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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 등잔대 환상
슥 4:1-10
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슥 4:1-10 / [다섯째 환상] 내게 설명을 해주던 천사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마치 잠든 사람을 깨우듯이 나를 흔들어서 깨웠다. 2) `이제는 무엇이 보입니까?' 하고 그가 물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하였다. `금으로 만든 등잔대 하나가 보입니다. 그 꼭대기에는 등잔 받침대가 하나 있고 그 위에는 등잔 일곱이 있는데, 등잔마다 기름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습니다. 3) 또 올리브나무 두 그루가 하나는 등잔대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서 있습니다.' 4) 나는 해석해 주는 천사에게 물었다.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5) 내게 설명해 주는 천사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로 모르십니까?' 내가 `모릅니다. 내 주여!' 하고 대답하자 6) a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내게 일러주었다. b ㄱ) 이것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전할 말씀을 내게 주신 것이다. `네가 하는 일은 인간적인 권력이나 군사적인 폭력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내 영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ㄱ. 4:6 하반절-10 상반절을 문맥상 14절 다음으로 옮겼다) 7)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장애물이라고 하여도, 스룹바벨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앞에서는 태산 준령도 납작해질 것이다. ㄴ) 스룹바벨이 마침내 이 성전 건축을 완성할 때에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ㄷ) `모든 일이 은혜로만 성취되었다.'고 우렁찬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ㄴ. 원문에는 `그가 머릿돌을 꺼내 올 것이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ㄷ. `참으로 아름답다' 또는 `주께서 축복하셨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한 번 내게로 들려왔다. 9) `이 성전의 주춧돌을 놓은 스룹바벨이 그 손으로 이 공사를 완성할 것이0다. 그때에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을 것이다. 10 보아라, 공사가 시시하게 시작되는 것을 보고 깔보던 사람들도 스룹바벨이 공사를 끝마치려고 머릿돌을 놓을 때에는 함께 보고 기뻐할 것이다.'
본문은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의 환상인 금촛대 환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1-7) 스가랴가 환상으로 본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순금으로 된 등대와 그 옆에 두 감람나무가 서 있는 것입니다. 환상을 천사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순금 등잔대 위에 기름 그릇이 있고, 그 위에 다시 일곱 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감람나무가 순금으로 된 등대에 끊임없이 기름을 공급해 주는 환상입니다. 일곱 개의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설명합니다(10).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개의 금촛대가 바로 다름 아닌 교회로 등장합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계 1:20). 하나님께서는 일곱 개의 교회를 통해 세상을 감찰하고 세상을 밝히시는데, 성령께서 등잔과 같은 교회에 끊임없이 기름을 공급하셔서 교회가 세상의 비추고, 세상을 보는 눈이 되게 하신다고 알려주고 계십니다(10). 교회는 맡겨주신 일을 하다가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힘을 얻습니다(6). 이것이 스가랴 4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성전 재건의 사명을 가진 스룹바벨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룹바벨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8-10) 하나님께서 성전 완공을 약속하십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기에 그의 손이 그 일을 마치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비록 여러 해가 지연되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의 장엄함과 위용을 기억하는 자들이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멸시하는 자가 있었습니다(10). 많은 사람들이 스룹바벨 성전재건을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가치는 건물의 크기와 위용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 성전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 성전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적용: "힘으로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6)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결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가 있습니다. 여우와 어린 왕자가 처음 만난 날, 여우가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말하자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너를 길들일 수 있니?" 그러자 여우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선 내게서 좀 멀어져서 앉아 있어. 그럼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되고 내 곁에까지 왔을 무렵에는 내가 길들여져 있을 거야."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 신뢰가 탑처럼 쌓이는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일 겁니다.
< 설 교 >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슥 4:7-10 / 변한규 목사
우리 모두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의 핸들을 돌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셔서 큰 산도 평지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무엘 2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우리를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신다. 또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우리를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을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오늘 우리 모두에게 봉독한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유대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고국에 돌아왔으나 큰 산 하나가 가로 막고 있는지라 걱정들을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큰 산에 네가 무엇이냐" 이 시간 말씀의 주제입니다. 여기 큰 산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전 건축을 위한 자금 조달이 그들에게 큰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하나님께 큰 산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처럼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이 누구입니까? 그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대장입니다. 기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큰 산도 평지가 됩니다. 기도는 큰 산을 평지로 만드는 위력이기 때문입니다. ♬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
어떤 산이 인생의 큰산입니까?
첫째 죄악의 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 죄 너무 높습니다. 죄악에 사는 인생 모두에게 큰 산입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 서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입니다. 그런데 죄에는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고착성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7). 무슨 뜻입니까? 죄는 마치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고 딱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마치 강아지처럼 문지방에 엎드려 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죄의 주인공 된 나를 자꾸만 바라보면서 짖어 댄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발육성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개의 거짓말을 참말인 것 철저히 꾸며 대려면 10개의 거짓말을 동원해야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셋째는 방해성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사 59:2).
무엇이 우리의 순수를 깨고 나로 하여금 거만스럽게 만듭니까? 죄입니다. 무엇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담을 만들어 놓습니까? 죄입니다. 믿음 생활이 방해하는 것이 죄요, 기도생활, 경건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죄입니다. 보다 더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주님 뜻대로 살고 환난과 핍박을 감수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겟세마네를 오르려고 할 때에 일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방해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먹 불끈 지고 외칠 말이 무엇입니까?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내게는 허물이 없는가? 혈기를 부린 오점이 내게는 없는가? 오만된 생각으로 형제를 깔아뭉갰던 적은 없는가? 사랑하는 성도여, 털어서 먼지 안날 인생 없습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는지요 지금까지 내 인생을 거울 앞에 비출 마음이 없는 지요.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세 가지 거울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양심의 거울입니다. 양심이 무엇입니까? 가끔 나를 향해서 '이 놈' 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나를 자세히 보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역사의 거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땠습니다. 못된 짓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믿음 생활하는 모두에게 역사의 거울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십시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사람이 압사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였습니까? 아니라고 했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성경의 거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인생의 행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성경이 내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말입니다. 이 거울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 거울 앞에서는 원망하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보여준 양심의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을 들여다보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울 앞에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고난의 산
고난의 산도 인생의 큰 산입니다. 세상에 고난 없는 인생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성도님들 중 고난 당해보지 아니한 성도 계십니까? 아예 없습니다. 욥을 보십시오. 하루 동안에 10남매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종들은 갈대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집은 대풍이 몰아쳐 무너지고, 많은 소와 나귀와 약대는 다 도적을 맞았습니다. 욥 자신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생겨 잿더미에 주저 않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적긁적 긁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고난 당한 욥 인생의 모습입니다. 또 요셉 일을 보면 그는 본래 부자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미워함으로 웅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미움이 만든 웅덩이가 참 많습니다. 형들이여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하십니까? 웅덩이 속에서 소리 소리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종살이 고난도 겪었고 옥살이 고난도 겪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고난 당한 요셉 인생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절규하셨습니다. 고난을 떠날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는 질병은 큰 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소개한 중풍병자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교훈합니다.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좋다는 모든 약을 썼고 영험하다는 의사를 다 만났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가산은 탕진되고 뚫고 나갈 길이 없다고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 소식을 듣고 네 사람이 그를 메어 예수님께로 데려 갔습니다. 그런데 또 낭패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운신할 틈이 없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길이 막힌 것입니다. 눈 앞이 캄캄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되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럴 때 외칠 말이 무엇입니까? "큰 산에 네가 무엇이냐" 그들이 포기했습니까?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병 고치러 온 사람들이 왠 지붕입니까? 그러나 인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지붕이 어떤 곳입니까? 높은 곳입니다. 땅에서 길이 막히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길입니다.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믿음생활이 무엇입니까? 순풍에 돛단 것 같은 생활이 아닙니다. 홍해를 만날 때가 있고 여리고 성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는 기도해야 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간 사람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뚫고 나갈 길을 모색했습니다. 땅만 바라보고 있으면 뚫고 나갈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대문만 바라보고 있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와를 벗겼다고 했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신령한 의미에서 기와를 벗기는 시간입니다. 내 마음의 이중 삼중의 기왓장을 벗기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교만과 나태와 편견의 기왓장을 벗기는 시간입니다. 그들은 또 어찌했습니까? 힘을 쓰고 애를 써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내려 보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 열심히 하되 헛수고하는 성도님들 계시지 아니합니까?
주일에 교회에 나가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예물을 드리고 이런 일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모든 것 헛수고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 중요합니다. 봉사하는 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기어코 해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언했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 침상을 가지고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함 받습니다.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 주의 품에 안기어 평안히 쉬겠네 ♬ 이 시간 나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산이 인생의 큰 산입니까?
셋째 절망의 산
생각하면 인생은 절망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연인을 잃고 명예를 잃고 권세를 잃었을 때에 절망합니다. 사업이 폭삭 망하고 무서운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에 절망합니다. 그리고 소망이 산산조각 나고 순탄하던 행로가 꽉 막혔을 때 저마다의 인생은 절망합니다. 절망의 산은 역시 인생의 큰 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절망중에 가장 큰 산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철학자 하이데커의 말인데 '인생은 순간 순간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반복할 수 없고 죽음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또 철학자 니체는 말하기를 '인생은 죽음을 정복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했습니다. 죽을 때 그 영혼이 어디로 갑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혼은 곧장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선언합니다. 시인 롱펠로우의 말입니다. "인생은 참이다. 진실이다. 죽음은 인생의 종국이 아니다. 죽음 건너편에 너와 나의 영원한 삶이 있다." 주석가 벵겔도 말했습니다. "죽음은 하늘 나라 방언으로 잠들음이다."
잠든 자는 아침에 눈을 부비면서 일어날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성도는 죽을 지라도 생명의 부활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생명이 무엇이냐,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 했습니다. 예술은 길지만 인생은 짧다고 하면서 초로 인생 운무인생이라고 허사가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 90:10)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문인 오셍 드 삐세유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온다, 운다, 이것이 인생이며 괴롭다, 간다, 이것이 죽음이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5장은 "낳고, 살고, 죽다" 이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죽음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죽음이 결코 절망만은 아닙니다. 무디는 그의 임종시에 말했습니다.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린다" 했고 웨슬레는 임종시에 "너무 좋구나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이 보이도다" 했습니다. 찬송 작가 토플레디가 "지금 천국문이 활짝 열린다"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지은 찬송을 부르고 임종했습니다. ♬ 살아 생전 숨쉬고 ♬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모두도 위기를 만났을 때에 외쳐야 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생각하며 우리네 삶이 너무 각박해졌습니다. 경제가 매우 어렵고 정치가 크게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용돌이 칠 것 없습니다. 요동할 줄 몰라야 합니다. 먼저 성전을 지어 가는 산 벽돌이 되어야 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애국하는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 동양의 성현도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 되어갈꼬' 물었을 때에 "군군 신신 부부 자자"라고 했습니다. 임금은 임금노릇 잘 하고, 신하는 신하노릇 잘 하고, 또 아버지는 아버지노릇 잘 하고, 자녀는 자녀노릇 잘 하면 나라가 잘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까?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여기십니까? 목사는 목사노릇 잘 하고, 장로는 장로노릇 잘하고, 또 권사는 권사노릇 잘 하고, 집사는 집사노릇 잘 하고, 평신도는 평신도로서의 자기 책임을 잘하면 교회는 부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우리의 큰 산을 평지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낮은 골짜기를 높이시고 없었던 신작로를 만들어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큰 산이 평지 되는 축복들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슥 4:6-7 / 김근중 목사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와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어 나갈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좌절하고 또 실패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비극적이고, 어두운 문제들은 인간의 연구로는 해답이 없어요. 하나님의 논리와 방법을 끌어들일 때 풀어 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벗어나는 일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게 어디 될 일 입니까?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히브리인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 았을 때, 그것은 비합리적이고 잘못된 결정이라고 항변한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 집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열거하면서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 일은 안됩 니다" 라며 자기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의 논리를 하나님의 논 리 앞에 복종시키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만 여겼던 출애굽의 역사를 성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수많은 난제를 해결하고 결국은 출애굽 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은 모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안될 일이었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이 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대 역사는 안될 일 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인간 이성은 하나님의 논리와 충돌 합니다. 안될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 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 십니다(사55:9). 호사다마라는 옛글이 생각이 나는계절 입니다, 지난 얼마전에 불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으로 22명이 죽었는데 그 중에 우리 나라 사람이 13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 KBS기자도 있었는데 그의 아내와 6살 된 아들과 9개월된 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동안 많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럴 때 낙심하게 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요즘 예비 선거로 뉴스 거리가 정치권이 시끄러운 날이 있군요,이 명박 시장의 땅투기문제 정치자금문제 재산 누락보고문제 정말 도덕적으로
큰 문제 인것같으나 우리에게 어떤것이 큰산인지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가랴는 이사야 다음으로 메시야에 대한 많은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본문말씀은 선지자 스가랴가 본 환상입니다.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가 체험하는 것으로 초자연적 현상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적 상태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한 타락으로 초자연적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체험한 환상은 이방종교의 황홀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방종교는 인간 스스로 자신이 원하여 황홀경에 빠지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는 자기의 의지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은 두 감람나무와 함께 있는 순금 등대입니다.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슥 4:2-3) 있었습니다. 두 감람나무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등대 꼭대기에 있고, 주발에 모아져 일곱 관을 통해 일곱 등잔에 전달되어 불이 밝혀졌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름은 에스더 2:12의 몰약기름을 제하고는 무슨 기름이라 이름을 밝혔거나(출 27:20, 레 24:2) 안 밝혔거나 모두 다 감람기름입니다. 감람기름은 등불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요리, 의약품(선한 사마리아인이 사용), 화장품, 제물(레 2:1)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름은 신령의 상징입니다. 헌신의 표(삼상 10:1, 16:3)로서 제사장, 선지자, 왕을 기름부음으로 성별하였습니다.
순금 등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계 1:20). 순금은 귀하고 변치 않는 것으로 하늘의 것을 상징합니다(계 21:18). 등대(교회)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기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요 14:16)을 통해서 능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교회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이 살아 있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공급되었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상징하는데 당시 귀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예표로서 두 감람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름이 성령일 때 성령을 보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 한 몸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두 감람나무로 묘사한 것은 여기서 제사장과 왕의 사역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자들 중에 1차로 돌아온 자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하다가 여러 어려운 상황에 의해 중단하여 14년 동안 방치하고 있을 때 스가랴 선지자에게 임한 말씀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영적 성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개인이 성전이고 성도들의 연합된 공동체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고전3:16, 고후6:16, 유1:20, 엡2:22, 4:15).
1. 이스라엘은 성전건축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BC 586년에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갔다가 약 70년이 지나서 고레스 칙령에 의해 유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불타버린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스3:1-13). 곧 중단되었고 14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원인은 외적으로 대적들의 방해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방해 공작이 있었고, 유브라데강 서편 바사 총독들의 동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사 왕에게 성전건축을 중지시키는 상소까지 올렸습니다 (스4:1-10, 5:1-5). 그런데다가 내적으로는 성전 건축을 스스로 작은 일로 여겼고 (스3:12-13), 점차 자기들의 판벽한 집을 짓는 데만 몰두하고 성전 건축에는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학1:2-6). 개인적인 신앙이나 교회적인 부흥도 어려운 일을 닥치므로 낙심하여 중단하기 쉽습니다.
2.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통해 재건한다고 했습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된 이후 14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순금 등대의 환상이었습니다. 양편에 두 감람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서 흘러가는 관이 있고 그 관에는 등대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등대는 일곱 가지가 있었고 가지마다 주발과 관과 등잔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슥4:1-4). 스가랴 선지자는 그 환상의 대용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해석해 주었고 하나님 말씀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슥4:5-10). '두 감람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성전이 완공되고 열국에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적으로는 종말에 참된 사역자들을 통해 교회를 확장, 완성시키시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1:3-6).
3. 하나님은 신(神)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천사로부터 하나님이 스룹바벨을 통해 계획하는 일을 이루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볼 때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이 갔을 것입니다. 그 때 천사는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6절). 또한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7절). 또한 스룹바벨이 성전의 지대를 놓았으니 그를 통해 완공하리라고 했습니다 (9절). 하나님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알바 에디슨'은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성공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99%의 노력이 성공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한 말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가 원래 의도한 바는 1%의 영감이 성공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었습니다. 99%의 노력을 해도 1%의 영감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1%의 영감이 99%의 노력을 이끌어 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목적이 있으면 이루어집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친히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비전을 가질 때는 옳다고 생각하는 사역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환경이 어려워지면 내적으로 낙심하여 중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과 목적과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엡 1:4, 롬 8:30, 롬 8:26).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 28:20, 요 14:16). 우리가 최선을 다해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 14:13-14). 출애굽기 14:13-14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 기억해야 합니다 (슥 4:6-7). 아무리 태산 같은 난관이 가로막혀 있다고 해도 평지가 될 것이라고 선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슥 4:6 / 김홍도 목사
1. 오직 성령으로
오늘 본문에 인간의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 즉 성령으로만 되느니라고 하는 말씀대로, 모든 하나님의 일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성취되는 것입니다. 중생도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서 구원받는 역사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시고 이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듯이 속사람 영혼도 다시 한 번 새 생명을 얻고 태어나야 구원받 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신령한 세계가 열리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수양에 의해 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고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2000년 전에 죽은 목수의 아들을 나의 구주로 믿고 생명보다 귀중히 여기게 된다는 것은 결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령 사업하는 교회나,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구령사업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집니다.
2.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성령으로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예수님을 알려면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말씀을 바로 깨닫고 알려면 성령의 역사로만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invisible God)이 보이는 하나님(visible God)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며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신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는 바로 깨달을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12-13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도 없고. 바로 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께 의지하면 서 듣고 읽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2:9-10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 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분은 성령이 그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코 어느 누구도 은혜받을 수도 없고, 믿어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어려운 궁지에 몰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도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면, 성령께서 그 때에 적합한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마가복음 13:11에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라는 말씀은 핍박받을 때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 지혜로는 감당치 못하고 내 말로 뭐라고 표현해야 될 지 모를 입장에 처했을 때 성령님께 간절히 의지하면 성령께서 지혜도 구변도 주셔서 능히 상대방이 대적하지 못하게 해 주십니다.
3. 진정한 기도는 성령으로
기도를 세 가지로 나눈다면 육신의 생각으로만 꾸며서 하는 기도가 있고, 성령의 감동을 어느 정도 받아서 하는 기도가 있고, 그 다음은 아주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는 기도를 해야 바른 기도, 상달되는 기도, 능력있는 기도를 할 수 있으므로 가급적 성령에 붙잡혀 하는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구변을 자랑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않고, 사람이 듣기에도 은혜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할 때 꼭 성령님께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특히 대중기도 할 때에 사람 듣기에 멋있게 해서 인기 끌려고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나 기도의 불이 붙는 것도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스가랴 12:10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고 싶고 기도의 열심이 생기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다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꾸 뜨거운 기도가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먼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신 것으로 믿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잘 안 되고 기도가 꽉 막히고 뜨거운 마음도 생기지 않으면 하나님이 허락치 않는 것일 때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기도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능력도 성령으로
사람에게 육신의 힘도 중요하고 정신의 힘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능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영력과 영능이 있어야 신앙 생활도 바로 하고 죄도 물리칠 수가 있고, 마귀도 이길 수 있으며, 말씀도 능력있게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를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49에도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겨우 영적 새 생명을 아는 것이고,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은 영적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 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또 유지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당하는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슬픔도 다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일명 보혜사(保惠師)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Comforter' 또 그 말의 뜻은 "능력이 함께 하신다"(Com+forte)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늘 승리하는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 교회 부흥도 성령으로
오순절은 교회의 생일입니다.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의 강림이 있는 후부터 교회는 부흥되고 확장되어 갔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날마다 믿는 무리가 더해가고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 갔습니다. 오늘날도 성령 충만한 교회는 끊임없이 부흥되고 있습니다. 순복음 중앙교회가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도록 부흥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도 100명 미만이었던 교회가 10년 미만에 장년 유년 합해서 6,000명이 넘는 교회가 된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부목사이고 담임 목회자는 성령님이십니다. 김홍도라는 인간이 목회한다고 하면 나는 10명의 교인도 거느릴 수 없습니다. 꿈에도 소원은 나와 우리 교회는 늘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성령 충만하고 뜨거운 교회는 날마다 부흥되고, 냉냉하고 자유주의(신신학) 적인 교회는 날마다 쇠퇴해 가거나 문을 닫고 있습니다.
6. 위대한 지도자들은 다 성령 충만으로
이사야, 예례미야를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이 다 "여호와의 신" 즉 성신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고 사울이 나 다윗 등 모두 훌륭한 왕들도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들이며 모든 제사장들도 다 성신의 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훌륭한 목사, 부흥사들도 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뚜렷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D. L. Moody 선생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번개가 번쩍하는 것 같이 확실한 체험을 가졌다고 합니다. 무디 선생은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여러 달 동안 성령 세례 받기를 간절히 목마르게 사모해서 심지어 이 은혜를 받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할 정도로 사모했다고 합니다. 그 때 무디 선생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을 만큼 세상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신령한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어느날 뉴욕 시가를 걷는데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너무도 강렬해서 하나님의 손을 멈추어 달라고 할 정도로 놀라운 체험을 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마치 온 세계를 다 소유할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옛날에 하던 똑같은 설교인데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무디 선생이 또 말하기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성령 세례 받기 전으로 되돌아 가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법률가이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읽다가 회개하고 기도생활하던 사람으로서 어느날 난로 옆에 의자에 앉으려고 하는 찰나에 강력한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데 전혀 그런 기대를 가지지 못했고 또 성령 세례에 대한 말도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이 자신에게 강림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마치 전기파동이 온 몸과 영혼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과 같고, 마치 거대한 선풍기를 자기 앞에 돌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기쁨과 사랑으로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너무도 그 전류같은 역사가 강렬해 "진동이 계속되면 나는 죽을 것 같습니다"고 외쳤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이와 같이 각양각색입니다. 전류와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불과 같이 임하기도 하고 생수와 같이 체험되기도 하고, 바람이 부는 것 같이 느끼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형태로 임합니다.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체험이 다르지만, 분명히 성령 세례를 받을 때는 분명히 체험적으로 느껴집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다 한 번씩 체험하시고 또 받은 은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먼저 간절히 사모해야 받습니다. 갈급히 사모하고 기대하지 않는데 하나님은 큰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모든 전체를 내어 맡기고 항복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히는 죄가 하나도 없이 다 회개하고 자복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에게도 꼭 성령 세례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도 받은 줄 믿어야 합니다. 특히 말세에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남종이나 여종이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다 받게 해 주시겠다고 했으므로 누구나 사모하고, 기도하면, 받을 수가 있습니다. - 아멘 -<1979년 8월 26일 대예배 설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슥 4:6-10 / 최병남 목사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범죄함으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하던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이제 그 포로생활에서 해방이 되고 본국에 돌아가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을 중심해서 오만명 이상의 포로민들이 다시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이 가진 꿈과 희망이 산산조각 깨어질수밖에 없는 현실에 임하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오만 명이 갑작스레 황폐해진 이스라엘 땅에 도착해보니 의식주가 당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갑자기 무엇을 먹고 어디에 거주해야 됩니까? 그래서 성전을 지을 목적으로 왔지만 그 중에 몇명의 사람들은 당장 성전보다는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야겠다고 주장하면서 점점 내분이 생겨나게 됩니다. 더욱이 그곳에 포로가 되지 않고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다른 나라 사람과 더불어 혼인해서 그들 사이에서 낳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이 짓고자 하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해 때문에 그만 15년 동안 성전건축이 멈추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이 말씀은 당시 절망 중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크나큰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1. 인간은 누구에게나 높은 산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큰 산이 가로막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난의 큰 산, 환난과 시련의 큰 산, 괴로움의 큰 산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가는 길은 누군에게나 큰 산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아규뉴스 고발주라는 분은 말하기를 "당신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고난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오히려 내게만 왜 이렇게 평안이 있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온 인류에게 짊어진 큰 무거운 짐을 개인에게 조금씩 분배받은 것 뿐이고 그것은 비록 힘들어 보여도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다. 더욱이 왜 당신만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하는가? 고난을 혼자 면제받기를 원하는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 인물을 보면 고난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 혼자만이 고난에서 제외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2. 아무리 큰 산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산악인들의 핸드폰을 보면 "8848"이 꼭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8848"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에베레스트산, 그 정상이 8848m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반드시 정복해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에서 꼭 유명한 산악인들의 전화번호 중에는 8848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외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보로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기에 그 사랑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와 늘 함께 하기에 우리는 넉넉히 큰 산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십니다. 때로는 연약하여 넘어져도 우리 하나님 능력의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그런고로 아무리 여러분 앞에 큰 산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불변의 사랑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시고 그대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여러분, 본문 9절을 보면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라고 했습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리 방해공작을 많이 하고 내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실이 불가능해 보여도 반드시 성전은 건축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않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여러분의 일생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0:13)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랬습니다. 오늘 환난 당할 때에 이 말씀을 강하게 붙잡으면 이 말씀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여러분 인도해 주시고 승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해결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큰 산이 여러분 앞을 가로막아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왜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영으로 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니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랬습니다. 성령 충만 받을 때에 오늘 우리들이 큰 산을 넉넉히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사사들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어떤 분은 농부요, 전혀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그런 분들, 보잘 것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삼손을 비롯해서 기드온, 이 많은 사사들이 어떻게 그렇게 적의 공격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가 될 수 있었는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 그랬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할 때에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이스라엘을 적군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는 용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11:2)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신을 충만히 받게 될 때에 성령 충만하게 될 때에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환난의 산도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하늘을 찌르는 환난의 높은 산이라도 은혜만 받으면 뛰어넘을 수가 있고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은혜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롬8:26)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그랬습닏. 성령님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외로운 자들 위로해주시고 피곤한 자에게 힘을 더해주시고 낙심한 자를 붙잡아 용기를 주시고 절망에서 소망을 주십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일2:27) "너희를 가르쳐 깨닫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막막할 때 많지만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갈 길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와 인자를 베풀어 주셔서 답답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가르쳐줍니다. 동으로 가야할지 서로 가야할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당한 여러 가지 환난, 시련만 해결해주고 승리하게 해주는 영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문제까지도 해결해주시는 능력의 영인 것입니다.
(요14:16)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랬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를 인도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시는 영입니다. 우리의 상담자가 되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감동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따라가도록 인도해 주시고 진리를 따라 가도록 인도해 주시고 믿음으로 살도록 인도해 주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은 보혜사 성령, 보혜사라고 하는 말은 위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 위로받을 수 없는 그런 외로운 상황에서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면 그 위로는 죽을 자를 살립니다. 약한 자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들게 됩니다. 여러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와 같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셔서 젊은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며 하늘을 향해 올라갈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성경의 역사요,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영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한해도 숱하게 많은 산들이 여러분 앞에 가로놓여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곳은 낮은 산, 어떤 곳은 높은 산, 어떤 곳은 평평한 산, 어떤 곳은 험한 산들이 가로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한해 동안 우리 앞길을 생각하면 답답합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너무나 마음이 어둡습니다. 절망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험한 일 년을 또 살아야 되고 우리의 힘으로 넘어갈 수 없는 높고 낮은 산을 또 넘고 또 넘고 넘어야 되는 현실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연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붙들어야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려울수록 더 하나님께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고 주님의 교회에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때에 아무리 우리 앞에 험한 산이 가로놓여 있더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체험할 줄로 믿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다. 절망하지 마십시다. 좌절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낙심하여 뒤로 물러나지 아니하고 이 한 해 동안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복된 일 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방법
슥 4:6-10 / 김태영 목사
스가랴 선지자가 본 다섯 번째 환상은 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입니다. 스가랴가 본 순금등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등 대 위로 뻗쳐진 7개의 가지 위에 놓여진 일곱 촛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순금 등대 외에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좌편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감람나무가 의미하는 바는 등대가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기름을 계속 공급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재건되어 결국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역할을 감당해 줄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 환상은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다른 말로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섯 번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일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철저히 성령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의지할 때,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환상을 통해 보여 주시는 것은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기름을 계속 공급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무한공급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이루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통해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철저히 성령님을 의지하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7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고 합니다. 이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침내 성전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인 어려움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의 손이 성전을 짓기 위한 기초를 놓았으니 그 손이 그것을 마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스룹바벨의 손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스가랴 선지자가 묻습니다. 하나님의 답은 기름부음 받은 자 둘로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성전재건에 쓰임 받게 될 두 명의 지도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입니다. 이 두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전재건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은 기름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자가 바로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에 쓰임 받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행하심에 따라 순종하며 헌신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세움을 입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태산이 평지가 되리라!
슥 4:6-10 / 오정호 목사
미국의 메리언 레이드라는 사람은 30대 나이에 예기치 않은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낙심하여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제가 이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까?"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가족들과 교우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령께서는 그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불같은 확신으로 그의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시각장애인 메리언 레이드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한숨과 절망에서 확신과 용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그의 가슴속에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시각장애인이지만 정상인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서비스 매스터 컴파니'(Service Master Company)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존중의 경영철학을 세웠습니다. 철저히 고객만족우선주의 철학으로 회사를 경영한 결과 그의 '서비스 매스터 컴파니'는 2000년도 한해 약 74억 달러의 매출실적을 올린 회사가 되었습니다.
메리언 레이드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마음에 계속해서 매어있었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마음까지 어둡게 하고 어렵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을 통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졌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돕고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학력,외모,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2002년 한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붙잡고 창조적이고 열매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올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스룹바벨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은 주위 대적들의 비웃음과 비난에 부딪혔습니다. 스룹바벨은 이러한 대적들의 비난과 비웃음을 큰산이라 표현했습니다(7절).
예수믿는 사람이라 해서 모든 문제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경제,자녀,개인적인 문제들을 겪을 수 있습니다. 주위의 억울한 오해와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산, 곧 장애물만 바라본다면 그것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큰 산이 평지가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큰 산이 평지처럼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7절).
우리는 제3의 힘인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6절). 우리가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워치만 니는 중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어느날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가는데 물살이 점점 세어져 큰 암벽에 부딪힐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난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하나님은 물의 고도(水位)를 높혀 주셨습니다. 앞에 있는 큰 암벽이 물에 잠겨버리고 배는 그 위로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지식과 지혜,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믿음의 수위가 높아질 때, 성령의 능력의 수위가 높아질 때 우리의 문제거리는 간증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걸림돌이 영적인 디딤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없을 때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학력지수를 높여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수위를 높여줄 때 자아상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믿음이 확고해짐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 구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위해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듯이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장애물을 극복하는 능력, 사람들을 돕기 위한 능력, 나를 세우고 가정과 교회와 조국을 세우기 위한 능력을 언제 구해보셨습니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엎드려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집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가 하나님의 능력자로 세워집니다. 지나온 과거에 매이지 마십시오. 나의 미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마귀는 우리의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리지만 성령은 우리의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나 자신과 가정과 우리 교회의 열린 미래를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전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올 한해도 우리는 복병처럼 숨어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남모르는 경제,질병,자녀,직장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올 한해는 우리 교회에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춧돌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대전과 중부권의 영적 흐름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해 교사들을 세우고자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업에 문제가 있습니까?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는 불신앙을 탓하십시오. 하나님께 돌파구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구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교수이며 법의학자인 스패포드(H.G. Spafford/1828-1888)는 사랑하는 아내와 세 딸을 배 충돌사고로 배가 침몰하여 모두 잃었습니다. 스패포드는 아내와 세 딸을 태우고 유럽을 향해 갔던 그 배가 침몰했던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견딜수 없는 슬픔을 안은채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십시오. 주의 뜻에 굴복하겠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강하게 감동하셨습니다. 스패포드는 그 자리에서 펜을 꺼내 자신의 신앙 고백을 글로 적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유명한 찬송가 470장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패포드를 붙들어주었던 하나님의 능력이 동일하게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눈앞의 문제들이 아무리 큰 산처럼 다가올 지라도 믿음으로 전진할 때 우리 눈앞에 평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성령의 능력을 구합시다. 나와 가정과 교회와 조국 대한민국을 세우는 능력자로 쓰임받읍시다.
올 한해 우리의 생애가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뤄드리는 창조적이고 열매충만한 한해가 되게 합시다.
우리 다함께 외칩시다.
"태산이 평지가 되리라!“
오직 성령으로
슥 4:6 / 김 조 목사
공중권세를 잡고 최후의 발악하는 사단이 혼란하고 어렵게 하는 험악한 세상이지만 언제나 주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두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받으라.” 는 것이요 또 하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지식이나 수양이나 노력으로는 실패했으니 기다렸다가 성령 받고 사명 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이 지나 오순절에 120여명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금년도 부활절 후 7주째 오늘이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절기로만 지나지 말고 성령 충만 받아 언제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강림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개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놀라운 날이요 신약시대 즉 교회시대가 시작된 현대 교회의 생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사람의 힘이나 능으로 할 수 없으나 오직 나의 신 즉 성령으로 되느니라. 하셨기에 “오직 성령으로” 라고 제목하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 “성령을 좇아(따라)행하라.” 평양 대 부흥 100주년이 되는 금년에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원하여 성령에 관하여 많이 말씀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하셨으니 믿어 구원받게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에 관한 말씀을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성령이란 거룩한 영이 십니다.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사11:2) 하셨고 성경에 27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창1:2 6:3) 주의 성신(시51:11) 심판의 소멸의 영(사4:4) 영광의 영(벧전4:14) 진리의 영(요14:7) 보혜사(요14:16,26) 예수의 영(행16:7) 성결의 영(롬1:14) 아들의 영(갈4:6) 그리스도의 영(롬8:9) 약속의 영(엡1:13) 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1) 요약해 보면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의 영이십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성령의 상징: 성령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유식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했을 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요3:2) 사람의 지식과 판단으로가 아닌 영적인 역사입니다. 예수께서도 영적 일을 중요시 하셨습니다.(요6:63) 바람이나 사람 정신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나 나타나는 증상을 통해 알게 되듯 성령의 나타남도 그러하여 성령을 상징적으로 불(마3:11) 불의 혀(창2:23) 물(요3:5, 7:38) 바람(요3:8) 인(印) (엡4:30, 계7:2) 비둘기(마3:16) 기름(시45:7 히1:9)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예로 불은 뜨겁다. 태우다. 밝아진다 는 것으로 성령이 임하면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3)성령은 천지창조에도, 죄인구원에도 함께 하신 삼위 중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령을 꼭 받아야 할 이유를 살펴봅니다.
1) 예수님의 명령입니다.(요20:21-22, 행1:4) 부활하신 주님의 강력한 명령이기 때문이요 성령 받아야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하신 명령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하시니 성령 받지 아니하면 믿을 수도 구원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신앙의 직급도 연도도 소용없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요3:6)
3) 시험을 이기는 능력자가 됩니다. 제자들은 말씀도 듣고 믿음도 있었으나 환란과 시험 앞에 다 도망쳤고 배신했습니다. 베드로도 세 번 예수님 부인했고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했던 도마도 다 버렸으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체험한 후 강하고 담대한 능력자요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행4:19,20)
4)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롬8:26) 성령이 연약한 우리를 도우사 친히 간구하시기에 성령에 잡혀 진실한 기도 할 수 있습니다.
5) 교회, 가정의 부흥도 성령으로 됩니다. 초대 교회 급성장이 증거하고 삼락교회에 성장도 그러하고 우리 개인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목사인 자신도 그러하고요. 이제 40일식 금식하며 기도 한 후임목사도 그러하기에 꼭 받아야 합니다.
셋째, 성령 충만의 결과(열매)를 살펴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이가 출생하는 것이라면 충만은 어린아이가 자라나 장년이 되어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성령의 임하심도 1단계가 감동 2단계가 감화되고 3단계가 내 안에 일하심으로 내주하시니 이것은 일순간에 일어날 수 있으나 내주와 충만은 차이가 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에 순종하고 행할 때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은 한 번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엡5:17, 18) 이렇게 성령 충만하면 삶 속에 나타나는 결과(열매)가 있습니다. 갈5:20~24에 죄악 끊고 좋은 열매가 맺혀지는 삶이 됩니다. 이것으로 성령 충만을 보이게 되고 또 은사로 임하여 고전12:4~11 에 나타납니다. 이전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신앙에 유익을 주시려고 하셨기에(고전12:7) 믿음도 봉사도 교회 섬김도 잘해야 합니다.
넷째, 성령 충만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하셨고 고전12:7, 11에 나타남 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워 주신다 하셨으니 사람의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돈을 가지고 사려고 하다가 책망 받고 망합니다.(행8:18-20) 그런데 선배 성도 특히 초대교회에 성령 임하심을 살펴보면 대략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사모할 때입니다. 오백 명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도를 시작해서 10일째 120여명 모였을 때니 열흘 동안 사모할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2)전혀 기도할 때(행1:14) 3)모였을 때(행2:1)이니 예배 참석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4) 회개할 때(행2:38) 5) 말씀 들을 때(10:44) 찬송하고 믿고 세례 받을 때도 역사하시어 충만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삼락교회 시작 전부터 개척하고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저는 성령충만해야 할 것을 부르짖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은 언제 어디서나 승리하고 하나님의 축복 받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이라면 기도하는 교회요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여! 성령 충만 받고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큰 산이 평지로
슥 4:6-10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큰 산이 평지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큰 산이 평지로” 여러분? 담배를 끊지 못해 늘 신앙생활에 당당하지 못했던 집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가족들에게 이렇게 약속을 하셨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담배를 피지 않겠다!"
그런데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베란다에 나가 비스듬히 기댄 채 뻐끔 뻐끔 담배를 피워대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당연히 아내가 비난을 했겠지요?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또 담배를 피우시느냐고?"
그러자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며 그러더랍니다. "앞으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렇게 옆으로 서서 피우고 있잖아?" 여러분?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담배 하나 제대로 끊지 못할 만큼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며 무능하고 나약한지 아십니까? 쥐란 놈은 지진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피신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수무책 당합니다. 개미는 홍수가 날 것을 미리 알고 높은 곳으로 이사를 해 둡니다.
거미는 어디로부터 바람이 불어올 것인가 방향을 미리 알고 거미줄을 칩니다. 사람이 하찮은 미물보다 못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인간 자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의지하는 돈, 권력, 과학의 힘 또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힘으로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 여기 힘은 인간의 힘, 조직의 힘, 과학의 힘등 당시의 군사력을 말합니다. 또한 능은 “코아하”라고 되어 있는데 - 육체의 힘, 건강의 힘 그리고 한 인간이 자랑할 만한 물질 등 환경적 능력을 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70년간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 고레스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토록 합니다. 그리웠던 고국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수축해도 좋다는 엄청난 허락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국보들, 성전 기명들을 모조리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필요한 건축 비용을 국고에서 보조토록 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성전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내적 외적 커다란 방해와 장애물에 부딪혀 14년간이나 중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뜻있는 사람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개인적인 일에 빠져서 하나님의 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 들려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여덟 가지 환상으로 나타나는 구약의 스가랴서요, 그 중 다섯 번째 환상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를 소위 두 감람나무 환상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이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말씀으로 오늘 본문의 그 막을 열고 있습니다.
지금은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보지 말고 환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무능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핵심 즉 우리 믿는 자들이 많이 좋아하는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첫째로,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다같이 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러분? 개인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살아가다 보면 문제에 부딪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인생의 문제를 산이라 표현했고, 아주 큰 문제를 큰 산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큰 산은 과연 무엇일까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흥분하여 힘을 쏟던 성전 건축공사가 중단된 사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공사가 중단되었습니까?
첫째는 외부의 방해 때문이었습니다. 건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유력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고레스 왕의 대를 이은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에게 거짓 고소를 하게 됩니다. 고소의 내용인즉 "유대민족이 왕을 대적하기 위해 성읍과 성막을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명에 의해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주변 국가들의 반대와 방해, 이는 과연 큰 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 고소장, 이는 억울하지만 큰 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더더구나 지배국의 왕이 거짓 고소장을 보고 공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공사 중단 명령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큰 산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었습니다.
둘째는 이런 외적 방해 뿐만 아니라 내적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입니다. 백성들의 불신앙 또한 큰 산이었습니다. 방해에 부딪히자 백성들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내 불평을 시작합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페르시아에 남았잖아.... 정치, 경제가 안정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지....’ 그래서 모두 다 개인적인 일, 세속적인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의 태도를 불신앙이라 책망하셨고,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어 가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불신앙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큰 산을 넘어 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11:23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산을 옮기는 것은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물을 뛰어 넘고 큰 문제를 돌파하는 힘은 오직 믿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에겐 문제는 성공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문제도 없고 어려움도 없는 일은 가치 또한 별로 크지 못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그 가치 또한 크다는 뜻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여러분? 불신앙인 앞에서 장애물 이던 것이 믿음의 사람 앞에선 사닥다리가 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통해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갑니다. 더욱 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을 넉넉히 이루어감으로 날마다 기적을 목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다같이 6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의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매 마찬가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큰 산, 작은 산을 만나게 될까요? 내가 큰 산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어 놓으시면 안 되는 것일까요?
내가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팍팍 부어주시고 밀어주셔서 창고에 쌓아놓고 끄집어내서 쓰면 안 되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얻은 자유요, 해방이었습니까? 얼마나 그리웠던 성전건축이었습니까? 그런데 왜? 왜? 그들 앞을 큰 산이 가로막고 나서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전체에서 위 질문의 대답이 되는 핵심 단어 한 마디를 뽑아내자면 “오직 나의 신(神)으로”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는 나의 힘이나 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 삶이 쉽게 풀어지지 않음을 느낍니다. 시시 때때로 장애물을 경험합니다. 시련과 역경의 산을 넘어 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도와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길을 내어 주십니다.
바로 그때 문득 깨닫는 진리가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가령 우리가 교회를 섬기다 보면 모든 조건이 완벽합니다. 주판알을 굴려보면 전혀 안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도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길이 막힙니다. 일이 꼬입니다. 반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도무지 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경험적으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상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준비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기도하고 감당하다 보면 됩니다. 하나도 어렵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적으로 제 아무리 완벽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성공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완전해 보여도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날마다 풍성히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믿음의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때문에 일찍이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치로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오직 나의 신(神)으로" "오직 나의 영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삼손을 보십시오. 주의 영이 함께 할 때 그는 엄청나게 큰 일을 했습니다. 나귀 턱 뼈 하나로 훈련된 군사 1천명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떠나자 두 눈이 뽑혀지고 초라한 종이 되어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영력을 잃어버리는 것, 영안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 영감을 잃어버리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불행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좋은 쇠라도 자력이 없으면 바늘 하나 끌어당길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쇠뭉치라도 자력을 회복하면 쇠뭉치를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생깁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사람도 성령이 떠나면 무능하고 무력해 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능력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정 세상 역사를 만들어 내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위대한 인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환상인 두 감람나무는 성령이 사용하는 사람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일컫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읽어내려 가다 보면 선지자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14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기름 발리운 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닷물을 쓰고 또 써도 1cm도 줄어들지 않듯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덧입고 쓰고 또 써도 조금도 축나지 않는 것이 성령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의 충만을 받을찌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나의 신(神)으로! 이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 신약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요즘 편리하고 발달된 가전제품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정전이 되고 나면, 전류가 차단되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입니다. 성령의 전류가 흐르지 아니할 때의 사도 베드로를 보십시오.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난이 두려웠습니다.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무슨 체면으로 수많은 사람 앞에 감히 예수님을 증거하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모든 갈등을 극복했습니다. 자기 콤플렉스를 온전히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해 보라.’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이렇게 매 맞고 복음 전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고 영광스럽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매 맞고도 기뻐합니다. 죽으면서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여러분? 나비와 나방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 똑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비는 여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나방은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나비는 낮에 날라 다닙니다. 나방은 밤에 날라 다닙니다. 나는 모습도 나비는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방은 천방지축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비는 태양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날기 때문에 내 힘이 아니라 태양의 힘으로 납니다. 반면에 나방은 스스로의 힘으로 퍼덕거리고 날아 보지만 힘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태양으로부터 힘을 공급받는 나비는 유연성이 있습니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습니다. 유연성을 상실한 나방은 불을 보고도 퍼덕퍼덕 날아가다 그만 멈추지 못해서 불속에 처박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사람은 내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삶이 아름답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허우적거려 보지만 아무런 영향력도 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는 바로 원동력의 차이입니다. 재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지혜의 차이가 아닙니다. 심지어는 윤리의 차이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삶으로 늘 언제나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그 손이 그것을 마치리라 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그 손이 그것을 마치리라.” 다같이 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건축 공사장에서 여호와의 신(神)이 함께 하자 장애물이 변하여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걸림돌이 사닥다리가 되었으며, 원수의 방해공작이 도리어 최대의 원군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 재건의 역사가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고소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던 중 선왕 대의 한 두루마리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답신을 보냅니다. 그 내용이 에스라 6장 6절이하 10절 사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주변 부족들은 하나님의 성전 역사를 막지 말아라. 둘째, 유대인들은 당당히 성전 건축 공사를 계속 하라. 셋째, 왕의 재산 곧 세금 중에서 소요 경비를 신속히 지원하여 지체함이 없도록 하라. 넷째,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 필요한 제물들은 제사장이 원하는 대로 영락없이 공급해 주라. 다섯째, 제사 때마다 부탁하노니 왕과 왕자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 여섯째,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어기면 그 집을 거름더미가 되게 하리라!
여러분? 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움과 문제를 만났다고 너무나 쉽게 불평하고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조그마한 난관에 부딪혔다고 걸핏하면 불평의 입술을 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된다고,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함부로 원망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큰 산이 평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니 방해가 축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니 장애물이 변하여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지어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의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세계를 우리가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10절 말씀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작은 일이라고, 오늘 거대한 역사의 문이 열려지는 이 날을 시시한 날이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냐?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기 위해 돌 하나를 갖다 놓았을 때 그 일은 너무나 시시해 보였을 것입니다. 미미한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형편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 옛날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을 기억하면서 ‘그런 성전 재건이 과연 가능할까?’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그 일을 보고 계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그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 일을, 그 미미하고 초라해 보이는 그 역사를 누가 보고 계셨습니까? 계속해서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일곱 눈이 모든 역사를 보고 계십니다.
시작을 보는 그분의 눈이 끝마침을 이미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미미한 시작은 진정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9절 말씀 "그 일을 내가 마치리라."
그렇습니다. 시작케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께서 온전히 완성케 하시겠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끝내 주리라!” (2번) 빌립보서 1:6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 분이 이루실 줄을 믿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은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때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때로는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직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서 믿음으로 나아가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자원을 넉넉하게 풍성하게 공급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에스라서를 살펴보면 이 역사는 다리오왕 6년 모든 역사가 끝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 혹은 제2성전이라 부르고 봉헌식을 올렸습니다. 해방되었노라 유월절 잔치를 벌였습니다. 방해하던 모든 원수가 다 물러갔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모든 백성들이 찬송하며 몰려와 하나님 앞에 경배를 돌렸습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끝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큰 산은 과연 무엇입니까?
힘으로도 능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되지 않아서 못내 당황해 하면서 달려 나온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친구, 가족 등 그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해서 어찌할 바 몰라 하다가 주님께 달려 나온 분이 계십니까? “큰 산아, 네가 진정 큰빛광성 가족들 앞에서 평지가 될지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큰 산이 평지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도 원수의 방해공작이 극심하십니까? 원수는 힘이 있어 보이는데 나는 도무지 나약하기 짝이 없으십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디딤돌이 되고 원군이 되어 원수가 축복이 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 앞에 활짝 펼쳐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큰빛광성교회가 주님께서 원하는 영광스런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성경이 보여주는 주님의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면서 지난 1년간을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실상은 그다지 크게 보이질 않습니다. 지금 막 땅속에서 돋아나는 새싹처럼 누군가 짓밟아 버리면 꺾어질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지금 보잘 것 없는 새싹 하나에서 거대한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엘리야처럼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거대한 장대비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 2009년 표어 그대로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다시금 힘차게 일어나 빛을 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단코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소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복된 장마비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들이 진정 가능할 수 있을까요? 오직 여호와의 신(神)으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 모든 일은 반드시 완성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진정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모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담대하게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라!
슥 4:6 / 이삼규 목사 낙양교회
우리의 사고 가운데 개혁이 필요한 분야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갖고 계신 계획에 관한 우리의 실제적인 믿음입니다. 여기서 제가 믿음이라는 말 앞에 ‘실제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까닭은 명목상의 믿음과 실제적인 믿음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명목상의 믿음은 믿음이라는 이름만 가진 것입니다. 반면에 실제적인 믿음은 실제로 믿음을 소유했으며 그 믿음이 여러분을 사로잡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명목상의 믿음에는 결점이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적당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트러블을 일으킵니까? 아닙니다. 매사에 잘 적응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믿음에는 수많은 결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인 믿음에 개혁이 필요합니다. 결점과 악습을 제거하고 이전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신 후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이후로 세상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너무 급진적이고 너무 전면적이며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는 혁명적인 변화들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 생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시대상을 좇는 믿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세상은 완전히 기상천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 때문에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분의 교회와 인류를 향한 계획을 수정하셔야만 했습니까?
바로 이분에서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섰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개혁이 필요하고 정화가 필요하며 결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오는 8월 14일에 로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합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나라에 교황이 방문하여 4박 5일을 머문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인들은 이때 정신을 똑 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은 채로 시대사상을 진리라고 믿어버립니다. 여러분! 시대가 바뀌었으니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바꾸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주의자들이나 신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반드시 새로운 발전의 견지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발전하였습니까? 우주선을 띄우고 달나라를 마음대로 갔다 올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옛날 나귀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적용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들의 주장은 성경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거의 대부분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표현은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 있으므로 성경은 구닥다리이고 해묵은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교훈을 재평가하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재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구약 시대와 비교해보면 삶의 질이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당시보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가 더 탁월한 사람들이 맞습니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매년 자동차 사고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습니까? 왜 선박 사고로 수백 명이 죽어야 합니까? 항공기 추락으로 탑승자 전원이 목숨을 잃어야 합니까?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옛날 사람들보다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옛날 사람들보다 탁월하다면 왜 교도소는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을까요? 왜 정신병원마다 환자가 넘쳐날까요? 왜 이렇게 끔찍한 범죄들이 일반사회에서, 군대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을까요?
움직이기만 하면 무조건 앞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앞을 보고 움직일 때 뒤로 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의 비극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비극입니다. 즉 변화하기만 하면 무조건 발전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또 실제로 그렇게 믿습니다. 개신교(改新敎)를 영어로 무어라고 부릅니까? ‘the protestant church’ 여기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은 항의, 시위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에 저항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말입니다.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정이철 목사님이 쓴 글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을까? 역사학자들은 다음의 네 사람이 인류의 역사를 가장 크게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1) 동서양에 이르는 거대 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56~323)
2) 로마제국의 영토를 확장하여 종신 독재관의 지위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44)
3) 태평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몽골제국을 창시한 칭기즈칸(A.D. 1162~1227)
4)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A.D. 1483~1546)
이 중에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크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 한 사람을 고른다면 누구일까? 우리 보통 사람들은 손에 칼을 들고서 군대를 몰고 보이는 땅을 정복한 전쟁과 정복의 영웅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다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손에 칼을 들지 않고 성경 한 권을 들고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은 당시 천주교의 신부였던 독일사람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로마가톨릭교회의 그릇된 가르침 95개에 대한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매우 작았던 그 불이 유럽을 삼키고 온 세상을 달구는 엄청난 큰 불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역사,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인류의 삶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단 한 번도 칼을 들지 않았던 루터에게서 그러한 힘이 나왔다는 것은 재물과 떡보다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종교개혁은 잃어버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류에게 선물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직까지 천주교와 교황의 거짓 종교의 압제 하에 신음하면서 어두운 세상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이렇게 쉽게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종교개혁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최근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가 스스로 자신의 뿌리인 종교개혁 신앙을 천시하는 심각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1999년 독일 아우스부르크에서 체결된 루터교와 천주교의 의화 교리 합의
2) 2006년 서울에서 체결된 감리교와 천주교의 의화 교리 합의
3) 2013년 미국 Austin에서 4개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가 맺은 '상호 세례 인정에 관한 공동 협정'(Common Agreement on Mutual Recognition of Baptism)
4) 2014년 5월 서울에서 출범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
최근에 일어난 이 네 가지 사건은 개신교가 종교개혁 신앙을 부정하면서 교황의 품으로 뛰어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는 사건들입니다. 왜냐하면 천주교의 신앙에 있어서 ‘의화 교리’와 ‘세례’는 결국 같은 것이고, 다시 말하면 구원받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중대한 신앙 문제에 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 교단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천주교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회귀하지 않았는데,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천주교와 신앙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런 일을 자행한 개신교 교단들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믿는 참된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은사주의자 케네스 코플랜드(Kenneth Copeland)가 교황을 칭송하고, 사람들에게 교황을 중심으로 일치하자고 선동하기 위해 2014년 1월에 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황은 천주교를 대표하여 토니 팔머(Tony Palmer, 2014년 7월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 신부를 보내어 교황의 영상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습니다. 교황의 영상 메시지가 상영되기 전에 토니 팔머 신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토니 신부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해야 했던 사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1999년에 독일에서 체결된 루터교와 천주교의 의화 교리 합의, 그리고 2006년 서울의 금란교회에서 체결된 감리교와 천주교의 의화 교리 합의를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토니 신부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천주교에 대한 '항의'(protestant)가 이제 사라졌으므로, 개신교가 천주교와 교황의 품으로 달려오지 않고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발칙하게 설교를 전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토니 신부는 설교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께서 '다리를 세우는 자'를 찾아서 그를 지지하기를 요청합니다."
'다리는 세우는 자'란 곧 교황을 뜻합니다.
우리는 저항자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저항자로 살지 못하고 그들과 동화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를 버리고 세뇌 자들에게 달라붙은 까닭에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합니다. 저항자들의 후손으로 살지 못하고 이제는 시대가 가르치는 대로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비극입니다.
세상을 굴복시키는 저항자
예수님은 세상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적응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서 죽고자, 세상을 자기 자신에게 이끌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적응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러 시대를 거쳐 일어난,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급진적인 변화의 물결이 뒤덮고 있습니다. 과학혁명, 산업혁명, 통신혁명, 철학혁명, 사회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혁명의 급진적인 물결이 이 세상을 삼켰다 할지라도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런 혁명적인 견지에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에 따라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변하셨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에 변화가 생겼습니까? 인류 사회에 일어나 수많은 변화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들짝 놀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우리는 초라하게 “글쎄요, 나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만 합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개신교도의 저항 정신과 용기가 충분하게 있어 담대하게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기적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그것이 특별한 일이든지, 아니면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든지, 아니면 초월적인 것이든지 하나님은 능히 그것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기적이 진짜라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구약에 기록된 기적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가만히 앉아서 이 시대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세뇌 당하고 말 것입니까? 아니면 용기를 내어 일어나서 저항의 깃발을 세우고 이 나라 가운데 진정한 개신교(저항자)도 임을 표명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세상이 우리에게 순응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순응하면 여러분의 생명은 끝장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견해에 순응할 경우 교회의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순응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이번에 보십시오. 야당이 여당에게 백기 투항하여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키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특검을 누가 임명합니까?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그런 특별검사가 대통령을 조사하고 청와대를 조사하며 국정원을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유가족들이 이 합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돌아가라!
이 세상에 굴복하고 마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배교한 개신교 신앙에 항복하고 말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복음의 길을 고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급진주의자들도 아니며 그렇다고 바보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십 일 금식을 밥 먹듯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옷을 입고 다닙니다.우리도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현대식 집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똑 같은 사람이고 웃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변치 않으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를 거둔 분이며 우리가 그분을 위해 변명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복음과 말씀을 변화된 세상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순응하거나 교정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변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말 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믿어야 합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우리는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우리에게 위대한 신조들을 유산으로 남겨 준 옛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라 현인들이었고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믿음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개신교도들은 저항해야 하고, 반대자들은 반대해야 하고, 사회에 순응하지 않은 자들은 순응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버트 벤자민 심슨 [1843-1919] 목사님은 미국의 복음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은혜로운 찬송가 작사가였습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어저께나 오늘이나,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네 병든 손 내밀라고"외에 수많은 찬송가의 작사를 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부르심을 받고 목사로서 평생 사역했는데 타고난 명설교가로 존경받았습니다.
장로교 목사인 심슨은 36때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하루 빨리 죽어서 무덤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병 때문에 수개월 동안 설교도 못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숲 속에서 열린 작은 캠프에 참석했고 중창단이 “예수님처럼 역사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처럼 역사할 수 없네.”라고 찬송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찬송은 심슨의 마음속 깊이 울려 퍼졌습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심슨은 소나무 숲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처럼 역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처럼 역사할 수 없습니다.”
심슨은 솔잎 위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만일 저 노래가 맞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고치소서”
노래 가사처럼 주님이 그를 고치셨고 심슨 목사님은 76세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 받을 때 찬송을 통해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회복되는 체험을 통해 그의 설교가 더 깊어지고 치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출판사를 세워서 40여 년간 주간잡지를 발행했고, 무려 10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기독교선교연맹[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이라는 미국의 기독교역사상 중요한 기관을 만들었으며 지금의 나약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지난 2세기동안 성령에 관한 가장 탁월한 저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A. W. 토저의 영적인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심슨의 후예들입니다. 그가 만든 찬송을 우리도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왜곡시키며, 우리가 받은 복음을 희미하게 만들고, 성령의 능력을 희석시키는 가르침에 자신을 내어 주려 한단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저항자의 후예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담대하게 시대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저항자로 살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 받아 바른 믿음에 굳게 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슥 4:6~10 / 김광일 목사
이기는 습관(Winning Habit)의 저자 전옥표 박사는 삼성전자에서 애니콜, 파브, 지펠, 하우젠등의 마케팅 성공신화를 만들고 전국 최하위 지점만을 돌아다니며 1등 지점으로 바꾼 장본인입니다. 30여 년간 마케팅 전문 분야의 노하우, 삶의 현장에서 경영자로 생활하면서 체득한 원리를 담아낸 ‘이기는 습관’은 CEO들이 추천하는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이기는 습관의 답은 성경 속에 있어요. 성경의 원리가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영 원리지요. 성공과 실패는 습관과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데 사람들은 자본의 크기나 규모에 의해 좌우된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잠시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승리하시고 이기신 예수의 삶을 보면 지지 않는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이기는 습관의 핵심은 동사형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리에 머물러 계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셨잖아요. 우리는 명사로 머무는게 아니고 우선적으로 실천하는 동사형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3년 동안 성경을 집중해서 읽고 최고의 CEO이신 예수의 경영원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체험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려놓았을 때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예수 안으로 한 발짝 다가설 때 잠시 잃은 것 같지만 더욱 많이 얻게 된다는 축복 불변의 법칙을 깨달은 것입니다. 삶 속에 절망이 올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위닝 경영연구소를 시작할 때 모두가 반대했어요. 모두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연구소를 세웠지만 정작 저에게 절망이 오더라고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서려니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하나 채워주시는데 도저히 하나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내셨죠.”대기업 컨설팅과 자문을 맡고, 기업과 교회에서 특강 요청이 쇄도하여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비전을 심어줄 수 있어 감사하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박사는‘네가 뭔데?’라는 표현을 씁니다. ‘큰 산아 네가 뭔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네가 뭔데? 넌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것입니다. 앞에 질병도 있고 가난도 있고 저주도 있고 실패도 있고 위기도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방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 산을 향해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25년간 장로로서 섬기다가 신학을 하고 현재 목사로서 판교 충만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여덟 개의 환상을 보았는데 환상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16년 동안 중지했던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의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내용은 성전을 재건할 주체로써 여호수아와 함께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19번째 왕이었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재건될 때 조직적인 방해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낙심하지 않고 고레스 왕이 성전 건축을 허락한 문서를 찾아내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을 허락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큰 산은 무엇입니까? 성전 재건의 난관과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스가랴는 큰 산을 만났을 때 낙심하거나 실망치 말고 믿음으로 선포하라고 합니다.‘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여러분에게 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큰 산과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까? 평지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렇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첫째로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언더우드 선교상을 수상한 김철기, 허운석 선교사 부부는 아마존 인디오들에게 복음을 20년 동안 전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조차 ‘들판에 뛰어다니는 영혼 없는 짐승’이라고 부르는 인디오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2006년, 허 선교사는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하고 6개월 만에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선교지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아마존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넘치는 성령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열매를 맺지 않았던 망고나무가 가지가 꺾일 정도로 과실을 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세워 1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50여명이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2010년 암이 재발 되어 1년을 넘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존에 4개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허 선교사는 고백합니다. “이제 제가 선교사로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섰습니다. 제 스스로가 교만해질 수 있는 시기였죠.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암을 허락하셨어요. 사람들의 존경보다 천국에서의 선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죠. 사실 암이 발병하고 까닭 없이 많은 모욕과 수치를 당했어요. 그렇게 헌신했으면 복을 받아야지 왜 암을 받았느냐며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죠. 그런데 죽음과 투쟁하는 그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게 하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이 생명 다하기까지 예수만 높이다가 이 땅의 사명을 마감하는 날, 저는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에게 큰 산과 같은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으나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6절입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성전을 완공하는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힘은 유다 백성들이 가진 집합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파워, 군사적인 힘, 경제력 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많아도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능력이라는 것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 지도력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성전 재건을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내 경험 내 의지 내 지혜를 내려놓고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여야 합니다.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인생과 교회의 모든 사역의 성공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능력을 부어주셔야 평지가 되는 은혜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커버넌트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 리처드 윈터(Richard Winter)의 ‘지친 완벽주의자를 위하여’라는 책에 보면 주기도문을 각색한 완벽주의자의 기도문이 나옵니다. “하늘에 계실지도 모르는 그들의 아버지,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일용할 양식을 내가 벌 것이며 나는 당신이 주실 것을 믿지 못하겠나이다. 지은 죄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리고 또 언젠가는 반드시 죄를 지을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도저히 내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나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상처만 주는데, 내가 왜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나이다. 게다가 그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나이다. 내게는 스스로 악에 빠지지 않을 능력이 있으니 정말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잘하셨더라면 제가 그 모든 유혹을 참아 내지 않아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나의 것이니이다. 아멘” 우스꽝스러운 기도문에서 보듯이 완벽주의자는 자신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사람이 피곤하게 사는 이유가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항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불안하고 늘 긴장 속에서 초조해했습니다. 완벽주의에서 구원을 받는 비결은 스스로 완벽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부족과 결핍을 채워주실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길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본문 7절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여기서 그는 스룹바벨이 아니라 성전을 가리킵니다. 스룹바벨이 마침내 성전 건축을 완성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모든 일이 은혜로 성취되었다고 환호성을 지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주어진 사명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항상 고백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종된 신분을 기억하고 오직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를 통하여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셋째로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
오래전에 공장을 짓고 높은 굴뚝을 세우는 일이 끝났을 때 일어난 일화입니다. 굴뚝을 세우는 데 필요했던 아시바와 발판도 제거했는데 그만 공정을 감독하던 감독관이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가 타고 내려와야 할 밧줄을 남겨 놓아야 했는데 모두 그냥 내려온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집에 있는데 아이들이 달려와서 황급히 말합니다.“엄마! 큰일났어. 아빠가 굴뚝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려고 해요”아내는 한숨을 몰아쉬고 잠시 기도를 하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굴뚝 꼭대기에서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저러다가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을 조이게 했습니다. 그때 아내가 외쳤습니다.“양말을 벗어서 실을 풀어요. 그리고 실 끝에다 막대기를 매어서 아래로 가만가만 내려 보내요”양말을 풀어 매달은 작은 막대가 흔들리며 내려 왔습니다. 한 사람이 막대기를 풀고 나일론 끈을 다시 매었습니다. 나일론 끈이 굴뚝 꼭대기까지 올라갔고 다시 나일론 끈에 밧줄을 매어 올렸습니다. 잠시 후에 남편은 밧줄을 든든히 매고 그 밧줄을 타고 무사히 내려왔습니다. 가늘고 약한 양말 실은 나일론 끈을 끌어 올렸고, 나일론 끈은 밧줄을 끌어 올렸습니다. 이리하여 구조가 가능했습니다. 약하고 가늘은 양말실이 인명을 구조하는 생명줄로 큰일을 한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양말뿐일 지라도 풀어서 활용할 때 가는 실이 엄청난 결과를 이룬 것처럼 작은 믿음의 줄이 우리를 영광의 나라로 끌어 올려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약한 시작으로 큰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로 큰 나무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담대히 큰 산을 향해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9절입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미미하게 시작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어 주십니다. 공사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멸시하던 사람들도 스룹바벨이 공사를 끝마치려고 머릿돌을 놓을 때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성취시켜 가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영광을 드러낼 때가 올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따라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따라 오셔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시라면 하나님이 앞장서시고 나는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이심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중국 선교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선교사역에는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디 가서 돈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의 지원이 결코 결핍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공급하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세운 OMF 선교회의 선교사들도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이 선교할 때 돈이 필요하면 교회에 가서 구걸하지 않습니다.‘우리 돈 좀 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안 합니다.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이다. 이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이 채울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자원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이루어가십니다.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러기에 큰 산 같은 문제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면 하나님께서 평지로 만들어 주실 것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평지가 되리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평지가 되리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평지가 되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큰 도우심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1-6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과 그 메시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가랴가 예언자로서 활동했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그 다음 해부터 바벨론에 끌려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전도 다시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에 열광하며 희망에 차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은 537년부터 파괴된 예루살렘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재건의 역사(役事)는 자원의 부족과,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살 동안 그들의 땅에 남아 살고 있던 이방족속들의 적대감, 그리고 중상과 비방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한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인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백성들은 좌절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잊어버리고 선조들이 저질렀던 잘못과 죄악에 다시 빠질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재건축공사의 중단상태는 페르시아왕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의 시대를 거쳐 다리오왕의 통치 제2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다리오왕의 즉위는 형제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왕권쟁탈전이 벌어진 끝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페르시아제국내의 정치적 격동과 불안정상태는 속국 이스라엘 안에서조차 불안한 기류?형성하고 있었고 백성들을 동요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때에 학개와 스가랴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예언자로 세워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영적 각성의 기회를 주시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자로서 행한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시대의 징조를 해석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가난과 흉작은 이스라엘의 영적 혼수상태에 대한 징벌이다, 따라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 겪고 있는 새 지배국 페르시아의 정치적 불안정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새롭고 결정적인 개입을 하시려는 징표가 아니겠느냐, 이제 구원의 시대가 드디어 오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서둘러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전을 지어드려야 하며 중단된 성전재건사역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일어서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신 메시지였습니다. 여기서 출발한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자로서의 활동에 힘입어 이스라엘백성들은 다시 뭉쳐 일어났고 처음 성전재건사역을 시작한지 22년만인 515년에 새 성전을 완성하여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가운 스가랴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예루살렘성전재건을 완수할 두 주역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임을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 두 구절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슥4:8-9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 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 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했고, 다음 슥 6:9-12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 /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정적 회복을 미리 묘사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언자 스가랴에게 단 하룻밤 동안에 잇달아 보여주신 여덟 가지 환상 중 다섯 번째의 것에 관한 서술의 일부입니다.
스가랴가 다섯째 환상 속에서 본 것은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였습니다. 본문 2절에는 먼저 이 순금등잔대의 모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순금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하여 일곱 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본문에서 조금 내려와 10절 하반절에 보면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등잔대는 다름 아닌 온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살피시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는 등잔대의 좌우 곁에 두 감람나무가 서있었는데 그 두 감람나무의 뜻은 밑의 14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해석되어졌습니다. 12절의 "금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라는 말은 그 두 감람나무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고 보입니다. 임금과 대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공직에 취임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 환상은 정치적인 지도자 스룹바벨과 영적, 신앙적 지도자 여호수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학개와 스가랴 두 예언자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며 이 예루살렘성전재건을 완성한 사실은 에스라 5장과 6장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 6절에서 읽는 대로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셨다는 말씀, 즉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힘"이란 무엇이며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학자에 따르면 전자는 군사력 또는 전사의 용감성을 뜻하며, 후자는 신체적 힘이나 도덕적 용기 때로는 폭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자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뜻하는 단어이고, 후자는 노동력을 의미하는 말이며, 따라서 "힘"은 총독 스룹바벨의 정치적 지도력을 시사하는 것이고, "능력"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노력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뒤따르는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는 말씀과 함께 예루살렘성전재건의 완성, 그리고 이스라엘공동체의 회복과 메시아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적인 역량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가 주시는 영적 능력에 의해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즉 그 어떤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인간의 힘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와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환상뿐만 아니라, 회개와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스가랴는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백성들에게 모든 불의에서 돌아서라고 부르짖고 있음을 우리는 스가랴서 첫머리에서부터 봅니다.
"1:3-6 인용"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는 이스라엘백성의 역사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메시지를 담고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처해있던 상황과 흡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몇 년 전 IMF관리체제하에 놓이는 경제적 위기를 맞았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놀라고 칭찬할 정도로 용기있고 신속하게 그 위기를 헤쳐나가는 듯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또 새로운 위기 속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단순한 경제적 위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아예 국민에 대한 두려움이나 최소한의 미안함도 없이 정치지도자로서의 일말의 양심까지도 다 내동댕이친 무리들에 의해 온 국민이 무시당하고 짓밟히고있는 국가적 위기이고 사회적, 도덕적으로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때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시기로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현상을 해석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발견하며 그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와해되는 공동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되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과 지혜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스룹바벨과 같은 정치지도자는 없습니다. 위아래로 오만과 독선으로 돌덩이같이 굳어버린채 고압적으로 군림하는 여권수뇌부를 비롯 막가파식 정치파괴자들밖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정치상황 아닙니까? 그러나 정치인들만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선거때마다 못난 인간들을 뽑아준 것이 누굽니까? 악하거나 무능한 정부나 의회가 태어나는 일차적 책임은 어리석은 국민에게 있습니다. 온 국민이 다 자성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합니다. 나라를 !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아는 지도자들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적 의식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신앙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했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우리나라를 다시 아름답고 튼튼하게 세우는 일에 지도적 역량을 발휘하며 중심적 주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의 오늘날 우리를 향한 의미라고 믿습니다.
지난 해 2000년대의 첫 1년을 보낸 우리는 이제 엄격한 의미에서 21세기의 첫 해를 맞았습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새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연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져야겠고 우리의 삶 또한 뭔가 달라야 할 것입니다. 또 새 담임목사와 함께 맞은 첫 해의 새문안교회도 어떤 분명한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좋은 전통은 계속해서 잘 지키며 발전시키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만과 안이함 속에서 구태의연함을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점, 우리가 잘 몰랐던 것, 우리가 소홀히 했던 것, 우리답지 못했던 것을 부지런히 살피고 고치며, 더 해야 마땅한 일들을 찾아가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일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고 교회답기 위해서는 세상과 분명히 달라야 하면서도 그렇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 하나 살피고 찾아내서 고쳐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밝히고 그것을 우리의 지식과 삶 속에 자리잡게 하고 뿌리내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배, 교육, 선교, 봉사의 영역에서 지금까지 해온 사역들을 한층 강화하며 계속 추진해야하겠습니다. 특히 교회교육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아낌없는 투자를 할 것입니다. 러시아에 한 분의 선교사를 증원파송하려고 합니다. 또 태국에 제2의 한태선교관 건립을 추진할 것입니다. 베트남인들을 위한 봉사사역도 확대하는 방안을 연구할 것입니다. 내년부터는 사회복지사역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기울일 것입니다.
넷째로 지금까지 하던 일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역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청소년 대상의 학원선교사역을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 교단 교회들의 장래가 걸린 목회자후보생신학교육의 향상을 위해 앞으로 본 교회예산의 2%까지를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인데 이는 지금까지 우리 교단역사에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어머니교회로서의 책임을 담당하려는 의지의 대표적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교인 한 가지 대외봉사직 갖기 운동" 같은 것도 전개하려고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관점에서 바르고 한국교회를 향해서 본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로 이 모든 일들을 우리 인간의 힘과 지혜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로 모든 일을 통해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리고, 모든 일은 온 교우 사이의 겸손과 사랑과 화목과 일치 속에서 하며 그로 인해 소외되거나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새로운 일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2001년 교회의 표어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자"로 정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과는 분명히 달라야함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그들과 같은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에베소교회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한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가 말하는 이방인,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성은 첫째는 허망한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둘째는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해진 것과 마음이 완악해진 것이며, 셋째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없어지는 것이며, 넷째는 그 결과로 온갖 더럽고 끝없는 탐욕과 방탕에 자신을 내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것이며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진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곧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교인들을 향해 했던 이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다 무지와 완악한 마음과 허망함과 더러운 욕심과 방탕 속에서 산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옛 사람을 그대로 입고있을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배에서 성찬식을 함께 거행할 것입니다. 지난 번 성찬식에서 저는 성찬에 임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의 하나로 변화된 삶, 성결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되고 거짓되며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지적인 면에 많은 강조를 하고있음에 주목합니다. 17절에서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이라 할 때의 그 마음이란 말은 "지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이란 말을 하고 있는데 "총명"이니 "무지"니 하는 것도 다 지성 또는 지각에 관계된 말들입니다. 20-21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배움", "들음", "가르침 받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로워지며 새 사람을 입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했는데 "진리의 거룩함"이란 "참된 거룩함" 또는 "진리로부터 오는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고 또 어떤 번역에는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새 사람의 본질인 의와 거룩함은 참된 진리의 인식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먼저 힘쓰지 않고는 새로워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을 입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보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노력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각종 예배를 통해서, 각급 성경공부반에서, 각 구역성경공부를 통해서 말씀을 배우는 열기가 뜨거워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연구는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교회봉사와 하나님나라 사역에의 의지가 확고해지는 가장 분명한 길입니다.
새 사람을 입고 새 시대를 맞아 새 사역과 함께 복된 한 해를 사는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슥 4:1-10 / 엄기호 목사
남왕국 유다의 멸망으로 인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은 70년 만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비록 포로들 중의 일부였지만, 그들은 꿈에 그리던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폐허뿐인 예루살렘성과 무너진 성전이었습니다.
해방이나 귀환의 기쁨도 잠시일 뿐,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와 더불어 국토와 성전을 다시 재건해야 하는 큰 걱정거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귀환은 금의환향도 아니요,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70년간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왔으니 가진 돈도 없고, 먹고사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생계를 위협하는 경제적인 문제가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성을 재건한다는 말입니까?
또한 그들은 국론도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먹고살기가 각박한데다가 이렇다 할 영도력을 가진 지도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외세의 위협도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 주변에 사는 이방인들은 입을 모아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결국 이 꼴이 되었구나", "하나님이 지킨다더니 잘도 지켰구나", "성을 너희 힘으로 재건하나 보자"라고 빈정거렸습니다.
과거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는 듯합니다.
최근 조심스레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전망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현실은 어렵기만 합니다. 생계가 어려운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이 민감한 가운데 국론은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태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조소하던 이방나라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들은 뒷전에 밀려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가랴 선지자는 본문을 통해 오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나의 신(神)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본문 6절에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 돈의 힘, 물질의 힘, 권세의 힘, 권력의 힘, 완력과 병력과 무력 등을 말하고, '능'이라는 것은 개인의 정력이나 담력, 실력이나 지혜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에게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주셔서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하늘에서 내린 신령한 양식으로 배불렀으며, 바위에서 솟구쳐 오른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城)을 함락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편안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땅에서 이방신을 섬기며, 타락에 깊이 물들어 갔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살펴주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도 하셨고, 어떤 때는 경제 상태를 파탄에 빠뜨려 기근에 처하게도 하셨으며, 또 어떤 때는 이방나라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고통을 받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 받아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든, 한 나라의 역사든, 개인의 역사든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나의 힘, 나의 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멸망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일련의 일들은 인간의 힘과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나 다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의 오만"에서 온 문제들입니다.
무기를 가졌다고 해서 모든 전쟁을 이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이 가진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기보다 더 큰 힘 앞에 거꾸러진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네 힘으로도 안 되고 네 능력으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오직 야웨의 신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의 힘과 능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힘, 성령의 능력을 언제나 힘입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본문 7절 중반절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이 비록 '큰 산'과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그것은 평지와 같이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큰 산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먼저 인간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바벨론과 이집트, 앗수르와 에돔 등 이 나라들은 자신들의 무력과 능력을 믿는 교만한 산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그것들은 썩은 나무토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큰 산이란 인간의 절망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절망을 창조하고 하나님은 희망을 창조합니다. 인간은 문제를 만들고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이사야 40장 4절에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절망의 산아! 네가 무엇이냐!”다시 말해서 절망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너지고 평지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큰 산이란 인간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사실 나의 걱정이 하나님의 걱정은 아닙니다. 나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은 아닙니다. 나의 문제가 하나님에게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문제가 너무 크고, 심각하며, 무척 어려운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든 작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분명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은총이 있을찌어다
본문 7절 하반절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은총"이란 값없이,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국가적 위기나 개인적 위기는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 해결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우리가 찬송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내 능으로 되지 않지만 성령으로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걱정, 근심, 염려, 위기, 절망, 좌절, 개인문제, 가정문제, 국가문제를 인간적 방법과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교만을 버리십시오.
큰 산을 낮추시는 하나님, 낮은 골짜기를 메우시는 하나님, 험한 인생길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 가시밭길에 평지를 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사 45:1~3).
은총, 은총이라고 거듭 강조한 것은, 이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일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장애물들을 우리의 능과 힘으로만 극복하려고 하면,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큰 산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문제의 큰 산은 우리 앞에서 평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라고 외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큰 산을 평지로 바꾸실 하나님만을 믿고, 그 하나님만을 영원토록 의지함으로써 큰 산을 뛰어넘는 성도가 됩시다.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1-10 / 이윤재 목사
스가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래전에 어떤 공장에 한 소녀가 취직했답니다. 실만드는 방직 공장인데 수습기간을 거쳐 드디어 작업반에 배치되었습니다. 반장이 와서 기계만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일을 배웠지만 일하다 보면 잘 안될 때가 있을 거야. 그 때마다 네가 할 일은 즉시 나에게로 달려오는 일이야. 알았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일하다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올이 얽히고 실이 감겨서 기계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낑낑 거리다가 반장을 찾아갔습니다. 반장이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고장났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몇 시간 돼요”. “그런데 왜 이제 왔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해보려고요. 그런데 안돼서 왔어요”. 반장이 말했습니다. “내가 말했잖아. 네가 할 일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즉시 내게로 달려 오는 것이라고. 이제부터는 그렇게 할거지?” 그리고 기계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될 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즉시 하나님께 달려 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안될 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즉시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많이 배웁니다. 어느날 자동차를 타다가 갑자기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타는 자동차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동차를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거기에 있는 쇠나 재료도 내가 만들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그래서 자동차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가게 하는 것은 키입니다. 키가 없으면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고 방향도 잡을 수 없습니다. 이 키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기름입니다. 다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름은 자동차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입니다. 자동차의 창조주이며 소유자이신 하나님, 자동차 열쇠이며 방향이신 예수님, 자동차 기름이요 능력이신 성령님, 이중 어느 것 하나 없어도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삼위 하나님의 은혜안에 삽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있고 키가 있다고 할 때 마지막으로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기름입니다. 에너지입니다. 기름 광고에 그런 광고가 있습니다. ”I am your energy“. 그렇습니다.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I am your energy“. 이 에너지가 성령입니다. 오래전에 나온 성령에 대한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고든 피라는 신학자가 쓴 책입니다. 제목이 <God empowering presence>, 우리 말로는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presence, 지금 여기 계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기도의 성자 이 엠 바운즈가 한 말입니다. “모든 노력은 나에게 달려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노력과 능력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노력할 뿐 능력은 없습니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도 안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스가랴의 첫 번째 메시지를 살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깨끗케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갈 때 할 첫 번째는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아께서 천사들에게 명했습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 더러운 옷을 벗기는 것도, 새 옷을 입히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탄은 우리를 정죄할 뿐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거룩은 강압으로 되지 않고 개혁은 협박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깨끗하게 되었으면 우리는 다음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스가랴 4장이 다음 환상입니다. 여기서 스가랴가 또 하나의 환상을 봅니다. 스가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데 천사가 와서 깨웁니다. 슥4:1입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항상 좋은 일은 하나님쪽에서 먼저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하나님이 깨닫하게 합니다. 그래서 스가랴가 잠에서 일어났는 데 환상이 보입니다. 2절입니다. 슥4:2,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 데 그 위에는 기름 기릇이 있고 그 기름 그릇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일곱 등잔의 환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보이는데 3절, 슥4: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 데”. 두 감람나무의 환상입니다. 종합하면 일곱등잔과 두 감람나무의 환상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일곱등잔과 두 감람나무, 그것은 스가랴 시대에 무엇이고 오늘 우리 시대에는 무엇입니까? 교회에게는 무엇이고 민족에게는 무엇입니까?
두 감람나무
스가랴가 보았던 일곱 등잔은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사진1).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메노라”라 부릅니다. 이 “메노라”는 이스라엘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어디에 가나 볼 수 있습니다. 벤 구리온 공항에도(사진2), 국회의사당앞에도(사진3), 거리에도(4), 그리고 정부 문양에도(5)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일곱등대는 구약 성전의 지성소에 진설병, 떡상, 분향단과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면 출25장에 보면 정금으로 만들, 하나의 줄기에 일곱 개의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가지의 끝에는 살구꽃 모양의 받침이 있고 그 위에는 등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일곱등잔의 끝부분을 보십시오. 모양이 살구꽃 모양입니다. 우리 말로 살구는 이스라엘에서는 아몬드입니다. 이 꽃을 히브리어로 ”샤케드“라 부릅니다. 그런데 ”샤케드“란 말의 뜻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지킨다, 돌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살구꽃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렘1장에서 하나님이 에레미아를 부르면서 물었습니다. ”에레미아야, 무엇을 보느냐?“ 에레미아가 대답했습니다. 렘1:11,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왜 하나님은 그 많은 나무중에서 살구나무를 보게 했을까? 에레미아 시대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망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에레미아가 북쪽에서 기운 끓는 가마를 보았는 데 그것이 장차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올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하나님은 에레미아에게 민족의 희망을 보여 주셨는 데 그것이 살구나무 환상입니다. 살구나무는 ”샤케드“, ”내가 너를 지키리라, 내가 너를 보호하리라“는 뜻입니다. 비록 죄로 인해 바벨론에 지배당하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샤케드“, 반드시 지키시고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을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기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일곱 등잔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름은 감람나무 기름이었습니다. 출27:20입니다.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일곱등잔에 부을 기름은 감람나무 기름인데 사람들이 감람열매를 수확하면 큰 돌로 눌러 기름을 냅니다(사진6). 그 무거운 돌에 짓눌려 연한 기름이 나오면 그 기름으로 등잔에 붓고 불을 켜 성전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24시간 성전에서 밝히게 했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24시간, 이 불이 켜져 있나 꺼져 있나를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이 얼마나 중요한지 슥4장에는 일곱이란 수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돌보심을 상징합니다. 천사도 그냥 천사가 아닙니다. 슥4:10에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입니다. 그냥 빛만 내는 등불이 아닙니다. 온 성전을 비추고 온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입니다. 그 등잔옆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감람나무는 무엇입니까? 한국의 많은 이단중에 전도관이란 이단이 있습니다. 지금은 죽은 박태선 장로가 세운 이단입니다. 박태선을 부르는 칭호중의 하나가 감람나무입니다. 박태선은 자신을 '영모님(靈母任)', '동방의 의인', '이긴자', '이슬성신', '참 구세주' 좋은 이름은 다 갖다 붙이다가 1980년 1월 1일부터 자신을 이 땅에 오신 '새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박태선이 감람나무가 아니라 예수님이 감람나무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의 예언서에 나오는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장차 올 메시아를 예표한 것입니다. 스가랴는 학개와 함께 주전 537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재건하고자 한 성전은 다만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메시아가 주인으로 계신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을 아무리 아릅답게 지어도 거기에 메시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과 왕이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그때 기름은 감람나무 기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을 메시아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에 기름부음 받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왕입니다. 따라서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이며 왕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습니까?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기름부음 받은 자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두 가지 의미의 기름부음받은 자입니다. 첫째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구약시대에 동물을 잡아 백성의 죄를 사했습니다. 예수님은 황소와 송아지의 피로 우리를 사한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자신의 피로 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왕입니다. 왕은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죄를 없앴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살아야 의로워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삽니다. 우리가 믿어 죄용서받고 우리가 그 안에 살아 통치를 받습니다. 죄용서받아 구원받고 통치받아 성화됩니다. 구원은 제사장에게서 오고, 성화는 왕에게서 옵니다. 두 감람나무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을 보여줍니다. 사하시고, 다스리시고,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제사장이면서 왕이신 예수님, 그가 성전에 계셔야 드디어 성전입니다. 구약의 성전이 두 감람나무가 있어야 성전이었듯이 신약의 교회도 제사장이시고 왕이신 예수님이 계셔야 교회입니다. 아멘.
기름을 부어라
중요한 것은 그 일곱등잔에 기름이 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기름부음받은 자라면 그를 따르는 모든 자도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영이시고 비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성경은 몇 가지 유비로 설명합니다. 일곱등잔이 있듯이 성령의 비유도 일곱가지입니다. 첫째 바람, 둘째 불, 셋째 물, 넷째 비들기, 다섯째 인, 여섯째 칼, 그리고 일곱째 기름입니다. 이것은 모두 유비입니다. 바람이 성령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바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각각의 성령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성령이 기름같다”할 때 기름이 성령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능이 마치 기름의 기능과 같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성령”이란 단어와 “기름”이란 단어의 어간이 같습니다. 기름을 히브리어로 “네샤마”라고 하는 데 글자의 순서를 뒤집으면 기름이 됩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기름과 같습니까? 기름은 부드럽습니다. 기름은 매끌 매끌합니다. 기름은 식용으로 쓰이고 화장품으로 쓰이고 치료제로도 쓰입니다. 만능입니다. 한번만 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쓰입니다. 기름은 두 가지를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열이 나고 다음에 빛이 납니다. 안에서는 열이 나고 밖에서는 빛이 납니다. 열은 우리안에서 우리를 뜨겁게 하고 빛은 우리 밖에서 세상을 비춥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행4:26에서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베드로는 성령이 기름부어졌다고 말합니다. 행10:38에서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또 성령이 ‘기름붓듯 하셨다“고 말합니다. 벧전4:11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 공급하시는 힘이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시92:10입니다.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시기 위해 부으시고 특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필요합니다. 제사장에게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왕에게 기름 부어졌습니다. 제대로 된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신 힘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사역자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기름부음은 특히 요한서신에서 강조합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나님을 압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웁니다. 성령님이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올리브 기름처럼 우리에게 부어져야 우리가 부드러워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래 예수 믿어도 얼굴이 지옥에 막 올라온 사람처럼 무서운 이유는 당신이 성경지식이 없거나 직분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은혜가 없고 교회 일은 그렇게 많이 해도 기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성실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재고량이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적 차이가 아닙니다. 기름부음의 차이입니다. 사울은 한번 기름부음받고 다윗은 세 번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학문적 차이가 아닙니다. 다른 사도는 한번 성령받고 베드로는 세번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의 재고량의 차이입니다. 기름이 안 부어지니까 안에서 열이 안나고 밖에서 빛이 안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분들이 더 많이 성령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것은 성경을 히브리어로, 헬라어로 줄줄 읽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이 날마다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13세기 이태리 수도원장 사보나롤라가 한번은 설교하는 데 설교하다가 갑자기 막혔답니다.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지하실에 내려가 다섯 시간을 “하나님 살려달라고, 내게서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다시 돌아왔더니 다섯 시간동안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고 사보나롤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날마다 능력의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집사보다 장로님들이 더 나은 것도 직분때문이 아니라 더 많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심야기도, 새벽기도에 나와 기도하는 장로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이는 제대로 장로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찬양대 여러분, 찬양대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으면 예배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찬양에 성령의 감동이 있기 위해 찬양을 준비하는 시간보다 예배자로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함을 아십니까? 교사 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과준비하는 시간보다 금요심야기도회에 나오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금주에 읽은 시편입니다. 신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큰 나라가 된다”. 영어 성경 niv로 보았습니다. “The Lord, our God is near us whenever we pray to him”. 우리가 기도할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아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 우리 개인을 회복시키시고 교회는 다시 세우는 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의 원천, 그것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우리 평생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아론의 수염처럼, 헬몬의 이슬처럼 우리의 심령에 흐르기를 축복합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그런데 스가랴가 이렇게 성전을 제대로 지으려고 하자 방해꾼이 생겼습니다. 7절입니다. 슥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가랴가 말한 큰 산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학개와 스가랴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는 많은 방해꾼이 있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페르시아로부터 에룩살렘으로 온 것은 주전 537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전 재건이 시작된 것은 주전 520년입니다, 햇수로 18년이나 늦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성전 재건이 늦은 것입니까?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반대했겠습니까? 일반 백성일까요? 일반 백성은 오히려 성전재건을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반대했을까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못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가를 아시나요? “하티크바”라고 합니다. “희망”이란 뜻입니다. 2천년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오매불망 기다린 것은 시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온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우리의 가슴속 깊은 곳에 유다의 얼이 살아 있는 한 동방의 시온 사모하면서 언제나 그곳 잊지 않노라. 우리 희망 살아 있다. 이 천년을 이어온 희망, 우리의 땅에서 자유롭게 살리라.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땅에서 자유롭게 살리라.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이들에게 시온은 예루살렘이고 곧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유대인들은 학개, 스가랴가 성전 짓는 것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반대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동안 그 땅에 살아온 이방인들과 학개와 스가랴를 시기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민족이고 이유도 달랐지만 학개, 스갸랴가 하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반대할 뿐 아니라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 18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스가랴가 4:7에서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할 때 스가랴는 이 반대자, 방해꾼을 말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큰 산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만, 너희는 스룹바벨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스룹바벨은 당시 총독이었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사람,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성경에 산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오는 데 나쁜 의미로 쓸 때 그 산은 세력을 이루어 반대하는 자, 하나님 나라의 대항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자, 장애물, 대적자를 가르킵니다. 막11:22-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에 나타난 산도 사람앞에 선 적대세력, 훼방꾼을 의미합니다. 살후2:4에도 대적자를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말했습니다. 대적하는 자는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은 자로 자신을 산처럼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대적의 산들을 무너뜨리시고 평지처럼 만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슥4:6, “만군의 여호아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2015년도에 제작된 인도 영화 <만지: 마운틴 맨>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다스랏 만지의 아내가 산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심하게 다쳐 병원에 갔으나 너무 늦어 죽게 되자 산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산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탄 주인공은 22년간 매일 산을 깎고 깍아 마침내 평지를 만듭니다. 우리에게 우습게 보이는 이 스토리는 사람이 어떤 일을 마음먹고 시작하면 산도 평지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반대와 방해에 부딛칩니다. 우리가 성전을 재건하지 않아도 우리가 사는 한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반대, 방해, 중상모략으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더라도 고통에 휘둘리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닉 부이치치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그를 놀리고 무시할 때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나를 놀려도 내 영혼을 건드릴 수 없다고 스스로 소리친 닉 부이치치처럼 우리가 밖에서 불행을 만날 수 있으나 우리가 불행에 동조하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수 있으나 고통에 나를 맡기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고통은 외부에서 오지만 나의 반응이 그것을 더 키우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밖에서 오는 고통을 우리가 막을 수 없지만 그 고통에 우리가 휘둘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느헤미아의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느헤미아 시대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하는 데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아등이 조롱하고 중상모략하고 심지로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이때 느헤미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느4:16-18입니다.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느헤미아가 한 것은 한손으로 일하면서 한손으로는 병기를 잡게 했습니다. 한 사람은 성을 쌓게 하면서 또 한 사람은 칼을 들게 했습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항상 우리의 성공이 하나님의 성공이 아니며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라고 보이는 일도 얼마 있다가 성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7절입니다.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힘’이란 말은 군대’와 같은 힘을 말합니다. ‘능’은 ‘삼손’과 같은 육체적인 힘을 말합니다. 군대나 육체의 힘으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신이 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최후 승리합니다.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있지만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할 뿐입니다. 옛날 청교도가 드렸던 기도입니다.
“주님,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슬픔이 나를 짓누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심히 당황스럽습니다.
세상의 염려로 온통 혼란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나를 도우셔서
나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소서
하늘의 은혜를 크게 보게 하소서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하소서“ (청교도 기도 모음집에서)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스가랴 4:1~14 / 피영민 목사
서론
오늘 본문은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모두 여덟 개의 환상을 보았는데 이 환상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16년 동안 중지했던 성전을 짓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은 성전 재건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때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환상은 화석류 사이에 홍마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홍마 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님께서 골짜기에 있는 화석류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통해서 성전을 재건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재건의 주역은 유다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환상은 네 뿔의 환상인데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그 뿔이 높고 정치적으로 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환상은 손에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장과 광을 척량하는데 성전을 지을 장소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짓도록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며 깨끗한 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할 사람이 여호수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지을 주체로써 여호수아와 함께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슥 4:6)
다섯 번째 환상의 첫 번째 목적은 스룹바벨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19번째 왕이었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야긴은 고니야 혹은 여고냐라고도 하는데 이 왕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죽지 않고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윌므로닥이 바벨론 왕이 되자 감옥에서 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주어서 말년을 아주 평안하게 살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여호야긴은 전반적으로 악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에 자식을 낳은 것이 그가 한 가장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야긴의 아들이 스알디엘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이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이 왜 중요한 인물이냐면 스룹바벨에서 10대를 내려가면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요셉이 나옵니다. 그리고 11대 자손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스룹바벨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스룹바벨을 격려하여 일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을 완성하도록 하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Ⅰ. 다섯 번째 환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스가랴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가 스가랴를 깨우고는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스가랴가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순금 등대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주발 옆에 보니까 좌우로 감람나무가 두 그루가 있고 두 개의 관이 연결되어서 주발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발에는 일곱 개의 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일곱 개의 등잔으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렇게 24시간 동안 기름이 공급되어 등잔에 불이 켜지는 것이 스가랴가 본 순금 등대의 환상입니다.
원래 순금 등대는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규례입니다. 모세의 규례는 출애굽기 25장, 37장 그리고 레위기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금 한 덩어리로 연결해서 만든 것입니다. 가운데 한 개의 등잔이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있어서 도합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 등대에 사용하는 기름은 반드시 순수한 올리브기름이어야 합니다.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서 100% 순수한 기름으로 불을 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 순금 등대가 성소 안에 놓여 있는데 제사장이 저녁에 들어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며 아침에 들어가서 불을 끕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순금 등대와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무엇이 다릅니까? 두 가지가 다릅니다. 첫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제사장이 올리브기름을 부어야 됩니다. 손으로 직접 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와 주발로부터 관이 연결되어 있어 자동적으로 올리브기름이 공급됩니다. 둘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지만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24시간 불을 켠다는 점이 다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의미를 몰라서 천사에게 물어봅니다.
Ⅱ. 다섯 번째 환상의 일차적인 의미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기름입니다. 순금 등대에 기름이 자동적으로 공급되는데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금 등대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들이 빛을 비추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면 성령의 지속적인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스룹바벨은 성전을 꼭 지어야 되느냐? 그 이유는 바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실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입니다. 인간의 지도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빛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칸트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인간들에게 빛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어둠에 처한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위해 성전이 꼭 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성전을 완공하는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공급되는 기름이 있어야 성전 재건이라는 사명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가진 집합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파워, 군사적인 힘, 경제력 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많아도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또 능이라고 것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 지도력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성전 재건을 성공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부은 바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산 같은 방해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모함했고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려 성전 짓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이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평지처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 4:7). 둘째, 시작한 일을 완성하게 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슥 4:9). 공부하는 학생이 학위를 위해서 공부하려면 논문을 끝까지 써야 하듯이 성전을 짓기로 시작했으면 끝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끝내는 것은 끊임없이 공급되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B.C. 520년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B.C.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가리켜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두 감람나무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고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게 하셔서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Ⅲ. 다섯 번째 환상의 궁극적인 의미
이 예언은 성전의 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신약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순금 등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다 동의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일곱 금 촛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환상은 신약의 교회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금 등대가 끊임없이 기름을 받아서 빛을 비추듯이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빛 비추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4).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비추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교회를 향해 명하신 첫 번째 사명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정치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좌파를 물리치려면 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우파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야지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구제도 해야 하지만 구제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닙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태어나 왜 살고 죽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둠에 처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승리는 어디에 달려 있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승리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 네 가지 중요한 일을 행하십니다. 1) 그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2)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3)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배하십니다. 말과 생각, 행동까지도 지배하십니다. 4)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중생이나 내주는 기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지만 성령의 충만과 능력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과 우리 성도들의 성공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나 받으면 되지 내가 그런 것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도 필요하지만 여러분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이 국밥장사를 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끓이는 국밥은 왠지 맛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작곡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전도사님 아들이 작곡하는 노래가 대한민국에서 1, 2등 합니다. 그 많은 작곡가가 있어도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작곡하는 노래는 유행가라도 1등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위 논문을 쓸 때 박사학위 논문이 잘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머리에 안 들어오고 우리말로 쓰는 것도 어려운데 영어로 써야 하니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주시더니 하루에 15장씩 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일 만에 다 써버렸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노래하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정치하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격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행하는 작은 일이라도 격려하고 기뻐하십니다. 스룹바벨은 손에 다림줄을 잡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스룹바벨이 손에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슥 4:10). 우리가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넣어도 주님께서 다 아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전을 짓는데 한 사람이 돈을 크게 내서 짓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300억을 다 내서 성전을 지었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1원이라도 내가 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여 드린다는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1원으로 성전이 지어지겠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1원이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순종해서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눈으로 보시고 기뻐하시며 능력을 부어 성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이 다릅니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지도자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모세, 다윗, 여호수아, 솔로몬,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같으면 어림도 없었는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시다가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나귀의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도 죽이고 했는데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불순종하자 성령께서 떠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두 눈이 뽑혀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울도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친구가 어떤 사람이 한 예언을 따라가다가 가정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니까 가정이 화목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쫓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한 장 더 읽으십시오. 사울 왕이 예언도 하고 별짓을 다 하다가 불순종하자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왔다가도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났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도들 안에 성령께서 일단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성도는 무엇이 다릅니까? 성도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불신자 안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청년들은 절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사람과 악령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이 함께 살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싸우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성령을 모신 사람들과 결혼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다섯 번째 환상은 결국 성도의 인생과 교회의 모든 사역의 성공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능력을 부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총, 은총이 있을지어다!
슥 4:1-10 / 송기정 목사 / 정동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모든 설교 원고를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제 일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오늘의 설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혜를 능히 넘치게 하시는(고후 9:8)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실 줄 믿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하여 그 머릿돌(the last stone)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있을지어다’ (슥4:7)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멋지고, 멋지다’ (공동번역), (Beautiful, beautiful!, Good News Translation)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복을 주실지어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복을 주실지어다’ (God bless it! God bless it!, NIV)라는 뜻으로 신앙적 감탄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두 번씩이나 ‛은총이 있을지어다! 은총이 있을지어다!’라고 외치게 된다는 것은 성전의 재건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며, 재건된 성전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을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를 확대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건물로서의 성전 보수와 우리 심령의 성전 보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재건되고 보수되는 성전과 성도들을 멋지고, 아름답게 하시며, 그들에게 은총과 복을 주신다는 것인 줄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다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깨웠습니다. 그리고 다섯째 환상을 보게 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스가랴가 비몽사몽간에 본 것은 순금 등잔대 두 개와 등잔대 곁에 있는 기름을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의 환상입니다. 여기서 등잔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계1:20). 그리고 두 감람나무는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와 제사장을 상징하며, 만왕의 왕이시고 선지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는 교회와 성도들이 등잔대와 등잔과 같이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감람나무와 같은 그리스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령의 기름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스가랴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스가랴는 순금 등잔대와 감람나무는 보았지만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슥4:6-7)하셨습니다.
성전 재건을 주도하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 앞에는 큰 산과 같은 장애가(obstacles)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스4:1-10)가 큰 산과 같았고, 과거 성전 재건을 중단했던 역사도 큰 산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백성들의 무관심과 경제적 부담 (학1:6)도 큰 산과 같았습니다. 스룹바벨이 총독이었지만 그의 힘과 능력으로는 그를 가로막고 있는 큰 산과 같은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하는 일에 함께 하심으로 큰 산과 같은 장애가 사라지고 평지가 될 것이며, 은총이 있을 것이고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얼마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산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게 하듯이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장애물들이 다 사라지게 하시고 은총, 은총이 있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미국의 작은 시골, 조지아주 알바니에 있는 셔우드 교회 교인들이 주축을 이뤄 제작한 <믿음의 승부> (Facing the Giant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위기에 처한 샤일로 기독학교의 미식축구팀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승리를 일구어낸 신앙 간증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테일러 감독과 그가 이끄는 미식축구팀은 위기에 처한 실패자들 (losers)입니다. 성적은 늘 부진하고 새 시즌이 시작되지 에이스 선수는 전학을 가버렸습니다. 팀 해체와 해임 위기에 처한 감독은 설상가상으로 ‛불임’이라는 가정의 문제까지 겹쳐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테일러 감독은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드리고 이기든 지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로 결심합니다. 선수들과 함께 목적을 새롭게 한 이글스 팀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변화와 승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골리앗을 믿음으로 맞서 승리했던 다윗처럼 그들은 연승으로 고교 미식축구 결승전에 진출하여 기적같이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이글스 팀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한 선수 데이빗의 아버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약한 아들 데이빗에게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서 불가능이 없음을 가르쳤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한다는 소명을 품고 5백명 교인들과 함께 영화제작에 헌신한 셔우드 교회 마이클 캣 담임목사는 저예산으로 완성된 영화가 56개국에서 상영되고, 제작비 대비 3천배의 수익을 기적적으로 달성한 것을 근거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도전합니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살든,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파트너라면 큰 꿈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큰 꿈을 꾸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마가복음 9:23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 큰 꿈을 갖고 불가능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다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시작하게 하신 일을 다 마칠 수 있게 하십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후예’라는 뜻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을 노예로 부려먹던 바벨론의 후예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학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실 것이라면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학1:14). 그런데 그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성전 재건 공사를 하다가 무력감과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학2:4)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뿐만 아니라 스가랴를 통해서도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이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슥4:9)라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백성에게 보내신 줄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이란 성전 재건 건축의 기초석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심은 공사가 중단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사람의 손으로 시작하게 하신 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전 재건 건축의 기초를 놓은 스룹바벨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학개 2:23에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내 종’이라고 하시면서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성전의 기초를 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큰 산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불평과 불만, 불신과 불참이었습니다. 그들은 헌금과 헌물에 인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솔로몬의 웅장한 성전과 비교하면서 공사가 중단된 스룹바벨의 성전을 ‛작은 일’ (small things)이라며 실망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슥4:10).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낙담하거나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작하게 하신 일을 그 손으로 마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사 중단으로 실망하고 멸시했던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공사를 계속하는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힘과 용기를 내어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시작하게 하신 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시고, 은총, 은총이 있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새빛선교회 안요한 (1939~)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의 아들이며 고등학교 불어 교사였던 그는 37살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인생이 37세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실명 이후의 시간이 더 숨 가쁘게 지나간 것 같다며 51세 때 겪은 1990년의 극심한 좌절과 극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해에 큰 비로 낡은 건물의 한 쪽이 무너져 내렸을 때 지칠대로 지친 그는 고민 끝에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잠시 부산에 내려가 해운대 모래사장을 걸을 때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이들은 모래를 토닥토닥 손등에 얹으며,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순간 그는 마음의 찔림을 받으며 ‟내가 소위 목사인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내놓지 못하고, 구하지 못했으니 내 믿음이 얼마나 작은가, 내가 하나님을 두꺼비만도 못하게 여겼구나”라며 자책을 하였습니다.
그는 눈물로 회개하고 교인들 앞에 다시 서서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목사입니다. 나의 믿음이 그렇게 적었습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하나님을 건축위원장으로 모시고 우리 다 건축위원이 되십시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고 순종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새빛맹인교회, 새빛맹인재활원, 새빛야간학교, 점자 새빛 등의 사역에 큰 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산이 안요한 목사님 앞에서 평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그의 손이 시작하게 하신 일들을 그의 손으로 마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은총, 은총이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신 일을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다 마치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다 마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룹바벨과 그 백성처럼 스스로 굳세게 하여,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신 일을 다 마칠 수 있게 해주심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6년 7월 18일, 권오서 감독님이 시무하시는 춘천중앙교회 예배당 2,3,4층이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전소된 예배당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춘천중앙교회 교인들은 심기일전 의기투합 하여 만 1년만인 2017년 7월 16일 예배당 복원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화재로 인해 비통한 눈물을 흘렸던 그들은 이제 감사와 감격이 가득한 행복한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21일 우리 교회 목회자들과 성전보수위원 장로님들이 춘천중앙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정말 ‛멋지고, 멋지다!’는 탄성과 함께 감동과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1년 후 우리 정동제일교회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도 1년 후에 보수된 우리 교회를 보는 사람들마다 ‛은총, 은총이 있을지어다!’, ‛멋지고, 멋지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복을 주시고,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 드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다 할 수 있게 하시고, 시작하게 하신 일을 다 마칠 수 있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롭게 보수 될 성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과 가족, 직장과 사업 위에도 하나님의 은총, 은총이 있으시고, 복의 복을 더하여 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