철 신부-
어린이를 상징하는 표현은 순수함, 단순함 그리고 겸손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함은 하느님께로 돌아오기 위해 부단한 회개를 통해 깨끗해지는 마음입니다.
마치 하얀 새 옷보다는 계속된 세탁으로 색깔이 바래 하얗게 된 옷 같다고 할까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 하나입니다. 죄를 짓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회개하십시오.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죄를 짓더라도 곧장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해 일어나십시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가 대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진다면 그 또한 은총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와 같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꽃이 되어
-김경숙 수녀-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단순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모든 면에서 작아진다는 의미다. 작아진다는 것은 소화 데레사 성인의 영성이기도 하다.
오래전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 이야기다. 초아라는 소녀와 함께 동해 바다가 보이는 야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는 청명했던 날씨가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하더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동해 바다에는 성난 파도가 날뛰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정말 무서웠다. “가자, 우리 빨리 뛰어가는 거야.” 그러나 몰아치는 폭풍은 우리를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덜덜 떨면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폭풍에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떼어놓았다. 갑작스러운 폭풍에 산새들도 울부짖었다.
그때 초아가 “저기 작은 꽃 좀 봐.” 하며 작은 풀꽃들이 피어 있는 동산으로 달려가더니 거기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아, 너무너무 포근해.”라고 말하는 초아를 따라 나도 눈을 감고 풀꽃의 향기를 맡았다. 순간 우리는 작은 꽃이 되었다. 작은 꽃잎이 되어 나비처럼 훨훨 나는 것 같았다. 사납게 불어대는 바람도 느껴지지 않고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난 그때 알았다, 작은 이들의 행복을. 그 꽃은 너무 작아서 무서운 태풍도 사나운 비바람도 덮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풀꽃처럼 작아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품에 안고 가실 것이다.
데레사의 작은 길
-권지호 신부 -
오늘은 10월 1일, 선교의 수호자이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대축일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 알랑송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녀는 9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성녀의 어머니는 성녀가 5살이 될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아버지와 언니들의 손에서 자라던 성녀께서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처럼 따르던 둘째 언니 폴린느가 갈멜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녀도 나중에 15살이 되어 갈멜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러나 9년 후 바로 오늘 성녀는 폐병에 걸려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갔습니다.
9년동안의 짧은 수도생활 동안, 완덕의 절정에 도달한 성녀는 당신이 스스로 말하듯이 작은 길을 걸어 갔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말씀처럼, 어린이로서 그 작은 길을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어린이의 작은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성녀는 자신의 이름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성녀가 걸어가신 작은 길은 어떤 것입니까?
성녀는 수도원 안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 밖에 나가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성녀는 사제가 되고 싶어했고, 성서학자도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도 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런 열망으로 가득 찬 성녀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기의 정확한 성소를 찾고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
“드디어 저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은 사랑으로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지체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지게 되면 사도들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 흘리는 것을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하고, 사랑이 전부라는 것, 사랑은 모든 때와 장소들은 포함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도 미칠 듯이 기뻐 부르짖었습니다. 오! 예수님, 나의 사랑이시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저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제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Ms B 3v°)
성녀는 자기의 성소를 깨닫고 나서 구체적으로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실천이 너무나 작은 것이기 때문에 성녀께서 걸어가신 길을 작은 길이라고 합니다.
성녀는 우선 일상생활의 작은 일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녀는 매순간 어떤 행동을 할 때,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복도를 걸어 갈 때도 ‘당신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드리거나 미사를 봉헌할 때도 ‘당신을 위하여’라고 먼저 말하였습니다.
갈멜수도생활은 너무나 단조롭고 좁은 공간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작은 희생을 끊임없이 바쳤습니다. 예를 들면, 의지 뒤에 기대고 앉지 않는다든지.. 또 수녀님들과 같이 빨래를 할 때, 옆에서 비눗물이 튀어오는 것을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라고 하면서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녀는 매일 구체적으로 조그만 희생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완덕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성녀는 나중에 폐병에 걸렸습니다. 폐병에 걸려 처음으로 각혈을 하게 되었을 때 성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정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고통을 통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버림받으신 예수님과 일치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성녀의 병이 심해지자 옆에서 다른 수녀님이 간호를 해주어야 했습니다. 하루는 간호하는 수녀님이 성녀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잠을 못자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 ≪자매님은 무엇을 합니까? 잠을 자야 해야 할텐데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십니까?≫ ≪저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임종을 앞둔 성녀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 “제가 가는 예수님의 팔 속으로 여러분도 곧 오시도록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겸손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데레사 성녀는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천국으로 떠나갔습니다 : “하느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가 걸어가신 길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너무나 작은 일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데레사성녀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녀의 삶을 바라보면서, 한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지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했는가입니다. 이것이 데레사 성녀가 남긴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데레사 수녀님을 천국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축복을 내려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나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주신 분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데레사 성녀는 우리나라 나이로 16세에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들어가 살다가 24세에 세상을 떠난 분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교회에 던진 감동은 대단했다. 숨어 지낸 짧은 생애, 데레사 성녀의 ‘작은 길’은 단순하고 사소한 일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 짧은 생애, 큰 메아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1873-1897년)는 입회할 수 있는 나이보다 어려 교황님의 특별한 허락을 받고 16세에 가르멜 봉쇄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24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인간적으로 볼 때 참으로 ‘삼가 조의를 표해야 할’ 일생이었다. 그러나 봉쇄수녀원 안에서 조용히 숨어 지낸 짧은 생애는 교회 안에 너무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안에서 성녀의 생애와 영성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데레사 성녀는 수녀원 담장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는데도 ‘선교의 수호자’가 되었다.
성녀는 지금부터 불과 100여 년 전에 살았던 분이기에 2000년 교회 역사에서는 실로 최근의 성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데레사 성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좀 더 깊이 깨달아야 하겠다.
2. 사랑이 나의 소명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교회의 여러 지체들이 저마다 맡은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1고린 12─13장)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은 어떤 지체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찾을 수 없어 속상해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1고린 12,3)와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3-13)라는 말씀에서 잠시 침묵에 잠겼다.
성녀는 모든 일을 가치 있고 위대하게 하는 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이 교회 안에서 해야 할 소명이 바로 온 교회에 사랑을 불어넣는 일, 곧 교회의 심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녀는 부르짖었다. “오! 저의 사랑이신 예수님!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3. 가는 실로 짠 베가 더 곱다
데레사 성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을 좋아했고, 이 말씀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았다. 어린 나이에 언니들을 따라 입회한 봉쇄수녀원의 생활은 실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녀원 울타리 안에서 기도하고 일하는 것뿐이었다. 자서전에 보면 수녀원 안에서의 일이란 접시 닦고, 청소하고, 바느질하고, 때로는 제구(祭具)들을 닦는 단순한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신문에 날 만한 큰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수녀나 다 하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할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있는 그런 불편들, 여러 사람이 함께 살면서 겪어야 하는 ‘서로를 참아주는 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위대한 성녀로 만들었을까?
성녀는 스스로 자신은 순교자들이나 사도들처럼 엄청난 일을 할 능력도 없고, 큰 활동이나 세상이 놀랄 만한 큰 자선사업을 할 처지도 못 된다고 하였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 사소한 일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열심히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성녀는 자신이 하는 사소한 그 일들과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참으면서, 그 하나하나의 희생을, 복음을 전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끊임없이 바쳤다. 말하자면 성녀는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선교사들을 위한 희생으로 하느님께 바친 것이다. 성녀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가는(고운) 실로 짠 베가(천이) 더 곱다.”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성녀의 영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현대에는 신앙 때문에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많은 신앙인들이 평범하게 직장일을 하고, 집에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우고 시장을 보면서 일상의 사소한 일 속에 묻혀 살고 있다. 누가 알아주는 일이 아니고, 신문에 날 일도 아니다. 데레사 성녀의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 모든 사소한 일에,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도 하느님 앞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일상의 평범한 일을 하며 사는 우리 모두는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월급쟁이도, 구두닦이도, 청소부도, 가정주부도, 군인도, 공무원도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내가 하는 사소한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서 할 때, 그 사소한 일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사랑만이 모든 것 안에 영원한 가치를 부여해 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것만이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너희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 조욱현 신부-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 이 말씀은 교회가 이 어린 성녀의 살아있는 모범으로 그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복음적인 이념이다.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15세에 리지외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9년을 살았고, 그곳에서는 특별한 영적인 노력을 하였다. 성녀는 그의 언니 첼리나의 명을 들어 내적 체험을 썼는데 그것이 "영혼의 이야기"이며, 이것으로 성녀가 존경을 받게되는 자서전이다. 그리고 성녀는 그의 작품 "영적인 아이의 작은 길"에서 무한한 봉헌을 하고 있다. 성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께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 말은 자신의 "성소"를 발견한 교회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성녀는 짧은 기간의 수도생활이었지만, 그리고 한번 들어가면 바깥구경을 전혀 할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살았으면서도, 그 안에서 전교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전교지방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을 하였다. 자신은 한번도 전교지방에 가서 전교를 해본 일이 없으면서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포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 성녀는 수도원 안에서 몇 년간의 수련장으로 일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삶의 스승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성녀를 조금씩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모두 바치도록 인도하셨다. 여기서 "포교사업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든 삶을 이를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녀는 작은 일에 충실하였다. 문을 조용히 닫는다든지, 복도를 다닐 때 조용하게 하는 것 등이다. 성녀는 특별한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으로 성녀가 되신 것이다.
또한 성녀는 성체를 통해 사도적 역할을 발견하였고, 이 성체는 오늘 우리에게 역시 성체의 "영적인 가난"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전교지역의 교회에 대한 큰 지향을 통하여 성녀를 닮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축성된 적은 양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공동체의 전례 안에서 "가장 미소한 분"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을 가르쳐 주신다: 바로 당신의 십자가이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어린이는 도움을 받고,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 앞에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언제나 하느님께 달아들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즉시 실천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자.
얻는 것과 잃는 것
-김강정 신부-
살면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얻은 것은 또 가질 수 있는 것들이지만, 잃은 건 모두 되찾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동심, 순수, 꿈, 열정 등등. 순수 하나면 넉넉한 시절, 동화 속 주인공마냥 꿈을 키우던 날들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허나 이만큼씩이나 자라버린 오늘, 제게는 동심도, 키워오던 꿈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황무지처럼 메마른 영혼의 깊이에서 영성을 길어내는 자신이 그저 초라할 뿐입니다.
철부지의 마음을 지녀야만 이를 수 있다는 영성의 마루. 그 완덕의 고지가 제게는 너무 높아만 보입니다.
정녕 말라버린 삶 앞에 빗물 같은 순수가 필요합니다.
그 여여한 흐름을 타고 당신께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의 발원. 당신 품에서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마냥 뛰노는 철부지 아이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왠지 수도원 담벼락 아래서 세상을 아름답게 살다갔다던 한 성녀의 삶이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황혼이 곱게 내려앉는 저녁, 장미꽃비를 내리겠다던 성녀의 마지막 말씀이 노을이 되어 어느새 하늘을 저리도 곱게 물들여가고 있습니다.
장미의 비
- 백운철 신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인들은 어린이처럼 단순하다. 오늘 천상 탄생의 축일을 맞이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1873-1897)의 모습은 아이처럼 마냥 순수하다. 15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9년 남짓 수도생활을 하고 24년의 짧은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데레사 성녀는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8년 만에 시성되었다(1925년). 그처럼 짧은 시간에 널리 사랑받게 된 이유로 사람들은 흔히 그녀의 ‘작음’의 영성을 지적한다. 실제로 성녀는 언니 수녀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작음을, 자신의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기뻐하신다”고 쓰고 있다. “자신의 가난과 허무를 깨달을수록 그 분의 자비에 대한 눈먼 희망에 더욱 매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음을 사랑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건조함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가난하게 되고, 그 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의 불꽃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나의 소명은 사랑이다. 교회의 한복판에서 나는 사랑이고자 한다”고 고백한다. 성녀는 이 사랑의 소명을 위하여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나의 하늘을 사람들에게 넘겨 주고 싶다”고 원의를 발하고, “나는 그들에게 장미의 비가 떨어지게 하고 싶다”면서 지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토로한다. 이처럼 봉쇄수도원의 독방에서 세상의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그녀의 원대한 기도지향을 받들어 교회는 그녀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1927년).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제물로 자신을 봉헌하고 이 사랑의 번제를 죽음의 순간에 완성한다. 그것은 바로 노력 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나는 당신의 손을 받들고 당신 곁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이 순교의 종려나무가지를 노력 없이 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녀는 “한밤의 망상과 싸우지 않기 위하여 차라리 눈을 감으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요?”라고 반문하며 번민의 밤 속에서도 평안하게 눈을 감는다. 마치 위대한 화가 라파엘이 “나처럼 하시오. 노력 없이 일하시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더 잘되는 법이다. 노력 없는 노력이란 바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아기 예수 데레사 성녀의 ‘어린이와 같은’ 삶의 영성이다.
불과 만 두 살의 나이에 언니처럼 수도자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3살 이후로 좋으신 하느님이 요구하신 것은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선택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하는 조숙한 영성의 천재! 그녀는 마침내 고통을 통해 완덕이 자신에게 다가온 것을 확인하면서 “매순간은 하나의 영원이고, 기쁨의 영원”이라고 외친다. “신뢰, 오직 신뢰가 우리를 이 사랑으로 이끌어 준다”고 말하면서 성녀는 세상 안에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약한 영혼들에게 오늘도 자신의 하늘을 넘겨 주고 그들에게 장미의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신다.
한 어린아이의 작은 길
-박상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