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문(惠化門) 밖의 냇가 동쪽에 석벽이 있었다. 거기에 돌로 만든 처마가 덮여 있고 두 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데 기둥 역시 모두 돌로 만든 것이다. 벽면에 불상 하나가 조각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노비부처[奴佛]’라 부르고 그 시내를 ‘불천(佛川)’이라 이름 지었다. 도성 동쪽의 나무하는 노비들이 날마다 그 밑에 모여들어 올려다보며 욕하기를,
“우리를 남의 종으로 만든 놈이 이 불상이다. 불상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쳐다본단 말인가.”
하면서 낫을 추켜들어 눈을 파내니 불상의 두 눈이 모두 움푹 파였다. 혹사당한 원한이 마침내 불상에게까지 옮겨 갔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속담에 “이 불상이 없어지면 노비 역시 없어진다.” 하였는데, 노비를 없애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지만 석불은 누가 없애겠는가. 내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불상이 높이 솟아 있고 그 발밑에 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매년 장마가 져서 산이 깎이고 하천이 메워져 수십 년 사이에 모래가 그 처마까지 쌓이는 통에 불상의 몸체가 전부 파묻혀 제거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속담대로 과연 이 불상이 없어진 것이다.
신해년(1731, 영조7)에 노비 가운데 양인 어미 소생은 어미의 신분을 따르도록 명하니 노비가 비로소 줄어들어 지금은 집안에 노비가 없는 자가 대부분이다. 금상 신유년(1801, 순조1)에 내시노비(內侍奴婢) 대장을 소각하도록 명하여 공노비가 모두 사라졌으니 사노비가 자신들의 천역에 종사하려 하겠는가. 결국에는 반드시 모든 노비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체로 노비의 자식이 대대로 노비가 되는 것은 중국 성왕(聖王) 시대의 법이 아니라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다. 기자(箕子)의 팔조법금(八條法禁)에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도록 한 것은 그 당대만을 징계한 법이니, 어찌 대를 이어가며 노비로 삼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끝내는 대대로 남의 종살이를 하는 원한이 불상의 눈을 파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 불상이 만약 지각이 있다면 응당 그들을 가엾게 여겨 눈물을 흘리고 성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공노비 대장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온 백성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으니, 하늘에 왕업이 장구하기를 비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올해의 대풍을 해마다 기약할 수 있어 복록이 국가에 돌아가고 은택이 노비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노비가 없는 집안도 걱정할 것이 없다. 한편 자기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이러한 경우는 옛 법에도 있는 것으로 단지 당대에 국한된 노비일 뿐이다.
註: 조선 시대의 공노비(公奴婢)에는 내수사(內需司) 및 각 궁(宮)에 소속된 내노비(內奴婢)와 중앙 관청 소속의 시노비(寺奴婢)가 있고 그 밖에 역에 소속된 역노비(驛奴婢), 향교에 소속된 교노비(校奴婢), 지방 각 읍과 감영ㆍ병영에 소속된 관노비(官奴婢) 등이 있었다. 내노비와 시노비의 두 부류가 공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내시노비(內寺奴婢)라 하면 곧 공노비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